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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2:39:57

국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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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aa7b> 제6공화국
국민의 정부
國民의 政府 | Government of the People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rowcolor=#ffffff> 출범 이전 이후
문민정부 참여정부
대통령 김대중 ,/ 제15대,
국무총리 고건 ,/ 제30대 (~1998.3.2.),
김종필 ,/ 서리 (1998.3.3.~1998.8.17.),
김종필 ,/ 제31대 (1998.8.18.~2000.1.12.),
박태준 ,/ 제32대 (2000.1.13.~2000.5.18.),
이헌재 ,/ 직무대행 국무위원[재정경제] (2000.5.18.~2000.5.23.),
이한동 ,/ 서리 (2000.5.23.~2000.6.28.),
이한동 ,/ 제33대 (2000.6.29.~2002.7.10.),
장상 ,/ 서리 (2002.7.11.~2002.7.31.)[2],
장대환 ,/ 서리 (2002.8.9.~2002.8.28.),
김석수 ,/ 서리 (2002.9.10.~2002.10.4.),
김석수 ,/ 제34대 (2002.10.5.~),
여당

[[새정치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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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1.20.),


[[새천년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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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1.20.~2002.5.6.),
연립여당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01.9.3.),


[[민주국민당(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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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4.16.~2001.9.3.),
파일:김대중 취임식 사진.png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취임 선서

1. 개요2. 슬로건/국정지표3. 외교/국방4. 정치/사회5. 경제6. 문화7. 여담8. 평가9. 국정지지율
9.1. 한국갤럽
10. 주요 사건11. 인사12. 관련 문헌1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국민의 정부 또는 김대중 정부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제15대 김대중이 이끌었던 정부이며,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로 출범한 정부다.[3] 제6공화국 세 번째 정부로 1998년 2월 25일 출범해 2003년 2월 24일까지 존속했다. 참고로, 공식 명칭인 '국민의 정부'의 의미는, 새로운 정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뜻을 강조[4]하기 위해서 채택된 것이며 인수위원회에 있었던 문희상 전 정무수석 내정자가 이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국민의 정부는 1998년 출범 이후부터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 집권하여,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일상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제공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사의 도입부부터 ‘정보화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할 정도로 정보통신강국을 지향했고 집권 후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고 소프트웨어 산업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5]# 그 외에도 후술되어 있듯 대기업 빅딜, IT를 비롯한 신산업 벤처붐, 문화산업 진흥[6], 기초생활보장법국민건강보험공단 설립, 전자정부 구축, 선진국 진입[7] 등 IMF 이후 대한민국의 방향성에 영향을 많이 끼친 정부였다.

2. 슬로건/국정지표

3. 외교/국방

국민의 정부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바로 미국, 중국, 일본, 북한 이른바 주요 4개국 외교에서 모두 호응하는 반응을 얻어냈다는 점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에서 알 수 있듯 국제적 위상이 높았던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값을 이용해 국민의 정부는 여러 다자 외교를 시도했고, 이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대외정책은 아무래도 북한을 향한 햇볕정책이었다.

햇볕정책은 8.15 광복 이후 남북 분단6.25 전쟁, 그리고 냉전으로 악화된 북한과의 관계를 녹이는 정책이었다.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직접 외교로 전쟁 위협을 낮추고 인도적인 지원 및 경제적 교류를 통해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키려고 시도한 투 트랙 차원의 접근 방식으로, 상호의존도를 높여 전쟁의 위험을 방지하고자 했던 신자유주의적 구조론[8]에 입각한 외교 정책이다.[9]

햇볕정책의 가동으로 한국 정부는 휴민트 사건자해와 가까울 정도의 고행을 통해 남북관계를 전례없이 호전시키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2000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분단 50여년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이 평화통일의 당위와 그 구현 방식에 있어 같은 목소리를 낸 남북 역사상 가장 큰 금자탑 중 하나로 남은 업적이었다. 다만 2002년 연평해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들어 이 정책의 효과가 미미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존재하며, 일부에서는 햇볕정책의 지원금이 북한의 핵개발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러한 평화적 제스쳐와는 별개로 북한 유사시, 기존 북한 지도 세력을 무력화하고 지지세력을 숙청한 후 개혁세력을 지원하여 통일을 주도하려는 계획도 세워놨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본과도 외교 관계에 있어서도 상징적인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대표적이며,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한국에 일본 문화가 대거 개방되며 오늘날 일반 국민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가져왔다.

4. 정치/사회

새정치국민회의는 출범 당시 역사상 가장 적은 의석 수의 여당이었다.[10] 공동 여당인 자민련과 합해도 130석이 채 되지 않았다.[11] 반면에 야당인 한나라당은 단독 의석으로만 과반을 훌쩍 넘기는 상황이었다.[12] 따라서 책임총리제를 약속하여 DJP연합김종필과 같이 이끌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실제로 김종필국무총리에 내정, 임명하였으나 워낙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국무총리 서리로 무려 5개월 정도 있었다.[13] 김종필은 총리가 중심이 된 내각책임제를 원했으나 한나라당의 반대가 너무 심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내심 그 정도까지는 허용해주지 않았고 이는 그들의 연합은 끝까지 지속되지 못한 계기가 되게 된다.

헌정사상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 이어 세번째 연립정권이 꾸려진 정부였고, 실질적인 의미로는 유일한 연립정권이란 평가도 받는다.[14]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이 연립을 했지만, 지속되진 못하고 삐걱거리더니 결국엔 깨지게 된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DJP연합에 의한 정권교체로 완전한 정권교체는 아니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이전 문민정부도 당만 같았을 뿐이지 내부 계파들은 전혀 이념이 다른 세력들이 뭉쳐 만든 정권이란 점에서[15]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 역사에도 중요한 분기점인게, 당시 민주당 내에서 비호남권 아웃사이더였던 노무현이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하는 등의 커리어를 쌓아 거물 정치인으로 발돋움하여 김대중의 후임 대통령이 된다.

1998년 정권 출범 3개월 이후에 있었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과 허니문 효과의 위력으로 16개 광역단체 중 공동 여당이 10개를 휩쓸었다(새정치국민회의 6곳, 자유민주연합 4곳). 이후 경제 상황이 호조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1999년 초반까지 줄곧 50%~60%의 지지율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9년 중반에 터진 옷로비 파문으로 인하여 지지율이 50% 아래로 처음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후 사건이 수습되고 다시 지지율 50%를 이어나가자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새천년민주당으로 개편한다. 이후 꾸준히 지지율이 유지되자 2000년에 있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으나 결과는 전체 273석 중 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115석, 자유민주연합이 17석으로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16] 그리하여 지지율이 최초로 30%대로 주저 앉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국정지지율이 60%를 돌파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잠시, 의약분업 사태를 거치며 다시 지지율이 하향곡선을 그렸고 결정적으로 2000년 8월 말,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30%로 폭락하였다. 이때 국민의 정부는 최초로 레임덕 초기에 진입하게 된다. 정권 후반인 2001년 들어서도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등 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권의 인기가 많이 시들었으며, 2000년 롯데호텔 및 사회보험노조 파업, 2001년 대우자동차 총파업 등지에 공권력을 투입해 폭력진압한 것 때문에 재야세력과 노동자 계층에게도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2001년 8월 23일에 IMF에서 완전히 졸업해 경제주권을 되찾고 계속되는 남북화해 무드 덕분에 그래도 30% 초중반대 지지율을 지키며 국정 운영에 큰 문제없는 수준의 지지율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2001년 8월,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17]에 자유민주연합이 동조하면서[18]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의원꿔주기[19]로 간신히 유지되던 DJP연합이 결국 붕괴되고 만다.[20]

DJP연합 붕괴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국회에서 다시 수적 우위를 상실하였고[21] 이후부터 사실상 국회에서 한나라당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 정권 말기인 2002년 초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 아들이 비리 사건에 연루된 이른바 홍삼게이트가 터지자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하여 임기 마지막 해에 사실상 레임덕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여파로 2002년 6월 13일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16개 광역단체 중 11개를 내주며 참패하게 된다.[22] 이후 계속 20%대 중반의 지지율을 이어나가다가 여당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하게 되자 막판에 지지율이 30%대로 다시 급등했지만 홍삼게이트 판결이 나오자 24%로 임기를 마쳤다. 이후 2002년 12월 16대 대선 이후 노무현 당선자 취임 직전인 2003년 2월에 대규모 인명피해 사고인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하여 암울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임기를 마쳤다.

5. 경제

오늘날 보면 역설적이지만, IMF의 구제금융 조건 등이 겹쳐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정부로 평가받기도 한다.[23] 물론 완전히 신자유주의적 기조로만 간건 아니라 기초생활보장법같은 복지 정책도 이때부터 시행되었다. 오늘날 국민건강보험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국민건강보험공단도 국민의정부 시절 설립되었다. 사실 신자유주의로만 매도되어서 그렇지 흐름 자체는 실용주의 노선격인 제3의 길에 가깝다.

김영삼 정부, 문민정부 임기말에 터진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서 후임인 국민의 정부는 울며겨자먹기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해야만 했다. IMF는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있던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모두에게 신자유주의 성향을 띤 강력한 구조조정 정책을 수행한다는 각서를 받았으며, 동아일보에서는 김대중의 취임 다음날 사설"IMF 위기만 극복해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란 내용을 싣는 현실에 당면했을 정도로 당시 한국 경제는 위기 상황이었다. 일단 호흡기 뗄 위기의 나라를 살리는 게 우선이었고, 그러기 위해 닥치고 뭐든 해야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IMF의 원조 조건이었던 구조조정(Structural Adjustment Programmes)의 핵심 내용은 당시 다음과 같았다.

1) 시장의 자유 강화
2) 규제완화 및 철폐
3) 국유화 된 사업체에 대한 민영화
4) 정부지출(보건복지 등) 축소
5) 고금리(29.5%)

이 과정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 주도 경제정책 노선을 많이 상실했으며[24], 신자유주의식 정책 노선은 IMF 위기 극복과 이후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데 분명 도움은 됐으나 부작용 역시 만만찮아 이후 나오는 비정규직 문제 등이 본격적으로 부각된다.[25] 하지만, 이것은 이미 군사정권 시절부터 IMF 사태 직전까지 유지되었던 대한민국 경제 기반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 일일 뿐이며[26], 국민의 정부가 원해서 진행된 정책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IMF에서 최대 피해자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정부 시절 1998년 2분기 ~ 2003년 1분기까지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은 6.15%에 달했다. 전임 정부인 문민정부 시절 1993년 2분기 ~ 1998년 1분기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인 4.79%보다도 1.46% 높은 수치였으며, 후임 정부인 참여정부 시절 2003년 2분기 ~ 2008년 1분기의 평균 1인당 연간 경제성장률인 4.34%보다는 1.81% 높은 수치였다. 이는 국민의 정부 시절 뛰어난 외교 성과 및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개선으로 인한 대외 신인도의 급격한 회복세와 원화 저평가로 인한 경상수지 대폭 확대, 대기업 간 업종 빅딜을 통한 기업의 국가경쟁력 향상[27], IT벤처기업(스타트업)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 지지[28], 기초생활보장법 통과로 인한 기본적 복지로 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한 제3의 길처럼 시장과 국민 복지가 극단적인 양자택일 사항이 아니고,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하에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실업자와 노숙자, 극빈층에 대한 지원 및 구제정책을 실시한 시기이기도 하였다.[29][30]

하지만 이렇게 높은 거시 경제지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행된 1/4분기 초고금리와[31] 사회적 안전장치가 덜 마련된[32] 상황에서 실시된 대규모 구조조정 여파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기 시작, 이는 곧이어 출범한 후임 정권 참여정부숙제로 남겨진다. 소위 닷컴 버블도 이 시기의 명과 암이다.

또한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이 중진국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선진국에 진입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시기도 바로 국민의 정부 시기이다. 실제로 2001년 8월 23일에 약 4년 만에 IMF 외환위기가 공식 종료되어 경제주권을 되찾고, 2001년 세계은행이 추산한 고소득 국가 재진입[33]인간개발지수 30위권 안(27위) 첫 진입[34]이 모두 2001년에 이루어졌으며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2배 이상을 다시 기록한 시기[35] 역시 2000년이고, 결정적으로 임기 말에 한일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로 국가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IMF 후유증을 뒤로해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한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신흥공업국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36]

부동산 정책 역시 민주당계 정당에서 배출한 정부이자 규제책을 사용한 참여정부문재인 정부와는 완전히 다르게 역대 정부 역사상 가장 강한 축에 속하는 완화책을 펼쳤다. 먼저 분양가 자율화[37], 전매 제한 폐지, 취/등록세 감면 및 면제 수준의 양도소득세 완화, 실거래가 기준 80%선까지 대출을 허용해 주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참여정부에는 부담이 되어 규제 정책으로 선회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6. 문화

국민의 정부 시절 5년은 그야말로 선진국 진입의 징표로써 각종 문화 산업의 시작과 부흥을 알린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K-POP 측면에선 1세대 아이돌들의 활동 기간이었다.[38][39] 이는 지금과 달리 아이돌은 '청춘스타'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5년이나 되는 긴 활동을 하면 멤버들이 20대 중반 이후 30대까지도 넘어가버려서 청춘스타라고 하기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별명이 문화 대통령이었던 만큼[40] 문화계 인사들이나 가요계가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던 상황이었던데다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팔길이원칙'(Arm's Length Principle)처럼 문화 검열을 하는 폐단이 많이 사라졌던 것도[41] 김대중 정부 때였다.

암흑기를 걷던 한국영화계도 쉬리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1999년부터 점유율 36%를 기록한 이래로 르네상스기를 맞게 되었고[42] 이전까지 대다수를 수입에 의존했던 게임계도 리니지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여 해외로까지 게임을 수출할 정도에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더해져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기고 e스포츠라는 용어가 생기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만화계도 1990년대 만화계를 이끌던 잡지만화가 쇠락했지만 한편으로 학습만화가 한국만화 시장을 주도한 장르로 떠오르고 웹툰이 크게 인기를 끄는 큰 변화를 겪었다.[43]

한류 열풍도 김대중 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난 현상으로[44] 영화, 음악, 드라마, 게임, 만화 등 한국의 문화컨텐츠들이 해외로 대규모로 수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시기였다.

스포츠사적으로도 족적을 남겼는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개최되어 아시아 최초로 4강에 진출했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당시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축구 대표팀 감독인 거스 히딩크와 만나 고맙다고 말하며 악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월드컵 선수들의 군 면제를 약속하면서, 이후 박지성 등 많은 선수들이 유럽 축구에 도전하게 된다. 16강전때는 청와대에서 경기를 직접 관람하기도 했으며 4강전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직접 나타나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이때 골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4강 진출이 확정되자 기뻐하기도 했다. 영상

7. 여담

대한민국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호남권 출신 대통령이 이끌었던 정부이다. 이승만은 황해도 출신이고 윤보선은 충청도 출신[45], 최규하는 강원특별자치도 출신, 이명박은 일본 오사카 출신인 것[46], 윤석열은 서울특별시 출신인 것을 제외하면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노무현 & 박근혜 & 문재인까지 7인은 영남 출신이었다.[47]

국민의 정부 집권 시기는 천년만에 인류사가 제2천년기에서 제3천년기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중대한 시기와 겹친다.[48] 이러한 세기적 변화와 함께 따라온 여러 국제적 정세의 변화와 외교, IT, 경제 시스템의 격동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집권했던 정권으로 평가된다. 국제 사회에서는 2001년 9월부터 후임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까지 벌어진 9.11 테러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공습으로 두 중동 국가의 정권이 축출당하고(탈레반, 후세인 정권) 중동이 내전 체제로 돌입하는 큰 변화를 맞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대북포옹정책으로 분단 이후 남북한관계가 온건한 스탠스로 변화하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경제는 1990년대 중반까지의 우등성적표를 IMF 외환위기로 인해 한번에 날려버린뒤 이에 무너져버린 경제시스템을 재건하였던 시기였다. 다행히 1998년 이후 2001년 8월 말, 4년여만에 외환위기를 조기 졸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듬 해인 2002년부터 외환위기의 여파와 함께 카드대란이 발발하면서 경제 위기는 한시도 사라지지 않았다. IT의 경우 초고속 인터넷의 도입과 함께 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설치되어 한국 사회가 디지털 사회로 진입하는데 시초를 닦았고, 정부 막바지에 접어든 2002년 9월에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돌파하여 기존 PC통신의 영향력은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8.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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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정지지율

9.1. 한국갤럽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김대중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
한국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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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득표율
제15대 대통령 선거
40.3%
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8년 2월-1998년 5월
71%
7%
1998년 5월-1998년 8월
62%
11%
1998년 8월-1998년 11월
56%
17%
1998년 11월-1999년 2월
63%
14%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김대중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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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1999년 2월-1999년 5월
60%
16%
1999년 5월-1999년 8월
52%
22%
1999년 8월-1999년 11월
46%
29%
1999년 11월-2000년 2월
50%
24%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김대중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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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2000년 2월-2000년 5월
49%
20%
2000년 5월-2000년 8월
38%
26%
2000년 8월-2000년 11월
54%
18%
2000년 11월-2001년 2월
30%
51%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김대중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주간집계 결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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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4년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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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2001년 2월-2001년 5월
27%
55%
2001년 5월-2001년 8월
29%
52%
2001년 8월-2001년 11월
28%
49%
2001년 11월-2002년 2월
31%
49%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김대중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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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기간 긍정 부정
2002년 2월-2002년 5월
33%
41%
2002년 5월-2002년 8월
26%
53%
2002년 8월-2002년 11월
28%
52%
2002년 11월-2003년 2월
24%
56%
이 자료는 한국갤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김대중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 분기집계 결과임.
조사 방법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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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주요 사건

10.1. 1998년

10.2. 1999년

10.3. 2000년

10.4. 2001년

10.5. 2002년

10.6. 2003년

11.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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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경제부장관 →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00aa7b> 이규성강봉균이헌재진념전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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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관련 문헌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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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경제] 재정경제부장관 겸임.[2] 인사청문회법 도입 이후 첫 낙마 사례.[3] 제1공화국부터 이 이전까지의 모든 정권교체는 쿠데타 또는 시민혁명으로 이전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루어졌다. 또 실질적 의미에선 헌정사 최초의 연립정권이기도 했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계속 유지되진 못하고 깨진다.[4] 대한민국헌법 제1조 2항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와도 꽤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5] 후임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인터넷 강국' 덕을 보면서 본인이 IT에 조예가 깊었던 것과 맞물려 한국의 IT산업을 확장해 나갔다.[6] 국민의 정부는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했으며 '문화산업진흥기금'을 조성해 IMF사태로 자금난을 격던 문화계를 지원했다. # 또한 정부 재정대비 문화예산 비율을 역대 가장 높은 1%대로 올렸으며, 스크린쿼터 사수와 영화진흥기금 1500억원을 조성해 영화계를 지원하기도 했다.#[7] 국민의 정부 말기인 2002년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했다.[8] 국제정치경제적 신자유주의와는 구별되는 국제정치학적 개념으로 이해에 주의를 요한다.[9] 대화를 통한 외교정책은 일본과의 전면적 문화 개방 등을 고려할 때, 국민의 정부의 외교정책 기조였던 것으로 보인다.[10] 이 기록은 2022년 윤석열 정부출범하면서 깨진다.[11]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160석을 넘는 과반 의석 수를 가졌으나 당시 공동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은 당시 79석, 45석 정도에 불과하였다.[12]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이 얻은 의석 수는 139석이었으나 통합민주당을 흡수하고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으로부터 의원 빼오기를 강행해 1997년 157석, 1998년 165석까지 늘어났다.[13] 이 때의 일은 훗날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 김종필이 끝내 이회창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국무총리 인준안 거부 외에도 한나라당의 자유민주연합 의원 빼가기가 워낙 빈번해 김종필은 한나라당에 단단히 앙금을 가지고 있었다.[14] 이승만 정부는 제 이승만 지지 정당의 연립이며 결국 자유당으로 통합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유신 치하 민주공화당과 비정상적 교섭단체 유신정우회의 연립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연립정권이라고 보기 어렵다. 2020년 문재인 정부더불어시민당도 있지만 더불어시민당은 어디까지나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이었기 때문에 연립정권으로 보기 힘들다.[15] 애초에 자유민주연합 세력이 그 문민정부에 탄압받고 쫓겨난 비주류 세력들이었다.[16] 하지만 완전한 패배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애초에 인구 500만의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 인구 1300만의 영남을 기반으로 한 정당을 상대로 과반을 저지하고 총 의석의 42%에 달하는 쾌거를 이루어냈고 공동 여당인 자유민주연합과 합하면 사실상 여반야반의 구도를 절묘하게 이루어냈기 때문에 결과가 비슷했던 19대 총선과 견주어보았을 때 내용상 더 좋은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17] 8.15. 평양축전에 남측 방문단의 방북을 허용했다는 이유였다.[18] 새천년민주당과 연정 상태였으나 대북관에 관해선 의견 차이가 꽤 있었다.[19] 사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이 교섭단체(20석)가 되지 못한 것은 새천년민주당이 이인제를 내세워 충청권에서 자유민주연합 말살을 시도한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자민련은 총선 이후 연합을 유지하지 않으려 했지만 김대중이 자민련에 의원 4명을 빌려주어 자민련이 교섭단체가 되도록 하였고 김종필이 화답하면서 연합이 지속되게 되었다.[20]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민주국민당 3당 연합의 의석 합이 과반을 넘어서자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연합을 붕괴시켜 관계를 끊어내 의석 수를 늘리고 충청권 기반을 흡수하려던 한나라당의 전략이었단 설도 있다. 당시 한겨레21 참조.[21] 15대 국회 말, 한나라당에서 의원 역빼오기를 통해 국민회의 101석, 자민련 52석으로 과반을 안정적으로 확보했으나 16대 국회에서는 새천년 115석, 자민련 17석으로 과반인 137석에 5석 모자랐고 민주국민당(2석)과 탈당파 의원(3석)까지 설득에 성공한 후에야 과반을 차지하게 된다.[22] 나머지 5곳 중 4곳은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가져갔지만 4곳은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 제주특별자치도. 즉 모두 호남이었다.(나머지 1곳은 자유민주연합의 충청남도)[23] 물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스런 기조가 처음 시작된 건 김영삼 정부부터였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건 김대중 정부부터였다. 당연히 주요 원인은 IMF.[24]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발언이 대표적. 다만 그렇다고 당시 정부가 가만히 논건 아니라 빅딜 정책 등을 주도하긴 했다. 사실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대한민국의 경제 정책 기조는 국민의 정부가 짜놓은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25] 하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구글링만 해봐도 알겠지만 한국 경제는 IMF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장한다. 오히려 대기업 등 상류층만 보면 이전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장했으며(세계화에 성공한 글로벌 기업들도 이 시점부터 늘어난다), 다만 문제는 그만큼 중산층의 임금이 따라가주지 못하다보니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는 것이다.[26] 분식회계와 뇌물로 인한 기업 리스크 등. 결국 언젠간 터질 일이었는데 문민정부 말기에 재수없게 터졌다는 소리다.[27] 오늘날 재벌 대기업들이 주력 분야가 겹치지 않는건 이때 빅딜 영향이 크다. 아니었음 지금도 1세대들처럼 서로 분야 침탈한다고 해외로 역량을 돌리지 못하고 국내에서 으르렁거렸을 것이다.[28] 연장선상에서 국민PC 보급 사업도 진행해 제법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29] 유시민보건복지부장관에 따르면,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 출범 무렵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인들 수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정부에서 이들이 동사무소에 지원을 요청 시, 소정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끔 조처한 덕분이었다고 한다.[30] 참고로 이때부터 연을 맺은 앤서니 기든스 교수는 이후 김대중학술원의 고문도 된다.[31] "제도권 금융기관의 금리"가 저랬다는 말이다. IMF측이 제시한 명분(시중의 자금을 금융기관으로 끌어들인다)은 그럴 듯 했지만, 실제로는 실직 후 자영업자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실직자분들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악재 중의 악재였다. 막대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어느 가장이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자작극으로 보험금을 타내려다 적발된 사건까지 일어나는 상황에서, 결국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금융시장 개방을(=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투자자들이 인수가능하도록) 조건으로 IMF와 재협상 한 끝에 겨우 이율을 낮추게 된다.[32] 실업수당제도와 정부 지원을 받는 직업전문학교들이 주축이 되어 실직자, 구직자분들께 소액의 지원금을 지급하고 직업 훈련을 돕는 제도가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차츰 활성화되기 시작한다.[33] 외환위기 이전인 1995~1996년 잠시 고소득 국가로 분류된 적이 있었다가 1997년에 탈락되었고, 2001년에 다시 재진입 한것이다. 그리고 세계은행에서 추산한 고소득 국가 자체가 선진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34] 정확히는 1999년 조사 지표가 2001년 발표된 것이다.[35] 외환위기 이전인 1994~1997년에도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긴 바가 있다.[36] 다만 당시 한국은 막 선진국에 진입했던 말단 선진국이었던지라 참여정부 시절부터 이명박 정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선진국 이미지는 해외에서도 옅었다. 오늘날의 포르투갈보다 약간 나은 포지션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37] 아파트 건축비가 종전 6,000만원에서 1억 7,000만원으로 크게 상승했다.#[38]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시기는 김대중 정부 임기 말이였던 2002년이 마지막 해였지만 참여정부 출범 이후인 2003년~2004년 초까지는 일부 1세대 아이돌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2세대 아이돌인 동방신기의 데뷔 이후인데다가 버즈 민경훈의 솔로 가수들이 인기를 끌었던 시기였고, 무엇보다 소몰이창법이 한참 인기를 끌던 시기라서 1세대 아이돌의 마지막 전성기는 사실상 2002년이다.[39] 1세대 걸그룹을 대표하는 핑클S.E.S. 모두 김대중 정부 임기말인 2002년까지 활동하다가 해체했고, 핑클은 공식적인 해체는 아니지만 2002년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40] 문화 대통령은 가수 서태지의 별명이기도 하나, 이 별명도 서태지 팬을 자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붙여준거긴 하다.[41] 물론 제도상의 문화검열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완화되거나 사라졌지만 1997년 청보법 파동에서 볼 수 있었듯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42] 이는 1996년 독립해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을 짓는 CJ 등 이후 한국 미디어 산업을 주도하는 문화 대기업들이 성장하는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43] 당시부터 웹툰 인기작들이 출간되어서 파페포포 메모리즈, 포엠툰같은 일부 작품들은 수십만 부가 넘는 판매부수를 보였지만 이 당시의 웹툰은 옴니버스 형식의 웹툰이나 에세이툰 위주였었기 때문에, 장르가 다양하지 않았던지라,(장편 스토리 웹툰으로 최초로 인기를 끈 작품은 2003년 강풀의 순정만화가 시초였다.) 잡지만화가 쇠락하는 와중에도 웹툰의 미래에 대해 회의하는 시각이 많았기는 했었고, 만화가들의 절규라는 글에서도 이 당시 만화가들의 시선을 알수있다.[44] 사랑이 뭐길래, 의가형제 등 한국 드라마가 김영삼 정부 말기부터 중국과 베트남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나, 이후 다양한 분야, 다양한 나라로 뻗어간건 김대중 정부 시기부터였다. 물론 어느 쪽이든 민주화 이후 자유로운 문화 산업 성장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되기에 양쪽 다 평가할만하다. 특히 김대중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한국에선 러브레터같은 영화가, 일본에선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같은 영화가 흥행하는 시초를 다졌다. 사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에도 어린이 시간대 TV애니메이션은 대다수는 미국과 일본에서 수입한 작품이었고, 오락실 게임도 일본것들이 다수였으며, TV프로그램과 가요도 표절시비가 공공연하게 일었던지라, 그 만큼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때문에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 대중문화 시장을 잡아먹는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강했지만 막상,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로 일본 드라마와 영화, J POP이 생각보다 흥행을 거두지 못한데 반해 한국 대중문화는 오히려 동아시아권과 동남아시아권,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상황이 격변했던것이었다. 다만 일본 대중문화계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한류국책론을 내세우면서 회피하려는 경향이 거셌다. 사실 근처 일본에서는 진작부터 한국 대중가요에 대한 수요가 있었으며, 특히 조용필은 아예 이미 민주화 전부터 국제적으로 동아시아의 대표 가수 중 한 명으로 간주되었다.[45] 하지만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여서 대통령은 그냥 얼굴마담이고 실권은 총리가 가지고 있어 5.16. 쿠데타 때도 윤보선 대신 장면을 노렸다. 하지만 어쨌든 대통령은 윤보선이었으니. 참고로 제2공화국의 실권자이던 장면은 서울특별시 출신이다.[46] 다만 광복 후 귀국해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성장해 실질적 고향은 포항시이다.[47] 다만 TK, PK를 나누면 TK가 3명(박노박), PK가 3명(김노문)이긴 하다. 예외적으로 전두환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합천군이지만 성장은 대구광역시에서 해서 TK 출신 대통령으로 인식되긴 한다.[48] 1999년, 2000년, 2001년 사이.[49] 쉽게 말해서 대우 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