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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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64F><colcolor=#fff> 제11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장상 張裳 | Chang Sang | |||
출생 | 1939년 10월 3일 ([age(1939-10-03)]세) | ||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 |||
본관 | 인동 장씨 | ||
재임기간 | 제11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 ||
1996년 9월 1일 ~ 2002년 7월 10일 | |||
국무총리 서리 | |||
2002년 7월 11일 ~ 2002년 7월 31일 | |||
상훈 | 국민훈장 모란장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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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배우자 박준서[2], 슬하 2남 | ||
종교 | 개신교 (한국기독교장로회) | ||
경력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세계YWCA 실행위원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 제11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통일고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국민의 정부)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 한국기독교학교연맹 부이사장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국무총리 서리 포항공과대학교 이사 민주당 공동대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 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상임고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민주당 상임고문 세계교회협의회 공동의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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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목사, 신학자, 교육자. 제11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종교는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로, 목사이기도 하다.
2. 생애
1939년 10월 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에서 독실한 개신교 신자 가정의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 장수근(張壽根)[3]을 여의었고, 8살이던 1947년 어머니 김봉현(金鳳鉉)과 함께 삼팔선을 넘어 월남했다.[4] 11살이던 1950년 6.25 전쟁이 터져,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다니며 초등학교를 여러 번 옮겼고, 피난민 학생들을 위한 임시학교인 대전종합중학교에 다니다가 휴전된 후 서울 숙명여자중학교에 편입학했다.숙명여자중학교와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중고등학교 내내 장학금을 받았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까지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다녔다. 공부 외에도 다양한 활동들을 열심히 했으며, 당시 총장을 지낸 김활란, 김옥길 등 교수들로부터도 총애를 받았다. 대학 2학년 때는 수학과 퀸으로 뽑혀, 메이퀸[5] 행렬에 참가하기도 했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영향으로, 장상은 전공인 수학뿐 아니라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장상이 입학한 이후로 이화여대에 기독교학과가 신설되었고, 장상은 기독교학과로의 전과도 생각했지만, 교수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졸업 후에 신학ㆍ기독교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수학과 신학 사이에서 갈등도 했지만, 훗날 그녀는 "수학 공부를 통해 논리력과 사고력을 기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신학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대 졸업 후에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편입학했는데, 이때 남편 박준서를 처음 만났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의 편입생으로, 법조인보다 신학자의 길에 뜻을 가지게 되어 연세대 신학과에 편입했다고 한다.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후 196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예일 대학교 신학대학원(석사)과 프린스턴 신학교(박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마침 박준서도 같은 학교에 유학 와 있어서 장상은 박준서와 재회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학생 부부가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인 1973년에 장남 박찬우([age(1973-01-01)]세)를 낳았는데, 나중에 장상이 국무총리 후보에 올랐을 때 장남의 국적 문제가 말썽이 되었다.
장상과 박준서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아기를 키우고, 학비와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일까지 하며 바쁘게 살다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77년 한국으로 귀국했다. 1978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차남 박찬석([age(1978-01-01)]세)이 태어났다.
귀국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교수 및 부총장, 총장을 역임하였다. 줄곧 독신 여성들만[6] 이화여대의 총장을 맡아왔던 관례를 깨고, 기혼 여성으로서 총장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장남의 이중국적 또는 미국 국적 취득, 병역 기피 의혹, 부동산 투기와 이를 위한 위장전입, 집의 크기, 많은 예금액수가 언론 지면에 다뤄지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 결국 낙마했다.[7] 2003년 5월 12일 <지금도 나는 꿈을 꾼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이후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민주당 공동대표, 대표를 역임하였다.
2008년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문국현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어 치러진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문국현 이전까지 해당 선거구에서 3선을 지내며 터줏대감으로 있던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에 18.43%p로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상임고문을 지내다가 2013년 6월 4일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탈당의 변은“시작할 때가 있으면 끝날 때가 있지 않으냐” #
3.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8080><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808080>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10 | 상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 서울 은평 을 | [[민주당(2008년)|]] | 33,048 (39.90%) | 낙선 (2위) | [8] |
[1] 현재는 수학과가 자연과학대학 소속이지만, 장상이 재학하던 시절에는 사범대학 소속이었다.[2]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및 부총장, 경인여자대학교 총장 등을 지냈다.[3] 1883년(고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해 평안북도 곽산군수를 지낸 장익후(張益厚)의 4남으로, 일본에 유학해 영문학을 공부했다.[4] 10살 위였던 언니 장란(張蘭)은 일찌감치 서울 진명여학교로 유학을 가 있었다.[5] 과거 여러 대학에서 5월마다 했던, 일종의 미인대회. 용모, 성적, 재능, 품성 등등을 두루 고려하여 선발하며, 학교의 스타 내지는 아이돌처럼 여겨졌다. 각 학과마다 퀸을 뽑고, 그 중에서 또 학교 전체 퀸을 뽑았다.[6] 이화학당의 창립자인 메리 스크랜턴 초대 총장을 제외한 역대 총장 전원이 미혼이었고, 메리 스크랜턴도 52세에 한국에 올 당시에는 과부여서 남편이 없었다. 대신 장성한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했다.[7] 최초의 여성 총리는 한명숙이 됐다.[8] 전임자 문국현 당선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