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fff,#1c1d1f><tablebgcolor=#fff,#1c1d1f> | 노벨상 | }}} | |||||
<colbgcolor=#663334><colcolor=#cd9f51> 노벨평화상 Nobel Peace Prize | |
주최 및 장소 |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노르웨이| ]][[틀:국기| ]][[틀:국기| ]] 오슬로 |
상금 | 1000만 SEK 89만 달러[1] (2022년 기준) |
첫 시상년도 | 1901년 12월 10일 |
최근 수상자 | 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 (2024년 기준)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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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가 시상하는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상하는 다른 노벨상들과는 달리 이웃 나라인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하는 것이 이색적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벨이 평화상은 노르웨이에 권한을 이임했기 때문이다. 1901년의 첫 수상자는 국제적십자위원회를 창립한 스위스의 앙리 뒤낭과 국제 평화 연맹을 창설한 프랑스인 프레데리크 파시이다. 또한 학문적 성취와 무관하게 탈 수 있는 노벨상이기도 하다. 물론 전 세계가 인정할 수 있을 만큼의 학문적 성취에 준하는 국제적 업적을 달성해야 한다. 물론 과학자, 경제학자, 문학가가 평화상을 수상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먼 볼로그, 무함마드 유누스, 베르타 폰 주트너, 라이너스 폴링이 좋은 예.
한 나라의 입법부의 의원이면 누구나 추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도 독재 인사를 추천하는 것 때문에 2001년부터 노르웨이 국회의원으로 추천 가능 인원이 제한됐다. 즉, 노르웨이 국회의원 최소 1인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2. 역사와 이야기들
1948년 마하트마 간디는 노벨평화상의 유력한 후보였으나 수상자 발표를 얼마 앞두고 암살당했다. 노벨상은 발표 시점에 생존 중인 인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간디의 평화상 수상은 무산되었고, 그 해의 노벨평화상은 이례적으로 공석이 되었다. 노벨상 공식 웹사이트에서도 간디에게 사후 평화상 수여를 여러모로 검토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1939년[2]에는 무려 아돌프 히틀러도 후보로 추천받은 적이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 국회의원이었던 E. G. C. 브란트라는 이가 추천했는데, 그에 의하면 안티파로서 풍자를 위해 추천한 것일 뿐 진심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공동으로 추천한 노벨상 후보는 뮌헨 협정의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 히틀러의 라이벌 이오시프 스탈린도 제2차 세계 대전 종식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후보로 추천받은 적이 있다.
'힘에 의한 평화'에는 매우 인색하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낸 주역 중 하나인 윈스턴 처칠은 전쟁광에 가까운 과격파였기에 아돌프 히틀러의 위험성을 미리 통찰했다는 평가와는 달리 노벨평화상 대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3]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냉전을 종식한 로널드 레이건 또한 받지 못했는데, 집권 초 군비 강화 정책과 이란-콘트라 사건이 마이너스 요인인 것으로 보인다.
2010년에는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와 관련된 인사인 류샤오보가 수상했다. 그런데 이분은 감옥에 있으며, 앞으로 나오기도 힘든 상황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었다.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 본인은 물론, 류샤오보의 모든 가족, 친척들과 인권운동가 등 수백여명을 출국금지를 시켰기 때문에, 결국 노벨평화상 수상은 공석으로 진행되었다. 노벨위원회 측에서는 타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인권 운동가에게 대리수상을 시켰을 수도 있지만, 특별히 상징적으로 빈 의자에다 노벨평화상 메달을 수여하였다. 빈 자리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것은 1935년 나치 독일 시절에 수상한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처음이며, 현장에 참여했던 인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3분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3. 비판
근본적으로 '평화'라는 주제로 상을 주는 것은 각 국가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문제와 연관된다. 왜냐하면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이라던가, 인권 등의 문제는 결국에는 정치가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른 노벨상과는 달리 수상자의 업적의 평가가 각 국가, 각 구성원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는 수상자가 많다.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의 원활한 해결'에 대한 공로를 내세워 수상했다. 하지만 그 평화는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이 미국-일본 사이의 야합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결과 일본 제국에 빼앗겨 수많은 한국인들의 피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우드로 윌슨도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을 제창했다는 이유로 1919년 평화상을 받았는데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에 합병됐던 나라에게만 해당됐던 얘기지, 승전국의 식민지(예를 들어 인도, 한국[4]) 구성원 입장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논란이 일었던 사례를 하나만 꼽자면 베트남 전쟁과 관련되어 상을 받은 헨리 키신저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으로 상을 받은 양쪽 수장[5]의 수상에 대한 비판이 많다. 1973년 파리 조약으로 베트남 전쟁을 휴전하고 미군을 철수시킨 공로로 베트남의 레득토와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키신저는 캄보디아 폭격을 포함해 국무장관 재임 시절 전쟁 범죄와 인권 탄압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 인물이며, 레득토는 자신의 조국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레득토의 말대로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전쟁이 끝난다. 키신저는 반전 시위대를 우려해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사이공 함락 후 상을 반납하려 했지만 노벨위원회가 거부했다. 그리고 50년 만에 공개된 것에 따르면 당시 노벨위원회는 그해 초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협정의 주역이었던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과 레 둑 토 북베트남(월맹) 정치국원에게 평화상을 수여했다.연합뉴스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 뒤 노벨위원회 위원 5명 중 2명이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홀로코스트 고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팔레스타인 학살을 옹호하는 등 수상 이후 행보가 바뀐 사람들도 있다. 물론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가 예지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확인된 '평화를 위한 노력이나 공로'에 수여하는 것이다 보니 나중에 노벨상 수상의 공로가 허상이 된다고 해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의 탓이 아니다.
레흐 바웬사(1983), 데즈먼드 투투(1984), 달라이 라마(1989), 미하일 고르바초프(1990), 아웅 산 수 치(1991), 넬슨 만델라(1993), 류샤오보(2010), 드니 무퀘게&나디아 무라드(2018), 동티모르의 독립운동가들과 아일랜드 평화 협상을 타결한 사람들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라도 적절하게 상이 주어지는 편이다. 문제는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에서 옐친과 함께 러시아를 박살낸 매국노 취급받고 있고 아웅 산 수 치 역시 로힝야 탄압 옹호 및 권위주의 논란 등을 빚었다는 것. 물론 수치는 군부의 눈치를 보느라[6] 어쩔 수 없었다는 옹호론도 있긴 하다.
4. 역대 수상자
자세한 내용은 노벨평화상/수상자 문서 참고하십시오. {{{#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
앙리 뒤낭 | 프레데리크 파시 | 엘리 뒤코묑 | 샤를 알베르 고바 | |
<rowcolor=#cd9f51> 1903 | 1904 | 1905 | 1906 | |
- | ||||
윌리엄 랜들 크리머 | 국제법학회 | 베르타 폰 주트너 | 시어도어 루스벨트 | |
<rowcolor=#cd9f51> 1907 | 1908 | |||
에르네스토 모네타 | 루이 르노 | 클라스 아르놀드손 | 프레드리크 바예르 | |
<rowcolor=#cd9f51> 1909 | 1910 | 1911 | ||
- | ||||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 국제평화국 | 알프레트 프리트 | |
<rowcolor=#cd9f51> 1911 | 1912 | 1913 | 1917 | |
토비아스 아서르 | 엘리후 루트 | 앙리 라퐁텐 | 국제적십자위원회 | |
<rowcolor=#cd9f51> 1919 | 1920 | 1921 | ||
우드로 윌슨 | 레옹 부르주아 | 얄마르 브란팅 | 크리스티안 랑에 | |
<rowcolor=#cd9f51> 1922 | 1925 | 1926 | ||
프리드쇼프 난센 | 오스틴 체임벌린 | 찰스 G. 도스 | 아리스티드 브리앙 | |
<rowcolor=#cd9f51> 1926 | 1927 | 1929 |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페르디낭 뷔송 | 루트비히 크비데 | 프랭크 켈로그 | |
<rowcolor=#cd9f51> 1930 | 1931 | 1933 | ||
나탄 셰데르블롬 | 제인 애덤스 | 니컬러스 버틀러 | 노먼 에인절 | |
<rowcolor=#cd9f51> 1934 | 1935 | 1936 | 1937 | |
아서 헨더슨 | 카를 폰 오시에츠키 | 카를로스 라마스 | 로버트 세실 | |
<rowcolor=#cd9f51> 1938 | 1944 | 1945 | 1946 | |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 국제적십자위원회 | 코델 헐 | 에밀리 그린 볼치 | |
<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9 | 1950 | |
존 모트 | 퀘이커 봉사협회 | 존 보이드 오어 | 랠프 번치 | |
<rowcolor=#cd9f51> 1951 | 1952 | 1953 | 1954 | |
레옹 주오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조지 마셜 | 유엔난민기구 | |
<rowcolor=#cd9f51> 1957 | 1958 | 1959 | 1960 | |
레스터 피어슨 | 도미니크 피르 | 필립 노엘베이커 | 앨버트 루툴리 | |
<rowcolor=#cd9f51> 1961 | 1962 | 1963 | 1964 | |
다그 함마르셸드 | 라이너스 폴링 | 국제적십자위원회 | 마틴 루터 킹 | |
<rowcolor=#cd9f51> 1965 | 1968 | 1969 | 1970 | |
유니세프 | 르네 카생 | 국제노동기구 | 노먼 볼로그 | |
<rowcolor=#cd9f51> 1971 | 1973 | 1974 | ||
빌리 브란트 | 헨리 키신저 | 레득토 (수상 거부) | 사토 에이사쿠 | |
<rowcolor=#cd9f51> 1974 | 1975 | 1976 | ||
숀 맥브라이드 | 안드레이 사하로프 |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 | |
<rowcolor=#cd9f51> 1977 | 1978 | 1979 | ||
국제앰네스티 |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 | 마더 테레사 | |
<rowcolor=#cd9f51> 1980 | 1981 | 1982 | ||
아돌포 에스키벨 | 유엔난민기구 | 알바 뮈르달 | 알폰소 가르시아 | |
<rowcolor=#cd9f51> 1983 | 1984 | 1985 | 1986 | |
- | ||||
레흐 바웬사 | 데즈먼드 투투 |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 엘리 비젤 | |
<rowcolor=#cd9f51> 1987 | 1988 | 1989 | 1990 | |
오스카르 아리아스 | 유엔 평화유지군 | 달라이 라마 14세 | 미하일 고르바초프 | |
<rowcolor=#cd9f51> 1991 | 1992 | 1993 | ||
아웅 산 수 치 | 리고베르타 멘추 | 넬슨 만델라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 |
<rowcolor=#cd9f51> 1994 | 1995 | |||
이츠하크 라빈 | 시몬 페레스 | 야세르 아라파트 | 조지프 로트블랫 | |
<rowcolor=#cd9f51> 1995 | 1996 | 1997 | ||
퍼그워시 회의 |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오르타 | 조디 윌리엄스 | |
<rowcolor=#cd9f51> 1997 | 1998 | 1999 | ||
- | ||||
지뢰금지국제운동 | 존 흄 | 데이비드 트림블 | 국경없는의사회 | |
<rowcolor=#cd9f51> 2000 | ||||
김대중 | ||||
}}}}}}}}}
- [ 21세기 ]
-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01 || 2002 || 2003 ||
}}}}}} ||
5. 기타
- 노벨상 중 유일하게 영어 명칭에서 'in'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노벨상은 'Nobel Prize in ~'인데 반해[7], 이 상은 그냥 'Nobel Peace Prize'로 부른다.
- 한 개인이 아닌 집단이 받는 경우도 있다. 1910년의 국제 평화국, 1917년, 1944년, 1963년의 국제적십자위원회,1977년의 국제앰네스티, 1999년의 국경 없는 의사회, 2001년의 UN, 2007년의 IPCC(Internation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2012년 유럽연합, 2013년 화학무기금지기구(OPCW(Organis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 2015년의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24년 원수폭 피해자단체협의회 등이 좋은 예이다.
- 교보문고 광화문점 입구에는 여러 나라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캐리커처를 분야별로 진열해놓고 있었는데,[8] 1992년 교보문고 광화문점 재개점 때 처음 선을 보였다. 교보생명과 교보문고를 창립한 대산 신용호 창립자의 아이디어였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보면서 큰 꿈을 키우고 독서를 통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 자리는 "한국인 수상자를 기다립니다"라는 문구를 써 놓고 비워뒀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는 김대중의 캐리커처가 들어가게 되었고 '다음 수상자를 기다립니다' 라는 문구가 다시 써졌다. 전시 공간은 2010년 광화문점 리노베이션 후 사라졌으나, 끊이지 않는 시민들의 복원 요청에 응해 2014년 재조성했다. 그리고 2024년 기다리던 다음 수상자가 나타났고, 해당 빈자리에는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사진이 설치될 예정[9]이다.
6. 관련 이미지
1979년 수상자 마더 테레사.[10]
1991년 수상자 아웅 산 수 치.[11]
1993년 수상자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과 F. W. 더클레르크 당시 대통령.
2000년 수상자 김대중 전 대한민국 대통령.
2010년 수상자 류샤오보. 본인이 중국 정부에 의해 감금되어 있는 상태여서 상징적인 의미로 빈 의자를 놓고 수상식을 진행했다.
2014년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
2015년 수상자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12]
[1] 한화 기준 약 12억 7,244만 원.[2]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바로 그 해다.[3] 정치 지도자들이 자주 수상했다보니 처칠은 쿠르드족 학살을 명령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노벨평화상 후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4] 3.1 운동이 바로 이 민족자결주의 선언에서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승전국인데다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었다.[5] 야시르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6] 실제로 군부는 의회의 개헌저지선을 점유하는 등 민주화 이후에도 대놓고 정치에 간섭했으며 수치가 문민통제를 조금이라도 확립하려 하자 바로 쿠데타를 일으켜 그녀를 내쫓았다.[7] 심지어 한참 후에 추가된 노벨경제학상도 정식 명칭이 'The Sveriges Riksbank Prize in Economic Sciences in Memory of Alfred Nobel'이다.[8]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부문별 2명씩 총 6개 부문 22명의 초상과 업적을 담은 그림들이다. 박영근, 이동재, 이인, 최석운 등 네 명의 중견 화가가 각각의 독특한 화법으로 그렸다.[9]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10156386i[10] 왼쪽 인물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오른쪽 인물은 낸시 레이건 영부인이다.[11] 수상 당시 아웅산수치는 미얀마 군사정권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였고, 가족이 대신 수상했다. 사진 속의 모습은 수치 여사가 복권된 후인 2012년.[12] 노동계 대표인 총노조, 산업계를 대표하는 산업·무역·수공업연맹 시민단체인 인권연맹 법조계의 변호사회 등 4개의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