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소설가에 대한 내용은 한강(소설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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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3334><colcolor=#cd9f51> 노벨상 The Nobel Prize | |
설립 | 1895년 |
국가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노르웨이| ]][[틀:국기| ]][[틀:국기| ]][평화상] |
상금 | 1,100만 SEK, 115만 달러 |
한화 약 13억 원 (2024년 기준) | |
시상 분야[2] | 노벨물리학상(1901) 노벨화학상(1901) 노벨문학상(1901) 노벨생리학·의학상(1901) 노벨평화상(1901) 노벨경제학상(1969) |
수여 기관 |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생리학·의학상) 스웨덴 아카데미(문학상) 노르웨이 노벨위원회(평화상) |
링크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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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산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다섯 등분하여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화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개발을 한 사람,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 분야에서 이상주의적인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국가간의 우호와 군대의 폐지 또는 삭감과 평화 회의의 개최 혹은 추진을 위해 가장 헌신한 사람에게 준다.
-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 中.
-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 中.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물리학, 화학, 경제학), 스웨덴 아카데미[3](문학),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생리학·의학), 노르웨이 노벨위원회(평화)에서 매년 인류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다.[4]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사업가 및 공학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졌다.
2. 역사
일설에는 1888년 알프레드 노벨의 형인 루드비그 노벨(Ludvig Emmanuel Nobel/Лю́двиг Эммануи́лович Нобе́ль)[5]이 사망했을 때 한 신문에서 실수로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고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에 노벨을 '죽음의 상인'이라 지칭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노벨이 자신의 사후 이미지를 걱정해 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해당 오보의 원본이 발견된 바 없으며, 심지어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등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언급, 인용한 바 없어서 잘못 알려진 풍문일 가능성이 높다.이유야 어찌되었든 다이너마이트가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던 노벨은[6] 후에 유언으로 유산의 94%(약 440만 달러[7])를 기부, 노벨상을 설립하게 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의 엄청난 재산을 대부분 기부하려하자, 자기들의 몫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그의 친척들[8]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게다가 노벨은 유언장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이 상을 줄 것을 당부했는데, 이것 때문에 스웨덴 내 여론과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2세까지도 노벨을 비난했다. 특히 평화상 수상을 당시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었던 노르웨이에 맡겼던 것도 이를 부채질했다. 그러나 유언 집행인 랑나르 솔만(Ragnar Sohlman, 1870~1948)의 결단으로 노벨의 재산은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노벨상의 위상을 생각하면 별 탈없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상이다. 솔만은 상을 제정하며 가진 인터뷰에서 '욕을 그리 많이 먹어보는 것도 재미있더군요.'라며 노벨의 친척들이 벌인 온갖 방해공작이나 욕설, 명예훼손을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다만 노벨경제학상의 경우 1968년, 즉 노벨상이 제정되고 난 뒤로도 한참 후에 노벨의 유언과는 무관하게 따로 생긴 상이다. 스웨덴 중앙은행[9] 설립 300주년을 기념해 제정한 상으로서, 상의 정식 명칭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경제학 분야의 스웨덴 중앙은행상'(The Sveriges Riksbank Prize in Economic Sciences in Memory of Alfred Nobel)이다.[10] 노벨의 유언에 의해 제정된 나머지 5개 분야 노벨상은 정식 명칭은 Nobel Prize[11]로 시작되는 데 반해, 노벨경제학상은 The Sveriges Riksbank Prize로 시작된다.
즉, 노벨경제학상은 엄밀히 따지자면 노벨상은 아니고 노벨 기념상이다. 하지만 경제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는 물리학상, 화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곳이며, 수상식에 다른 분야의 수상자들과 함께 참석하고 상금 또한 동일하다. 스웨덴에서 달리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12] 그래서 일반적으로 노벨상이라고 하면 이 경제학상도 포함되는 편이다. 하지만 알프레드 노벨의 형의 후손인 피터 노벨은 노벨경제학상에 대해 크게 부정적으로, 경제학상에 무단으로 붙인 '노벨'이라는 이름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주식 옵션 투기를 조장하는 시카고학파들이 상을 휩쓸고 있다며, 인류에 공헌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한다는 노벨의 취지를 크게 벗어났다고 비판하고 있다.
노벨상 시상 초기에는 지금처럼 권위 있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곧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상이 되었다. 이는 상의 수준을 높여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에 힘입은 결과였다.
3. 시상 및 수상
3.1. 시상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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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의 시상 분야는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13], '문학', '평화', '경제학'이다. 이 중 경제학상은 노벨상이 제정되고 난 뒤로도 한참 후에, 스웨덴 중앙은행 설립 300주년을 기념해 제정한 상으로서 노벨의 유언과는 무관하게 따로 생긴 상이다.
노벨상의 시상 분야들은 노벨이 생전에 몸담았던 분야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폭약을 합성, 제조하는 과정은 화학이, 폭발의 반응 에너지를 연구하는 것에서 물리학이, 그가 제조했었던 폭약인 니트로글리세린이 약으로써 사용된다는 점에서 생리 의학이, 노벨이 말년에 평화를 바라며 문학 저술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문학과 평화상이 관련되어 있고, 후대에 새로 제창된 분야이지만 노벨 역시 성공한 사업가였다는 점에서 경제학상도 연관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자연과학의 5가지 분야(물리학/화학/생물학/지구과학/천문학) 중에서 명확히 상의 이름에 언급된 물리학과 화학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와 노벨상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지구과학(지질학, 기상학, 해양학)은 노벨상의 시상 분야에서 빠져 있다.[14] 다만, 지질학의 세부 분야인 지구물리학, 지구화학 그리고 기상학의 세부 분야인 대기역학, 대기화학, 해양학의 세부 분야인 해양물리학 분야의 업적으로 물리학상이나 화학상을 수상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202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중 2명은 기상학자인데, 이들의 연구업적은 대기역학에 속하는 것이었고, 기상학 연구에 노벨상이 수여된 건 2021년이 최초였다. 한편 지구온난화·환경에 관련된 인물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전례도 존재한다.
- 천문학은 물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천문학 분야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물리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있으며 2019년을 비롯하여 이미 수상한 사례가 수차례 존재한다.[15]
- 생물학은 노벨생리학·의학상에서 말하는 생리학이 사실상 생물학의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16] 시상 분야에 속한다.
- 생태학의 경우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기는 하나, 생리학에는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생태학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는 동물행동학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례가 있다. 즉, 꿀벌의 춤을 연구한 카를 폰 프리슈와 거위와 오리의 각인[17]을 밝혀낸 콘라트 로렌츠, 리처드 도킨스의 스승인 조류학자 겸 동물행동학자 니콜라스 틴베르헌 등이 1973년에 동물행동학에 대한 연구로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 식물학의 경우엔, 먼저 리하르트 마르틴 빌슈테터가 엽록소를 비롯한 식물 색소의 연구로 191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 한스 피셔도 엽록소 연구로 1930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고 1947년엔 로버트 로빈슨 경이 알칼로이드 연구로 역시 노벨화학상 수상, 옥수수 유전학에 대한 독보적 존재인 여성 생물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이 1983년도에 '이동성 유전 요소의 발견'에 관한 식물유전학 연구로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단순히 기초과학 업적만 수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노벨은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에게 수여하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응용과학은 물론 발명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18] 발명이 업적인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수상자는 꽤나 많고, 특히 발명과는 제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노벨생리학·의학상 역시, MRI(자기공명단층촬영장치)[19] 개발로 수상하거나, CT(컴퓨터단층촬영)[20]를 개발한 전기공학자가 수상했다.
수학상은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노벨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라는 수학자가 노벨 수학상을 받는 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설[21], 미타그레플레르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그가 워낙 수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보니 수상의 공정성이 떨어질까봐 제외했다는 설, 흠모했던 여인이 수학자를 선택하는 바람에 사랑이 쫑나서라는 설 등이었는데 모두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 (관련 반론) 가장 신빙성 있는 설은 공학도 출신 실업가였던 노벨이 수학은 실용학문이 아니라서 노벨상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들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수학자들이 앞에서 언급된 소문들을 꾸며냈다는 해석도 있다. 물론 수학과 관련된 상은 필즈상, 아벨상, 울프상 등 여럿 존재하는데 이 상의 권위는 노벨상에 준할 정도로 높다. 한편 노벨상을 받은 수학자가 없지는 않는데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시, 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 등이 있다.
3.2. 수상자
국적은 일체 불문하고 가장 적합한 수상자를 선정한다. 한 상에 대해서 최소 1명~최대 3명에게 수상하고,[22] 개인에게 주는 상이지만 평화상만은 단체도 받을 수 있다.또한 살아있는 사람만이 수상할 수 있다.[23] 다만, 예외적으로 사후 수상한 사례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1961년 콩고 내전을 중재하러 가던 도중에 북로디지아(현재 잠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제2대 UN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가 있다. 최근에는 2011년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 가운데 한 명인 랠프 스타인먼 박사가 수상자 발표 3일 전에 사망한 걸 노벨위원회가 알지 못하고 명단에 올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으나 수상자 목록은 그대로 유지시키기로 했는데, 이 때의 이유는 수상자 명단에서 사망자를 제외하는 것은 수상자가 이미 사망한 사실을 심사위원회가 확인한 때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심사가 끝나고 수상자가 결정된 이후 사망 확인은 수상자 변동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판단.# 그래서 수상자로 확정된 사람이 시상식이 오기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도 그 고인에게 상은 수여된다.
1년 이내에 상을 받지 않으면 수상을 거절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상자는 6개월 이내에 수락 강연을 해야 한다. 즉, 노벨상 시상일이 매년 12월 10일이므로 다음해 6월 10일까지가 기한을 주고 있다. 수락 강연을 하지 않으면 상금이 수여되지 않는다. 강연 형태는 정해진 게 없으므로 일반적인 형태의 강연은 물론이고, 연설, 동영상이나 녹음, 공연, 노래 등의 형태도 가능하다고 한다.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누가 후보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데 노벨상 최종 후보자와 수상 과정에 대한 정보는 무조건 50년이 지난 후 공개 여부 적합성 심사를 거친 다음에 공개 가능하다. 흔히 언론에서 누가 후보라 카더라는 영국의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의 배당률을 인용한 것이다.[24] 또한 후보는 선정자를 정해서 투표하는 게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올해는 누가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적어내는 형식으로 결정된다. 2011년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수상이 발표되기 직전 래드브록스에서 그의 배당률이 급격히 떨어져 수상자 정보가 유출됐다는 의혹도 있었으나 의혹이 제기된 직후 스웨덴 검찰이 수사에 나설 정도로 후보나 수상자 정보에 대해서는 철통 보안이 이뤄지고 있다.
수상자를 발표할 때는 사진이 아니라 초상화를 그려서 발표한다. 201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그림을 도맡는 사람은 스웨덴의 일러스트레이터 니클라스 엘메헤드(Niklas Elmehed). 그림 재료는 검은색 아크릴과 금박뿐이다. 보통 그림은 수상 발표 직전이 되어서야 그린다.
3.2.1. 수상자의 국적
노벨상 수상자의 공식 기록에는 국적/인종을 딱히 적지 않고, 수상자의 출생지와 (사망했을 경우) 사망지만 기록한다. 애초에 국적을 고려하지 않고 수상자를 선정하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이 있는데다 한편으로는 수상자의 국적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국가마다 국적을 결정하는 원칙이 속지주의/속인주의부터 시작해서 제각기 다르고, 수상자가 활동 기간 동안 국적이 바뀌는 사례도 빈번하다. 이중국적, 미승인국 문제, 수상자 본인의 국가 정체성, 종주국-식민지 관계 문제까지 들어가면 복잡해 진다.[25]- 이 출생지의 원칙 때문에 한국이 출생지로 등록된 한국인이 아닌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 해양 엔지니어로 부산세관에서 근무했던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콩, 누에를 재배하던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1904년 부산에서 태어난 찰스 피더슨이라는 미국인이 그 예이다. 8살때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후 1922년에 데이턴 대학교, MIT를 거친 다음 42년간 연구에 전념하다가, 1987년 노벨화학상을 받고 뉴저지주에서 사망했다.[26]
- 영토 변경으로 인해 출생지가 속한 국가가 달라진 경우에는 당시 해당 지역의 지명과 해당 지역을 통치한 국가의 명칭을 먼저 기재하고 현재의 지명과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를 괄호로 병기한다.[27] 가령 마리 퀴리[28]는 출생지를 Warsaw, Russian Empire (now Poland)로 표기하고, 출생 당시에는 독일 제국령이었지만 현재는 프랑스 영토인 스트라스부르가 고향인 한스 베테의 경우는 출생지를 Strassburg[29] (now Strasbourg), Germany (now France)로 표기한다.
- 위 찰스 피더슨 역시 1904년은 아직 대한제국이 있던 시기이므로 'Pusan, Korea (now South Korea)'라고 적혀 있다. 만약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수상했다면 Japan Empire (now South Korea)로 표기했을 것이다.[30] 참고로 한강 작가 역시 Republic of Korea가 아니라 South Korea를 사용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노벨상의 공식적인 국가별 집계 기록 같은 건 없다. 노벨상 수상 개수를 놓고 국가간 묘한 알력다툼이 있으며 세계 각지의 여러 매체들이 국가별 수상 통계를 집계하지만 이는 전부 노벨위원회가 공인하지 않는 비공식 기록이다. 노벨상 수상자의 국적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므로 수상자의 기록을 특정 국가 집계에 포함하면 그 국가 국적임을 공인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간혹 출생지를 기록한다는 점을 잘못 이해하여 출생지 기준으로 집계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노벨위원회는 어떠한 국적 또는 지역별 통계를 내지 않는다.
다만 어쨌거나 비공식적으로는 많이 집계되는 편이며, 어찌보면 IOC는 공식 집계를 하지 않지만 전 세계 매체들이 집계를 내는 올림픽 메달 순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비공식 통계에서의 국적은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으로 인식되는지를 따라가는 편이다. 예를 들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수상 당시 스위스인이었지만 보통은 독일 물리학자로 인식되므로 독일 수상 집계에 포함된다. 마더 테레사처럼 국적 논란이 심한 수상자는 매체마다 다르게 잡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그래서 공식 집계를 따로 안하는 것이다.
3.3. 수상자 발표
수상자들은 시상식 약 두 달 전인 10월의 첫 번째 월요일을 기점으로 평일마다 하나씩 월요일 생리의학상-화요일 물리학상-수요일 화학상-목요일 문학상(이상 스톡홀름)-금요일 평화상(오슬로)-토요일 경제학상(스톡홀름)의 순서대로 현지 기준 오전 11시~오후 1시 사이[31]에 공식적으로 발표되며 유튜브로 생중계 및 녹화 업로드된다.# 당연하지만, 한국의 공휴일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추석 연휴, 개천절이나 한글날에 발표할 수도 있다.3.4. 시상식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톡홀름 콘서트홀. 스웨덴 국왕이 직접 수여한다. |
매년 12월 10일, 노벨의 기일에 시상한다. 평화상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식이 열리며, 나머지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다. 노벨이 살던 당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병합된 상태였기에 노벨 사후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분리되며 평화상만이 노르웨이에서 시상식을 열게 된 것. 드레스 코드가 엄격한데, 남성은 연미복, 여성은 이브닝 드레스를 입는 게 원칙이다. 단, 자국의 전통의상을 입는 것도 가능하며, 신념에 따라 종교의상이나 재활용 의상 같은 특수한 의상도 허용된다.사례 수상자들은 스웨덴/노르웨이 국왕에게 메달과 상패를 수여받는다.
시상식이 끝나면 기념 만찬이 열리며 스웨덴에선 TV로 중계된다. 수상자들은 왕과 왕비를 대면하는 자리를 가지며, 왕은 대화마다 먼저 말을 건낼 특권이 있다.
12월 11일에는 수상자들이 스톡홀름 콘서트 홀에 모여 각자의 연구 성과와 앞으로의 발전에 대해 토론하는 "Nobel Minds"가 있으며 이 역시 TV로 중계된다. 이 자리는 당해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데 모이는 유일한 기회라는 의의가 있다. 문학상 수상자는 토론회에 참석할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공식적인 자리가 끝나면 수상자들은 각자의 수상 분야 주관처에서 여는 성녀 루치아 축일(12월 13일) 행사에 참석하게 된다. 이 행사는 시상식과 만찬에 비하면 많이 풀린 분위기이다.
모든 행사가 완료되면 수상자들은 (공식 행사가 아니고 통상 이런 과정을 대부분의 수상자가 거치는데) 고국으로 돌아가서 노벨상 수상 강연을 하고 정부, 기업, 학계 등 각계각층에서 몰려오는 초청을 받으며 인류 학문과 평화 발전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살게 된다.
2020년에는 코로나 19 유행으로 시상식과 연회 등 상기의 행사들이 모두 취소되면서 TV 중계로 대체했고 수상자들은 각국 주재 스웨덴 대사관이나 근무 기관에서 상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노르웨이에서 시상하는 평화상 역시 시상 행사 규모가 대폭 축소되고 연회는 열리지 않아 역시 온라인 시상으로 진행되었다. 관련 기사 2021년에는 상황이 많이 좋아진 관계로 다시 오프라인 시상으로 돌아갔다.
3.5. 메달
노벨물리학상 메달 | 노벨생리학·의학상 메달 |
노벨화학상 메달[32] | 노벨문학상 메달 |
노벨평화상 메달 | 노벨경제학상 메달 |
노벨상 메달은 1902년부터 2010년까지 스웨덴 에스킬스투나에 있는 스웨덴 화폐제작소(Myntverket, Swedish Mint)[33]에서 제작되었다. 그러나 2011년 회사가 없어지면서, 이 회사에서 만들던 스웨덴 노벨상 메달을 2011년에는 노벨평화상 메달을 만들던 노르웨이의 Det Norske Myntverket (Mint of Norway)에서 함께 만들고 있다. 2012년 5월부터는 노벨상 메달을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Svenska Medalj AB라는 회사에서 만들기로 계약을 했고, 이 회사에서 노벨평화상을 제외한 모든 노벨상 메달을 만든다.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노벨생리학·의학상, 노벨문학상 메달의 경우에는 뒷면에 수상자의 이름을 새기는 반면, 노벨평화상과 노벨경제학상 메달은 수상자의 이름을 테두리에 새긴다. 또한 윗 사진과 같이, 과학 분야 상 및 문학상는 전면 모양이 다 동일하지만 평화상과 경제학상은 나머지와 다르다.
3.6. 상금
아무리 노벨이 많은 돈을 남겼다지만 상금을 계속 지급하기 때문에 그 유산이 영원할 수는 없다. 따라서 노벨재단에서는 노벨의 유산을 토대로 여러 사업[34]을 진행하고 있다. 그 덕분에 노벨상 위원회는 지속적으로 투자를 하여 상금 줄 예산을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1949년에 인당 지급하는 상금을 한번 줄였다가 그 이후 지속적으로 상금을 높여서 인당 140만 달러(2023년 기준으로 약 18억 1천 3백만 원)까지 지급했으며 2012년 주식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안정적인 상금 수급이 어려워지자 다시 인당 110만 달러로 줄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35] 현재는 1,100만 스웨덴 크로나, 115만 달러 (2023년 기준으로 약 14억 8,925만 원)정도를 지급하고 있다.노벨상 상금은 대한민국 국적자가 받으면 소득세법 시행령 18조 2항[36]에 따라 세금없이 실수령할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은 노벨상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으나 스웨덴 중앙은행이 외국 정부 내지는 기타 외국의 단체에 포함되기에 마찬가지다. # 노벨상의 권위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37]
3.7. 각국 수상 현황
자세한 내용은 노벨상/각국 수상 현황 문서 참고하십시오.4. 대한민국의 분야별 현황
자세한 내용은 노벨상/대한민국의 분야별 현황 문서 참고하십시오.5. 관련 상
- 이공 계열 분야[38]
- 인문사회 분야
- 템플턴상 - 존 템플턴 재단에서 주관하는 종교상. 일명 종교학계의 노벨상.
- 요한 쉬테 정치학상: 스웨덴 요한 쉬테 재단에서 주관하는 정치학상. 일명 정치학계의 노벨상.
- 예술 분야
- 폴라음악상 - 스웨덴 왕립음악원[43]에서 주관하는 음악상. 일명 음악계의 노벨상.
-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 서양음악 작곡, 지휘, 연주 분야에서 시상하는 상. 대중음악도 포괄하는 폴라음악상에 비하면 범용성은 상대적으로 좁은 편이나,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상당히 권위를 가지는 상이며, 클래식 음악의 노벨상이라고 자주 언급되어진다.
- 휴고상 - 세계 SF 회의에서 주관하는 사이언스 픽션상. 일명 SF계의 노벨상.
- 황금곰상, 황금사자상, 황금종려상 - 3대 영화제에서의 최고 상. 일명 영화계의 노벨상.
- 안데르센상 - 덴마크의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아동문학상. 일명 아동문학계의 노벨상.
- 대상 지역이 한정적인 상
- 기타 버금가는 국가 후원 상[44]
6. 기록
노벨상 다회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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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관왕에 등극한 단체
-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 평화상 3회: 제1차 세계 대전 구호 업적, 제2차 세계 대전 구호 업적, 전 세계 재난 구호 업적으로 각각 1917년, 1944년, 1963년에 수상한 최다 수상 단체이다. ICRC의 창설 100주년을 맞은 1963년에는 ICRC의 산하 단체인 국제적십자사·적신월사연맹도 함께 받았다. 또한 1901년에 ICRC의 창설자인 앙리 뒤낭이 적십자 창립과 제네바 협약에 대한 공로로 초대 노벨평화상을 수상해서 실질적으로는 4번 받은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ICRC에서는 본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할 때 창립자 뒤낭의 수상도 포함한다.
- 유엔난민기구 (UNHCR) - 평화상 2회: 1954년에는 난민들에 대한 정지적 법적 보호, 1981년에는 난민들의 이주와 정착 및 처우 개선에 이바지한 공로로 수상했다.
- 2관왕에 등극한 사람
- 라이너스 폴링(미국) - 화학상, 평화상: 세계에서 유일하게 과학상과 평화상을 모두 받은 인물이다.
문이과 통합반핵 운동 때문에 당시 매카시즘 광풍이 불고 있던 미국 정부에 출국 금지 조치를 받는 바람에 DNA의 X선 사진을 보지 못했고 DNA의 잘못된 구조를 내놓는 바람에 왓슨-크릭에게 생리의학상을 내줬다. 최상의 시나리오의 경우 3회 수상까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타 복수 수상자와 달리 그는 2회 모두 단독 수상했다. - 마리 퀴리(프랑스) - 물리학상, 화학상: 사상 최초로 2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자 유일하게 여러 분야의 과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남편 피에르 퀴리 역시 1903년에 그녀와 공동으로 물리학상을 받았고, 첫째 딸과 사위는 1935년에 화학상을 받았으며, 둘째 사위는 1965년에 유니세프를 대표하여 평화상을 받았다. 둘째 딸인 이브는 이에 대해 "저는 우리 집안의 수치입니다."라는 농담을 했는데, 이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그리고 자신의 남편까지도 노벨상을 탔는데 자신만 못 탔다는 이유를 들었다. 사실 그녀도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유명 피아니스트로서 여러 상과 훈장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가족들 모두가 능력자.
- 존 바딘(미국) - 물리학상 2회: 1956년에는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의 발명, 1972년에는 초전도 현상의 연구 공로로 수상했다.
- 프레더릭 생어(영국) - 화학상 2회 : 1958년에는 인슐린의 염기서열, 1980년에는 핵산의 염기 서열 해독에 대한 연구 공로로 수상했다.
- 배리 샤플리스(미국) - 화학상 2회 : 2001년에는 비대칭 촉매된 산화 반응, 2022년에는 클릭 화학으로 수상했다.
- 가족(투톱) 수상
- 부부
-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 부부(1903년 물리학상 투톱 수상)
-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이렌 졸리오퀴리 부부(1935년 화학상 투톱 수상) - 위의 퀴리 부부의 사위·딸이다.
- 칼 퍼디낸드 코리·거티 테리사 코리 부부 (1947년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 군나르 뮈르달(1974년 노벨경제학상)와 알바 뮈르달(1982년 노벨평화상) 부부
- 에드바르드 모세르·마이브리트 모세르 부부(2014년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 부자(父子)
- 조지프 존 톰슨 (아버지, 1906년 물리학상)과 조지 패짓 톰슨(아들, 1937년 물리학상)
- 윌리엄 헨리 브래그(아버지)와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아들), 1915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 : 수상 당시 아들 브래그의 나이는 불과 25세로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노벨평화상을 탈 때까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였다. 그리고 현재까지 유일한 부자 공동 수상자로, 과학분야에서는 지금도 최연소 수상자로 등재되어 있다.
- 닐스 보어(아버지, 1922년 물리학상)와 오게 닐스 보어(아들, 1975년 물리학상)
- 칼 만네 예오리 시그반(아버지, 1924년 물리학상)과 카이 만네 뵈리에 시그반(아들, 1981년 물리학상)
- 한스 폰 오일러켈핀 (아버지, 1929년 화학상)과 울프 폰 오일러(아들, 1970년 생리의학상)
- 아서 콘버그(아버지, 1959년 생리의학상), 로저 콘버그(아들, 2006년 화학상)
- 수네 베리스트룀(아버지, 1982년 생리의학상), 스반테 페보(아들, 2022년 생리의학상)[47]
- 부녀(父女)
- 모녀(母女)
- 형제
- 숙질
- 크리스티아네 뉘슬라인폴하르트(이모, 1995년 생리의학상), 베냐민 리스트(조카, 2021년 화학상)
- 최고령/최연소 수상자[48]
- 최고령 수상자: 존 B. 구디너프 (97세 4개월 17일, 2019년 화학상)
- 최연소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 (17세 5개월 1일, 2014년 평화상)
- 수상을 거부한 사람들[49]
- 장폴 사르트르 - 1964년 문학상. "노벨상이 너무 서구쪽에 치우쳐져 있고 동양은 별로 받지 못했다. 또한 노벨상을 받으면 나의 행동과 지지 발언이 노벨상의 권위로 대체되어 버리기 때문에 수상을 거절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면서 노벨상위원회에 후보 명단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고 만약 수여된다고 하더라도 상을 받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위원회는 그를 그해의 수상자로 뽑았다. 이에 대해 당시의 노벨상 위원이었던 라르스 일렌스텐(Lars Gyllensten)이 저술한 회고록 「Minnen, bara minnen」의 주장에 따르면, 사르트르는 11년 후인 1975년에 변호사를 통해 노벨상위원회에 뒤늦게나마 상금만이라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당연히 위원회 측은 거절했다고 한다. # 그러나 1975년에 사르트르는 책 인세와 강연 등으로 이미 상금이 아쉽지 않을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었고 건강이 나빠지긴 했지만 꾸준히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므로, 그런 그가 자신이 말한 것을 모두 내팽개치고 갑자기 상금을 타고자 연락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50]
- 레득토 - 1973년 평화상. 북베트남 외교부장. 베트남 전쟁 종전에 기여한 공로로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공동 선정되었으나 아직 조국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 수상을 거부하려다 결국 받은 사람들
- 조지 버나드 쇼 - 1925년 문학상. 본인은 처음엔 받지 않으려고 했다가 받은 뒤 '인간의 탈을 쓴 악마만이 노벨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고 비꼬았다. 상금을 기부해 달라, 입양해 달라 같은 구걸에 가까운 편지들을 계속 받다보니 쇼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 리처드 파인만 - 1965년 물리학상. 유명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수상을 거부하려 했으나 "그런 짓을 하면 더 유명해질걸요."라는 기자의 말을 듣고 받기로 결정했다.
- 밥 딜런 - 2016년 문학상. 가수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수상자 발표가 난 이후로 한동안 그는 전혀 이에 대해서 연락을 받지도 않았고, 별다른 의견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다. 그러다가 침묵을 깨고 노벨상을 수락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본인이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며 주스웨덴 미국 대사가 참석해 밥 딜런의 수락 연설문을 대독한 다음 노벨상을 대리 수상했다.
- 수상을 거부ㆍ저지당했으나 결국 받은 사람들
- 리하르트 요한 쿤 - 1938년 화학상
- 아돌프 프리드리히 요한 부테난트 - 1939년 화학상
- 게르하르트 도마크 - 1939년 생리 · 의학상
- 나치 독일 정부는 1935년 평화상 수상자로 카를 폰 오시에츠키를 선정한 것에 대해 강력히 비난하면서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위의 사람들은 상을 받고 싶어도 당시에는 받을 수 없었다. 물론 이 금지령은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해제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1946년에 상을 받았다.
- 사실은 1944년 화학상 수상자 오토 한도 여기 들어갈 뻔했다. 노벨위원회가 또 독일인을 선정한 걸 왕립학술원에서는 난감해하면서 공식 발표를 한 해 미루기로 했고, 1년 후 나치가 패망하자 "이제 독일인도 상 받을 수 있다!"라는 상징으로 그제서야 수여했다. 발표 자체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거부당한"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1958년 문학상. 닥터 지바고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러시아 혁명을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소련 정부와 작가 동맹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자 수상을 거부했다. 하지만 노벨상 주최 측에서는 이를 거부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아서 수상 보류로 남겨 두었다. 결국 그의 사후 소련에서도 닥터 지바고가 출판되는 등 그 업적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고 난 뒤 그의 아들이 대리 수상을 했다. 고로 받긴 받았다.
- 수상을 거부·저지당했으며 결국 받지 못한 사람들
- 카를 폰 오시에츠키 - 1935년 평화상. 선정 당시 나치 독일 정부에 의해 투옥 중이었던 터라 수상이 불가능했으며, 결국 상을 받지 못하고 1938년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 류샤오보 - 2010년 평화상.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중국 정부에 의해 수상을 거부당했다. 심지어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가족들도 가택연금 조치하여 수상하지 못하게 막았다. 노벨위원회는 그를 위해 마련된 빈 의자에 공석으로 직접 상을 수여함으로써 중국 정부의 독재적 행태에 비판을 가했다. 이렇게 수상을 강제로 거부당하고 빈 의자에 수상을 해준 사례는 193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나치 독일 시대의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노르웨이산 연어 수입을 금지하는 경제보복을 했다.
- 성비
분야 남자 여자 성비[51] 평화상 91 18 5.05:1 문학상 102 17 6.00:1 생리학·의학상 212 12 17.67:1 화학상 180 8 22.50:1 물리학상 215 4 53.75:1 경제학상 87 2 43.50:1 전체 887 61 14.54:1
7. 논란
노벨상은 모든 나라에 공정한 것이 아니라 친서방권에 속한 국가들이 더 받기 쉬웠다는 주장이 있다. 그 예를 들어 냉전 기간이었던 1950년 ~ 1990년 기간 사이에 공산권 인물이 수상한 노벨상과 미국, 유럽 등 친서방권의 수상을 비교하면 제1세계가 수십 배 더 많다. 아무리 제2세계가 상대적으로 열세였다지만, 상식적으로 정말로 실제 각종 과학 발전이 노벨상 수상 횟수에 비례해 수십 배까지 차이났다면 두 세력의 대결 구도란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하고, 결국 어느 정도는 과학 연구 시설, 자금 문제, 홍보 등 여러 가지로 서방 진영에 속한 출신 인물들에 당연히 유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그러나 노벨상 수상 횟수와 세력 간 대결구도는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 애초에 노벨상을 수상한 정도의 발명 및 발견은 해당 국가가 온전히 독점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세계 각국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간다. 오히려 발명한 나라와 그걸로 돈 버는 나라가 따로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때문에 어느 한쪽이 노벨상 100개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이 노벨상 1개를 가지고 있어도 군사,정치적으로 대결구도는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현재 중국의 노벨상 수상자는 4명,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는 390명에 육박하지만 두 세력은 현재 G2로서 얼마든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미국과 거의 대등하게 대결구도를 벌이는데 노벨상 수상 횟수는 훨씬 적으니 노벨상 선정이 중국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평화상이나 문학상은 일부러 좀 더 지역 안배/배려를 하는 경향이 있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평화상은 다른 노벨상들과는 달리 논란이 있는 상이다. 근본적으로 '평화'라는 주제로 상을 주는 것은 각 국가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다른 노벨상과는 달리 수상자의 업적의 평가가 각 구성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문학상의 경우, 실제로 동아시아 지역의 문학상의 경우 10년 정도 주기로 준다는 속설도 있다. 또한 문학상도 국적과 사용 언어에 따라 불리한 점이 있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동의가 있는 편이다. 한편, 작가의 국적이나 정치적 성향을 문제삼아 상을 안 주는 경우도 있는데 1회의 최유력 후보였던 톨스토이는 스웨덴과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인 러시아인에 기독교적 무정부주의를 표방했다는 이유로 탈락했고, 남미의 대문호 보르헤스는 파시스트와 독재 정권을 지지했다는 논란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다.
이 외에 성비불균형이 심하다는 점도 비판을 받고 있다. 과학사회가 워낙 남초인 까닭도 있지만 실제로 노벨상이 만들어졌을 때 당시와 그 이후에도 여성차별이 만연했다.[52]
게다가 2018년에는 노벨문학상의 심사를 담당하는 스웨덴 학술원의 종신 위원 중 한 명인 카타리나 프로스텐손의 남편이자 학술원과 끈끈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던 장클로드 아르노가 여성 18명을 성폭행한 의혹을 받은 것으로 학술원 파문이 시작되었으며,[53] 학술원의 미온적 대응에 항의한 종신위원들이 여럿 사퇴했다. 이로 인해 학술원이 내부 심사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마비되어 문학상 시상이 취소되는 대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관련 기사 시상 취소는 제2차 세계 대전 같은 전 인류의 위기상황에서나 일어나던 일인데, 이를 성추문 때문에 일으켜버리는 추태를 보여주었다. 다만 수상자 선정은 해뒀는지 2019년에 공동 수상하는 식으로 공란은 면했다.
8. 기타
- 수상자 발표는 매년 10월의 첫째 주에 이루어진다. 월요일의 생리학/의학상을 시작으로, 화요일에 물리학상, 수요일은 화학상을 발표하고, 이후 목요일에 문학상, 금요일은 평화상, 끝으로 그 다음주 월요일에 경제학상을 차례로 발표하는 방식이다.
전반부는 이공 계열, 후반부는 인문사회 계열발표 시각은 스웨덴(평화상은 노르웨이) 현지 기준으로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걸친다. 한국 시각으로 저녁 6~8시에 해당된다.[54] 물론 유튜브 생중계도 제공한다.
- 수상자 발표는 먼저 노벨상 위원회의 자국어에 해당하는 스웨덴어로 말하고, 뒤이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어로 말하는 방식으로 한다.[55] 다만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에서 발표하는 평화상은 곧바로 영어로 수상자를 발표한다.
- 특기할 사항으로, 평균수명이 증가하면서 80대 수상자가 최고령 축에 들어갔던 과거와는 달리, 2010년대 이후로는 90대 이상 수상자들도 속속히 나오고 있다. 여기에 수상자들의 연령대도 상승하여 대부분 50대 ~ 60대 이상인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 노벨상 수상자 발표 직전에는 수상자에게 연락해 알려주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철저히 비밀로 하다 보니 전화를 받고 장난 전화로 의심한 수상자는 약과고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스웨덴에 노벨상이랑 이름이 비슷한 무슨 상이 있구나 하고 생각한 수상자나 시차로 인해 새벽에 전화를 받고 왜 자는데 깨우냐고 역정을 낸 사람, '무슨 몰카 찍는 건가' 착각한 사람도 있다.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압둘라자크 구르나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국인 소설가 한강도 처음 전화를 받고는 "보이스피싱인가...?"하고 오해했다고 한다.# [56]
- 1965년에 학술인용분석 및 과학계량학의 기초를 닦은 유진 가필드(E.Garfield)는 초기 노벨상 수상자들이 동료 연구자들에 비해 5배 더 많은 논문을 출판했고, 피인용수는 30~50배 가량 더 높으며, 그 분야에서의 피인용수 상위 0.1%에 속하는 걸작급의 논문을 한 편 이상 저술한 바 있음을 발견하였다. 오늘날에도 2,0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의 저자들을 중심으로 노벨상 수상을 예측하기 위한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
- 평화상과 문학상 외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상당수는 민간기업이 아닌 대학 소속의 학자들이지만, 벨 연구소와 IBM이 민간 기업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계속 배출해오고 있다. 2020년 기준으로 IBM 소속의 노벨상 수상자는 6명이며, 이들의 업적은 하나같이 현대 과학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한편으로 민간기업에서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 중 한 사람인 시마즈 제작소에 소속된 다나카 고이치인데 그는 과학 분야 모든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유일하게 학사 학력으로 수상했다.
- 2020.01.11~2020.05.31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서 노벨상 특별전시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 다만 코로나19 바이러스 범유행의 여파로 생각만큼 많이 다녀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보면, 젊은 시절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수학자 존 내시에게 노벨상(경제학상)을 줄 것인가를 두고서 미리 존 내시를 찾아가서 사전 인터뷰 혹은 사정청취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슨 얘기인가 하니, 후보의 인격이나 정상적인 판단력 등이 실은 고려대상이라는 것이다. 단 어디까지나 인용 사항에 불과하고 업적이 지대하면 인성이 문제있어도 상은 주는 것 같다. (프리츠 하버 문서를 참조)
[평화상] 노벨평화상 한정.[2] 괄호 안은 최초 시상년도.[3] 여러 왕립 아카데미 중의 하나이나 과학과 달리 공식명칭은 Svenska Akademien로 왕립의 의미인 Kungliga(Royal)가 없다.[4] 언론에서는 보통 ‘스웨덴 한림원’이 수상자를 결정했다고 보도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며 위의 설명처럼 분야마다 수상자를 선정하는 기관이 다르다. '스웨덴 한림원'은 '스웨덴 아카데미'를 지칭하는 말이며, 또한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를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이라고 옮긴다. 그래서인지 이를 분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으로 보인다.[5] 젊은 시절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가 공장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후에는 블루 오션인 석유 사업에 뛰어들어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브라노벨(Branobel)이라는 석유 회사를 설립했다. 브라노벨은 한때 전세계 석유 생산량의 50%를 차지했다고 한다.[6] 노벨은 본래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강력한 무기가 있으면 오히려 전쟁이 줄어들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상무기가 될 뿐이었다.[7] 19세기 말에는 엄청난 돈이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국내 방송에서 현재 값어치를 원화로 추정했더니 약 2,215억 원이라고 한다.[8] 반평생 넘게 독신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기에 노벨의 직손은 없었다.[9] 스웨덴의 화폐인 스웨덴 크로나를 조폐 및 발행하고 있다.[10] 그래서 노벨경제학상은 노벨재단에서 수상하는 상이 아니므로 노벨 재단에서 상금을 주지는 않는다.[11] 예: Nobel Prize in physics[12] 게다가 노벨이 노벨상에 대한 유언을 남길 당시에는 아직 경제학이 체계적인 분과 학문으로 발전하기 전이었고 때문에 경제학을 시상 분야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 여러모로 곤란했다. 설령 노벨의 생전에 경제학이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으로 성장해서 존재하고 있었더라도 노벨의 관심사를 따진다면 경제학을 시상 분야로 지정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13]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 시상되는 노벨상의 정식 명칭은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 대한 노벨상)인데, 이에 대한 한국어 번역은 <노벨생리학 또는 의학상>, <노벨생리학 및 의학상>, <노벨생리학·의학상>, <노벨생리의학상>, <노벨의학상> 등 각양각색이다. 한편 최근 언론에서는 노벨의학상이라는 용어보다는 노벨생리의학상이라는 용어를 주로 쓰는 편인데, 이 용어 역시 일반인들로서는 "<생리의학>이라는 의학 분야가 있나보다. 그리고 그 분야에 대한 상인가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 이 상의 시상 분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번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14] 더욱이 지구과학 분야는 수학의 필즈상이나 아벨상처럼 노벨상과 동급의 권위를 가진 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구과학이 노벨상 시상 분야에서 빠져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특히 지질학은 지구과학의 근본 학문으로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학 등에 비해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는 분야이기에 권위있는 상을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게 나오고 있다.[15] 또한 천체물리학도 물리학의 한 분야이지만, 천문학의 한 분야이기도 하므로, 천체물리학 관련 업적으로 인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은 천문학 분야의 업적으로 수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16] 노벨이 유언을 남길 당시 생리학은 생물학의 여러 분야를 통칭하는 용어였다. 이에 대해서는 노벨생리학·의학상 문서로.[17] 태어나서 처음 본 움직이는 물체를 어미로 인식하고 따르는 현상[18] 심지어 과학분야의 경우 초창기에는 실용과학에 더 비중을 두었다. 특히 노벨물리학상은 초창기엔 실험물리학자나 발명가가 수상했으며 1918년 막스 플랑크가 양자론으로 상을 받기까지 이론물리학은 찬밥신세였다.[19] 2003년 노벨생리학·의학상. 폴 로터버와 피터 맨스필드[20] 1979년 노벨생리학·의학상. 앨런 코맥과 고드프리 하운스필드[21] 2018학년도 7월 전국연합학력평가 30번 지문에 이 설이 등장한다.[22] 어떨 때는 한 업적으로 4명의 공로자가 나오는 바람에 1명이 수상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3명이 상금을 나눠서 그 1명에게 주었다고 한다.[23] 노벨상을 수상할 수도 있었으나 사망한 대표적인 사례는 주기율표를 만드는 데 큰 공로를 한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제1차 세계 대전 갈리폴리 전투에서 사망한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 스티븐 호킹 등이 있다.[24] 래드브록스는 2006년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와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을 맞힌 이력이 있다.[25] 실제로 노벨상 수상자 중에는 이중국적자나 한 번 이상 국적을 바꾼 사람, 출생 국가가 식민지었던 시기에 출생하거나 활동한 사람도 여럿 있다.[26] 관련 기사[27] 독일인 수상자 중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이나 알자스-로렌같은 지역이 고향인 경우. 이런 경우에 걸리는 사람이 모두 독일인인 것은 아니다.[28] 마리가 노벨상을 수상할 당시(1903년 노벨물리학상, 1911년 노벨화학상) 국적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출신인 피에르 퀴리와 결혼을 하면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 본인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고 마리 자신이 폴란드인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폴란드는 독립 국가가 아니라 제정 러시아의 점령 하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3자의 입장인 노벨위원회가 함부로 국적을 결정하기도 어렵다.[29] '슈트라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의 독일어 명칭[30] 다만 1924년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났던 김대중은 Japan Empire (now South Korea)가 아니라 Korea (now South Korea)라고 표기 되어 있다.[31] 한국시각 저녁 6시~8시[32] 물리학상과 동일[33] 국영은 아니다. 1,000년이 넘도록 스웨덴의 주화와 노벨상 메달을 만들어 왔던 회사이다.[34] 근데 여기에는 무기회사도 있는데, 노벨이 무엇으로 돈을 벌었는지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35] 물론 노벨상만 받아도 엄청난 명예와 각계 각층의 각종 지원이 따르기 때문에 상금은 부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벨상을 딸 정도의 업적을 달성하면 과학/문학 분야는 이미 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의미가 없지만 어떤 분야던 간에 노벨상을 따기만 하면 전 세계의 온갖 명문 대학에서 제발 우리 대학 교수 좀 해달라고 러브콜이 밀려오며, 조교수나 부교수가 아닌 테뉴어를 받는 정식교수로 임용된다. 우스갯소리로 노벨상의 가장 큰 장점은 '돈 걱정 안하고 연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과학, 기술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선진국의 경우에도 기초 과학을 다루는 대다수의 교수와 연구원이 비용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관측천문학이나 전파천문학 같은 학문은 관측 장비가 대학은커녕 정부 차원에서도 제작하고 운영하기 힘들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학자들은 항상 연구비에 목말라 있는데 노벨상을 수상하면 정부, 학교, 기업의 지원이 따라오고 상대적으로 연구 분야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36] 노벨상 또는 외국정부·국제기관·국제단체 기타 외국의 단체나 기금으로부터 받는 상의 수상자가 받는 상금과 부상[37] 물론 한국에서 노벨상이 갖는 명예를 생각하면 상금은 부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의 경우 발표 후 책이 팔린 인세만으로도 이미 상금을 뛰어넘었다. 이런 부분은 다른 나라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노벨상 수상 과업 정도의 업적을 남긴 학자가 경제적으로 불안정할 경우는 거의 없는데다 연구 성과를 통해 천문학적인 수익이 창출되는 경우가 많아져서 상금보다 공인된 명예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강하다.[38] 이 이공 계열 상들은 특히 노벨상에 견줄 수 있는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다. 수상시 노벨상과 동급의 큰 영광을 누리게 된다. 세계 명문대들을 비교할 때, 노벨상과 함께 해당 대학 출신들이 이 상들을 얼마나 수상했는지도 참고가 되어 순위가 매겨질 정도다.[39] 권위는 필즈상이 제일 높긴 하지만, 40세라는 나이 제한이 있기에 수학계를 이끄는 젊은 리더들에게 준다면, 노벨상처럼 그 분야의 나이 많은 대가가 받는 상은 아벨상, 울프상에 더 가깝다. 어떻게 보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준다고 볼 수도 있다.[40] 앤드루 와일스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공로로 40세를 넘겨서 받은 (수상 당시 44세) 사례가 존재하긴 현재까지는 유일한 사례다.[41] 필즈상은 상금도 많지 않고, 40세 이하라는 조건이 달려있어 그러한 조건이 없는 아벨상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인정하는 추세다.[42] 한국인 수상자로는 이상엽 교수, 박남규 교수가 있다.[43] 노벨상처럼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스웨덴 국왕이 직접 시상한다는 상징성과 권위를 지니고 있다.[44] 노벨상과 수상 분야가 겹치는 상이다. 따라서 노벨상의 아성을 넘지는 못 하고 있다.[45] 물리, 화학에서는 노벨상 다음가는 상이고 수학에서는 필즈상, 아벨상과 함께 인정받는 상이며 의학쪽에서는 노벨상과 래스커상 다음가는 상이다.[46] 이그노벨상과 노벨상을 동시에 수상한 사람도 있다.[47] 혼외자이기 때문에 성이 다르다.[48] 날짜는 시상식이 진행되는 12월 10일 기준.[49] 당사자가 거부는 했지만 일단 공식적으로는 역대 선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니콜라 테슬라의 경우 1915년 당시 로이터 통신 주장에 따르면 토머스 에디슨과 공동으로 받을 수 있었으나 '공동으로 받을 바에는 받지 않겠다'고 밝혀 다른 물리학자들이 수상을 했다고는 하나 노벨 재단에서 "본인이 상을 받기 싫다고 해서 수상자에서 제외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강하게 부인했고 실제로 근거로 뒷받침된 바가 없다.[50] 사르트르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들은 한 사기꾼의 상금 탈취 시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51] 소수점 아래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52]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2개나 받았지만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이민자와 여성이라는 이유로 떨어졌고 거기에 더해 여성은 영원히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지금은 폐지).[53] 스웨덴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빅토리아 공주를 성추행하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명단을 외부로 유출했다는 의혹까지 있다.[54] 문학상이 가장 늦은 현지 오후 1시, 즉 한국 시각으로 밤 8시에 발표된다.[55] 이런 방식 때문에 2024년 문학상 발표에서 한강이 처음 수상자로 언급되었을 때는 스웨덴어라서 알아채지 못했다가 이후 영어로 '코리아', '한 캉'이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알아들은 이들이 많았다. 발표 당시 민음사 유튜브 채널의 생중계 반응 영상과 관련 보도.[56] 더 나아가 구르나는 아예 욕을 하며 끊을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 상대방 설득에 끊지 않고 제대로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57] 평화상을 제외한다면 특히 수상자의 해당 분야가 엄청난 강세를 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