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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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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colbgcolor=#000><colcolor=#fff>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파일:Bernard-Shaw-ILN-1911-original.jpg
19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출생 1856년 7월 26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아일랜드 섬 더블린 포토벨로
사망 1950년 11월 2일 (향년 94세)
영국 허트포드셔 주 아욧 세인트로렌스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1856~1950)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1934~50)
직업 작가, 비평가, 웅변가
장르 희극, 소설, 수필
배우자 샬롯 페인 타운센트 (1898년 ~ 1943년, 사별)
종교 무종교[1]
서명 파일:조지 버나드 쇼 서명.svg

1. 개요2. 생애3. 명언 제조기
3.1. 사례
4. 흑역사5. 평론집

[clearfix]

1. 개요


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 사회주의자.

그러나 영국계 아일랜드인(Anglo-Irish people)이어서 영국 국적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영국인으로 보기도 한다. 아일랜드(당시 아일랜드 자유국) 국적은 늘그막인 1934년에 딴 것이며, 그가 일생의 대부분을 살았고 일생을 마친 곳, 화장한 유골을 뿌린 곳까지 모두 영국이다.

2. 생애

1856년 7월 26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중산층 집안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공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그의 아버지가 곡물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고 급격히 가세가 기울게 되자, 14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부동산 중개사무소 사환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정규 교육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글들을 여러 편 쓸 정도로 그는 학교생활을 싫어했다. 하지만 성악가였던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 미술, 문학 등에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가졌고, 이 덕분에 훗날 음악평론가로까지 활동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실패로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 결국 갱생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자, 그의 어머니는 자신을 포함하여 두 딸이 성악가로서 훈련을 제대로 받기 위해 그녀의 음악 가정교사인 조지 존 반달러 리(George John Vandaleur Lee)와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쇼가 그의 어머니를 찾아 런던으로 떠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 20세가 되던 1876년이었다. 한 집에서 동거하며 생활한 음악선생 조지 리와의 실제 사이는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아버지도 아니면서 아버지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 얼마나 싫어했냐면, 이 남자의 이름 역시 '조지'여서 사람들이 자꾸 부자(父子)지간이라고 생각하자, 그 뒤로 자신의 이름을 쓸 때면 'G. 버나드 쇼' 혹은 '버나드 쇼'를 더 자주 사용할 정도였다.

런던에서 그는 대영박물관이나 도서관 등을 오가면서 그간 읽지 못한 책들을 읽고 글을 썼으며, 각종 강의와 논쟁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지식을 넓혀갔다. 그는 잠시 전화회사에 취직하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고 문필가로서의 인생을 본격 시작했다. 25세 때 그는 자신의 직업을 ‘소설작가’로 적었다. 그러나 20대 후반 썼던 소설이나 기고문들은 모두 출판을 거절당했다. 20대 동안의 계속된 실패와 좌절을 통해 그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가 사회주의자, 채식주의자, 연설가, 논객, 극작가 등으로 살아가는 데 튼실한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크게 감동받아, 1884년 페이비언 협회[2]를 설립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풍자와 기지로 가득 찬 신랄한 작품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최대 걸작인 '인간과 초인'을 써서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다. 1925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인간과 초인', '성녀 조앤'[3],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피그말리온'(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와 '피그말리온'의 원작) 등이 있다. 평생 70여 편이 넘는 희곡을 집필했는데 워낙 방대해서 영어권에서조차 전집은 사후 단 한 번만 나오고 절판되었다.

3. 명언 제조기

20세기 위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명언 제조기이자 독설가. 골 때리는 명언을 즉석에서 쏟아내곤 했다. 개중에는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꼬집는 명언도 있다.

3.1. 사례

내 언젠가 이 꼴 날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세간에 알려진 문장. 한국에서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의역된 문장으로 일단은 알려져 있다. '우물쭈물'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2006년 KTF 쇼(show) 광고 캠페인에서 사용된 것이 각인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그 이전 과거부터 이미 국내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인용구로서, 생전의 성철 스님도 이것을 최고의 묘비명이라고 평하기도 했고, 법정 스님도 90년대 말 '샘터' 잡지에 기고하던 자신의 수필에 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소개하기도 했다.[4] 이 묘비명은 이기호의 단편집 제목으로 재활용되기도 하였다. 정확한 이기호 소설집의 제목이자, 해당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제목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리고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캐릭터 이방지가 18화에서 무휼 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 대사를 쳤다.

일단 1985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의 칼럼에서 정확히 해당 해석이 발견되며 #, 80년대의 다른 다양한 신문 기사에서도 여러 번 발견된다. 이후 8~90년대에 걸쳐 다양한 저작물이나 매체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국내에서는 최소 80년대 중반 이전부터 이미 이 해석이 널리 퍼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당 문장은 "이만큼 오래 살았으면 이렇게 되는(=죽는) 게 당연하지"로 번역하여 죽음이 별 거 있냐라는 의미에서 고인이 자신의 죽음마저도 풍자했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모든 배경을 무시하고 문장을 기계적으로 번역한다면 "내가 충분히 오래 지냈다면 이런 식의 일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도에 가깝다.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좌우지간 원문에는 '우물쭈물'에 해당하는 뉘앙스가 없는 것은 사실.[5] 우물쭈물 안 하고 열심히 산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이 아니기에 의미도 맞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언젠가 이런 꼴이 될 줄 알았지' 정도가 가장 원 뜻에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을 듯. 그런데 묘비명을 버나드 쇼 본인이 썼는지는 알 수 없다[6]

그런데 버나드 쇼는 사후 화장되어 그 재가 자신이 살던 집 '쇼스 코너(Shaw's Corner)' 정원 구석구석에 뿌려졌다. 따라서 따로 묘비를 남기지 않았고, 그나마 묘석이라 할 만한 거라고는 집 근처에 세워진 성녀 잔 다르크의 동상이 전부다. 즉 묘비명 따위를 남길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버나드 쇼의 묘비 사진이라고 떠도는 것 역시 과거의 어느 광고에 나왔던 이미지가 달랑 하나만 있고, 그 이미지 하나만 곳곳에서 복사 붙여넣기 되고 있을 뿐이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따라서 광고 제작자가 임의로 만들어 낸 묘비 이미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영미권에서도 이 묘비명은 버나드 쇼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여기저기에 떠돌고 있으니 더더욱 수수께끼이다.
"당신은 아주 낡고 오래된 골동품처럼 내 생명을 보전시키려고 하지만 나는 이제 글렀어. 마지막이오. 나는 죽습니다."
진짜 유언.
"애국심이란 단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우월하다고 믿는 신념이다."
"가능한 일찍 결혼하는 건 여자의 비즈니스, 가능한 늦게 결혼하는 건 남자의 비즈니스."
여자는 젊을 때(리즈 시절) 얼른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싶어하고, 남자는 본인 인생 즐기다 천천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결혼을 하고 싶어한단 뜻. 농담이기도 하고, 버나드 쇼가 살던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 없는 말이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
Q. 금요일에 결혼한 사람은 평생 불행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당연한 말이죠. 금요일이라고 예외겠습니까?[7]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8]
"남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정도의 자신감은 쓸모없다."
가장 유명한 소설가 12명을 꼽아 달라는 요청에 자기 이름을 12번 적으며 한 말. 그것도 그냥 '조지 버나드 쇼, 조지 버나드 쇼…', 이렇게 쓴 게 아니라 'G. 버나드 쇼', 'G. B. 쇼', '조지 쇼', '쇼, 조지 버나드' 이런 식으로 썼다.[9]
"아니오,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 받은 아이가 탄생할 수도 있겠지요."
세계적인 발레모던댄스 스타 이사도라 덩컨[10]이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 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근사하겠지요'라는 말에 대한 대답. 다만 쇼를 20년 이상 옆에서 지켜본 헤스캐드 피어슨이 쓴 평전에 따르면, 그냥 좀 정신이 이상한 어떤 여성이 한 말에 대꾸한 것이며 덩컨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가장 어리석은 유인원에게 말이 통하기라도 할까? 해 줄 말은 없다."
YMCA를 조직해 퇴폐문학 반대운동을 벌였던 미국의 목사이자 정치인 앤서니 컴스톡(Anthony Comstock, 1844-1915)이 쇼의 작품들을 저질이고 문제가 많다고 비난하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투로 이렇게 일축했다. 이 한 마디에 컴스톡은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하긴 당연히 창조설 믿던 양반에게 이런 독설을 날렸으니… 컴스톡은 매우 수구적이고 기독교 원리주의적 성향인 인물이어서 당대에도 적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컴스톡에게 있어 가장 저질인 범죄자는 임산부(알몸인 아기를 낳았으므로)'라는 식의 블랙 코미디로 신문 시사만화에서도 단골 조롱거리일 정도였다.
"크라우스를 처벌하자는 것은 악독한 정권을 향한 어리석은 복수심이 낳은 촌극일 뿐이다. 원작대로 제대로 연기한 것을 호평해야지, 그것을 엉터리 복수심으로 얽매는 것부터가 문제다. 그를 처벌한다면 원작을 쓴 셰익스피어부터 나치 협조죄로 처벌하고자 무덤에서 파내서 기소해야 할 것이다!"
나치 독일 치하에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역인 유태인 샤일록을 훌륭하게 연기한 배우 베르너 크라우스(Werner Johannes Krauss, 1884-1959)를 종전 후에 나치 협조로 재판에 세운 것을 비난하며 하던 말. 실제로 이 일에 전세계 연극, 영화계는 엄청난 비난을 가했다. 연합국은 물론이요, 유태인들도 옹호했을 정도. 크라우스 본인도 이에 당당하게 맞섰다. 결국 나치에 동조했다는 억지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했지만 이조차도 거센 비판을 받았으며, 유럽 연극계에서 벌금도 모금해서 대신 내 줬다. 이 사건으로 인해 크라우스는 몇 해 동안 연극 무대를 쉬어야 했지만, 이후 복귀하여 서독 연극 공연에 이바지하며 문화훈장이나 공로상도 받고 연극계의 거물로 추앙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베니스의 상인 문서에 나오듯이 크라우스는 원작의 내용대로 훌륭하게 연기했을 뿐이었다. 굳이 책임의 소재를 물을 것이라면, 그의 재능을 쓸데없이 프로파간다에 써먹은 나치 정권을 비판해야 할 일이다.
"실수하며 보낸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생보다 존경스러울 뿐만 아니라 더 유용하다."
"제도가 저절로 굴러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정치적 게으름일 뿐이다."
"술을 마시다가 반이 남은 술병을 보고 '아, 술이 반밖에 없구나'라고 말하면 비관론자, '아, 술이 반이나 남았군!'이라고 말하면 낙관론자다."

낙관론자와 비관론자의 차이에 대해 예시를 든 말. 어린이들을 위해 술을 물로 순화한 버전이 유명하다.

한 번은 윈스턴 처칠에게 이런 전보를 보낸 적이 있다.
"제 연극의 초연 때 좌석 2개를 예약했으니 친구분과 같이 오세요. 친구가 있다면 말이지요."
그러자 처칠은 이런 답장을 보냈다고.
"초연에는 참석이 불가능하니, 두 번째 공연에는 참석하겠소. 공연이 열린다면 말이오."
이 일화는 2015년 기준 고2 영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쇼의 전보야 당연히 처칠에게 "님 친구 없잖음ㅋ"하고 놀리는 것이고, 처칠의 답장은 "님 연극은 겁나 형편없어서 초연하자마자 망할걸ㅋ"이라고 받아친 것.

다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일화가 처음 알려졌을 때의 주인공들은 버나드 쇼와 처칠이 아니라, 처칠의 아들인 란돌프 처칠과 노엘 카워드(Noel Coward)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증거가 없는 풍문에 가까운 이야기라 출처도 불분명하다. 자세한 건 참조.
"존경할 만한 두 시민이 공공연하게 범할 수 있는 가장 뻔뻔하고 멍청한 짓거리."
오페레타 <제인 애니 또는 선행상>를 까면서. 독설치고는 평범(?)한 듯 싶지만, 사실 이 오페레타의 제작자가 바로 코난 도일과, <피터 팬>의 작가인 J.M. 배리이다. 심지어 이 오페레타의 완성도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대중들도 버나드 쇼의 이런 독설에 동감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미국에서 무대에 공연되었는데, 사정상 그 공연을 관람할 수 없었던 쇼가 연극의 여주인공이었던 코넬리아 스키너에게 전보를 보냈다.
"정말 훌륭했소."
독설가인 쇼에게 칭찬받을 줄은 몰랐던 코넬리아가 답례로,
"뭘요, 정말 별 것 아니에요."
쇼는 답장을 보냈다.
"당신의 연기가 아니라, 내 작품 말이오."
이에 발끈한 코넬리아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러니까요."

쇼는 문학 평론가이자 작가인 G. K. 체스터튼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마른 체구였던 쇼에 비해 체스터턴은 몹시 뚱뚱했다. 어느 날 체스터턴이 "쇼, 자네를 보면 영국이 심각한 기근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겠군."이라며 놀리자 쇼가 받아쳤다. "그리고 자네를 보면 그 원인이 자네 때문이라는 것도 알겠지." 당시 영국이 아일랜드에 가한 수탈과 탄압을 이중으로 비꼬았다. 그런데 한 가지 웃긴 것은 쇼가 체스터턴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느꼈는지 셰익스피어 숭배자들을 조롱했다. 특히 오셀로에 대해서 "피부 아래로 파고드는 인물 묘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다"고 비평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이 이미 쓴 내용을 뒤따라 썼을 때에만 진정으로 훌륭한 극작가"라고 비아냥댔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양심이 없었고, 나도 그렇다."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중에 피그말리온,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성녀 조앤은 각각 말괄량이 길들이기, 줄리우스 시저, 헨리 6세와 대립 및 비교가 되게 만들어졌다.

자신의 각본으로 만든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고 나서 쇼가 무대 인사를 하자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그 중 한 남자만이 심한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분위기가 싸해지는 가운데 쇼의 대답이 압권. "저도 저 신사분의 의견에 완벽히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 의견에 반대하는 이 수많은 관객 앞에서 우리가 뭘 어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신을 못난 관객과 함께 비하하여 에둘러 깐 것. 극장의 분위기가 반전되어 다시 업된 건 당연지사. 이 재치 넘치는 멘트는 조지 버나드 쇼를 일약 런던의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도대체 프랑스 사람들은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인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이 있고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데, 개방한 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아무도 자살하지 않다니. 만약 에펠탑이 런던에 있었으면 개시 첫 주에 사람들이 줄지어 떨어졌을 텐데."[11]
― 영국인의 우울함을 풍자하며
"침묵은 경멸을 표현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버나드 쇼는 생전에 노벨상 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상만 받고 상금 수령을 거부했다가, 결국 상금까지 수령한 희귀한 케이스가 되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노벨상을 수상하자 도움을 요청하는 수천 통의 편지들이 쇄도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당시 그는 친구인 어거스틴 해먼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상금 거부 소식이 보도된 뒤에는 상금을 거부할 정도로 부자라면 자신의 아이를 입양해 달라는 둥, 집 담보금을 갚아 달라는 둥 하는 편지들이 날아오더라.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것은 자기를 가정부로 써 달라는 두 여성의 편지였다." 그 직후 그는 상금을 수령했는데 그에게 날아온 편지들의 금액을 다 합쳐 보니 상금 총액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겪은 후에 노벨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프레드 노벨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탈을 쓴 악마만이 노벨상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1914년 1월 7일 찰스 디킨스의 팬덤인 디킨스 펠로우십 회원을 방청객으로 소설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존 재스퍼의 재판이 열리는데, 이때 배심원단장을 맡았다.

미국의 前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버나드 쇼를 영국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케네디는 버나드 쇼에게 "미국이 장차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을까요? "란 질문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버나드 쇼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럼요, 미국인들이 영어를 제대로 한다면 말입니다."
“목젖까지 공산주의에 몸을 던지세요. 만약 여러분이 스무 살에 혁명가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쉰이 넘어서는 가장 극한까지 미친 늙다리가 될 것입니다. 반면 스무 살에 이미 '사회주의 혁명론자'라면 마흔이 되어서도 시류를 쫓아갈 가망이 좀 있습니다.”
파일:조지 버나드 쇼 명언.jpg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There are two tragedies in life. One is not to get your heart's desire. The other is to get it.)[12]
사람들은 1년에 두세 번이라도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1주일에 한두 번의 생각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4. 흑역사

저는 관련 주제에 대한 문헌과 통계를 연구했어요. 어느 저명한 세균학자를 설득하여 제너가 작성한 자료를 검토하도록 하기까지 했죠. 저는 어떤 의구심도 없이, 백신 접종은 비과학적인 추악한 짓으로서 범죄 행위로 규정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 1931년 7월, 여전히 천연두 백신을 반대하는지, 접종을 받아본 적은 없는지 묻는 서신에 대한 답하며

5. 평론집

《쇼, 음악을 말하다》(이석호 역, 포노, 2021). 한국어판. 쇼의 평론집 London Music in 1888-89 as Heard by Corno di Bassetto(London: Constable, 1937), Music in London 1890-94 vol. I II III(London: Constable, 1932) 등에서 발췌하여 한국어로 옮긴 책.


[1] "George Bernard Shaw quotes on religion", ireland-calling.com[2] '페이비언(Fabian)'이란 말은 고대 로마의 장군 파비우스로부터 왔다. ‘지연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파비우스가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지구전을 펼쳐 이겼던 것처럼 ‘비록 많은 사람들이 비난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되, 일단 때가 도래하면 모든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사정없이 내리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3] 잔 다르크의 시성을 보고 그녀에 대해 쓴 희곡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 1997년에 법정 스님이 만 65세가 되었을 때 '노인 교통수당 안내문'을 받은 후, 인생의 마무리에 대해 고찰하는 수필을 샘터 잡지에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해당 문장이 인용되었다. 해당 수필은 훗날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제목의 단행본에도 실렸다.[5] 동양권에서는 영어에서 부사적으로 쓰이는 전치사의 의미를 오독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여기서는 around를 '주변을 맴돌다'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발생한 오역일 가능성이 크다. around에는 '머무르다'의 의미도 있으며, 아무리 감안을 해 줘봐도 '별 생산적인 일도 안 하고 생각 없이 그냥 살다' 정도로밖에 번역할 수 없다(hang around, sit around등의 경우가 그렇다). 한국어의 '그냥 있어' 정도의 의미를 떠올리면 될 듯. '우물쭈물'은 아니다.[6] 다만 생전의 버나드 쇼는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우유부단한 성격도 아닌 매우 독설적이고 적극적인 사회비판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런 인생을 오래 살았음에도 제국주의와 제1,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간 사회의 밑바닥을 다 본 사람으로써 자기 스스로도 가진 힘에 비해 현실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우물쭈물대다가 이런 일이 터지는 걸 막지 못했다는 자아비판+자학적 풍자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는 것.[7] 당연히 이것도 그냥 농담이다. 쇼의 결혼생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아내와 사별할 때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8] 원문은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비긴 어게인의 OST인 Lost stars에서 인용되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 '젊은이들은 젊은 게 귀중한 줄 모른다'로, 늙어서야 젊음이 중요한 줄 알게 된다며 젊음의 가치를 역설한 문장.[9] 비슷한 일화가 영국의 문학가인 서머셋 몸에게도 있다. 명작으로 꼽을 만한 100편의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에 '9권밖에 추천할 수 없소. 난 아직 9권밖에 쓰지 못했거든.'이라고 대답했다고.[10] 스페인의 배우 엘레오노라 두세가 한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다만 이사도라 던컨 설이 더 일반적. 세간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11] 에펠탑에서 첫 자살자가 발생한 것은 건설되고 나서 9년 뒤이다. 이후 실제 이 말대로 자살의 명소가 되어 프랑스에서 가장 자살자가 많은 탑이 되었다(...).[12] 오스카 와일드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13] 그는 사회주의자답게 1920년대에 레닌에 대해서도 "유럽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운 정치가(the one really interesting statesman in Europe)" 평을 남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