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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아르드리 · 아일랜드 영주 · 아일랜드 국왕 · 아일랜드 자유국 국가원수 · 아일랜드 대통령 |
<colbgcolor=#000034><colcolor=#fff> 아일랜드 제3대 대통령 아일랜드 제2대 총리 에이먼 데 벌레라 Éamon de Valera | |
본명 | 조지 데 벌레로 (George de Valero) → 에드워드 데 벌레라 (Edward de Valera) → 에이먼 데 벌레라 (Éamon de Valera)[1] |
출생 | 1882년 10월 14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사망 | 1975년 8월 28일 (향년 92세) |
아일랜드 더블린 블랙록 | |
국적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정치인, 독립운동가 |
경력 | 아일랜드 공화국 대통령 (1921~1922) 아일랜드 자유국 집행위원회 의장[2] (1932~1937) 아일랜드 총리 (1937~1948)[3] 아일랜드 총리 (1951~1954, 1957~1959) 아일랜드 대통령 (1959~1973) |
정당 | 신 페인 (1916~1922) 공화사회당 (1922~1923) 신 페인(조약반대파) (1923~1926) 피어너 팔 (1926~1975) |
학력 | 로열 유니버시티 아일랜드 |
배우자 | 시네드 데 벌레라[4](1910년 결혼, 1975년 사별) |
자녀 | 7명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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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의 정치인. 아일랜드의 제3대 대통령이자 제2대 총리.마이클 콜린스와 더불어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5], 아일랜드 자유국과 독립국 아일랜드의 총리 및 대통령을 역임했다. 아일랜드 현대사의 거물이자 국부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
2. 생애
2.1. 초기
1882년 미국 뉴욕에서 아일랜드 이주민 어머니와 스페인계(바스크 혈통)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성인 데 벌레라(de Valera, 데 발레라)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스페인어식 성이다.[6] 이 시기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1세대들은 가난을 비롯한 열악한 생활조건 탓에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데 벌레라 역시 두 살때 아버지를 여읜다.아버지를 여읜 직후 가족들과 함께 아일랜드로 돌아온 데 벌레라는 1901년에 이름을 에드워드 데 벌레라(Edward de Valera)로 고쳤고, 1904년 더블린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교사로 임용된다. 이 시기 민족주의 운동이 거세지던 아일랜드 내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아일랜드어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데 벌레라 역시 이 운동에 활발히 참가했다. 이후로는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자신의 이름인 에드워드도 아일랜드어식인 에몬(Éamon, 영어식 발음 에이먼)으로 고치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데 벌레라는 아일랜드 내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신 페인과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에 가입했고 1916년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이 일으킨 부활절 봉기에도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참가한다. 이 부활절 봉기는 영국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됐고, 패트릭 피어스를 비롯한 데 벌레라의 동지들은 대다수가 처형됐지만 데 벌레라 본인은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영국 당국이 데 벌레라를 살려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데 벌레라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점이 가장 컸다. 이 당시 1차대전은 한창 격화되고 있었고 영국은 어떻게든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여 전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시민권자를 처형했다가는 미국 내 반영감정을 대폭 증폭시킬 가능성이 컸으므로 영국은 데 벌레라를 살려둘 수 밖에 없었던 것. 더블린 주재 미국 영사관에서도 영국 측에 '데 벌레라 죽이면 재미없는 거 알죠?'라고 공연히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1917년 석방된 데 벌레라는 신 페인의 일원으로 1918년 총선에 출마했고 '당연히' 당선된다.[7] 아일랜드에서 선출된 신 페인 당 소속 의원들은 영국 의회로 출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아일랜드 의회를 수립해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포했고, 공화국을 이끌 수장인 대통령으로는 데 벌레라가 임명된다. 데 벌레라는 파리 강화 회의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아일랜드의 독립을 이끌어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는 수포로 돌아갔고 이에 데 벌레라는 자신이 직접 미국으로 들어가 외교전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1919년 6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미국에서 체류하면서 데 벌레라가 실행한 외교전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후원에 힘입어 미국 상원에서 아일랜드 독립 결의안이 통과됐으며, 무려 500만 불 이상의 자금도 모집했던 것. 데 벌레라가 미국에서 외교전을 벌이는 시기에 아일랜드 본국에서는 마이클 콜린스의 주도 하[8]에 무장독립투쟁이 격렬히 벌어지고 있었고 데 벌레라가 미국에서 보내온 자금은 IRA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2.2. 아일랜드 내전 시기
-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 내전 문서를 참고
이 사임을 두고 데 벌레라의 반대파들은 그가 더 이상의 결과를 얻기 힘들 게 뻔했던 협상의 정치적 부담을 콜린스에게 떠넘겼다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당시 영국 정부도 협상안 통과 전까지 타결을 자신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협상이 결렬된다면 단기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신생국 소비에트 러시아의 아일랜드 독립운동 지원, 아일랜드인들의 재봉기, 거듭되는 전쟁에 반감을 품은 영국 본토 민중들의 저항 등과 같은 각종 국내외 조건들이 맞물려 아일랜드 전역을 상실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조약 반대파가 아일랜드 대법원을 무장 점령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터져버리고 결국 내전이 발발한다. 그렇지만 전황은 조약찬성측에게 유리했고 결국 데 벌레라는 1923년 항복한다. 항복 직후 데 벌레라는 체포됐지만 아일랜드 자유국 당국이 조약 반대측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 석방된다.
2.3. 아일랜드 (공화국) 시기
합법적인 정치투쟁으로 전환을 선언한 이후 1926년 데 벌레라는 자신의 지지자를 규합해 아일랜드 공화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고 1932년에는 아일랜드 자유국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는 1937년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완전한 독립을 이룩한 뒤 신생 독립국 아일랜드의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취임 직후 데 벌레라는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과의 담판을 통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진행된 영국과 아일랜드 간 무역전쟁을 해소한다.1937년 헌법 제정과 함께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폐지하고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의 집무실을 폐쇄했다. 이 때 아일랜드에서 사실상 영국 국왕의 국가원수 대우가 사라졌다. 법적으로는 아일랜드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신설했으나 영국 국왕의 국가원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 그러다가 1948년 영국 국왕의 국가원수 지위를 삭제하면서 완전한 공화국이 된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데 벌레라는 중립을 선포했고, 이는 전반적으로 아일랜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10] 하지만 중립이 너무 과해서 1945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자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대사관을 방문하여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11] 서방권에서는 '미친 중립'이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고,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1965년 처칠이 사망했을 때 벌레라를 영국에 초청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소련은 아일랜드의 유엔 가입에 나치 옹호국이라고 거부권을 행사했다.[12] 이 때문에 아일랜드는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5년에야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다. 벌레라는 이에 대해 히틀러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교상 의전에 불과했다고 해명했다. 이때 역시 히틀러 옹호 흑역사가 있는 조지 버나드 쇼는 기독교적 기사도 정신의 극치라고 벌레라를 옹호했다.#관련기사
이후로도 1951년부터 1954년까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총리직을 역임한 이후 고령을 이유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13] 대신 그는 상징적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89세가 되는 1973년까지 활동한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자연인으로 살다 1975년 92세를 일기로 데 벌레라는 세상을 떠난다.
3. 여담
아일랜드 내전 문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정치적, 사회적인 판세를 읽는데 서툴렀다. 그래서인지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마이클 콜린스의 평가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것과 비교해서 데 벌레라는 점점 역사가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데 벌레라도 나중에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반대한 것을 후회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아일랜드인답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37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포한 헌법 내용에 아예 이혼 금지 조항을 포함했을 정도.[14] 그렇지만 32-48년 총리 재임 시절 일부에서 제기되었던 성 패트릭 대성당 몰수 주장에 반대하고 가톨릭교회의 아일랜드 공식 국교 지정을 반대했으며 소수 종파에 관용적 태도를 견지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다고는 해도 공식 석상에서 가톨릭교회를 우대하는 등 편향이 있었고 그의 총리 재임 시절 가톨릭교회와의 정교유착은 더 긴밀해졌다. 그의 총리 재임 시절 가톨릭교회는 아일랜드의 준(準) 국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어쨌든 데 벌레라의 가톨릭 신앙심은 바티칸에서도 인정받아서, 37년에는 교황 비오 12세가 파견한 교황사절이 300여 년 만에 아일랜드를 방문했으며, 62년에는 교황 요한 23세에게 그리스도 훈장을 수여받았다. 64년에는 당시 가톨릭교회 내 보수파 유명 인사였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도 만났다.4. 대중매체에서
- 1996년 개봉된 영화 <마이클 콜린스>에서 알란 릭맨이 데 벌레라 역을 맡았다.[15] 콜린스가 주역이다보니 영화 내에서 묘사되는 모습은 썩 좋지 않다. 시시건건 콜린스에게 태클을 걸면서 콜린스를 정치적으로 음해하고 시기나 하는 찌질이 정도의 묘사.
- 2016년 부활절 봉기 100주년 기념으로 아일랜드 방송국 RTE에서 만든 드라마 리벨리온에서도 데 벌레라의 작중 모습은 비교적 부정적으로 비춰진다. 부활절 봉기 당시 기대했던 지원군이 안오고 영국군이 쏟아져 들어오자 주인공 일행이 '데 벌레라 이색히 약속한 지원군은 어디간거야!!'라고 까며, 봉기가 실패로 끝난후 다른 지도자들이 속속 처형되는 상황에서 처형 명령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긴장이 풀린듯 주인공 옆에서 구토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약속한 지원군이 안온것에 항의하자 '지도자로서 내 양심을 따랐다.'라는 가당치 않은 변명을 둘러대기도 한다. 그래도 봉기에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지도자이기에 아일랜드 독립군들은 데 벌레라에 경의를 표한다. 또한 작중에서 묘사된 데 벌레라의 이야기가 퍼지자 가만두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데 벌레라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시즌2에서는 역사대로 미국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에 등장하진 않지만 언급은 종종 된다.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후원금으로 IRA의 독립자금을 충당하며, 작중 마지막 영국과 아일랜드의 휴전협정이 타결되자 데 벌레라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반응이 등장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마지막으로 예정된 시즌 3에서는 마이클 콜린스에 대적하며 아일랜드 내전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영국에게 복수하고 싶어하지만 아일랜드 내전을 겪으면서 아일랜드는 영국군 1사단이나 해안 경비대에게도 지는 약소국이란걸 실감하고 울분을 삼키는 지도자로 등장.
[1] 아일랜드어 발음으로는 에먼 데 왈러러(/ˈeːmˠən̪ˠ dʲɛ ˈwalʲəɾʲə/).[2] (영어:President of the Executive Council of the Irish Free State, 아일랜드어: Uachtarán ar Ard-Chomhairle Shaorstát Éireann) 아일랜드 자유국의 정부수반이었다. 현대 아일랜드에서는 이때 집행위원회 의장도 역대 아일랜드 총리(티셕, Taioseach)로 인정한다.[3] 이 시기 아일랜드는 약간 애매한 지위에 있었다. 이 시기 아일랜드는 영연방 활동 참여를 일체 중단하고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 사무실을 폐쇄(1937년)했으며 대통령이라는 국가원수가 있었지만, 동시에 영국 국왕의 아일랜드 국가원수 지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진 않은 약간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후 1948년에 공화국법이 제정되면서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영국 국왕의 국가원수 지위를 박탈하고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4] Sinéad de Valera, 1878~1975. 에이먼 데 벌레라보다 7개월 일찍 사망했다.[5]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가 무장투쟁을 이끌었다면 데 벌레라는 (미국에서의) 외교노선을 이끌었다. 무장투쟁노선과 외교노선이 서로 반목했던 한국의 독립운동과 달리 콜린스와 데 벌레라의 노선은 상부상조적인 관계였다. 다만 마이클 콜린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벌레라가 그를 몇차례 견제하는 조치를 취하긴 했다.[6] 스페인어에서 de는 ~의 정도의 뜻으로써 영어의 of, 프랑스어의 de 등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로 이 때문에 2016년에 방영된, 1916년의 부활절 봉기를 다룬 드라마 리벨리언(Rebellion)에서 주인공이 데 벌레라를 보고 스패니어드(Spaniard, 스페인인)냐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데 벌레라는 여기에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은 아일랜드인이라고 대답한다.[7] 부활절 봉기의 영향으로 신 페인 당은 아일랜드 전체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18년 총선에서 아일랜드 내 150석 중 73석을 획득했다.(나머지 중 대부분이 북아일랜드 의석)[8] 자신이 미국으로 가면 정부가 똑바로 운영되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아예 데 벌레라는 콜린스에게 임시로 대통령 직을 맡겨준다.[9] '북아일랜드는 영국 영토로 존속할 것,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자치령의 지위로 영국의 지배하에 있을 것, 아일랜드 정부는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 등이 협상안이었다.[10] 윈스턴 처칠이 어떻게든 데 벌레라를 구워삶아서 아일랜드를 자기 측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데 벌레라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벨파스트가 독일 공군에게 공습당하자 인도적인 의미로 소방대를 지원해주긴 했다.[11] 참고로 유럽 지도자들 중에서 히틀러에게 조의를 표한 것은 벌레라 외에도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있었다.[12] 다만 이는 소련이 진심으로 분노했다기보다는 친 서방 국가의 유엔 의석을 늘리지 않으려는 의도에 가까워서 스탈린은 웬만한 서방 국가들의 가입은 죄다 비토했다.[13] 아닌게 아니라 이때 나이가 75살이었고, 1959년 당시에 데 벌레라는 심각한 시력 문제로 안과수술을 6번이나 받아야 했다.[14] 이 이혼 금지법은 1996년에나 이르러서야 폐지된다.[15] 당연히 주연은 마이클 콜린스. 콜린스 역은 리암 니슨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