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cd9f51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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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리 프뤼돔 | 테오도르 몸젠 |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 |
<rowcolor=#cd9f51> 1904 | 1905 | 1906 | 19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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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에체가라이 |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 조수에 카르두치 | 러디어드 키플링 | |
<rowcolor=#cd9f51> 1908 | 1909 | 1910 | 19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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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오이켄 | 셀마 라겔뢰프 | 파울 폰 하이제 | 모리스 마테를링크 | |
<rowcolor=#cd9f51> 1912 | 1913 | 1915 | 19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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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하웁트만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로맹 롤랑 |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 |
<rowcolor=#cd9f51> 1917 | 1919 | 19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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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기엘레루프 | 헨리크 폰토피단 | 카를 슈피텔러 | 크누트 함순 | |
<rowcolor=#cd9f51> 1921 | 1922 | 1923 | 19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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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 프랑스 | 하신토 베나벤테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 |
<rowcolor=#cd9f51> 1925 | 1926 | 1927 | 19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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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 | 그라치아 델레다 | 앙리 베르그송 | 시그리드 운세트 | |
<rowcolor=#cd9f51> 1929 | 1930 | 1931 | 19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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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 싱클레어 루이스 | 에릭 악셀 카를펠트 | 존 골즈워디 | |
<rowcolor=#cd9f51> 1933 | 1934 | 1936 | 19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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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부닌 | 루이지 피란델로 | 유진 오닐 | 로제 마르탱 뒤 가르 | |
<rowcolor=#cd9f51> 1938 | 1939 | 1944 | 19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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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 | 프란스 에밀 실란패 |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
<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8 | 19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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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 앙드레 지드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 윌리엄 포크너 | |
<rowcolor=#cd9f51> 1950 | 1951 | 1952 | 19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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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 프랑수아 모리아크 | 윈스턴 처칠 | |
<rowcolor=#cd9f51> 1954 | 1955 | 1956 | 19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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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 할도르 락스네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알베르 카뮈 | |
<rowcolor=#cd9f51> 1958 | 1959 | 1960 | 196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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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살바토레 콰시모토 | 생존 페르스 | 이보 안드리치 | |
<rowcolor=#cd9f51> 1962 | 1963 | 1964 | 19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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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벡 |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 | 미하일 숄로호프 | |
<rowcolor=#cd9f51> 1966 | 1967 | 196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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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 넬리 작스 |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 가와바타 야스나리 | |
<rowcolor=#cd9f51> 1969 | 1970 | 1971 | 19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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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파블로 네루다 | 하인리히 뵐 | |
<rowcolor=#cd9f51> 1973 | 1974 | 197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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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화이트 | 에위빈드 욘손 | 하뤼 마르틴손 | 에우제니오 몬탈레 | |
<rowcolor=#cd9f51> 1976 | 1977 | 1978 | 19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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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벨로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 |
<rowcolor=#cd9f51> 1980 | 1981 | 1982 | 19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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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와프 미워시 | 엘리아스 카네티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윌리엄 골딩 | |
<rowcolor=#cd9f51> 1984 | 1985 | 1986 | 19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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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 클로드 시몽 | 월레 소잉카 | 조지프 브로드스키 | |
<rowcolor=#cd9f51> 1988 | 1989 | 1990 | 199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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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브 마푸즈 | 카밀로 호세 셀라 | 옥타비오 파스 | 나딘 고디머 | |
<rowcolor=#cd9f51> 1992 | 1993 | 1994 | 19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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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월컷 | 토니 모리슨 | 오에 겐자부로 | 셰이머스 히니 | |
<rowcolor=#cd9f51> 1996 | 1997 | 1998 |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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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바 심보르스카 | 다리오 포 | 주제 사라마구 | 귄터 그라스 | |
<rowcolor=#cd9f51> 2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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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싱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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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 | 화학 | 생리학·의학 | 평화 | 경제학 |
<colbgcolor=#000><colcolor=#fff> 조수에 카르두치 Giosuè Carducci | |
19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
본명 | 조수에 알레산드로 쥬세페 카르두치 Giosuè Alessandro Giuseppe Carducci |
출생 | 1835년 7월 27일 |
토스카나 대공국 피에트라산타 | |
사망 | 1907년 2월 16일 (향년 71세) |
이탈리아 왕국 볼로냐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시인 |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시인으로 이탈리아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물이다.2. 생애
피사의 의대생이었던 미켈레 카르두치와 피렌체 금세공인의 딸인 일데곤다 첼리 사이에서 태어난 조수에는 가난 속에서 살았다. 조수에의 아버지인 미켈레는 혁명가로 1830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려다가 실패해서 1년 동안 구금된 적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조수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계몽 사상에 심취했고 아버지의 서가에 있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아이네이스, 아돌프 티에르의 프랑스 혁명사를 주로 읽었다.하지만 카르두치의 집안은 가난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조반니 베르티넬리 신부의 밑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조반니 신부는 조수에에게 라틴어를 가리켰고 이로인해 조수에는 더더욱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져들게 되었다. 한편 미켈레가 비밀결사인 카르보나리의 회원이라는 것이 들통나자 1849년 쯤 피렌체로 피신하였다.
조수에는 피렌체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수사학에 높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때 마침 시에 재능이 있던 제레미아 바르소티니 신부의 눈에 들고 본격적으로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미켈레가 또 다시 혁명을 하다 들켜서 셀레 술 리고라는 마을로 도망을 갈 때 조수에는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거기서 그는 낭만파인 프리드리히 실러와 월터 스콧의 작품에 빠지게 되었다.
조수에는 중등 교육을 마치고 그는 가족들이 있는 셀레 술 리고로 갔다. 거기서 조수에는 평생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에르콜레 스카라무치를 만나게 된다. 스카라무치는 대단한 문학 애호가였는데 그들은 들판에서 산책하면서 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의 집에서 각종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 스카라무치가 죽었을 때, 조수에가 장례식에서 한 애도사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미켈레는 이런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기 시작했고 그를 피사로 데리고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시인으로서 성공하기는 매우 힘들었고, 아레초의 한 고등학교에 교사로 지원하였지만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남동생인 단테가 자살을 하고, 이에 충격받은 아버지 미켈레의 병이 악화되자 그는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하지만 친구들과 열렬한 문학 논쟁과 훗날 결혼을 하게 될 아내 엘비라 메니쿠치와 만나서 우울했던 기분을 떨쳐냈다.
그런 와중에 이탈리아에서 민족주의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통일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조수에가 살고있던 토스카나에서도 사르데냐 왕국 중심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해야한다 말아야한다는 논쟁이 벌어졌다. 조수에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끼어들지 않고 1860년 볼로냐 대학교 웅변학 교수로 취직하였다.[1] 그는 대학에서 단테 이전의 이탈리아 문학을 연구하였고 그 분야에서 크나큰 권위자가 되었다.
1863년에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교황은 이탈리아 통일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조수에는 시를 한편 썼다. 그 시가 사탄 찬가(Inno a Satana)였다. 교황을 헌신적인 애국과 자유를 갈망하는 이탈리아의 발전을 막는 사탄으로 비유한 이 시는 그 즉시 이탈리아 전역으로 널리 퍼졌고 조수에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후 이탈리아의 국민 시인이 된 조수에는 여러 편의 시를 썼고 내는 족족 시집은 불티나게 팔렸다. 그 이후 이탈리아의 저명 인사가 된 조수에는 1890년에는 이탈리아의 상원의원이 되었고 1906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년 뒤인 1907년 2월 16일 볼로냐에 있는 자택에서 간경변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