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2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cecec,#888><tablebgcolor=#ececec,#888> | 닐스 보어 관련 문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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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 ||
소속 | 케임브리지 대학교(트리니티 컬리지) | ||
관련 학자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 막스 보른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기타 | 오게 닐스 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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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 Niels Henrik David Bohr | |
출생 | 1885년 10월 7일 |
덴마크 코펜하겐 | |
사망 | 1962년 11월 18일 (향년 77세) |
덴마크 코펜하겐 | |
국적 | [[덴마크|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이론물리학자 |
학력 | 가멜홀름 그래머 스쿨 (졸업) (1903년) 코펜하겐 대학교 (물리학 / 석사) (1909년) 코펜하겐 대학교 (물리학 / 박사) (191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
배우자 | 마르그레테 뇌를룬드 (1912년 결혼) |
자녀 | 장남 크리스티안 보어 차남 한스 보어 삼남 에릭 보어 사남 오게 보어 오남 에른스트 보어 육남 하랄 보어[1] |
종교 | 무종교(무신론)[2] |
개인 문장 | [3] |
서명 |
[clearfix]
1. 개요
이제 당신에게 그 시대의 또 다른 위대한 인물 중 하나와의 경험, 아마도 이런 일에 어떤 기준을 적용한다면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한, 닐스 보어(Niels Bohr)에 관한 경험을 몇 가지 얘기하려고 합니다.
에드워드 텔러
덴마크의 물리학자.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다.에드워드 텔러
2. 업적
수소의 선 스펙트럼을 설명하면서 원자의 구조에 대한 가설(보어 모델)[4][5]을 내놓아 19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양자론을 도입했기 때문에 이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내놓는 데 영향을 주었다.3. 생애
3.1. 어린 시절
닐스 헨리크 다비드 보어는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코펜하겐 대학교의 생리학 교수이고 어머니는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삼남매 중 둘째로, 누나와 남동생이 있었다.식사중 과학, 철학 등의 얘기를 하며 화목하게 자랐다고 한다.3.2. 과학자의 삶
1903년, 보어는 코펜하겐 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1911년 전자에 대한 연구 성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전자를 발견한 조지프 존 톰슨의 제자가 되었다.1911년 말에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톰슨의 제자이자 원자핵을 발견한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였다.1912년 그는 덴마크로 돌아와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보어의 첫 번째 스승 조지프 존 톰슨은 음극선 실험으로 전자를 발견하였다.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보어의 두 번째 스승인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알파입자를 금박에 쏘아 알파입자가 튕겨나오는 것을 보고 원자핵을 발견했다.이로써 태양계 모델이 완성되었는데, 이 모형엔 단점이 있었다. 원자핵은 +전기를 띄고 전자는 -전기를 띄니 결국엔 전자가 돌다가 원자핵과 가까워져 충돌한다. 근데 러더퍼드의 모형이 맞다면 이 세상 모든 원자는 소멸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발견한 보어는 전자의 궤도가 있는 원자 모형을 생각해냈다. 보어는 전자가 여러 궤도를 양자도약하며 원소의 스펙트럼을 나타내는 것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 양자역학이 정립되며 전자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는 이 모형을 쓰지 않지만,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는 여전히 원소의 선 스펙트럼을 보어의 원자모형으로 설명한다.
1917년 그는 연구소 설립 캠페인을 시작했다. 1918년 연구소를 짓는 것이 법적으로 통과되었고 1921년 닐스 보어 연구소가 세워졌다. 닐스 보어 연구소는 1920~1930년대의 양자역학의 중심도가 되었고 당시 제일 유명한 과학자들도 그곳을 들렀다.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는 낮에는 축구를 하는 등 스포츠를 즐겼고 저녁부터 거의 다음날 아침까지는 물리학에 대한 토론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보어는 192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여받는다.
1927년 10월 27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제5차 솔베이 회의가 열린다. 솔베이 회의는 벨기에의 유명한 기업가 에르네스트 솔베이가 만든 물리학 학회이다. 제5차 솔베이 회의에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리 퀴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플랑크, 에르빈 슈뢰딩거, 막스 보른 등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초청되어 양자역학에 대해 토론했다. 이 때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갈등이 심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수학적으로 계산이 되며 확률적으로 입자의 물리현상을 해석한다는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보른의 코펜하겐 해석이 싫었던 것이다. 이 때 그 유명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아인슈타인)와 '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보어)란 말이 나온다. 이 엄청난 논쟁 끝에도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 해석을 인정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운동도 즐기는 스포츠맨 타입이지만 꽤 수줍어 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26세 때의 그를 본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동료는 "소년 같다"고 평하기도. 중년 때는 후학들에게 꽤나 우러러 보였던 모양. 제자인 오토 프리슈[6]는 편지에 보어와 만났던 일화를 쓰면서 "신이 내 코트 단추를 만졌다"고까지 했고 파인만은 회의장에서 보어를 만났을 때를 "거물들에게도 보어는 위대한 신이었다"고 회상했다.[7][8]
덴마크에서 유명한 과학자였다 보니 집도 근사한데 덴마크 맥주회사인 칼스버그가 기부해 줬다. 거기에 수십 년간의 관리비까지 그냥 지급해 주어서 그의 후손들은 편하게 잘 먹고 잘 산다고 한다. 그의 아들 오게 닐스 보어도 197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고 평생 보어 연구소에서 소장 자리를 맡았으며 오게의 아들도 물리학자다.
1939년, 나치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후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에는 나치가 덴마크를 공격했는데, 보어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였기 때문에 보어 가족은 나치의 감시를 받았다. 보어 가족은 몰래 밤에 배를 타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스웨덴은 중립국이라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독일의 스파이들이 많아 그렇게 안전하진 않았으나, 이후 보어가 덴마크를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이 고속폭격기를 보내 보어를 영국으로 데려왔다. 또 보어는 영국을 건너 미국의 워싱턴 D.C.로 갔고,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보어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깨닫고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그들은 보어의 경고를 거의 무시했다. 보어는 원자폭탄이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것을 알고 큰 충격과 후회를 했으며 이후 반핵 운동을 펼쳤다.
3.3. 노년
전쟁이 끝난 후, 보어는 다시 코펜하겐으로 돌아갔다. 유럽에서는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공동 물리학 연구소를 만들기로 했고 보어는 이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1952년 유럽 입자물리연구소 CERN이 스위스 제네바에 설치되었다.1962년 11월 18일,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묘지에 안착되었다.
107번 원소 '보륨'의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 왔다.
4. 몇 가지 일화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God does not play dice)."고 말하자 보어는 이렇게 답했다. "아인슈타인 씨, 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시오(Einstein, stop telling God what to do)." 원래 의미는 '신이 주사위를 던지는지는 우리가 상관할 수 없다'쯤이 된다. 물론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이전에도 친한 사이였다.[9] 혹은 '과학을 논하면서 신을 들먹이지 말라' 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 그는 유대계 덴마크인이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게 점령당한 덴마크에서 곧 수용소로 잡혀갈 입장이었다[10]. 가까스로 스웨덴으로 빠져나간 다음 영국으로 도망쳤는데 스웨덴에서 그를 데리러 온 비행기는 민간용 비행기가 아닌 민항기처럼 색을 바꾼 폭격기 모스키토였다. 그는 덩치가 컸기 때문에 비행기 중에서도 폭탄 저장고 위치에 자리잡았고 비상시를 대비해 낙하산과 조종사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무전기가 달린 헬멧을 제공받았지만 머리가 너무 커서 그 헬멧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결국 조종사가 "고도가 높아지니 산소마스크를 쓰세요"라는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산소부족으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당시 조종사는 그가 죽었을 거라고 믿었다. 더 흠좀무한 사실은 조종사들이 만약 구출작전이 실패하여 나치에 체포될 것 같으면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산소마스크를 쓰지 못한 이유가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서 못들었다는 버전과 영어를 못해서라는 버전도 있지만 그는 영국에서 러더퍼드의 제자로 있었으니 영어를 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 정말 못 했다면 그런 중요한 임무에 통역해 줄 사람을 안 태워갔을 리가 없으니 후자는 신빙성이 없다. - 그는 제임스 프랑크와 막스 폰 라우에가 나치 독일로부터의 몰수를 피하기 위해 보내온 노벨상 메달을 본인의 연구소(닐스 보어 연구소)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두 사람의 노벨상 메달이 노출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 때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과학자 조르주 드 헤베시[11]의 제안을 받아들여 메달을 왕수에 녹여서 연구소 선반에 놓고 덴마크를 탈출했다. 연구소를 뒤지던 독일군은 왕수가 든 병에 메달이 녹아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여 건드리지 않았다. 녹였던 메달은 종전 후 헤베시가 다시 석출하여 금덩이로 만들어 노벨재단에 돌려주었으며 사정을 알게 된 재단에서는 이 금덩이를 다시 메달로 제작해 줬다.
- 1941년 9월경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만난 사건은 과학사가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만남에서 오간 대화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의 개발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결백을 증명하려고 했다, 독일의 핵무기 개발능력이 없으니 연합국의 개발도 취소해 달라 등 다양한 설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는 형제처럼 친한 사이였지만, 이 날의 만남 이후 사이가 소원해졌다. 마이클 프레인(Michael Frayn)의 희곡 코펜하겐(Copenhagen, 1998)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 보어와 그의 제자들은 서부영화를 매우 좋아했었는지 연구 중 지치면 서부영화를 보면서 쉬었다고 한다. 보던 중에 이들은 영화광들이 흔히 하는 의문이 생겼다. '왜 악당이 불의의 기습을 거는데 선역이 먼저 총을 쏴 이기게 될까?' 누군가 '의식적 기습보다 무의식적 반응이 더 빠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선역은 보어, 악역은 당시 학생이었던 조지 가모프가 맡아 물총으로 즉시 실험에 나섰는데 가모프가 기습을 걸었고 결과는 보어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통해 가설이 성공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 보어는 글쓰기를 지독하게 싫어했다고 한다. 박사 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이후 몇 년간 논문을 쓸 때는 보어가 말하는 것을 그의 어머니가 받아 적었다고 한다. 편지도 쓰고 또 고치고 또 고치기를 잘해 절친한 물리학자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에게 와 달라는 편지를 보내자 파울리가 편지의 최종교정본이 오면 그 때 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글쓰는 재능이 좀 없었던 듯. 보어가 논문을 쓰며 "문장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려워하자 물리학자 폴 디랙이 "나는 문장을 끝낼 줄 모르면 시작하지 말라고 학교에서 배웠다"고 쏘아붙였다. 악의가 담긴 말은 아니었고 디랙이 원래 좀 이런 사람이었다.
- 보어가 수학을 못했다는 설이 있으나 증거가 없다. 수학을 끔찍이 못했다는 주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12], 진지하지 않은 토론 중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수학에 재능이 있다는 말이 있다.[13] 무엇보다도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학을 못했다면 수학적 접근법, 수학적 모델을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수학이 기본 언어인 이론물리학을 하는 그가 수학을 잘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14]
- 주역 등의 동양철학에 심취했는데 태극을 가문의 문장으로서 채택하고 노벨상 타러 갈 때 옷에 팔괘도까지 그려 넣어 갈 정도였다. 상보성 원리는 주역의 음양이론을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 동생 하랄트 보어(Harald Bohr, 1887–1951)는 수학자로, 젊은 시절에는 골키퍼로 뛰면서 1908 런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2023년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케네스 브래너가 분했고, 작중 주인공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스승이자 덴마크에서 미국으로 탈출해 오펜하이머에게 여러 조언을 해 주는 인물로 묘사된다.
[1] 동생인 '하랄 보어'와 이름이 같다.[2] 종교적 믿음도 없을 뿐더러 신의 계시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종교를 싫어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루터회 신자였다.[3] 태극 문장이 맞다. 아예 문장 정의문이 백색 배경,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된 태극도(Argent, a taijitu Gules and Sable)라고 되어 있다.[4] 원자핵 주변을 태양계처럼 전자 입자가 도는 형태.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전자가 원자핵 주위에 '구름'처럼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원자의 기본 구조로 자리잡았다.[5] 현재 과학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이 원자하면 떠올리는 모양이 대부분 이거다.[6] Otto Robert Frisch,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이고 그녀와 함께 핵분열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7] 교과서에서 원자 모형을 제시한 공로만 나오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보어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비견할 만한 물리학의 거장이다. 단적인 예로 아인슈타인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다음해(1922년)의 수상자가 바로 보어였다.[8] 정작 파인만 본인은 보어 부자(父子)와 아이디어를 논의하면서 아니다 싶으면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라고 말해서 이 위대한 신을 흡족하게 했다고 한다. 보어는 아들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저 친구를 눈여겨 봐 둬라. 내 말에 '네, 네.'밖에 할 줄 모르는 얼간이들은 신경쓰지 말고."[9] 함께 산책을 하다가 찍힌 사진도 있으며 보어는 숨을 거두는 전날까지도 아인슈타인이 던진 질문에 대해 고뇌하고 있었다.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셈. 실제로 보어는 말년에 아인슈타인과 토론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수강생에게 말했다.[10] 당시 덴마크의 국왕인 크리스티안 10세가 "짐이 바로 유대인이다!"라는 패기 넘치는 발언을 하면서까지 자국 내 유대인들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나라가 점령당하여 모든 실권을 잃은 상황이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가 일국의 왕이 나섰다고 해서 귀담아 들을 인간들도 아니고 말이다.[11] 헝가리 출신으로, 하프늄의 발견 및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물질 추적법 개척 등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인도 1943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12] 책 Mathematics and War에 다음의 주장이 나온다. "Indeed, one contributor to this summer's newspaper debates in Denmark has ever claimed ... that, in particular, he was extremely bad at mathematics."[13] "He displayed great abilities in mathematics and science.", "During his last two years at school Niels specialised in mathematics and physics."[14] 이는 리만기하학 등의 어려운 수학 이론을 기초로 하는 일반상대론을 만든 아인슈타인이 수학에 서툴렀다는 설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