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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슈뢰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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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오셔로프 로버트 리처드슨 윌리엄 필립스 스티븐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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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우스 페렌츠 안 륄리에
수상자의 국적은 수상 시점 기준이다 }}}}}}}}}}}}}}}
<colbgcolor=#000><colcolor=#fff> 에르빈 슈뢰딩거
Erwin Schrödinger
파일:TfJMQty927cktX4OG6Dvv8Hx0phYuVxJP_xtzB3Wqmw.jpg
본명 에르빈 루돌프 요제프 알렉산더 슈뢰딩거[1]
Erwin Rudolf Josef Alexander Schrödinger
출생 1887년 8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1961년 1월 4일 (향년 73세)
오스트리아
국적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 |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2]
직업 물리학자
학력 빈 대학교
수상 마테우치 메달 (1927)
노벨물리학상 (1933)
막스 플랑크 메달 (1937)
배우자 안네마리 베르텔 (1920년 결혼)
종교 무종교(무신론)[3]
서명 파일:Erwin_Schrödinger_signature.svg.png

1. 개요2. 업적3. 여담4. 기타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 양자역학의 체계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과학자이다. 슈뢰딩거 방정식과 사고실험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잘 알려져 있다.[4]

상당히 다방면에 재능이 있던 과학자로, 물리학뿐 아니라 식물학, 고대 문법, 철학 등에도 조예가 있었다. 20대 때에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2. 업적

1921년 취리히 대학교에 부임하여 양자이론에 대해 연구하였다. 특히 보어의 원자모형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연구하여 몇 편의 논문을 낸다. 1922년에는 보어의 원자모형에 상대론적 도플러 효과가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발표한다. 1924년 원자 스펙트럼에 대한 BKS이론이 발표되었을때 해당이론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이나 결정론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고 그를 통계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처음으로 행렬을 이용하여 양자역학의 기본 이론을 제시했는데,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슈뢰딩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양자역학의 기본 이론을 제시하려고 했다. 한편 당시 대학생이던 루이 드 브로이가 자신의 교수 랑주뱅에게 물질파 가설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는데, 랑주뱅은 '이딴 걸 논문이라고 낸 건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 되지 않았지만, 그 논문은 아인슈타인에게 보내진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당시 조교였던 슈뢰딩거에게 보냈고, 슈뢰딩거는 그 논문을 보고 "어? 이거 괜찮은데?" 하며 그를 이용한 방정식을 찾아나선다. 역학, 특히 고전 역학은 뉴턴의 방법, 라그랑주의 방법, 해밀턴의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중 슈뢰딩거는 해밀턴의 방법과 입자의 파동성에서 착안하여, 1926년 '슈뢰딩거의 방정식(파동방정식)'을 발표하였다. 이는 양자역학의 기본이론을 새로운 방법으로 정립한 것이다.[5]

모든 물질은 파동의 성격과 입자의 성격을 가지는데, 물질들이 가지는 파동의 성격에 대한 방정식이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이다. (파동)이라는 게 붙는 이유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족하는 함수는 대개 주기성을 가지는 파동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파동과 같은 성격을 띠었다고 입자가 파동 방정식에서 나온 해와 같이 진동하거나 움직이는 건 아니며 관측되는 물리량들은 정상상태(stationary state)로 존재한다.

그런데, 사실 슈뢰딩거가 파동함수를 만든 것은 분명 사실이긴 하지만, 웃긴 것은 그도 사실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이것 때문에 파동함수의 성격 문제로 물리학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 발터 후켈이라는 사람은 이런 시를 썼을 정도이다. "슈뢰딩거는 그의 '파동함수'를 가지고 많은 계산을 할 수 있었다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알지 못한 것은 도대체 파동함수가 뭘 의미하느냐였지."

입자들이 파동의 양상으로 나타날 때, 그 파동을 서술하는 것이 파동함수라는 것까지는 슈뢰딩거가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 파동의 진폭이 복소수라서,(중심축에서 멀어진 정도가 허수 i라면, 상상이 가는가?) 파동함수가 존재한다는 건 확실한데 그 자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가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 슈뢰딩거는 파동함수의 실수부분만이 물리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막스 보른이 '어떤 점에서의 파동함수의 진폭의 절댓값의 제곱, 즉 복소수의 절댓값의 제곱은 그 지점에서 입자를 발견할 확률에 비례한다'라는 해석을 내놓았다.[6] 이는 현재까지 표준적인 해석으로 내려오고 있다.

사실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에 대한 입장은 매우 모호했었다. 한때는 파동함수의 반실재론적 성격을 옹호했고, 1930년 뮌헨의 국립독일박물관에서 관찰에 따라 상태가 결정된다는 코펜하겐 해석을 따라 양자역학에 대한 강연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의 교류를 하면서 입장을 정리한 1930년대 이후로는 평생동안 결정론을 주장하며 파동함수에 대한 보른의 확률적 해석을 비판했다. 1946년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른의 이름을 대며 그의 해석을 싫어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또한 1960년 보른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서는 "저는 박사님을 정말로 존경하지만... (중략) 박사님은 역사의 심판이 걱정스럽지 않으십니까? 인류가 박사님의 어리석은 판단에 굴복할 것이라고 정말로 확신하십니까?"라는 거의 비난 수준의 비판을 했을 정도이다.

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수상의 이유는 당연히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물리학과 및 화학과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는 슈뢰딩거 방정식 덕분이다.

1935년 논문 "양자역학의 현상에 대해서"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을 발표했다. 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은 원래 양자역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그가 불확정성 원리를 '까기 위해서' 사용했던 비유이나, 의도치않게 비유가 너무나도 적절하게 양자역학의 이중성에 대해서 비유하는 바람에 오히려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비유로 유명해졌다.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이러한 역설적인 결과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내가 이런 것에 일조했다는 것이 유감스럽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1952년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아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했다. 파동함수는 물리적 실재이며 간헐적으로 입자가 나타난다고 보는 코펜하겐 해석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는 완벽한 반면 입자를 통한 해석은 인위적이고 거추장스럽다는 것이다. 우리가 입자라고 해석하는 것들도 사실 파동묶음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7]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을 입자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려 하는 바람에 잘못된 해석이 퍼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2차 양자화를 근거로 입자라는 개념없이 파동의 개념만으로 양자역학을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8] 파울리, 보른, 로젠펠트 등의 물리학자들은 이같은 슈뢰딩거의 해석에 반발했다.[9]

또한 슈뢰딩거는 다른 분야의 물리학과 생물학에 공헌했다. 열역학에 대한 교과서를 집필했으며 중력과 전자기력을 합친 통일장 이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명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현상에 대해 양자역학을 통한 철학적이고도 본질적인 설명을 시도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후대 생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3. 여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8년, 에딘버러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 준비하던 차에 하필 비자 발급이 늦어지는 바람에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남아서 연구를 하다가 독일오스트리아 병합이 일어나는 바람에 반나치주의 성향을 띠던 슈뢰딩거는 당연히 탄압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슈뢰딩거는 반강제로 '나는 나치즘에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해야 했으며[10] 나중에 아인슈타인에게 사과했다고 한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쫓겨나고 출국 금지 조치까지 당해야 했다. 그러다가 기회를 봐서 먼저 이탈리아로 도망간 후 아일랜드로 가서 거기에 있는 더블린 고등연구소 이론물리학부에 몸을 두게 되었다. 사실 이걸 피할 수 있는 길이 미리 있긴 있었다. 바로 1934년에 프린스턴에서 교수직 제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이를 거절했는데, 자신이 죽은 후 부인이 받는 연금이 다른 대학에 비해 적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결핵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사인도 결핵이다. 죽기 몇달 전인 1960년 5월경 한동안 잠잠하던 결핵 증세가 다시 나타나 빈과 인스브루크에서 정밀한 진단을 받은 후 의사의 요양 권고를 받고 평생을 그가 사랑하던 알프바흐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나이는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요양을 해도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1961년 1월 4일 오후 7시경에 아내인 안네마리 베르텔 곁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이틀 후인 1월 9일 요양지였던 알프바흐에 매장되었다.

개인사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여성편력증이었다. 일정한 숫자의 난민만 받아들이던 영국이 슈뢰딩거에게 영주권을 내주었을 때 제자의 아내와 불륜관계여서 제자를 위해 한 장 더 달라고 요구했던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아예 두 여자와 같이 살기도 했다. 아내조차 슈뢰딩거가 너무 여자에 집착하다 보니 나중엔 포기하고 여자를 소개해주고 본인 역시 다른 남자와 맞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심지어 파동방정식의 핵심적인 부분도 애인과 산장에 2주간 밀회 여행을 가서 완성했다 한다. 여성편력이 그의 연구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파동방정식을 완성할 때 친한 수학자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의 조언을 많이 구했는데, 그 바일은 또 슈뢰딩거 아내와 바람 난 상태였다. 당연히 둘 사이 자녀는 없었다.

다만 위 일화와는 별도로 두 사람은 평생 절친으로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막스 보른은 슈뢰딩거의 사망 후 "그는 아주 멋지고 개성적이며 유쾌하고 별나면서도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의 두뇌는 정말로 완벽하고 비상했습니다."라고 그를 기렸다.

4. 기타

5. 같이보기



[1] 성씨의 독일어 발음은 [ˈʃʁøːdɪŋɐ\](슈뢰딩어)에 가깝다. 그런데 외래어 표기법의 용례집에서는 슈뢰딩거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식 표기법의 영향으로 독일어에서 모음 또는 l 앞의 ng[ŋ\]에는 'ㄱ'을 첨가하여 표기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일본어로도 슈레딘가(シュレーディンガー)이다. (다만 한국어의 가와 일본어의 ガ행은 음가가 조금 다르다는 것은 감안하자.) 그래서 Tübingen이나 Göttingen 같은 독일의 지명도 각각 튀빙겐괴팅겐으로 표기하고 있다.[2] 1948년 취득.[3] 다만 동양의 종교나 범신론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4] 그런데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양자역학자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양자역학을 아주 경멸했다. 애초에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부터가 '니들(양자역학 주장자들) 말대로 하면 이딴 상황이 성립한다는 소리인데, 그게 니들 눈에는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냐?'는 생각으로 만든 거다.[5] 뉴턴의 방법은 힘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둔다면, 라그랑주나 해밀턴의 방법은 에너지의 개념에 중점을 둔다. 그런데 미시 세계에서는 힘의 개념을 적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라그랑주의 방법과 해밀턴의 방법의 양자역학 버전을 개발하려고 했다.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해밀턴의 방법의 양자역학 버전을 개발했는데, 나중에 파인만이 라그랑주의 방법의 양자역학 버전을 개발했다. 경로 적분이 이와 연관되어 있다.[6] 막스 보른은 이 업적으로 (보다 정확히는 '파동함수에 대한 통계적 연구'를 통해) 195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7] Schrödinger, Erwin. "Are there quantum jumps? Part I and II." The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3.10 (1952): 109-123 233–242[8] E. Schrodinger, The meaning of wave mechanics, in Louis de Broglie Physicien et Penseur, A. George, ed., Albin Michel, Paris, 1953 https://archive.org/details/SchrodingerWaveMechDublin1952[9] 칼 포퍼,『양자이론과 물리학의 분열』 참고.[10] 정확하게는 나치스가 슈뢰딩거와 안면이 있는 학자를 통해 나치즘에 찬성하라는 편지를 쓰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며, 이 서신은 비공개로 하겠다라 전달했다. 슈뢰딩거가 어쩔 수 없이 나치즘에 반대하지 않으며 새로운 국가 아래 기쁜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자 나치스는 바로 약속을 어기고 주요 일간지에 슈뢰딩거의 편지를 게재하였다.[11] 2차 세계대전 이후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 받은 걸로 봐서 아인슈타인이 평생 슈뢰딩거를 외면했다는 속설은 사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