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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K는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를 아울러 이르는 약자. 대구의 이니셜 T와 경북의 이니셜 K를 따서 만들어진 표현이다.2. 유래와 의미
김진현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장이 13대 대선 일주일 후인 1987년 12월 23일, 노태우 대통령 당선인을 향한 칼럼에서 최초로 사용한 표현이다.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DG(Daegu-Gyeongbuk)가 맞는 표현이지만,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이 쓰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표현이라 TK(Taegu-Kyŏngbuk)가 되었고, 이것이 굳어져 오늘날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유래가 신문의 정치 칼럼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원래는 TK는 대구·경북을 지칭하는 단순한 지리적 표현이 아니라, 해당 지역을 정치적으로 구분할 때 쓰이는 표현이다.[1] 특히, 같은 경상도 내에서 정치 성향에 차이가 있는 PK와 구분 지을 경우에 자주 사용된다.[2]
주로 정치권과 언론에서 보수정당 지지세가 강한 대구와 경북을 일컫는 정치 용어로 쓰이는데, 넓혀서 행정구역상 경남에 속하지만 부산, 창원보다는 대구와 교류가 더 많고 정서적으로도 더 가까운 측면이 있는 경남 서·북부 지역(거창, 창녕, 합천 등)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경남 합천이 고향인 전두환, 경남 창녕이 고향인 홍준표는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고 정치적 기반도 대체로 대구·경북 중심이기 때문에 경남 출신임에도 TK계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반면, 경남 서·북부 지역 출신이라도 학창 시절을 부산에서 보냈거나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활동한다면 PK계로 분류되는데, 이에 해당하는 정치인은 김광일, 김동영, 김혁규 등이 있다.
3. 지역 특징
현재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지역이다.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 입장에선 최고 험지이며, 보수정당의 최대 텃밭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TK를 보수의 심장으로 치켜세우곤 하지만,[3] 반대 세력 일부는 수구의 심장, 거칠게는 극우의 온상이라며 적대시하기도 한다.[4]대한민국 대통령 최다 배출 지역으로, 역대 대통령 13명 중 5명을 배출했다.[5] 이들의 재임기간을 모두 합산하면 총 13,654일로 37년이 넘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age(1948-08-15)]년이 지난 걸 생각하면 약 절반 가량을 TK 출신 대통령이 차지한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미국 대통령을 가장 많이 배출한 버지니아주, 일본 총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야마구치현에 비견될 만하다. 특히 일본 우익의 발상지로 평가 받는 야마구치와 공통점이 많다.[6]
아래는 TK가 배출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자세한 정치 경력은 각 인물의 문서를 참고하길 바란다.
- 박정희: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고, 15세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해 청소년기를 대구에서 보냈다. 졸업 후 20대 초반엔 경북 문경에서 3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훗날 육영수와의 결혼식을 대구 계산성당에서 치렀으며, 딸 박근혜를 낳은 곳도 대구였다.[7] 1963년 5대 대선에서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이후 1967년, 1971년, 1972년, 1978년 대선을 통해 연임했다.
- 전두환: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으나, 성장기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다. 이 때문에 출생지는 행정구역상 PK에 속함에도 TK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1980년 11대 대선에서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1981년 12대 대선에서 또다시 당선됐다.
- 박근혜: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 맏딸로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4세부터 생애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8] 하지만 TK 정치의 거두인 아버지의 정치적 후광이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었으며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도 대구 달성군이었기에 자타가 공인하는 TK 정치인이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 당선됐다.
이들 중 이명박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군사정권 계열이다.[9] 특히 박정희는 예나 지금이나 보수 진영 전반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10]
3.1. 사회·문화적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보수적인 지역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TK=보수'라는 대중의 인식을 공고화하는 데에 한몫한다. 정치적 의미의 보수가 사회·문화적 보수와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나,[11] TK에선 대체로 사실이다. 특히 가족문화에서 유교적 가부장제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다.다음은 TK의 사회·문화적 보수성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보기들이다. 먼저 2022년 조사에선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부부 가사분담율이 가장 낮은 곳이 대구, 그 다음은 경북으로 나타났는데, 이를 통해 전통적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여전히 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 여아 낙태가 성행하던 1980-90년대에 남아선호사상이 유독 두드러져, '백말띠' 속설이 낳은 '역대 최악의 성비'로 회자되는 1990년생의 전국 평균 성비가 116.5일 때 경북은 130.7로 전국 1위, 대구는 129.7로 전국 2위를 기록했다.#
2019년 추석을 앞두고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서울과 호남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응답은 각각 53.2%, 53.9%로 가장 낮았고 전국 평균은 64.3%였지만, TK에선 무려 80.7%가 제사를 지낸다고 응답하기도 했다.#[12] 종교적으론 기독교(개신교+가톨릭)의 교세가 약하고 불교가 우세한데,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유교적 가치 규범의 통제력이 타 지역에서보다 강하기 때문에 '외래 종교'에 대해 더 배타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
보수성이 교육 분야에서도 작용해 교육감 선거에서 교권을 중시하는 중도·보수 성향 후보만 줄곧 당선됨에 따라, 학생인권조례는 시행된 적이 없고 향후 시행될 가능성도 매우 낮다.[13][14]
위 예시들로 설명되는 특유의 보수적인 문화는 조선 시대에 TK 지역이 성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타 지역에 비해서 유교 및 양반 문화가 더 깊게 뿌리내린 것에서 기인한다.
사림파가 처음 분화했을 때 동인의 정신적 지주는 경상도 예안군(현 경북 안동시) 출신 퇴계 이황(1502-1571)이었다. 이황은 경상도 풍기군(현 경북 영주시)에서 건립된 백운동서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명종에게 건의한 것을 시작으로 서원 보급 운동에 앞장섰고,[15] 지금의 대구와 경북을 중심으로 서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TK가 영남학파의 아성이 됐다.[16]
이후 동인의 계보를 이어받은 남인은 인조반정(1623) 이래로 항상 서인에게 열세였던 만년 야당 포지션에, 그마저도 여러 차례 환국을 거치면서 세력이 더욱 기울었으며 결정적으로 이인좌의 난(1728)을 계기로 정치적 기반인 경상도가 반역향으로 낙인 찍힌 탓에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소외됐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중앙 정계를 떠나 대구·경북에서 서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향촌 사회의 주류를 차지한 정통파(강경 퇴계학파) 남인을 영남남인이라 칭한다. 한양·경기도의 근기남인과 달리 영남에서 상주한 이들은 중앙의 관심에서 벗어난 덕에 숙청을 피해 생존할 수 있었고, 현대에도 안동시, 경주시 등 경북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종의 전통적 보수주의 세력으로서 TK 특유의 지역 문화에 일조했다.
4. 타 지역과의 비교
4.1. PK
지리적으로 같은 영남에 속하며 선거에서 보수 진영이 유리한 지역이나 세부적으론 성향이 이질적인 PK와 자주 비교된다.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군사정권 시절, 부산을 위시한 PK 동부는[17] 리버럴 세력의 성지로서 김영삼과 상도동계의 지지 기반이었고 부마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의 중심이기도 했다.
그러다 민주화 이후 1990년 3당 합당을 계기로 TK와 PK가 모두 같은 보수 진영에 묶이면서 '우리가 남이가'의 기치 아래 정치적으로 한 배를 탔고, 1992년 14대 대선에서 합심해 김영삼을 당선시켰다. 1990년대 중반엔 대구가 김영삼과 PK계의 민주자유당 장악에 반발해 무소속 후보들과 자유민주연합을 지지하며 약간의 균열이 생긴 적도 있었지만, 경북은 크게 개의치 않고 대체로 민주자유당-신한국당을 지지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경남 김해 출신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나서 당선된 것을 계기로 민주당이 '지역감정 해소'를 전면에 내걸고 PK를 공략하는 한편,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계 수권정당에서 PK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TK의 영향력이 강화됐다. 또한 민주당에서는 참여정부와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거치면서 호남 중심의 동교동계가 점차 주도권을 잃고 PK 중심의 친노-친문이 새로운 주류로 올라섰다. 그 결과, 2010년대 이후 보수정당의 텃밭에서 서서히 벗어나 보수 약우세의 경합지역으로 변모하는 추세에 있다.
4.2. 호남
보수정당의 최고 험지이자 민주당계 정당의 최대 텃밭인 호남과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상반되는 포지션에 서 있다. 두 지역 모두 외지인 유입이 비교적 적은 편이고[18] 인물 중심의 연고주의가 강한 탓에 웬만한 서구권 민주주의 국가에선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몰표가 상수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최대 텃밭으로 여겨지는 미국 남부나 민주당의 최대 텃밭으로 여겨지는 캘리포니아, 뉴욕주도 득표율은 최대 60%대가 한계이지만, TK에선 범보수 진영이 일반적으로 70~80% 이상을 기대할 수 있으며 호남에서도 범민주·진보 진영의 득표율은 80~90%대가 기본이다.이렇듯 지지 정당만 다를 뿐 텃밭으로서 일견 대동소이해 보이지만, 차이점도 분명하다. 동서고금 보수성이 강한 노인들조차 광주학살의 영향으로 강경한 반(反)보수정당 성향을 띠며,[19] 이러한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젠더 분쟁 등 다른 사회적 담론에 더 관심도가 높은 일부 20대 남성[20]이나 호남 지역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외지 출신[21]을 제외하면 보수정당 지지자가 없다시피한 호남과 달리, TK에선 의외로 민주당 지지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22]
한편, 호남에서 민주당이 초강세인 것은 민주당 자체에 대한 호감보단 지역 전반에 깔린 보수정당에 대한 극심한 반감 때문이지만,[23] TK에서 보수정당이 초강세인 것은 지역 출신이 주류를 차지해온 보수정당에 대한 연고주의적 선호에 가깝다는 견해가 있다.[24] 그래서 일각에선 호남의 지역주의를 방어적 지역주의, TK의 지역주의를 패권적 지역주의라 해석한다.
또한 민주당과 호남, 보수정당과 TK의 상호관계가 사뭇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호남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스타로 성장할 가능성이 보이는 정치인에게 힘을 실어줘 전국 당원의 여론을 주도하는 반엘리트주의적인 상향식(bottom-up)을 지향하지만,[25] TK는 보수정당 중앙당에서 결정된 후보에게 그대로 힘을 실어주는 엘리트주의적인 하향식(top-down)을 따른다는 것이다.[26]
재미있는 사실은 일제강점기에는 호남평야, 나주평야를 바탕으로 대지주가 많았던 호남이 정치적 보수였고, 산이 많아 농경지가 협소한 탓에 소규모 자영농 위주 사회였던 TK가 정치적 진보 포지션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수립된 TK 중심 군사정권 하에서 30여 년간 개발독재가 진행되면서 두 지역의 입장이 서로 뒤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27]
5. 정치적 역사
5.1. 일제강점기~제2공화국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는 진보 및 사회주의 세력이 맹위를 떨쳤던 지역이었으며, 특히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상당수가 TK 지역 출신이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공산당 초창기 인물이자 6.10 만세 운동 주도자 중 하나였던 권오설이 있었고,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와 박상희의 친구인 황태성도 해방 후 대구 10.1 사건에 참여한 공산주의자였다.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반(反)이승만 정서가 가장 강한 야도(野都)였기에, 이승만이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승리한 1956년 3대 대선에서도 진보 성향 조봉암이 가장 높은 득표율(44.7%)을 올린 지역이었으며 동시에 치러진 부통령 선거에선 야당 후보 장면(54.4%)이 여당 후보 이기붕(36.2%)에게 가장 큰 격차로 승리한 지역이었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에 사형선고를 내린 4.19 혁명의 시발점이었던 2.28 학생민주의거도 경북고 등 대구 지역 고교생들이 주도한 것. 4.19 이후 제2공화국 시기에 '혁신정당'[28] 사회대중당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도 대구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부터 TK 지역에서 좌파 세력이 득세했었던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먼저, 평야가 드물어 협소한 농경지 탓에 대지주 계층이 형성되지 않아 일찌감치 자영농 등 자립적 경제주체가 많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지주와 양반 계층을 식민지배의 조력자로 삼았는데, 이런 흐름에서 대구경북은 비교적 밀려났기에 지역 양반들을 중심으로 반일 및 항일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근대적 교육기관이 경성과 평양, 그리고 대구에 주로 설립되면서 신문물을 체화한 젊은 지식인 계층의 형성에 유리했다. 젊은 고학력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들은 진보적 사고방식을 갖기 쉬웠으며, 지역 사회에서 리더로 활동한 이들도 많았기에 지역 여론에 큰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6.25 전쟁 당시 대구는 인민군의 점령지가 아니어서 국군의 북진 이후 일어난 '친북 부역자 색출' 명목의 숙청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진보 좌파 세력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
5.2. 제3공화국
이랬던 TK의 정치 성향이 1960년대부터 점차 우경화하기 시작한 원인에는 역시 박정희의 집권을 빼놓을 수 없다.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며 대구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린 후 1963년 5대 대선에 출마해 합법적인 대통령으로서 집권하고자 했다.사실, 쿠데타로부터 불과 1년 전 이승만 독재 정권을 몰아낸 4.19 혁명의 시발점이었던 대구 시민들이 4.19의 힘으로 들어선 합법적 민주 정권을 금세 뒤집어 버린 박정희를 보는 시각은 참으로 복잡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엄민영, 김성곤, 백남억, 이효상, 박준규 등 TK 인사들이 대거 합류했고, 이들은 TK 지역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신라 대통령'을 내세웠으며,[29] 결정적으로 투표 5일 전 윤보선측 정치인 김사만이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 김일성이 오면 만세를 부를 거다"라는 종북몰이성 실언을 저지르면서 진보적인 TK 표심이 박정희에게 결집하는 효과가 일어나버렸다. 결국 TK 지역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을 상대로 55.64% 대 36.12%로 낙승을 거두었으며 이는 1, 2위 후보의 표차가 1.55%에 불과할 만큼 치열했던 대권 경쟁에서 박정희가 신승을 거두는 데 큰 힘이 됐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수출주도산업화를 내세우며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축' 중심 개발에 착수했고, 대구와 경북 남부는 그 수혜를 받아 눈부신 경제성장의 과실을 맛볼 수 있었다.[30] 1960년대부터 경공업 육성에 따라 대구의 섬유 산업이 활황을 이뤘고, 1970년대에는 포항제철소, 구미국가산업단지 등이 TK 지역에 들어선 게 그 예시다. 덕분에 대구권은 수도권과 부산권에 이어 대한민국 3위의 광역경제권으로서 위상을 굳혔다.
그렇다 해도 이 당시 TK가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수준의 보수 텃밭은 아니었다. 1967년 6대 대선, 1971년 7대 대선에서도 각각 64.01%, 75.62%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여주며 박정희에게 힘을 실어주긴 했지만, 1971년 대선 약 한 달 후에 치러진 8대 총선에선 대구 지역구 5석 중 4석을 야당 신민당이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경북에서도 19석 중 5석을 야권이 가져가는 결과를 보여주면서 영구집권을 꾀하는 보수 여권에 대한 경고도 함께 나타냈다. 1971년 대선과 총선 결과는 박정희가 더 이상 선거를 통한 정권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만들어 1년 후 10월 유신을 단행하는 원인이 된다. 대선에선 박정희가 엄청난 정치자금을 투입했음에도 김대중과 고작 득표율 8%차로 이겼고, 총선에서도 공화당이 승리하긴 했지만 신민당과의 득표율은 48.8% 대 44.4%로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를 총선에서 신민당이 휩쓸었다는 사실은 박정희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 야권에서 제기되던 호남소외론이 1971년 7대 대선에서 전남 출신 김대중이 야당 후보로 등판하면서 본격화됐고, 이 과정에서 여야 양측이 지역 감정을 자극하면서 영호남 지역갈등이 한국 정치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야당이 주장한 바의 요지는 "영남 군사정권 때문에 호남이 인사에서 차별받고 개발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이었으며,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 광주 유세 당시에는 김대중을 포함한 신민당 의원 6명이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에 이후락의 중앙정보부는 1963년부터 밀어왔던 '신라 대통령론'에 더해 1971년 대선 투표 3일 전 영남 지역에 "호남에서 영남 상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 전단을 살포하며 선동하는 등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행태를 보였다.
5.3. 제4공화국~문민정부
이렇듯 영호남 지역갈등이 정계에서 점차 가열되기 시작했지만, 1972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단행해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버렸고 1973년에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도 중대선거구제로 바꿔버리면서 이후 약 15년 동안 제도권 정치에서 지역 감정이 일단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1979년 박정희 피살 사건으로 발생한 권력 공백을 틈타 전두환이 군사반란으로 집권하면서 TK 군사정권이 재창출되긴 했으나, 전두환 정부 시기까지도 대구는 야도(野都)로서의 면모가 남아 있었다. 일례로 1985년 12대 총선을 들 수 있다. 이 선거에서 전두환 정부의 여당인 민주정의당 득표율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낮았던 지역이 대구였으며, 야권 신한민주당과 민주한국당의 득표율(48.2%)이 민주정의당과 한국국민당의 득표율(44.3%)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대구시민야구장에서 열린 1986년 한국시리즈(해태 vs 삼성) 3차전 경기에서 발생한 해태 타이거즈 버스 방화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영호남 지역 감정은 선거 결과로 뚜렷이 나타나지만 않았을 뿐 수면 아래에서 곪아가고 있기도 했다.
TK가 오늘날처럼 보수정당의 텃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산물로서 치러진 13대 대선부터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떠나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독자출마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6월 항쟁의 열기가 아직 식지도 않은 상황에서 '민주주의 vs 독재' 구도로 치러질 전망이었던 대선이 'TK vs PK vs 호남 vs 충청' 지역주의 구도로 흘러가게 됐다. 이런 지역 구도뿐만 아니라 KAL기 폭파 사건으로 안보에 민감한 보수 표심이 결집하면서 대구 출신 노태우에게 대구는 득표율 70.69%, 경북은 득표율 66.38%의 몰표를 줬다.
이후 노태우가 13대 총선에서 형성된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 3당 합당을 성사시켜 민주자유당이 탄생하면서, 지역 구도는 하루 아침에 4자 구도에서 '호남 vs 비(非)호남(TK+PK+충청)' 구도로 격변했다.
흥미로운 점은 1990년대 중반에는 민자당-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계 수권정당이 TK 지역에서 부진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문민정부 시기와 겹치는데, 이는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이래 30여 년간 줄곧 보수정당의 주류를 차지해왔던 TK가 김영삼이 득세한 이후 PK에게 밀려나고 있었기에 김영삼에 대한 반감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김영삼의 의지에 따라 하나회 숙청, 전·노 구속 등으로 TK 민정계 인사들이 힘을 잃고 있었다. 여기에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에서 대통령의 실언,[31] 진상 조사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미온적인 태도도 TK 민심을 악화시켰다.
1993년 재보선(동구 을)와 1994년 재보선(수성구 갑)에서 모두 민주자유당 후보가 20%대 득표율을 기록하며 무소속 후보에게 참패했고, 1995년 1회 지선에서도 무소속이 초강세를 보였으며 대구시장 선거에선 민주자유당 조해녕 후보가 4위로 낙선하는 일도 발생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박철언, 박준규, 김복동 등 옛 민정계 출신 인사들을 내세운 충청권 보수정당 자유민주연합이 약진하여 대구 지역구 13석 중 8석을 획득해 1당으로 올라섰다.[32] 언론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반(反)YS 비(非)민주계 TK 정서라 표현하기도 했다.
5.4. 국민의 정부~이명박 정부
그러나 대구의 가출은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1997년 15대 대선을 기점으로 다시 주류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특히 이 선거에서 TK와 지역 감정 때문에 험악한 관계인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 야당 후보로 나서면서, 반(反)YS 정서보다 더 극심한 反DJ 정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 한동안 대구 시민의 지지를 받았던 자민련도 DJP연합으로 김대중과 공조하면서 당시 최대 야당인 한나라당에게 민심이 쏠린 것도 있었다. 게다가 안 그래도 1990년대 초반부터 쇠락하기 시작한 TK 지역 경제가 1997년 외환 위기로 큰 타격을 받으면서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김대중이 외환 위기를 이용해 TK 향토기업(청구건설, 우방건설 등)을 탄압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나돈 것도 상당한 파급력을 가졌다. 그리고 외환 위기로 인해 고도성장 시대가 끝이 나면서 전국의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강해졌고, 그 결과 15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이회창 지지 선언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등판했다.[33]2000년대엔 박근혜와 이명박 등[34] TK계 정치인들이 주류 보수정당의 헤게모니를 되찾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TK의 보수 성향이 강해졌다.[35] 특히 2000년대 후반엔 TK를 넘어 호남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한나라당이 장악했고, 2006년 지선-2007년 대선-2008년 총선에서 3연속 압승을 거두며 제6공화국 출범 이래 보수정당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던 때이기도 하다. 특히 박근혜가 출마한 2012년 18대 대선에선 TK가 무려 80.5%의 표를 몰아주며 박근혜 당선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참고로 이는 아버지가 TK에서 받은 최고 득표율(75.62%, 1971년 대선)을 뛰어넘는 수치이며, TK가 대선에서 누군가에게 이 이상 몰표를 준 역사가 없다.
5.5. 박근혜 정부
실질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해였던 2016년은 보수정당과 TK 입장에선 매우 다사다난한 해였고, 보수 진영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해였다. 이미 2015년부터 보수 진영 내에서 분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었다. 당시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은 원내대표직을 수행하면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발언, 국회법 개정 등을 놓고 친박 그룹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그 해 6월 갈등이 폭발해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는 발언으로 유승민을 공격하면서 청와대에 밉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유승민은 민정계 재선 의원 유수호의 아들로,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를 졸업한 TK의 성골 중 성골이었고 한때는 '원조 친박'으로 불렸던 인물이었으나 이 일을 계기로 박근혜와 완전히 멀어졌다.이때부터 새누리당 내에선 '친박 vs 비박' 구도의 계파 갈등에 불이 붙었고, 2015년 11월에는 박근혜가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 달라"는 발언을 하면서 진박 감별사라는 희한한 정치 신조어도 등장했다. '진박 감별사'는 쉽게 말해 총선 공천권을 쥔 친박 세력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판별해 진짜 친박에게만 TK 지역구 공천을 주겠다'는 것으로, 이는 도무지 2010년대 선진국의 수권정당에서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기에 TK 지역 민심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전국에서 122석을 얻는 데에 그쳐 더불어민주당에게 원내 1당 자리를 내어줘야 했다. 특히 대구에서 비박의 수장인 유승민이 동구 을에 무소속 출마해 생환했고, 북구 을에선 민주당 출신 홍의락이 당선되었으며 수성구 갑에선 민주당 소속 김부겸이 당선되면서 31년 만에 민주당 소속 대구 지역구 국회의원이 출현했다. 거기다 새누리당의 비례 정당 득표율도 53.06%로 과반을 겨우 사수한 탓에 새누리당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나마 경북은 새누리당이 전부 지켜내긴 했지만, 여기도 비례 정당 득표율이 60% 아래로 떨어졌으며 경산시에선 정의당 후보가 30%, 구미시 갑에선 민중연합당 후보가 38%를 득표했다는 사실은 경북에서도 보수 여권에 등을 돌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러한 여당의 총선 참패로 인해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이 도래했고, 2016년 가을에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정치 스캔들이자 최악의 국기문란 사태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TK에서도 콘크리트 지지층 붕괴가 나타났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TK가 박근혜에 대한 지지만 철회한 것이지, 박정희와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까지 철회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많았다. 게이트 발생 이후 타 지역의 국정 지지도가 꾸준히 0~4%를 유지하는 것과 달리, TK에선 박근혜의 검찰 조사 불응 후폭풍으로 잠시 3%로 떨어졌다가 바로 다음 주에 10% 내외까지 회복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 하지만 20~30대는 범야권인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이나 비박계 보수 바른정당으로 빠르게 이탈하고 있었다.[36]
5.6. 문재인 정부 초기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지게 된 5월 19대 대선에선 TK가 가장 주목 받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전국 단위 선거였기 때문에, 박근혜의 정치적 기반인 TK의 민심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분기점이었다. 결과는 표면상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득표율 47.6%)의 압승이었다. 전국 모든 권역에서 최저 34%였던[37]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이 TK에서는 21.75%에 그쳤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득표율이 그보다도 낮은 14.95%에 머물러 TK에서 전국 최하위 득표율을 기록했다.그러나 선거 결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막은 달랐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대구에서 45.4%, 경북에서 48.6% 득표율을 올리는 데에 그쳐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처음으로 보수계 수권정당이 TK에서 득표율이 과반 아래로 떨어졌다. TK 전체로 보면 2012년 18대 대선의 박근혜의 득표율에서 무려 33.4%p가 하락했다. 자유한국당만 보면 과반이 무너졌지만, 같은 보수 계열 후보인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득표율 10.6%을 차지했기에 이를 합산하면 보수 진영의 득표율이 57.7%에 이른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유일하게 TK에서만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의 득표율을 넘어섰다.
문재인 정부 출범 1주년 즈음해 치러진 2018년 7회 지선에선 홍준표 대표 휘하의 자유한국당이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대구시장과 경북지사를 지키긴 했으나, 1년 전 대선과 마찬가지로 내막을 들여다보면 한국당 입장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속출했다. 먼저,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박정희의 고향으로서 보수의 성지라 불렸던 구미시가 민주당에게 함락됐다. 또한 대구에서는 기초단체장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들이 모두 30% 이상 득표했고, 북구, 수성구, 달서구에선 40% 이상, 동구에선 당선된 한국당 후보와 2위 민주당 후보의 격차가 4.36%p에 불과했다. 경북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이 경산시와 청도군에선 30%대 중반, 영덕군에선 41%, 포항시에선 42%, 칠곡군에선 43%를 득표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기초의원 선거에서도 대구 최대 부촌인 수성구 의회에서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했고, 광역의원 선거에선 사상 최초로 민주당 소속 대구시의원이 4명 배출됐다.
해당 선거 이후 TK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다는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이미 2017년 19대 대선부터 예견된 일이었지만,[38] 2018년 지선에서는 1990년 3당 합당 이래 30년 가까이 '우리가 남이가'를 내세우며 정치적으로 TK와 연대해왔던 PK마저 더불어민주당이 완승했고, 북한과 인접해 반북 성향이 강한 특성상 1950년대부터 보수의 텃밭이었던 강원도까지 민주당에게 넘어가면서 고립이 더욱 심화됐다는 평가다. 이러한 현상을 꼬집은 표현이 TK 자민련이다. 게다가 보수 최후의 보루인 TK도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콘크리트 지지층이 붕괴되고 민주당 세가 강해지고 있음이 드러났기에, 향후 몇 년 내에 보수정당은 TK의 노년층과 농어촌 지역에만 의존하는 군소 정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까지 고조됐다.
5.7. 문재인 정부 후기~윤석열 정부
하지만 2019년 초 문재인 대통령이 개각을 단행하면서 장관 후보 7명 중 TK 출신을 단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아 본격적인 'TK 패싱' 논란이 일었고#[39], 3월에는 대구 칠성시장 기관단총 노출 논란도 발생하면서 'TK소외론'이 지역사회에서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여기에 2019년부터 부동산 정책 실패, 일자리 정책 실패, 조국 사태 등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보수층이 결집해 자유한국당의 지지도가 회복되는 추세를 보였다.특히 'TK소외론'에 쐐기를 박은 것은 2020년 2월 신천지발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로 대구·경북에서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대변인이 대구 봉쇄론을 언급한 사건이었다. 또한 공지영의 '투표의 중요성' 페이스북 게시글, 김어준의 '대구 신천지 사태' 발언 등 친민주당 성향 유명인들의 TK 조롱·비하 논란이 터진 것도 한몫 했다.
이 때문인지 그 해 4월 21대 총선에서 대구는 지역구 12석 중 11석을 미래통합당에게 몰아줬고,[40]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확보한 TK 지역 교두보 두 곳을 모두 상실했다. 경북에서도 통합당이 13개 지역구를 싹쓸이 하면서 아직 이 지역의 보수세가 건재함을 알렸다. 비록 전국 결과를 보면 보수 진영이 103석을 차지해 개헌저지선만 겨우 지키는 수준의 참패를 당했지만, PK와 강원도의 보수세를 일정 부분 회복하면서 TK의 정치적 고립이 2017년, 2018년보다는 다소 완화됐다.
2022년 20대 대선에서는, 본래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었으나 2019년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반문으로 돌아서 2021년 국민의힘에 입당한 윤석열을 지지했다. TK는 윤석열에게 득표율 73.9%의 지지를 보내[41] 2위 후보와 득표율 차이가 0.73%p에 불과했던 초접전 대선에서 정권교체 5년만에 보수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윤석열 정부 하에서 치러진 2024년 22대 총선에서도 국민의힘이 TK에서 2연속 의석 싹쓸이에 성공했고, 경산시를 제외하면[42] TK 모든 지역구에서 60% 이상 득표해 종합 69.8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6. 관련 문서
[1] 다만 언론의 실제 용례를 보면, TK를 단순히 대구·경북과 동의어로 쓰는 것도 쉽게 찾을 수 있다.[2] 물론 전라도나 충청도 내에서도 세부적으론 차이가 있다. 김대중의 연고지인 전남 서부권(목포, 무안, 신안 등)과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한 광주의 경우 아직도 동교동계-호남계의 영향력이 크지만, 이러한 흐름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전남 동부권(여순광 등)과 전북에선 친노-친문에 대한 선호도가 더 높다. 또한 신민주공화당-자유민주연합-자유선진당으로 이어지는 충청권 보수정당은 김종필의 연고지인 대전·충남이 충북보다 더 많이 지지했다. 그러나 세부적으론 어찌 됐든 전라도는 강경 반(反)보수정당 성향에 민주당계 정당에 표를 몰아주는 것은 모두 같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고, 충청도는 김종필과 충청권 보수정당의 영향력이 사그라든 이후 보수계/민주계 수권정당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완전한 경합지역이 됐기에 현재로선 구분이 무의미하다. 즉, 삼남 지방 중 경상도만이 남과 북의 정치 성향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3] 2004년 17대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일으킨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로 대통령에 대한 동정 여론이 강해져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도 TK는 한나라당에 전 지역구 의석을 몰아줘 총 121석이라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줬다. 이후 2016년 가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보수정당이 궤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2017년 5월 19대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유일하게 낙승한 지역이 TK였고, 덕분에 선거 비용 보전은 받을 수 있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이라는 사상 최대의 압승을 거둘 때 TK는 미래통합당에 역시 전 지역구 의석을 몰아줘 개헌저지선은 지키게 도와줬다. 이처럼 TK는 보수정당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마다 '마지노선'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4] 실제로 태극기 집회를 주도한 우리공화당 등 강경 친박 극우정당의 주요 활동지가 TK였다. 또한 한국에서 대표적인 극우(대안 우파) 성향 커뮤니티로 여겨지는 일베저장소는 과거 본사를 대구에 두었기에(현재는 울산으로 이전) 그런 인식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들이 추앙하는 대통령들이 이승만을 제외하면 모두 TK 계열이기도 했고. 물론 이런 극단적 성향은 TK에서도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고 소수에 불과하다.[5] 2위는 3명(김영삼, 노무현, 문재인)을 배출한 PK다. 이 셋의 공통점은 한때 민주당에 몸 담았거나(김영삼) 민주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노무현, 문재인)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반면 TK가 배출한 대통령은 전원 보수정당 소속이었다.[6] 야마구치는 과거 조슈 번으로서 19세기 중엽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본 제국 시대를 연 주역이었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아베 신조 등 근현대 일본 역사에서 굵직굵직한 총리들을 여럿 배출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TK 출신 대통령들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를 시작으로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에 이르는 30여 년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이끌었지만, 한편으론 독재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인권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를 억압하기도 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대 한국 사회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두 지역 모두 보수적 성향을 강하게 띠며, 선거에서도 보수정당의 확고한 텃밭으로 꼽힌다.[7] 박근혜 탄생 후 박정희 일가는 직업군인 가족 특성상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1956년 4월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 정착했고,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 이후 청와대에서 1979년까지 거주했다.[8] 그래서인지 대표적인 TK 정치인임에도 말투는 동남 방언보단 충청 방언 억양이 가미된 서울 방언에 가깝다. 충북 옥천 출신인 어머니 육영수에게 영향을 받은 듯.[9] 이명박은 TK 출신 대통령들 중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다. 육군 장성 출신인 경우(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혈연을 통해 군사정권 시대의 정치적 자산을 이어받은 경우(박근혜)와 달리 군과 무관한 기업인 출신이었고, 정계 입문도 이들과 상극이었던 김영삼을 통했다. 게다가 대학생 시절 박정희 정부의 한일수교에 반대해 6.3 항쟁에 참여한 적이 있기에 운동권 출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발독재 시대 고평가, 강경한 반북 · 반공 성향, 영남 지역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일명 '정통 보수'와는 일부 차별화되는 점이 있었다. 신자유주의를 경제 정책에 적극 반영했고, 기존 보수를 '올드라이트'(Old Right)로 구분 지은 뉴라이트 인사들을 등용했으며, 서울시장 경력을 바탕으로 수도권을 정치적 근거지로 삼았던 것 등이 그 예다. 다만 이명박도 근본적으론 관치 및 재벌 경제를 옹호했고, 경제제일주의와 권위주의적인 리더십, 영남 편향 인사('고소영' 인사) 등 다른 TK 대통령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평도 있다.[10] 그 이유는 바로 박정희가 이룬 경제적 성과 때문이다. 박정희 집권 이전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매우 피폐해져 전형적인 개발도상국 내지 최빈국 상태였지만, 박정희 집권 이후 절대적 빈곤율이 1961년 66.9%에서 1979년 11.2%로 크게 개선됐다. 또한 수출주도산업화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행, 과학기술 및 중화학공업 육성, 경부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운동 실시, 녹화사업 추진 등을 통해 매우 빠른 속도로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고 경제 성장을 이끌어 훗날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하는 기틀까지 마련했다. 이 때문에 당시를 경험한 세대에게 박정희 향수가 강하게 남았고,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엔 이것이 더욱 강화돼 2012년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박정희의 공포정치와 부정부패, 병영국가화 등 독재자로서의 어두운 면이 재조명되면서 평가가 다소 하락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보수 진영 대통령 중 유일하게 여론조사에서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를 압도하는 대통령이며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 정치인과 지지자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박정희에 대한 긍정 평가는 공통된다. 2023년 한국갤럽 조사 기준 박정희에 대한 긍정 평가가 가장 높은 지역은 TK로 무려 74%에 달했다.#[11] 비슷한 예로 호남이 있다. 호남은 한국에서 범진보진영에 대한 지지세가 가장 압도적인 지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남에서 페미니즘/성소수자/다문화 등 진보적 아젠다가 보편적으로 지지 받는 것은 아니다. 농촌 사회의 전통이 깊고 젊은 인구 유출로 평균 연령도 높으며, 무엇보다 개신교 신자가 많기 때문에 대체로 사회·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편이다. 예를 들어, 2017년 한국갤럽 조사에선 '동성애도 사랑의 한 형태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44%로 전국에서 가장 높게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정당과 지독한 악연이 있는 지역이 호남이기 때문에 보수정당이 받는 표는 매우 적다. 또한 개신교 신자가 많음에도 한국 기독교 우파는 5.18에 대한 북한 개입설, 무장폭동설 등 왜곡된 주장을 설파하는 극우 성향인 경우가 흔하고 보수정당과의 연결고리가 강한 탓에 호남에서 거의 지지받지 못한다. 아직 한국에선 서구권에서만큼 문화적 이슈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기도 하고.[12] 해당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집의 경우 '종교적인 이유'가 40.6%로 가장 많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매우 높은 확률로 개신교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신교에서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고 원칙적으로 금하기 때문. 호남 지역의 낮은 제사율 또한 높은 개신교 신자 비율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3] 대구는 진보 성향 후보가 20~30% 차이로 중도·보수 성향 후보에 밀려 낙선하며, 경북은 7회 지선의 이찬교 후보를 제외하고는 아예 진보 성향 후보가 출마를 하지 않았다.[14] TK 지역 이외에 중도·보수 성향 후보만 당선된 지역으로는 대전광역시가 있다.[15] 이황 본인도 50세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와 도산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다.[16]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홉 곳의 서원 중 다섯 곳이 대구와 경북에 위치한다.[17] PK 서부, 즉 경남 서부는 농어촌이 많고 TK 지역과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군사정권의 지지 기반이었다. 지금도 TK 다음가는 보수정당의 텃밭으로 여겨진다.[18] 비수도권 5개 광역시의 토박이 비율을 보면 부산과 대전은 25~30%, 울산은 35~40%로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광주는 45~50%, 대구는 약 55%가 3대 이상 거주해온 토박이에 해당한다. 호남과 TK에서 그나마 토박이 비율이 낮은 편인 여순광과 전주, 포항, 구미도 인구의 35~45%를 토박이가 차지하고 있다. 한술 더 떠 전남, 전북, 경북의 농어촌 지역에선 토박이 비율이 90~95%를 넘는 곳이 대부분이다.[19] 2023년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호남에서 전두환에 대한 긍정 평가는 4%에 불과하지만 부정 평가는 무려 90%에 달했다.#(반면 TK는 37%가 전두환을 긍정 평가해 전국 평균인 18%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다만 해당 조사에서 박정희가 호남의 긍정 평가를 46%나 얻은 걸 보면, 이곳에서도 반보수정당 정서와는 별개로 박정희 향수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가 전남에서 10%, 전북에서 13%를 득표했는데, 이는 호남 지역 노년층의 15% 정도가 박근혜에게 표를 준 것이 컸다. 1971년 7대 대선의 박정희를 끝으로 박근혜 이전까지 다른 보수정당 대선 후보들은 호남에서 두 자릿수 득표율을 얻는 데에 실패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고무적인 성과였다.[20] 최근 20대 대선에서 윤석열의 호남 20대 득표율은 18% 정도로, 호남 전체에서 윤석열이 기록한 득표율 13%보다 높다. 전국적으로 20대 남성에서의 윤석열 득표율이 이재명의 약 1.5배였음을 고려하면, 호남 20대 남성의 윤석열 득표율은 22% 내외로 추정된다. 4~5명 중 1명 꼴로 윤석열에게 표를 준 셈이다.[21] 일례로, 광양제철소 사택이 위치해 외지 출신이 많은 전남 광양시 금호동에선 20대 대선 당시 윤석열이 28.15%를 득표했다.[22] 제6공화국 시대에 활동한 정치인들만 봐도, TK 출신 민주·진보 진영 정치인은 유시민(참여정부 보건복지부장관), 추미애(더불어민주당 대표, 문재인 정부 법무부장관), 김부겸(문재인 정부 행정안전부장관, 문재인 정부 국무총리), 이재명(20대 대선 더불어민주당 후보,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대권주자로도 언급되는 인물들이 여럿 나타났으나, 호남 출신 보수 진영 정치인 중 일정 지위 이상 올라간 이는 이정현(새누리당 대표), 심재철(제20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 정도가 끝이다.[23] 그렇기에 호남 이외의 민주당 우세 지역에서 지역내 제2당은 대체로 보수정당인 것과 달리 호남에선 진보정당이 제2당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지방선거에서 두드러진다.[24] 일례로 1990년대 중반 민주자유당-신한국당의 주도권을 김영삼이 차지해 PK가 새로운 주류가 되자 TK 지역의 반(反)김영삼 정서가 고조된 상황에서 충청권 보수정당 자유민주연합이 TK 출신 정치인들을 내세워 대구에서 선전했던 사례가 있다.[25] 대표적인 예가 2002년 16대 대선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호남의 지지를 업고 대통령까지 당선된 노무현이다. 이후로도 18대 대선~19대 대선에서 문재인, 20대 총선에서 안철수의 국민의당 돌풍, 20대 대선에서 이재명, 22대 총선에서 조국의 조국혁신당 돌풍 등 영남 출신을 밀어주는 전략을 보이고 있다.[26] 총선만 봐도 TK 지역구는 보수의 텃밭이라는 이유로 중앙의 일방적인 컷오프와 낙하산 공천이 빈번하다. 때문에 매번 공천 잡음이 끊이지 않는데, 대표적인 예가 '진박 감별사' 논란이 뜨거웠던 2016년 20대 총선이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도 대구에서 무소속 3석, 민주당 1석이 나온 것을 제외하면 TK 전역을 새누리당이 손쉽게 석권했다. 같은 선거에서 문재인의 호남 홀대 논란으로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토 여론이 강해진 호남은 또 다른 민주당계 정당인 국민의당에게 23석을 몰아줬고, 전남 순천시와 전북 전주시 을은 새누리당 후보를 당선시켰으며 더민주에겐 겨우 3석만을 남겨준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27] 군사정권의 저곡가 정책으로 농업이 사양화의 길을 걸음에 따라 호남의 많은 농민들이 출향해 수도권이나 영남으로 이주했지만, 반대로 영남에는 포항제철소, 구미국가산업단지,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 온산국가산업단지, 창원국가산업단지 등 여러 공업 지대가 형성됐다. 덕분에 한강의 기적 시대에 혜택을 톡톡히 누린 영남은 점차 보수화한 반면, 호남은 호남소외론이 확산되던 차에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저지른 학살이 쐐기를 박아 반(反)보수정당 정서가 매우 강해져 진보 포지션으로 굳어졌다.[28] 당시에는 진보정당보단 혁신정당이라는 표현이 통용됐다.[29] 1963년 9월 19일 대구 수성천변 유세가 대표적이다. 박정희측 찬조연사였던 이효상은 "이 고장은 신라 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 임금님을 모시자"고 연설했다.[30] 반면 경북 북부는 개발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31] "대구 사고는 몇 사람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아까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76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클린턴의 인기가 올라가더라". (1995. 5. 2.)[32] 다만 경북에서는 여촌야도 현상 탓인지 자민련이 11석 중 2석을 얻는 데에 그쳐 신한국당이 1당을 차지했다.[33] 정작 이 당시 박근혜의 남동생 박지만, 이복언니 박재옥, 사촌언니 박영옥, 작은이모 육예수, 사촌형부 김종필 등 박정희 일가의 다른 구성원들은 대부분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을 지지했다. 그 덕분인지 직전 대선에선 김대중의 TK 득표율이 대구 7.82%, 경북 9.62%에 그쳤으나 15대 대선에서 대구 12.53%, 경북 13.66%로 상승했다. 물론 DJP연합에 김종필, 박태준 등 박정희 정부 인사들이 많이 합류한 것도 한몫 했다. 한편, 김대중이 박근혜를 영입하려 여러 차례 애썼다가 끝내 불발됐다는 흥미로운 비화도 있다. 만약 실현됐다면 지역 구도를 넘어 대한민국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34] 박근혜는 출생지는 대구이긴 하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TK 보수의 대부인 박정희고, 본인 지역구도 대구 달성군이었으며 지지 기반도 TK 지역이기에 이론의 여지가 없이 TK계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이명박은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이나 해방 직후 부모와 함께 귀국하여 어린 시절 대부분을 경북 포항시에서 보냈기에 대체로 TK계로 분류된다. 하지만 정작 TK 지역에서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을 역임한 적은 없고,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는 종로구였으며 서울시장 경력이 정치적으로 가장 큰 자산이었던 만큼 수도권 정치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명박과 정치 성향은 다르지만 비슷한 케이스로 박원순이 있는데, 이쪽은 경남 창녕군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까지 살았지만 서울시장으로서 PK보단 서울에 정치적 기반을 둔 인물이었다.[35] 문민정부 후기에서 국민의 정부 시기까지 신한국당-한나라당을 지배했던 이회창이 1997년 대선에 이어 2002년 대선에서도 패하면서 이회창계는 당내 헤게모니를 완전히 상실했다. 또한 2004년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를 일으키면서 그 역풍으로 최병렬 등 범YS계가 힘을 잃었고, 충청권 보수정당 자민련도 덩달아 몰락해 김종필까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반면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기에 추진해 많은 호평을 받은 청계천 복원사업, 서울 시내버스 개편을 앞세워 대권주자로 발돋움했고, 박근혜도 탄핵 역풍 속에서 17대 총선을 지휘해 기대 이상의 결과를 거두면서 대권주자로 조명받기 시작했다.[36] 실제로 2017년 5월 치러진 19대 대선 결과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대구 20대에서 19.2%, 30대에서 22.3%를 득표하는 데 그쳤고, 경북에서도 20대 18.3%, 30대 27.1%라는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특히 대구 20대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30.9%), 바른정당 유승민(22.7%)을 더 많이 지지해 홍준표가 3위에 불과한 걸로 나타났다. 그래도 홍준표의 전국 20대 득표율이 8.2%에 불과했던 걸 감안하면 TK에서는 타 지역에 비해 선방한 편이다.[37] TK 다음으로 문재인 득표율이 낮았던 권역은 강원(34.2%)과 PK(37.8%)였다.[38] TK를 제외하면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이긴 지역은 경상남도뿐이었으며 그마저도 득표율 격차가 1%p도 되지 않았고, 낙동강 벨트에 속하는 경남 동부권에선 49.5% 대 29.17%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크게 패했다.[39] 대구 수성구 갑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장관도 비판했다.[40] 남은 한 석은 수성구 을인데, 여기는 공천 탈락에 반발한 홍준표가 미래통합당을 탈당하고 출마해 당선된 경우이기에 사실상 통합당 당선자나 마찬가지였다.[41] 특히 20대 대선에서 윤석열의 대구 득표율 75.14%는 2012년 18대 대선의 박근혜(80.14%)와 2002년 16대 대선의 이회창(77.75%)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한다. 이는 실로 대단한 기록인데, 정치 경력이 1년도 되지 않고 TK에 연고도 전혀 없는 윤석열이, TK 정치의 상징인 박정희의 딸로서 엄청난 정치적 후광을 받은 박근혜, 국민의 정부 시기 약 4년 동안 한나라당의 제왕적 총재로 군림하면서 보수층에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진 이회창에 준하는 지지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42] 여기도 범진보 진영 입장에서 마냥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아니, 다른 지역보다 더 처참했다. 민주당 후보는 아예 내지도 못했고, 진보 성향 후보 2명이 출마했지만 범보수:범진보 득표율 합계가 85:15로 완벽하게 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