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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12:33:59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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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Oklahoma City Bombing
<colcolor=#fff><colbgcolor=#000000> 발생일 1995년 4월 19일
[dday(1995-04-19)]일
발생 위치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 시티 알프레드 P. 뮤러 연방 정부 청사
유형 트럭 폭탄 테러, 대량살인, 백색 테러
원인 반정부 정서, 웨이코 포위전에 대한 보복
테러 주동자 티모시 맥베이[2], 테리 니콜스
사망 168명
부상 680명
1. 개요2. 피해3. 처벌4. 테러 이후5. 테러범들의 근황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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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factsBombers.jpg
테러의 주범인 티모시 맥베이(Timothy James McVeigh)와 공범 테리 니콜스(Terry Lynn Nichols)

1995년 4월 19일 미국 오클라호마오클라호마 시티의 앨프리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Alfred P. Murrah Federal Building)에 가해진 폭탄 테러.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 국내에서 일어난 테러 중 가장 인명피해가 컸던 폭탄 테러이다.

테러를 일으킨 티모시 맥베이(Timothy McVeigh)와 공범 테리 니콜스(Terry Nichols), 마이클 포티어(Michael Fortier) 셋은 미합중국 육군 훈련소 동기였다. 포티어의 부인인 로리 포티어(Lori Fortier) 또한 범행에 가담하였다. 주범 맥베이는 걸프 전쟁에 참전하여 훈장을 받은 경험도 있었다. 이들은 극단적 반연방주의 및 극우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파일:mcveigh terry.jpg
(왼쪽 맥베이, 오른쪽 테리 니콜스. 1988년 군대에서 찍은 사진)

테리 니콜스는 당시 34살에 입대했기에 부대에서 'grandpa'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군대에서 형성된 둘의 관계는 91년 전역 뒤에 더욱 친밀해졌다. 맥베이는 경비원 일을 잠깐 했지만 곧 그만뒀고, 이 둘은 특별한 직업없이 총, 화학 무기, 무정부 사상 등에 지대한 관심을 쏟으며 시간을 보냈다.

1992년의 루비 능선(Ruby Ridge) 사건, 1993년 웨이코 포위전 당시 연방정부의 강경진압에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1994년부터 오클라호마 연방정부청사를 목표로 잡고 테러를 위한 사전답사를 벌였다. 이들은 연방정부청사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면서 다른 지역에 대한 피해는 최소화하기 위해 벽면 대부분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주차장이 자리잡은 연방청사 북쪽을 목표로 설정했다.

장소 설정 후 맥베이는 동료들과 폭발물 제조에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여 임대 창고에 보관하기 시작하는데, 1994년 9월 30일 캔자스 주에 있는 비료 공급업체에서 23kg 질산암모늄 포대 40여개를 구입하였다. 이후 캔자스 주 폴린에서 열린 NHRA 드래그 레이싱 시리즈 이벤트의 연료 공급 업체에서 니트로메탄과 하이드라진을 구입하려 했지만 연료 공급업체의 의심으로 실패하였다.

NHRA 챔피언십 투어의 다음 라운드는 텍사스 주 에니스에 위치한 텍사스 모터플렉스에서 열린 치프 오토 파츠 네셔널스(Chief Auto Parts Nationals)였는데, 멕베이는 여기에서 오토바이 레이서로 가장하여 그와 몇몇 동료 바이커들이 경주에 필요하다는 구실로 니트로메탄을 구입하려고 시도하였고, 여기서도 굉장한 의심을 사며 거절당하지만,[3] 결국 연료 공급업체의 부사장이 3개의 니트로메탄 드럼통을 판매하였다.

당초에는 하이드라진질산암모늄을 이용한 Astrolite G 라는 폭발물을 제조할 계획이라고 하였으나, 하이드라진의 매우 높은 가격으로 상기된 니트로메탄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만약 이 방법을 사용했더라면 기존 폭발의 약 2배의 위력이 나오므로 피해가 더욱 커질뻔 했다.

추가로 멕베이는 캔자스주의 한 채석장에서 160kg의 "Tovex" 라는 광산용 젤형 폭약과 수백개의 뇌관도 훔쳐서 보관중 이었다. 채석장에는 많은양의 ANFO 폭약도 있었지만, 위력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고, 따로 공급책이 있었기에 훔치지 않았다.

사건 발생 이틀 전 임대 창고에 보관했던 동료들이 구해온 질산암모늄 비료 포대 수십개와 니트로메탄과 경유를 라이더 렌탈 트럭에 싣고 Geary Lake 주립공원 주차장으로 향해 준비해둔 드럼통 안에 9개는 질산암모늄과 니트로메탄, 나머지 드럼통 3개는 경유를 혼합하기 시작했다. 이때 폭발력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트럭 벽면쪽으로 드럼통을 모두 배열시켰다. 또한 폭발의 화염을 증대시키기 위해 아세틸렌 가스통을 트럭에 싣기도 하였으며 훔친 160kg의 광산용 폭약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제조한 폭발물의 중량은 드럼통을 포함해 3200kg이 넘었다. 이때 트럭 한쪽으로 하중이 집중되어 이동중 전복되거나 최소한 기울어진게 티가나서 걸릴수도 있었다.

점화장치는 운전석까지 구멍을 뚫어 폭죽에 쓰이는 도화선을 이중으로 비전기식 뇌관에 연결하였고, 광산용 폭약이 먼저 폭발하게 설계하였다. [4] 하나는 5분용, 하나는 3분용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때 조수석에 폭발물을 따로 빼놓았는데, 점화장치가 문제가 생길경우 권총으로 쏴 자폭할 용도였다.

사건 당일 1995년 4월 19일 맥베이(Timothy McVeigh)는 폭약을 실은 트럭을 타고 연방정부청사로 향했다. 해당 날짜는 웨이코 포위전이 벌어졌던 날짜에 테러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오전 8시 57분, 운전석에 연결해둔 점화장치에 불을 붙였으며, 이후 두번째 점화장치를 작동시켰다. 오전 9시 1분에 연방정부청사 앞에 트럭을 주차시켰고, 멕베이는 걸어서 현장을 빠져나갔다[5]. 오전 9시 2분 도화선이 다 타들어가자 연결된 160kg의 광산용 폭약이 폭발하며, 연쇄적으로 대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만에 일어난 사건이라 세계는 또 다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2. 피해

폭발의 위력은 매우 강해서 폭발한 자리에는 폭 9m, 깊이 2m의 구덩이가 파였고 수 km 떨어진 곳의 지진계에서도 리히터 규모 3.0의 지진이 감지될 정도였다. 폭발로 일어난 충격파가 연방정부청사 유리창을 전부 날려 버렸고 건물의 3분의 1이 붕괴되었다. 그 외에도 반경 16블록 내에 있던 건물들이 폭발의 위력으로 파괴되거나 유리창이 깨졌다. 폭발 위력은 TNT 2,300 kg을 터트린 것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차량 80대가 폭발로 불에 타면서 2차 폭발이 일어나 피해가 더 커졌다.

인명 피해도 상당해서 168명이 사망하고 68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중 99명이 연방 건물 직원이었고 연방청사 내에는 탁아소도 있었기 때문에 19명의 어린이 희생자도 나왔다. 맥베이는 체포된 뒤에 테러 당시 폭발 지점 인근에 보육시설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고 증언했으나, 한편으로 웨이코 포위전 당시에도 여자와 아이들이 사망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해서 크게 비판받았다. 한편 FBI는 그가 당시 범행장소 근처에 보육시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무시하고 테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작은 미스터리가 있는데, 공식적인 사망자는 168명이나 조사를 진행하던 중 추가로 다리 한 구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다리는 기존 사망자들 중 누구의 DNA와도 일치하지 않았기에 이름 없는 169번째 사망자거나 이미 다리 없이 묻어 버린 8명의 사망자 중 한 명의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폭발 후 소방관이 부상을 입은 Baylee Almon(1994.04.18~1995.04.19)이라는 아기를 안아 든 사진이 유명한데 이 사진은 1996년 퓰리처상을 받았다.[6] 사진 속의 아기는 부상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이송된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아기가 이제 갓 돌에서 하루 지난 어린아이였다는 점이다.

테러 전 니콜스와 맥베이의 대화를 보면 이들은 이 폭발로 사망하는 소방관이나 여타 공무원을 스타워즈스톰 트루퍼에 빗대어 악의 제국에 충성했으니 그들에게도 죄가 있다는 식으로 말한 바 있다.

3. 처벌

대형 참사를 일으킨 맥베이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체포되었는데 주 경찰이 고속도로를 순찰하다가 번호판이 없는 차를 보고 차를 돌려 세워서 검문하는 도중에 주위에서 불법 무기를 발견하여 체포하였다.

맥베이는 군 출신인데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당했는데 "연방정부는 악이지만 주 정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극단적인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7] 덕분에 처음 체포한 경찰들은 맥베이가 폭탄 테러를 일으킨 범인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고 청사에 마약 단속국 사무실이 있었던 점을 근거로 마약 단속에 대한 보복이나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후속 테러 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곧 그가 테러의 진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후 테리 니콜스와 마이클 포티어 역시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맥베이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는 토마스 제퍼슨의 유명한 문구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를 먹어야 한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가 인쇄되어 있었고 재판 과정에서도 맥베이는 본인의 행위가 미국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는 식으로 정당화했다. 그러나 법정이 내린 결론은 맥베이와 그 일당은 '자신의 비뚤어진 신념에 빠져 무고한 사람 수백 명을 죽고 다치게 한 전형적인 테러리스트'라는 것이었다.

파일:8002917.jpg
(맥베이의 사형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에서 아버지 윌리엄 맥베이(맨 왼쪽)와 여동생 제니퍼 맥베이[8]가 참관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법원은 1997년에서 1998년에 걸쳐 주범이자 테러 실행자인 맥베이에게는 약물주사형 형식의 사형, 공범이자 테러 모의 및 준비에만 가담한 니콜스에게는 희생자 한 명당 1회로 총 168회 종신형을 중복 선고[9], 역시 비슷한 범죄를 지었으나 죄를 인정하고 법정에서 증언을 한 포티어는 법정에서 협력한 점을 고려하면서도 죄질이 나쁜 점을 들어 징역 12년과 당국에 미리 테러를 경고하지 않은 점을 들어 7만 5천 달러의 벌금을 선고했다. 포티어의 부인 로리의 경우 맥베이가 트럭을 빌리는 데 필요한 위조면허증을 만드는 데 협조하였는데 포티어가 자신의 형감면과 부인의 무죄감면을 대가로 증언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 2001년 6월 11일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폐쇄회로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주범 맥베이의 사형이 집행되었다.[10] 니콜스는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형은 비록 참관인이 희생자들의 유족들로 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1936년 이후 65년만에 처음 집행된 공개처형이었고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38년만에 처음 집행된 사형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한 일반적인 사형 집행 관행과 달리 이례적으로 1심 선고 4년 만에 아주 신속하게 이뤄진 점도 논란이 되었다. 사형 반대론자들은 맥베이가 사형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테러를 저지르고 순순히 체포되기까지 한 점 등을 들어 사형제도가 정말 사형이 마땅하다고 인정될 만큼 죄질이 나쁘고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범죄 예방 효과가 없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맥베이가 사형을 당하던 날 연방 교도소 사형장 밖에서는 사형 집행을 환영하는 집회와 규탄하는 집회가 동시에 열리기도 했다.

멕베이는 사형 확정 이후에도 전혀 반성하는 태도가 없었고 사형 집행 직전에야 테러 당시 사망한 유아나 일반인 등 무고한 죽음에 대해서 유감의 표현을 남기기는 했으나 본질적인 책임은 연방정부에 있고 연방정부가 악이라는 주장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았으며 이를 보여주듯이 사형 집행 전 유서로 '나는 내 운명의 주인(I am the master of my fate)'라는 구절로 유명한 윌리엄 헨리의 시 '인빅투스(Invictus)'를 써서 남겼다.

4. 테러 이후

오클라호마 테러 발생 이후 미국 정부는 연방청사에 대한 경비 강화와 건물 설계 변경 등을 지시했다. 이 대처로 비슷한 테러 시도가 수 차례 있었지만 전부 저지당했다.

테러를 당한 연방정부청사는 철거되었으며 해당 부지에는 추모공원이 생겼고 지금도 추모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은 한동안 득세하던 미국 극우 및 백인우월주의, 반연방주의 진영이 크게 비판받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 테러는 단순히 티모시 멕베이 한 개인의 범죄가 아닌 미국 사회에서 조직적으로 성장한 극단주의 세력을 간과한 결과라는 인식이 강했고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있었으며 이후에도 오클라호마 테러 이전의 위세를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간혹 잊을 만하면 일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인종주의 증오범죄 혹은 반연방 테러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테러리스트' 하면 '아랍인'만을 연상하던 미국인에게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을 위해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훈장을 받은 백인'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남겼고 후에 집필된 맥베이의 평전 역시 <미국인 테러리스트[11]>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한편 R&B 그룹 Color Me Badd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Remember when>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맥베이는 사형 집행 전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유나바머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우편폭탄테러범 시어도어 카진스키를 만나 친분을 쌓은 바 있다고 한다. 카진스키는 맥베이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글로 쓰기도 했다.# 카진스키는 맥베이가 머리 좋고 사교적인 청년이었고 인종차별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인종과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맥베이가 저지른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 대중에게 민병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평했다. 하지만 카진스키의 이런 증언은 신빙성이 낮다. 그 이유는 실제 티모시 맥베이는 미군 복무 시절부터 "화이트 파워" 라는 백인우월주의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사 입고 다닌 데다 유색인종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과 인종차별 표현 사용으로 징계를 먹기도 하는 등 군복무 시절부터 인종차별적인 행태를 보였다. 자기랑 똑같이 무고한 사람이나 테러로 죽이는 테러리스트 범죄자 동족이라고 쉴드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5. 테러범들의 근황

니콜스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12]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엄중한 감시 하에 20년 넘게 복역 중에 있으며 포티어는 수사당국과 사법부에 적극 협력한 점이 인정되어[13] 원래 선고받은 12년형에서 감면된 7년 반만인 2006년 1월 20일에 출소하였으며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현재는 새로운 신분을 받고 사법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어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하다.[14]

한편 위키피디아에 나온 니콜스의 근황에 의하면 그는 지금도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꾸준히 재심 청구를 하고 있는데 2005년에 테러와 관련해 맥베이를 적극적으로 도운 제3의 인물이 있다는 주장을 하며 재심을 청구하기도 했으나 증거가 없어 기각당한 바 있으며, 이후에도 맥베이와 관련해 잊을 만하면 그럴듯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주장을 늘어놓으며[15] 재심을 청구하고 있다고 한다.

2020년 테리 니콜스의 친아들 조슈아 니콜스(Joshua Isaac Nichols)[16] 강도, 절도 등의 혐의로 당국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조슈아는 그 이전에도 마약 등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조슈아의 여자친구 Nadine씨는 "오클라호마 테러가 일어났을때 조슈아는 12살이었는데, 사건직후 조슈아 역시 FBI조사로 인해 상당 기간 학교에 결석해야 했으며,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아버지의 한 일 때문에 학교에서 'bomber'라는 별명으로 놀림당했으며 급우들에게 얻어 맞기도 했다. 도저히 학교에 정상적으로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이 조슈아의 인생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라며 안타까워했다. 링크

2024년 한 주간지에 테리 니콜스가 죽었다는 소문에 관한 기사가 올라왔다. 링크 기사의 결론은 "죽었다는 공식적인 이야기는 없으니 살아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구글에서 자동완성검색으로 "terry nichols still alive" "terry nichols 2023" 등의 검색어가 자동완성되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대중들이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맥베이는 이미 죽은지 오래되었으니 자연스레 생존 가해자인 니콜스에게로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맥베이의 아버지 윌리엄 빌 맥베이는 맥베이가 처형된 이후로도 가끔 언론에 모습을 비췄는데, 2015년, 2020년에 The buffalo news라는 주간지와 인터뷰를 한적이 있다.[17] 또한 오클라호마 테러로 딸을 잃은 버드 웰치라는 희생자 아버지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2020년 Grace from the rubble 이란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링크

6. 관련 문서



[1] 폭탄 테러 후 파괴된 연방 정부 건물.[2] 지금도 미국인 극우 테러리스트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이다.[3] NHRA 경기 면허도 없었으며, 해당 경기에는 니트로메탄으로 구동되는 오토바이도 없었고, 보통 1~5갤런(3.78~ 약 5리터)정도만 구입하는데 55갤런(약 210리터) 드럼통 3개 분량이나 원하는 점에서 의심을 샀다.[4] 질산암모늄 폭발물은 일반 뇌관으로 쉽게 폭발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5] 걸어서 이동중에 폭발이 일어났으며, 혼란한 틈을 타 거리가 떨어진곳에 미리 준비한 차량을 타고 도주하였다[6] 해당 사진의 수상자인 기자 찰스 포터는 "명예롭지만, 파티와 샴페인으로 축하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I'm honored to win, but this is not necessarily the time for parties and celebrations and champagne bottles)라며 소감을 밝혔다고 전해진다.[7] 사실 미국인들 중에 미국 연방정부가 너무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 중에서도 심한 사람들은 연방정부를 절대악 그 자체로 본다. 맥베이의 경우는 다소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미국인들 중에 자기네 주를 남의 동네인 다른 주들도 포함된 연방보다 우선해서 여기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다. 이런 경향이 강한 지역이 바로 텍사스로, 텍사스는 텍사스 공화국이라는 엄연한 독립 국가로 미국과 별도로 유지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부심이 다른 주에 비해서도 훨씬 강하다.[8] 맥베이의 사형이 집행된 2001년에 미국에서 교사로 재직중이라는 뉴스가 있었다. 링크, 2023년 현재에도 교사로 근무중인것으로 목격되고 있다. 링크[9] 테리 니콜스의 어머니 Joyce Wilt#는 테리 니콜스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재판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링크 니콜스가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쉽게 조종당하는(manipulated) 성향이 있어 맥베이에게 쉽게 조종당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맥베이가 니콜스에게 테러를 함께하지 않으면 가족을 해치겠다고 협박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그대로 가해자 어머니의 주장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PC방 살인사건의 가해자 김성수의 어머니 역시 매우 비슷한 행동을 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니콜스가 아스퍼거 증후군까지는 아니어도 조용하고 수줍움 많은 일종의 'nerd' 성격이었다는 것은 어느정도 맞아 보인다. 니콜스의 고교 동창과 첫번째 부인인 Lana walsh 역시 비슷한 증언을 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Joyce는 니콜스의 재판에 거의 빠짐 없이 참석하고 오클라호마 테러의 희생자 가족들 사이에서 가해자 부모로써 평정심을 유지한채 재판을 경청하는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왔다. 또한 FBI의 수사에서 절차적으로 위법한 부분을 발견해내기도 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나는 이 사건 전에는 FBI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10] 특이하게도 마지막 식사로 2파인트(906ml) 분량의 민트초코 아이스크림만을 주문했다. 또 사형 전에 토미 페이지Paintings on my mind , A shoulder to cry on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1] American Terrorist: Timothy McVeigh & The Oklahoma City Bombing[12] 피살자 한 명당 한 건씩 계산하여 총 161회에 걸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지만 사실상 한 번이나 100번이나 죽을 때까지 깨끗한 지옥에 가둬두는 건 동일하기에 큰 의미는 없다. 감형의 여지도 없다.[13] 실제로 미국에서는 일반적인 범죄에 대한 처벌이 엄격한 대신 사법부에 협력하는 등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 제공이나 협상을 한 범인들에게 의외로 관대한 처벌이 내려지곤 한다. 찰스 맨슨이 벌인 연쇄살인행각에 가담한 린다 카사비안의 경우는 다른 가담자 3명과 맨슨이 사형을 선고받은 와중에도 아예 기소가 면제되었으며 제러드 크루즈 사건에 가담한 성인 6명도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대로 아동 집단 성폭행이라는 사상 초유의 범죄에 대한 처벌에 걸맞지 않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미국은 사법거래가 합법이다.[14] 이 때문에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그의 근황은 출소 이후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타당한 이유가 없지는 않은데 만약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질 경우 그의 배신으로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된 데다 사형까지도 당할 처지인 니콜스가 모종의 수를 쓸 수도 있는 데다(미국 사법부도 이를 잘 알기 때문에 그를 외부와의 연결이 거의 불가능한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 가둬놓은 거지만) 맥베이 일당의 사상에 동조하는 다른 반연방주의자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15] 주로 맥베이의 역할을 강조하거나(이미 죽은 상황이라 반박을 못 하니까) 제3의 공범이 있다고 말하는 식으로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는 주장이다. 받아들여질 경우 형량이 다소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16] 테리 니콜스는 결혼을 두 번 했고 친자녀가 총 3명이 있다. 첫번째 부인인 Lana walsh는 테리가 부동산 중개업자로 근무했을때 만났던 여인으로 조슈아는 이 둘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이다. 그 후 이혼하여 1990년에 필리핀인 Marife Torres Nichols 사진 와 재혼하였고 여기서 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Marife와는 우리나라 남자들이 동남아 여자와 결혼하는 것과 비슷하게 국제결혼 중개업소를 통해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 Marife는 오클라호마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도 맥베이와 알고 지내던 관계였으며, "맥베이와 니콜스와의 관계가 너무 친밀해 자신이 질투심을 느꼈다(jealous). 맥베이가 나와 니콜스와의 관계에서 한걸음 떨어져 주길 바랐다" 며 법정에서 맥베이와 니콜스와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영어가 서툰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필리핀인 Marife는 오클라호마 테러와는 무관하였지만 어쨋든 테러 당시 니콜스의 공식 부인이었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고 자신도 FBI 조사를 위해 호텔에서 수일간 감금당하며 강도높은 신문을 받았고 사람들의 협박편지를 받는등 고초를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그후로도 그녀는 수없이 열린 니콜스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다녀야 했는데, 그녀의 증언은 대체로 거짓없이 중립적이었다. 때때로 니콜스에 유리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검찰에 유리한 것들이었다. 니콜스에 대한 원망은 표현하지 않았다. 니콜스의 사형 여부를 결정하는 공판에서는 "그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척 혼란스럽습니다"라고 증언함으로서 배심원들의 동정심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녀는 사건 후 약 8년 뒤인 2003년 니콜스와 공식 이혼하였다.[17] 그는 골프, 볼링, 정원관리 등을 취미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교회와 재향 군인 행사, 지역 소방서, 골프 토너먼트, 빙고 모금 행사에서 자원 봉사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준 많은 친구들이 있었기에 힘든 지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다. "나는 '빌 맥베이입니다' 라고 말하며 재킷을 입고 돌아다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티모시 맥베이의 아버지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말합니다. ··· 그것은 단지 일어난 일이고 나는 그것을 숨기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Timothy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만 그의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 중 누구도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Tim의 바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