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전쟁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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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 Bosnian War | ||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 | ||
기간 | ||
1992년 4월 6일 ~ 1995년 12월 14일 | ||
장소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
원인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부의 종교 갈등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 충돌 | ||
결과 | ||
데이턴 협정 | ||
영향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해체 및 보슈냐크계-크로아티아계 구성국과 세르비아계 구성국으로 이루어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립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 발생, 주로 보슈냐크인에 대한 학살 평화협정 준수 여부에 대한 감시를 위해 NATO군 배치 및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고위대표 파견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1992년 10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크로아티아| ]][[틀:국기| ]][[틀:국기| ]]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1992년 5월) [[틀:깃발| ]][[틀:깃발|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 [[스릅스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
(1992년 10월~1994년 3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1992년 10월~1994년 3월) [[크로아티아| ]][[틀:국기| ]][[틀:국기| ]]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1992년 5월~1994년 3월) [[스릅스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 ]]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 |
(1994년 3월~1995년 1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크로아티아| ]][[틀:국기| ]][[틀:국기| ]]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1994년 3월~1995년 12월) [[스릅스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 | |
지원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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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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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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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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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불명 사망자 5,100명 |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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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구도 요약
3.1. 1992년 4월 ~ 9월(세르비아인 vs. 나머지)3.2. 1992년 10월 ~ 1994년 5월(세르비아인 vs. 보슈냐크인 vs. 크로아티아인의 삼파전)3.3. 1994년 5월 ~ 1995년 11월(세르비아인 vs. 나머지)
4. 역사4.1. 전쟁의 시작4.2. 사라예보 포위전4.3. 스레브레니차 학살4.4. 제파 포위전4.5.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4.6. 포차 학살4.7. 1993년 아테네 합의(밴스-오언 안) 시도4.8.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발발4.9. 뒤집힌 전황4.10. 종전
5. 전쟁범죄와 인종청소6. 매체7. 여담8. 관련 문서[clearfix]
1. 개요
보스니아 전쟁 관련 사진자료 | |
죽어가는 시민들을 발로 차는 세르비아 의용방위군 대원. 1992년 4월 1일 보스니아 비옐리나. | 내전으로 인해 불타는 어느 한 시골 마을. |
세르비아계의 포격으로 불타는 무역 센터 빌딩. | 저격수 거리로 출발하는 UN군들 |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에 의해 파괴된 모스타르 다리. | 저격수를 피해 도망치는 여성을 위해 호위하는 UN 평화유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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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 War In Mostar Bosnia | 보스니아에서 최악의 강간 피해를 입은 지역인 '그르바비차(Grbavica / Грбавица)'. 해당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EBS 지식채널e 측에서 다시 편집한 영상이다. |
20세기 후반 역사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세계에 상당한 충격을 준 전쟁으로, 400만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이들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40%의 집들이 방화와 폭격 등으로 초토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25∼30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나 아직도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다. 전쟁의 피해는 초기에 집중되었으며, 실제로 1995년 6월 빌 클린턴이 앨 고어 부통령과 함께 CNN의 앵커인 래리 킹과 대담을 나눴을 당시 그는 "전쟁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만명이 초기 1년 동안에 희생당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대량학살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3년 반 동안 지속되었던 보스니아 전쟁은 대량의 난민사태와 민간인 학살, 유엔보스니아평화유지군(UNPROFOR)과 나토군의 군사적 개입, 비정부 민간 구호단체들의 개입, 그리고 집중적인 언론보도 등의 이전의 전쟁들과는 다른 양상을 드러냈고, 이로 인해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보스니아 전쟁을 '새로운 전쟁'이라 부른다. 이후 국제 분쟁의 해결에서 국가주권보다 인명 보호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인도적 개입', '보호 책임(R2P)' 개념이 제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유고슬라비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다양성은 종종 민족 갈등을 유발하거나 격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특히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등의 민족 간 갈등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왔다.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독일 제국의 패배로 인해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면서, 유럽의 정치구도가 크게 변했다. 슬라브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이 크게 발전했고[3], 그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아온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 보슈냐크인(보스니아 무슬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에 합류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탄생하게 되었다.[4]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왕국 탄생 이후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슈냐크 민족들을 계도한다는 명분으로 선민의식을 드러냈고,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보슈냐크인은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신한 새로운 주인으로 모실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를 통합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 후에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이 발생했다.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적 변화와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종종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는 경제적인 불안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실업률과 빈곤이 증가했다. 결국 이는 민족주의와 갈등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결국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1991년에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분리주의를 선포하며 국내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다.
3. 구도 요약
대표적인 구도만 정리한 것이다. 사실 1992년 ~ 1995년 보스니아 전쟁 기간 사이에 아래에서 적힌 나라들 이외에도 갖가지 지역 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보스니아 정부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도 하고, 주변 다른 국가와 통합하는 등 그야말로 3년간 보스니아는 붕괴 후 혼란기였다.보스니아 독립 선언 이전에 세르비아인이 세르비아 자치주(SAO) 독립을 선언했던 것만 해도 보스니아 국내에 무려 11곳이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스릅스카 공화국에 1992년 상반기 중으로 통합하긴 했으나, 잔여 SAO들을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완전히 통합하는 것은 1995년 3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크로아티아의 공세에 밀려가던 시점까지 가야 할 정도로 시간이 한참 걸렸다.
크로아티아인은 헤르체그보스니아 이외에 다른 중소 세력들이 엄청 많았고 이들을 통합하여 헤르체그보스니아를 만드는 것도 1993년 2월까지 가야 했다.
보슈냐크인 중에서는 전쟁의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서보스니아 자치주처럼 아예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과 결탁하고 같은 보슈냐크인의 등에 총칼을 꽂아버리는 세력들도 엄청나게 나왔다.[5]
3.1. 1992년 4월 ~ 9월(세르비아인 vs. 나머지)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보슈냐크인 + 크로아티아인) vs. 스릅스카 공화국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세르비아인 + 세르비아의 물밑 지원)
3.2. 1992년 10월 ~ 1994년 5월(세르비아인 vs. 보슈냐크인 vs. 크로아티아인의 삼파전)
- 스릅스카 공화국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세르비아인 + 유고슬라비아의 물밑 지원) vs.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보슈냐크인) vs.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크로아티아인) 3파전
3.3. 1994년 5월 ~ 1995년 11월(세르비아인 vs. 나머지)
미국과 유럽연합이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을 압박하여 체결한 워싱턴 조약에 따라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 합병하였다. 다만 헤르체그보스니아는 1998년 5월 31일까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 명목상 존속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보슈냐크인 + 크로아티아인) vs. 스릅스카 공화국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 서보스니아 자치주(세르비아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은 1994년 5월 워싱턴 조약 확인 이후 스릅스카/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했다.
4. 역사
일자별 전황 경과. 처음에 나오는 영상은 독립 선언 직전인 1991년 10월 14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자치 의회에서 벌어진 라도반 카라지치와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설전 영상이다.
4.1. 전쟁의 시작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붕괴·분열 과정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이 벌어진 곳은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도 크로아티아도 아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였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보스니아가 최약체였고, 어느 정도 국내 민족 구성이 지역을 단위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와 달리 보스니아는 이슬람(보슈냐크계) - 가톨릭(크로아티아계) - 정교회(세르비아계) 신자들이 한 지역 내에서도 뒤섞여 통혼 혼혈하며 살았기 때문.유고슬라브인은 통틀어서 남슬라브 민족으로 사실 크로아티아부터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에 이르기까지 언어는 표기 문자만 다르지 똑같았고, 이들을 구분하는 단위가 바로 종교였다. 즉, 종교를 배경으로 민족이 쪼개져 버린 것이다. 이런 유고전의 특수성 때문에 보스니아 전쟁은 초기부터 종교 전쟁으로 흘러가, 자기 종교가 아닌 타 종교 인원들에 대한 집단 학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여 1990년 각 구성국에 자유 총선을 시행했다. 1990년 보스니아 총선 결과,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민주행동당(이슬람)이 31.1%,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민주당(정교회)이 26.1%,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가톨릭)이 16.1%, 보스니아 공산당이 12.3%, 유고슬라비아 개혁연합이 8.9%를 얻었다. 1990년 총선 결과가 곧 내전의 시작이나 다름이 없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방 탈퇴로 시작된 연방 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연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91년 10월 14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의회에서 벌어진 라도반 카라지치(세르비아 민주당)와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민주행동당, 보슈냐크인)[7]의 비방전. 카라지치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겠다고? 어디 독립 선언 한 번 해 봐라. 무슬림은 자기네를 지킬 힘이 없으니 내전 나면 다 죽여버리겠다."라고 대놓고 위협했다. 대놓고 세르비아인들이 보슈냐크인에 대한 학살, 공격에 나서라고 하는 부분이다. 이에 이제트베고비치는 "세르비아인들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들도 유고슬라비아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가 아무리 무슬림들을 공격해도 무슬림 사회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이때 이제트베고비치는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들인 슬로베니아인(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인(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인(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인(코소보), 헝가리인(보이보디나 자치주), 무슬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슈냐크인을 비롯한 유고슬라비아 전체)을 직접 언급한다.[8] 이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치하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발언이었다.
▲ 1991년 전쟁 발발 이전 당시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알기 쉽게 정리하자면 빨강색 계열이 세르비아계(정교회), 초록색 계열이 보슈냐크계(무슬림), 파랑색 계열이 크로아티아계(가톨릭)이며 하얀 선 동편이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던 지역이다. 아래의 흰 선이 데이턴 협정으로 확정된 양 세력 간의 경계이다. 경계선 동쪽 세르비아계 영역에 다수 거주했던 보슈냐크인들이 주된 희생자가 되었으며, 이후 세르비아계의 영역 확장으로 원래 크로아티아-보슈냐크계 지역이었던 곳들도 큰 전쟁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이전의 분쟁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각각의 분쟁 양상은 판이하였다는 점이다. 슬로베니아는 민족 분포가 각각 슬로베니아계(90%)로 세르비아계의 비율이 적었으며, 크로아티아의 경우 크로아티아계(89%)가 다수였지만 세르비아계도 소수 정도나마 분포하고 있었으면서도 두 민족 간의 주거 지역도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어[9] 전쟁의 성질이 지역 내 민족 분쟁보다는 사실상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전선 쟁탈전이었다. 이와는 달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교를 믿는 보슈냐크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이라는 세 민족종교집단이 일정한 주거 지역이 없이 내부적으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서 분포하고 있었다.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에도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했으나 세르비아계가 반대하면서 분란이 격화되었다.
결국 긴장이 고조되어 가던 1992년 1월 9일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공화국을 선포했고[10]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 이틀에 걸쳐 연방 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의 분리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세르비아계가 투표를 보이콧한 가운데 전체 투표율 64%, 독립 찬성 99.7%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근거로 3월 3일 보스니아 인구의 2/3를 차지하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며 유고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계가 이에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3월부터 4월까지 각 지역에서 세 민족 간 소규모 충돌이 일어난다.
연방의 주도국이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992년 3월 10일 유고슬라비아의 정부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보스니아에서 철수시키고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는 철저한 기만술이었다. 실제로는 인민군 인원 중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 본토 출신만 보스니아 밖으로 내보내고 (보스니아 주둔 인민군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한)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인들은 1992년 3월부터 4월 6일 라도반 카라지치의 세르비아계 괴뢰국인 스릅스카 공화국 건국 선언 직전까지 세르비아계 민병대로 소속만 바꾸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양의 장비들이 인민군에서 이들에게로 넘어간 것은 덤.
미군과 러시아군의 보호 하에 마을을 떠나는 150명의 보슈냐크인들. 그 주변을 400명의 세르비아계 청년들이 둘러싸고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군 사령관은 100m 간격을 두고 두 집단이 충돌하지 않게끔 갈라 놓았다. |
마침내 운명의 4월 6일 미국과 유럽 공동체(EC, 이후 유럽 연합)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보스니아의 연방 이탈이 사실상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되자 이와 동시에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라도반 카라지치는 미국과 유럽 공동체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 승인을 확인하고, 4월 6일 14시(현지시간) 연방[11] 주도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원 하에 세르비아 접경 도시인 팔레(Pale)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공화국의 이름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8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뗀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렇게 카라지치는 봉기를 일으키고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의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스릅스카 정부군 및 민병대를 활용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전쟁 초반에는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가 함께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양상을 띄었으나[12] 시간이 지나면서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 역시 각자 장악한 지역의 통제권과 전쟁 범죄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자체적인 공화국인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Hrvatska Republika Herceg-Bosna)을 수립하고 궁극적으로 크로아티아와의 통일을 노린 크로아티아계와 이를 거부한 보슈냐크계가 서로를 공격하면서 상황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크로아티아계 지역을 노리던 크로아티아 역시 보슈냐크계에 대한 지원을 끊고 헤르체그보스니아를 지원해 보슈냐크계를 공격하였다. 결국 보다못한 미국의 압력으로 크로아티아가 굴복해 1994년 7월 워싱턴 협정과 스플리트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수립되면서 보스니아 전쟁의 하위 전쟁인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사상자가 1만 명 이상이 나왔는데 62%가 보슈냐크인이었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였다. 이 전쟁 중에 크로아티아인들은 보슈냐크인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이 크로아티아인들을 지원한 크로아티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도 전쟁범죄자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 전쟁 중기인 1994년의 인구 구성. 세르비아계(붉은색) 영역이 전범위로 넓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유일한 예외로 형제국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지도 남쪽의 크로아티아계(파란색) 영역이 일부 확장되었다. 보슈냐크인이 많았던 지역을 크로아티아계가 차지한 경우도 있다. 크로아티아가 본국에서의 전쟁을 수행하기도 여력이 부족하여 세르비아를 제대로 막지 못한 탓에 세력 간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졌고,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은 스릅스카군이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이 전쟁은 세르비아가 이하에 서술될 반인륜적인 전범 짓거리만 안 했어도 승리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전쟁이었다. 특히 이 학살은 보슈냐크계, 크로아티아계만 학살당한 것이 아니라 동족이었던 온건파 세르비아계도 학살한 것이 문제였다.
4.2. 사라예보 포위전
자세한 내용은 사라예보 포위전 문서 참고하십시오.4.3. 스레브레니차 학살
자세한 내용은 스레브레니차 학살 문서 참고하십시오.4.4. 제파 포위전
스레브레니차 학살 이후 다음 타겟은 근처의 마을인 제파였다. 제파 역시 얼마 안가 스릅스카군에게 점령되었고, 현재까지 스릅스카 공화국의 영토로 남았다.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스레브레니차와 다르게 제파에서는 우크라이나 평화유지군의 주도로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철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
4.5.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12세밖에 안 된 소녀까지 유린당하고 6개월 난 아이를 가진 19세 소녀 어머니는 7명의 세르비아계 병사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트르노폴레(Trnopolje)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증언#
보스니아 북부에 위치한 프리예도르 지역에서 스릅스카군이 1992년 부터 1993년 까지 자행한 인종 청소로 보슈냐크인, 크로아티아인 합쳐서 3,000여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고 한다.트르노폴레(Trnopolje)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증언#
스릅스카군은 특히 강제 수용소들을 건립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인종 청소를 수행했으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음식도 공급받지 못한 채 무자비한 고문과 강간을 당하면서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 외에도 블라시치(Vlašić) 산에 위치한 코리차니(Korićani) 절벽에서는 보슈냐크인, 크로아티아인 남성 200명 이상이 대량 학살 당했으며 이는 보스니아-세르비아계 경찰 특수부대 "빨간 베레모"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한다.
토마시차(Tomašica)에서는 2013년에 1,000명 규모의 대규모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어서 세계를 다시 한 번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국제 형사 재판소는 이를 근거로 전범들에 대한 추가 기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라트코 믈라디치와 스릅스카군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명확한 증거였다.
해당 학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 중 하나인 프리예도르 시의회 부의장인 밀로미르 스타키치(Milomir Stakić)는 2007년, 징역 40년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복역 중이다.
4.6. 포차 학살
보스니아 동부에 위치한 마을 포차(Foča)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1992년 부터 1994년 까지 자행한 대량학살로 보슈냐크인 1513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고 전해진다.심지어 스레브레니차에서와 같은 강간 수용소까지 설립되었는데 특히 '카라만의 집'에선 보슈냐크 여성들이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의해 강간 당하고 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포차 지역의 문화유산까지 대거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저질렀다.
- 해당 학살로 인해 기소된 전범들
- 드라간 가고비치(Dragan Gagović): 라도반 카라지치에 의해 포차의 경찰서장으로 임명된 자로 포차에서의 학살 및 강간 수용소, 추방 등을 진두지휘하고 본인이 직접 자행했다. 당연히 지명수배되었던 인물로 1999년, 평화유지군 소속 프랑스군이 그를 포위했고 가고비치는 최후의 발악으로 자신의 자동차로 프랑스군을 치려고 했다가 그대로 프랑스군의 총탄에 맞고 지옥에 떨어졌다.
- 조란 부코비치(Zoran Vuković):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여러 차례 자행한 강간과 고문 혐의로 기소된 인간 말종이다. 2001년에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어서 2008년에 조기 석방되었다.
- 빌랴나 플라브시치(Biljana Plavšić): 스릅스카 공화국 2대 대통령을 역임한 거물 중 하나였지만 다수의 인종 학살을 조장하고 계획한 혐의로 2003년에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2009년에 조기 석방되었다. 참고로 그녀는 전쟁 이전에는 사라예보 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치는 저명한 유학파 교수였다고 한다.
- 몸칠로 크라이슈니크(Momčilo Krajišnik):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세르비아 민주당을 창립한 스릅스카의 정치 지도자로 포차 학살을 비롯한 다수의 학살을 기획·허용한 혐의로 2006년에 수감되어 2013년에 조기석방되었다. 그는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감염되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끝에 사망했다고 한다.
4.7. 1993년 아테네 합의(밴스-오언 안) 시도
보스니아 전쟁은 딱 한 번 합의가 돼서 멈출 뻔했다. 이게 바로 1993년 아테네 합의, 즉 밴스-오언 안이다.- 1993년 5월 아테네에서 제안하였고, 구 유고슬라비아 구성국들이 모여서 합의했던 밴스-오언 안(Vance-Owen Plan)이다. 비교 대상인 노란색은 1995년 데이턴 조약에 따른 현재의 경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스릅스카 공화국, 브르치코 행정구)이다. 빨간색은 세르비아계, 초록색은 보슈냐크계, 파란색은 크로아티아계이며 노란색은 공동 거주구역이다.
밴스-오언 안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10개 주로 나누고, 해당 주의 주 민족을 설정하되 지역의 주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이 자기 집으로 다시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하였다.[13]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구성국을 두지 않고, 주보다 권한이 낮은 광역자치단체만 설치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단일국가체제를 구상하였다. 민족 갈등을 억제하기 위해 20여개 국가로 구성된 UN 평화유지군을 3만 명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전쟁 발발 초기였던 1992년과 1993년 초까지는 스릅스카 공화국을 지원했으나 1993년 5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뤄진 아테네 합의[14]를 적극 주장하여 스릅스카 공화국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와 엄청난 마찰을 빚기도 했다. 관련 영상. 해당 영상을 보면 밀로셰비치는 밴스-오언 안, 아테네 합의가 아주 좋은 방안이라며 카라지치를 압박하였고,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 의회에 참석하여 해당 합의를 비준시키고 보스니아 전쟁을 그만 중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라도반 카라지치는 한 뼘이라도 늘리려는 영토에 집착했고 라트코 믈라디치는 의회에 갑자기 들이닥쳐 전황 지도를 보여주며 아테네 합의를 파기해 버린다.
밀로셰비치는 보슈냐크인의 독립 자체는 용인할 수 있어서 아테네 합의를 시도했으나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기에[15]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에 집중하는 대신 보스니아에서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초기 전쟁을 벌였다가 분리독립을 인정했던 슬로베니아와 같이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개입을 철회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에 집중할 것을 촉구했으나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는 무슬림 제거가 먼저이고 영토 문제에 대해서 양보할 수 없다며 아테네 합의를 파기해버린다. 그러자 밀로셰비치는 1993년 말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하고 세르비아 측의 군사지원이 사실상 중단됐다.
- 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1994년 4월 22일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라도반 카라지치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과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날짜 출처 사실 이 회담에서 카라지치는 밀로셰비치한테 전면적인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으나 밀로셰비치는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해 "1993년 아테네 합의(밴스-오언 안)을 걷어찬 대가로" 군사적 지원을 거절한 장면이다. 경제적 지원에는 합의했지만 밀로셰비치가 스릅스카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거부하였기 때문에 카라지치의 표정이 매우 안 좋다.
이렇게 밀로셰비치가 스릅스카 공화국을 손절한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은 보스니아 전쟁에서 수비와 점령지 내에서의 보슈냐크인 학살에만 집중하다가 나토군의 군사개입으로 폭격을 맞고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했다.
4.8.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발발
자세한 내용은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1992년 당시만 해도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스릅스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서 동맹관계였다. 하지만 점차 두 국가는 정치적 알력다툼을 겪으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야 만다. 특히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은 '두 개의' 보스니아 분할 계획을 발판으로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의 비율이 높은 서부 헤르체고비나와 포사비나주까지 병합해서 '대 크로아티아'를 설립하려는 야망이 있었고, 이는 보슈냐크계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스니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는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군대인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HVO)의 병력들을 보스니아군에 통합할 것을 요구했지만 크로아티아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당장은 둘 다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양측은 상호 요구 조건들을 일부 수용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자치안을 수용했다. 이 자치주 안에서는 크로아티아 국기, 크로아티아 화폐 디나르, 크로아티아어, 크로아티아식 교육체계가 수용되었으며 자체적인 군대와 경찰의 설립까지 허용되었고 수도는 모스타르로 설정되었다. 투지만은 그 대가로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 병력들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지휘체계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상호간 갈등이 근본적으로 봉합되지는 않았고 국제사회로부터 지원받은 보급품의 배분 문제, 인종 문제로 인해 양측의 균열은 깊어져 갔다.
갈등의 골은 결국 양측 사이에서 소규모 교전이 하나 둘씩 터지다가 1993년에 대규모 교전이 발생하는 것으로 확전이 되고 말았다. 전쟁 초기 우세했던 보스니아군은 하나 둘씩 크로아티아계 영토들을 장악하고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은 보스니아군을 피해 피난을 갔다.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 측 병력들도 반격을 가했고 그 과정에서 보슈냐크 주민들을 학살하고 눈이 뒤집힌 보스니아군 역시 크로아티아계를 향한 보복학살을 자행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HVO)가 계속 수세에 몰리자 결국 크로아티아 정규군이 직접 개입해 안테 로소(Ante Roso)를 HVO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재개편에 돌입했다. 1993년 말, HVO는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재편했고 보스니아군은 이를 돌파하는데 실패했다. 보스니아군은 무슬림 의용병까지 동원하여 1994년 초까지 대규모 공세를 했지만 손실만 보고 제대로 된 진격을 수행하지 못했다.
1994년 1월 24일, HVO 측은 트비기 94 작전으로 역으로 공세에 나섰고 요충지인 헤레(Here) 마을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면서 전략적 우위를 거머쥐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HVO 역시도 진격이 정체되면서 양측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때 보스니아 영내에선 이미 다수의 크로아티아 정규군들이 세르비아군에 대항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었고 프라뇨 투지만은 사태가 악화될 경우 해당 분쟁에 개입할 것이며 더 많은 병력을 파병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결국 국제사회는 양측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개입했고 1994년 3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워싱턴 협정이 체결되어 양측은 전쟁을 종결하게 되었다. 협정에 의하면 HVO측과 보스니아군이 점유하고 있던 영토는 10개의 자치주로 분할되었고 느슨한 형태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설립하자는 목표가 수립되었다. 이 협정은 1995년,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와의 공식적인 동맹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는 대규모 반격을 통해 그동안 우세하던 스릅스카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 측의 장군으로 참전한 슬로보단 프랄략은 다수의 보슈냐크인들을 학살한 혐의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되었으며 2017년, 항소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재판정에서 독극물을 복용하고 자살했다.
4.9. 뒤집힌 전황
전쟁이 시작되자, 1992년부터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 NATO 가입국의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신 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단계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신 유고 연방에겐 경제 제재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심지어 UN에서도 신 유고 연방에 대해 사실상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면서[16] 세르비아를 비롯한 신 유고 연방은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하지만 이런 외교적인 차질과는 별개로, 당시 서방이 가했던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금수조치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가 세르비아와 밀수, 밀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 당시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자행하는 전쟁범죄와 학살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르비아 애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경제 봉쇄를 통한 압력보다는 외교적 방법으로 전쟁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서방의 경제적 제재를 반대하는 등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단순히 태평한 소리는 아니었던 것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민주화 이후 급속한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지하경제가 크게 성행하고 있었고 중앙정부도 월급액수가 적던 상황이다보니 지하경제 융성에 대해 단속조차 하지 못했다. 헝가리도 이보다는 상황이 조금 낫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러다 보니 밀무역이 이루어져도 약간의 뇌물로 해결이 가능했고, 밀무역 단속이 제대로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물론 물가상승 문제는 세르비아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이미 1980년대 말부터 물가상승이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던지라 어느 정도 내성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르비아도 급속한 물가상승에는 도저히 못 버티고 특히 1994년 1차 화폐개혁이 실패로 돌아갈 정도로 물가상승률이 너무 높아지자 아예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독일 마르크에 페그시키는 방식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나서야 겨우 물가가 안정되었다.
한편 무기 금수조치는 세르비아 뿐만 아니라, 전쟁 당사자인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절박한 상황에 몰린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당시 미국과 서방 세계 국가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이들은 현장 관리만 맡는 소규모 군대였고 세르비아계 입장에서는 직접 공격만 안 하면 상관없었기에 전쟁 종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이었던 라트코 믈라디치는 고라주데, 사라예보, 비하치 세 도시만 점령하면 이제 전쟁은 끝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승리를 확신했으며 실제로 보스니아 공화국의 운명은 무척 위태로웠다.
1994년 12월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군이 보스니아에서도 공세로 전환한데다가, 1993년 밴스-오웬 안(아테네 합의)가 파기되면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다보니 1994년 10월 이후로는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은 영토를 점령하기보다는 점차 크로아티아군의 공격에 밀려나고 있었다. 1995년이 되면서 밀로셰비치가 지원을 중단한 세르비아계의 전력 약화는 눈에 띄는 수준이라, 보스니아 내 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국가 합병을 발표해야 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자신들의 점령지 내에 있는 보슈냐크인을 학살하는 데에만 집중하였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 심각했던 인종청소가 1993년~1994년에는 잠시 주춤하다가 1995년부터 다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995년 5월이 되자 스릅스카 공화국의 확장판 격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서슬라보니아 지역이 "플래시 작전"으로 크로아티아한테 점령당했고, 이때에 맞춰서 보스니아 내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군(크로아티아군)이 세르비아군을 공격하여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의 수도인 크닌과 스릅스카 공화국의 수도인 바냐루카를 잇는 고속도로를 1995년 6월 점령한다. 그러자 크라이나는 고립되었고, 스릅스카 공화국 서부지역은 원래부터 세르비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기에 스릅스카 공화국은 이 지역에 대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지 않던 상태라 크로아티아군의 공격에 비하치로 가는 길이 뻥 뚫려버린다. 그러자 스릅스카 공화국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사라예보 포위전을 강화하고 스릅스카 공화국 동부 지역에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제파 학살, 고라주데 압박을 강화하는 식으로 동부지역에만 집중했다. 서부 지역은 사실상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방어를 전담시키고 스릅스카 공화국은 아예 서부 지역에 대한 방어를 거의 포기해버렸다. 1995년 6월 초에 시도됐던 마지막 비하치 공성전도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아닌 크라이나군이 주도해서 시행했을 정도다.
사라예보 시장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인해 벌어진 참상. 피가 낭자하고 두개골로 보이는 뼈 조각이 널브러진 거리의 모습,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끔찍한 부상을 입고 간이 병원으로 끊임없이 실려오는 시민들의 모습, 충격을 받고 울부짖는 간호사의 모습이 담겼다.
1995년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사라예보 시장을 폭격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평화로운 일요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번화가 시장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포격으로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한 이 사건 때문에 국제적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던 것이다. 사라예보는 당시 양측의 경계였고, 전쟁 중 우세한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 포위되어 있었으나 수도라는 등의 이유로 전쟁 위협에서 벗어나 방치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깨지게 된 것이다.
4.9.1. 나토의 보스니아 전쟁 개입
스릅스카군에게 맹폭을 가하는 NATO군 |
1995년 8월 30일 ~ 9월 20일까지 NATO 소속 항공기들은 사라예보 일대에 배치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야포 진지와 물자 집적소, 통신시설을 집중 폭격했으며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의 핵심 시설도 덩달아 폭격의 대상이 되어 이로서 스릅스카 공화국의 진격은 저지당했다.
이에 세르비아계는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기존에 NATO군이 소규모, 방어적 위주로만 작전을 했기 때문이다. NATO군은 1992년 7월부터 마리타임 모니터 작전, 마리타임 가드 작전, 샤프 가드 작전을 통해 해상봉쇄를 실시했으며, 스카이 모니터 작전[17]으로 공중 감시를 수행하였고, 1994년 4월부터 수행한 디나이 플라이트 작전은 세르비아계에 대한 근접항공지원[18], 공중전[19]등을 수행하였으나, 나토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군의 시 해리어 FRS.1 가 이글라로 추정되는 맨패드에 격추되었으며, 2K12 쿠프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미 공군의 F-16C 도 격추[20]되는 등 기존 나토군의 작전은 세르비아계의 사기만 올려주고 큰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으로 인해 전황이 바뀐 셈이다. 본 대규모 공습으로 인해 프랑스 공군의 미라주 2000N 1대가 이글라의 공격에 추락하였다.
결국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UN군 포로들을 전략 거점에 묶어서 인간 방패로 삼았고 프랑스 평화유지군 사령관이자 UN군 사령관 베르나르 잔비엘 장군에게 '폭격을 계속하면 보스니아 민간인들과 UN군 포로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이미 여론은 세르비아에 불리하게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거기에 이웃한 크로아티아 공화국 영내에서는 미국의 후원으로 재정비된 크로아티아 공화국군의 '폭풍작전'이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의 직접적 개입이 힘든 상황이었기에 미국 국무부는 크로아티아군에게 미국 민간군사기업(PMC)을 알선해 주었고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 군대의 훈련을 MPRI라는 업체가 맡게 되었다. MPRI는 구성원의 상당수가 미군의 전직 고위 장성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의 훈련을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NATO의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남부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 분리주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붕괴되었고, 이 지역의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로 축출되었다.
이어서 미국 특사가 세르비아를 후원하던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을 만나 압력을 넣으면서 전쟁이 수습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옐친은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후원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도자에게 더 이상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회담에 응하라고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기만자'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세르비아 편을 들었으나, 사라예보와 고라주데에서 벌어진 참상으로 인해 반전된 여론에 밀려 세르비아에게 등을 돌렸고 세르비아인들은 최소한의 인도적 한계도 지키고 있지 않다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4.9.2. 보스니아군-크로아티아군의 대반격
나토군의 공습에 힘입어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은 양동 작전으로 대대적 반격을 가해 스릅스카와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을 하나 둘씩 격퇴하기 시작한다. 먼저 크로아티아 정규군과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HVO)는 1995년 7월에 여름 공세를 가해 스릅스카 공화국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연계를 차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95년 8월 4일 부터 폭풍 작전(Operacija Oluja)으로 대규모 공세를 가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멸망시켰고 스릅스카군에 의해 형성된 보스니아 비하치(Bihać)의 포위망이 붕괴되었다.사나 작전중 128mm 방사포로 스릅스카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보스니아군 |
기세를 힘입어 1995년 9월,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은 양동 작전으로 보스니아 서부에서 스릅스카군을 격퇴해나갔다. 크로아티아군은 마에스트랄 2 작전(Operation Maestral 2)을 통해 2,500 km²이상의 영토를 탈환하고 야이체(Jajce), 시포보(Šipovo), 드르바르(Drvar) 등의 주요 마을들을 점령하여 세르비아계 최대 도시 중 하나인 바냐루카(Banja Luka)를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기에 보스니아군은 사나 작전(Operacija Sana)을 개시했으며 보산스키페트로바츠(Bosanski Petrovac), 산스키모스트(Sanski Most), 보산스키크루파(Bosanska Krupa) 등의 세르비아계 도시들을 장악하게 되었고 스릅스카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나토군 공습은 주로 스릅스카군의 지휘통제시설과 보급시설에 집중되었기에 실질적인 지상군 전력의 손실은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의 공세로 인해 대부분 발생하였다. 이전과 달리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은 미군 군사고문단에 훈련되었고 서방의 군사지원을 받아 무장을 갖추었기 때문에 스릅스카군은 서부와 중부 일대를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계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Mi-24 공격헬기까지 동원하여 남부 공세 작전을 실시중인 크로아티아군 |
마지막 전투는 1995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실시된 크로아티아군,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HVO) 측의 남부 공세 작전이었다.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계 도시인 므르코니치그라드(Mrkonjić Grad)를 장악한데 이어 마냐차(Manjača) 산의 고지까지 장악하는 데 성공함으로서 불과 20여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바냐루카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가 스릅스카 공화국의 유일한 발전소인 보차츠(Bočac) 수력 발전소도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장악당하면서 스릅스카 공화국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태에 내몰렸고 결국 스릅스카는 협상 테이블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은 추가 공세를 통해 스릅스카 공화국을 아예 멸망시키고자 했지만 미국과 서방세계는 엄청난 압력을 가해 추가적인 공세를 중단시켰고 결국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도 협상 테이블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4.10. 종전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턴에서 역사적인 데이턴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계승되어 독립국으로서 인정되었으나, 각각 영토를 절반씩 차지한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계-보슈냐크계 연합의 두 세력이 한 연방 내에서 공존하는 식으로 합의되었다. 대통령직은 세 민족이 돌아가며 맡게 된다는 협정 내용은 결국 갈등의 근본 원인인 민족 분쟁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후 1996년 3월부터 사라예보에서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철수하였고, 이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UN 감시이행군과 러시아군이 공동 주둔하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별도로 추가된 것은 세르비아계의 요청으로, 협정상 보장에 따라서 러시아군이 세르비아계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다행히 현재까지는 큰 탈이 없지만 언제 타오를지 모르는 불안한 불씨가 남겨진 셈으로, 주변국들의 EU 가입이 미뤄지거나 아예 고려되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이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비슷한 면이 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지역의 민족 분쟁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테러가 전면적인 국제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 세르비아 뒤에 범슬라브주의의 대부를 자처하는 러시아가 있었다는 점 등이다. 냉전 시기였다면 세계대전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상황인데, 다행히 1990년대의 국제정세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약화가 명확하던 시기였고 결국 유일 최강국이었던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강경한 입장에 밀려 러시아가 개입을 포기하게 되면서 더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상임이사국으로서의 거부권을 행사하여 UN의 개입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21] 아울러 당시 보스니아 전쟁이 한참 진행중인 1994년 12월 당시 러시아는 제1차 체첸 전쟁을 일으켜 다수의 전차, 항공기 등으로 개전 초기 체첸을 조지고 부쉈다. 전술상의 약점과 여러가지 변수때문에 결국 패전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당시 러시아 정부는 2만 명(1994년)에서 7만 명(1995년)의 군대는 손쉽게 동원할 수 있었음에도 같은 시기에 진행 중이던 유고슬라비아 전쟁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1998년 발생한 코소보 전쟁에서는 세르비아가 NATO의 공습을 받자 이를 러시아에 대한 도발행위라고 발끈하면서 즉각 세르비아에 군대를 투입하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보스니아 전쟁 당시 러시아의 태도는 세르비아에 의도적인 방관 내지는 암묵적인 지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22] 또한 러시아가 개입하지 않는 상황에서 서방 측은 유고 전쟁을 최소화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이를 관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전쟁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서방측이 안일하게 행동하면서 그 피해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인종청소가 벌어진 이면에는 이슬람 정권을 축출해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방관하고 있었던 서방 세력(유럽)의 태도가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서방도 이 전쟁에 대해 큰소리 칠 입장이 결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스니아 전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해결을 노력한 것은 미국이었다. 1992년 보스니아 전쟁 초기 당시 미국이 구상했던 전략은 '해제후 공격(Lift and strike)#'였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에 의하여 제안된 이 전략은 1991년에 발효된 발칸반도 무기 금수조치, 즉, UN 안보리 결의안 713호(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713)를 해제(Lift)하여 무력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보슈냐크인에게 첨단 미군 무기를 지원하는 것으로 그들의 무력을 증가시켜 세르비아인에 대항하자(strike)는 전략이었다. 1991년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전운이 피어오르자 UN 안보리는 이 지역의 전쟁을 막기 위하여 발칸반도내로의 추가 무기 유입을 막았는데 이는 시간이 지나자 보슈냐크인 대비 압도적으로 강한 화력을 키우던 세르비아군이 유리해지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Lift and Strike 전략은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인 조 바이든도 동의하는 등 실현 가능성이 높았으나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면서 공은 빌 클린턴에게 넘어갔다. 이후 빌 클린턴도 Lift and Strike 전략을 수용하여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를 유럽에 보내 협조를 구했는데 놀랍게도 당시 유럽 수반들의 여론은 매우 나빴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전부 해당 제안을 거부했으며 특히 러시아는 보스니아 당사자들간의 일일뿐이니 자기들끼리 협상을 하도록 제3자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미국에게 역으로 제안하였다.
보스니아 전쟁 개입 문제에서 유럽의 비협조는 미국 단독으로 참전을 실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1994년 5월 미국 상원은 미국 혼자서라도 발칸반도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하자고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빌 클린턴은 이번에도 "유럽내 동맹의 반대"를 이유로 해당 법안을 거부한다# UN와 NATO 내 동맹들이 발칸 반도 무기 금수 해제를 반대하는데 미국 혼자서 이를 해버리면 UN과 NATO내에서의 미국 입지가 난처해진다는 것이 빌 클린턴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의 악몽 때문에 개입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국내와 해외의 반대에 부딪힌 빌 클린턴은 결국 Lift and Strike 전략을 포기했고 그 사이에 '어디서'로부터 각종 중화기를 가져온 세르비아군은 보스니아에서 일방적인 인종학살이 벌이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후 보스니아 전쟁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빌 클린턴 입장에서는 미국 국내에 혼재하는 두 가지 목소리, 즉 군사적 개입을 통해서라도 빠른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와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수 있는 또다른 전쟁에 휘말리기 싫다는 목소리 2개를 모두 만족시켜야 했으며 특히 언론에서 자주 노출되는 보스니아 전쟁의 참상은 1996년에 다가올 재선에서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그 전에 어떻게든 결론을 봐야했다. 그리고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 역시 처음에는 직접적인 개입에 반대하였으나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인한 난민 수십만명이 독일에 오는 등, 유럽 동부의 혼란상으로 인한 여파를 NATO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대로 받아내어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적극적인 개입론을 펼쳤고 영국과 프랑스도 보스니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는 적극적인 개입론을 펼쳤다.
실제로 1995년 8월~9월에 실행되어 보스니아 전쟁의 전황을 바꾼 것으로 평가받는 딜리버레이트 포스(Deliberate Force) 작전의 경우, NATO 공군에 의한 세르비아군 공습이 주요 전략이었는데, 이때 NATO 공군은 총 3,515번의 소티를 실행했으며 그중 미공군의 소티는 2,318건(65.9%)으로 최대 비중을 구성한다. 영국이 326건(9.3%), 프랑스가 284건(8.1%)으로 그 뒤를 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보스니아 전쟁 종전에는 미국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던 셈#.
훗날 공개된 백악관 기말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행동을 가장 가로 막는 것은 미국 국내의 반전 여론과 러시아의 영향이었다. UN 안보리를 통한 해결은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이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혼자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공습을 시작한다면 결국 지상군을 투입하라는 압박을 받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보스니아에 미국의 지상군이 투입되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악몽이 아직 살아있던 당시 미국에서 반발을 불러왔다. 그리고 실제로도 지상군 파병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받을 수 있고 비용도 너무 많이 든다는 점에서 결국 미국은 지상군 파병없이 현지의 세력들을 적절히 조율하고 UN 안보리 결의안을 통한 비행금지 구역이나 안전지대 설정 같은 식으로 간접적으로 참전해야 했다.
특히 당시 미국이 고려하던 중대한 변수는 러시아였는데, 보스니아를 포함한 유고슬라비아는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세력이 미치던 곳이라 미국 혼자서 보스니아를 공습하고 지상군을 파견하는 것은 "루비콘강을 건너는 일"#(매들린 올브라이트)에 비견되어서 NATO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개입이 보다 권장되었는데 이렇게 NATO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참여해도 이는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와 결국 냉전 이후 최초로 서방과 러시아가 정면충돌한 사례가 되었고#, 1996년 데이턴 협정의 이행을 위하여 미군이 지상군을 보스니아에 보내게 된 것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계기#(윌리엄 페리[23])로 평가되었다.
2005년의 민족 구성. 두 공화국의 경계로 민족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계 너머 세르비아인의 대대적인 민족 이동이 수반되었고, 전쟁 중 심각한 피해를 입은 보슈냐크인 거주 지역은 일부만이 회복되었다.
5. 전쟁범죄와 인종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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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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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 발생 위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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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파슬리 학살 ,1937, | 발생 위치 도미니카 공화국 | ||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홀로코스트 ⚖️ ,1941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 |||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 |||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크로아티아 독립국 | ||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 |||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 |||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 ||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관련 단체 체트니크 | |||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과테말라 | ||
문화대혁명 ,1966 ~ 1976,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전역 | 영국령 홍콩 | ||
난쟁이 수용소 ,1970 ~ , | 발생 위치 북한 전역 | ||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 발생 위치 동파키스탄 | ||
이키자 ,1972, | 발생 위치 부룬디 | ||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 발생 위치 우간다 | ||
관련 인물 이디 아민 | |||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 발생 위치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 ||
킬링필드 ⚖️ ,1975 ~ 1979, | 발생 위치 민주 캄푸치아 | ||
재판 ECCC | |||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 |||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 |||
수용소 뚜올쓸라엥 | |||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 발생 위치 짐바브웨 | ||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 |||
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이라크 쿠르디스탄 | ||
재판 안팔 학살/재판 | |||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 |||
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 ||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 |||
보스니아 전쟁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스릅스카 공화국 | |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 |||
세부 사건 스레브레니차 학살 |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 포차 학살 | |||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 발생 위치 르완다 | ||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르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 목록 |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인물들 목록 | |||
관련 단체 후투족 민병대 (Interahamwe | Impuzamugambi) | |||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 발생 위치 자이르 키부 | ||
파룬궁 학살 ,1999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전역 | ||
밤부티 피그미족 학살 ,2002 ~ 2003, | 발생 위치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 ||
다르푸르 학살 ,2003, | 발생 위치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 ||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 |||
야지디 학살 ,2014 ~ 2019, | 발생 위치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 ||
관련 단체 ISIL | |||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 발생 위치 미얀마 라카인주 | ||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보스니아 스브라케(Svrake)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의 피해자 시신들을 발굴하는 모습.[24] |
이 참담한 전쟁에서 보스니아에서는 3만 명이 넘는 군인과 비슷한 수치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고, 세르비아도 2만 명의 군인(주로 세르비아계 의용병과 스릅스카군)과 4천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크로아티아 역시 5천 명의 군인과 2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실제 사망자는 앞 수치들의 도합인 9만여 명보다 1~2만 명 정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상자나 난민은 물론 그보다 훨씬 많아서 무려 22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직전 인구는 435만 명이었는데, 현재는 402만 명으로 줄었으니 난민의 규모와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민간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쟁의 생존자가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피폐하게 버텼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나마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불어 제노사이드가 조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애초에 인구도 얼마 없는 동네라는 점 덕분에 아프리카 지역처럼 백만 단위에 이르는 대규모 사망자가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또한 국제적인 인권단체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이 2003년 8월에 낸 한 보고서에 따르면, 1만 7,000명가량이 실종 상태라고 밝혔고 가족들은 그들이 죽임을 당한 뒤 어딘가에 암매장됐을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보스니아 곳곳에선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보스니아 당국이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1995년 전쟁이 끝난 뒤 지난 8년 동안 약 1만 8,000구의 시신이 발굴됐다.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약 1만 1,500명이며 나머지 6,500명의 유골은 훼손이 심한 탓에 신원조차 확인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모두가 민병대를 조직해서 서로 잔혹하게 싸웠다.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의 약 80%가 보슈냐크인이지만, 크로아티아인들이나 보슈냐크인들도 세르비아인과 서로에게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95년 미국 중앙정보국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보스니아 전쟁에서 벌어진 인종청소 등의 참상 중 90%는 세르비아인에 의하여 자행된 것이라고 한다#.
1993년부터 2017년까지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ICTY)에 의하여 전쟁범죄로 기소된 인원은 총 161명이다. 이들은 각각 집단살해죄(G), 인도에 반한 죄(H), 사람에 대한 전쟁범죄(W), 제네바 협약(C)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중 8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았다. 특히 집단살해죄(G)로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 전원은 스릅스카 공화국소속의 세르비아인이었다.
기소 및 유죄 인원을 민족구성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세르비아인: 94명 기소, 62명 유죄
크로아티아인: 29명 기소, 18명 유죄
알바니아인: 9명 기소, 1명 유죄
보슈냐크인: 9명 기소, 5명 유죄
마케도니아인: 2명 기소, 1명 유죄
몬테네그로인: 2명 기소, 1명 유죄
나머지: 민족 불분명 또는 재판 취소
기소 취하(Indictment withdrawn)된 인원은 해당 전쟁범죄과의 개인적인 연관성만 배제된 것일 뿐, 관련 전쟁범죄 혐의(학살, 인종청소, 강제수용소, 강간) 자체는 전부 사실로 인정되었다. 예를 들어 기소 취하된 인원 중 고란 라이치(Goran Lajić)라는 세르비아인은 고문, 학살, 강간으로 악명높은 케라테름 캠프(Keraterm Camp)에서 경비병 및 심문관으로 근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당시 보스니아에서는 고란 라이치(Goran Lajić)이라는 이름이 대단히 흔했던 이름이었던고로 체포된 고란 라이치는 결국 동명이인으로 판명되었고 해당 인원에 대한 기소는 취하되었다#. 하지만 케라테름 캠프 자체에 대한 전쟁범죄 혐의는 대부분 사실이었고 해당 캠프에 부역한 상당수는 짧게는 3년, 길게는 31년의 징역형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판결 전에 사망하거나 해당 국가 법원으로 이관되어 ICTY에서 판결되지 않은 케이스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재판 끝에 최종적으로 ICTY에서 무죄(Acquitted)를 선고받은 인원은 총 18명인데, 그 중 세르비아인은 한 명도 없다.
2010년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통계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ICTY의 검사장이었던 Ewa Tabeau는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에 대해서 집중하지 말라고 언급한바 있다. 왜냐하면 사라예보 포위전등 다양한 지역에서 세르비아인이 같은 세르비아인을 죽인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전체 사망자 수: 104,732명
보슈냐크인 사망자 수: 68,101명
세르비아인 사망자 수: 22,779명
크로아티아인 사망자 수: 8,858명
기타 사망자 수: 4,995명
민간인 총 사망자 수: 36,700명
보슈냐크인 민간인 사망자 수: 25,609명
세르비아인 민간인 사망자 수: 7,480명
크로아티아인 민간인 사망자 수: 1,675명
기타 민간인 사망자 수: 1,935명
군인과 경찰 총 사망자 수: 68,031명
보슈냐크인 군경 사망자 수: 42,492명
세르비아인 군경 사망자 수: 15,298명
크로아티아인 군경 사망자 수: 7,182명
기타 군경 사망자 수: 3,058명
노르웨이 정부의 후원으로 보스니아 전쟁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설립된 '사라예보 연구 및 문서화 센터(Research and Documentation Center in Sarajevo)'가 2012년 발표한 사망자 통계는 다음과 같다#
전체 사망 및 실종자 수: 101,040명
보슈냐크인 사망 및 실종자 수: 62,013명
세르비아인 사망 및 실종자 수: 24,953명
크로아티아인 사망 및 실종자 수: 8,403명
기타 민족 사망자 수: 571명
민간인 총 사망자 수: 38,239명
보슈냐크인 민간인 사망자 수: 31,107명
세르비아인 민간인 사망자 수: 4,178명
크로아티아인 민간인 사망자 수: 2,484명
기타 민족 민간인 사망자 수: 470명
군인과 경찰 총 사망자 수: 57,701명
보슈냐크인 군경 사망자 수: 30,906명
세르비아인 군경 사망자 수: 20,775명
크로아티아인 군경 사망자 수: 5,919명
기타 민족 군경 사망자 수: 101명
상태 알 수 없음(민족 불문): 5,100명
사라예보 연구 및 문서화 센터의 2013년 발표에 따르면 사망자의 90%가 남성이었으며 유대인이나 집시 등의 소수민족도 희생되었다고 한다.
6. 매체
- 음악 쪽으로는 U2의 〈Miss Sarajevo〉가 유명하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빌 카터가 보스니아 전쟁과 관련된 영상 제작을 보노에게 제안하여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들었고 이후에는 브라이언 이노,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이 참여하여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내기 이른다. 또한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사바타지의 1995년작 〈Dead Winter Dead〉가 이 보스니아 전쟁의 참상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은 컨셉트 앨범으로 엮기도 했다.
- 리버풀 FC의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된 데얀 로브렌의 개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My Life as a Refugee〉에서도 당시의 참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 폴란드 11 비트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생존게임 This War of Mine은 그라츠나비아의 포고렌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내전에 휘말려 고립된 민간인들이 주인공이다. 해당 게임은 보스니아 전쟁 당시 포위됐던 사라예보의 상황, 그리고 전쟁 생존자인 Selco와 진행한 "도심 SHTF(Shit-Hits-The-Fan, '극도의 혼돈 상황')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했는가"라는 주제의 인터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보스니아 전쟁의 참상 또한 체험할 수 있다. 게임 트레일러 중에는 실제 보스니아 전쟁 생존자가 출연한 동영상도 있다.
6.1. 단행본
- 보스니아 전쟁 당시 10대 소녀였던 즐라타 필리포비치(Zlata Filipović)가 쓴 《즐라타의 일기(Zlata's Diary: A Child's Life in Sarajevo)》(1994)는 '보스니아판 안네의 일기'란 평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1994년에 번역 출간됐다. 즐라타 필리포비치는 이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고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평화 운동과 난민 구호 등의 여러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 르포 취재물 중에서는 워싱턴포스트의 특파원으로 2년간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했던 피터 마스(Peter Maass)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20세기 유럽-야만의 기록(Love Thy Neighbor: A Story of War)》(1996)이 대표적이다.
- 제프 롱의 소설인 《디센트》(1999)의 주인공 일라이어스 브랜치는 보스니아에 주둔한 유엔군 출신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 《팔레스타인》(1996)을 그려 유명해진 만화가 조 사코의 단행본 작품인 《안전지대 고라즈데(Safe Area Goražde)》(2000)와 《종전(War's End: Profiles from Bosnia 1995–96)》(2005)이 보스니아 전쟁을 다루고 있다.
- 스티븐 갤러웨이의 《사라예보의 첼리스트(The Cellist of Sarajevo)》(2008) 역시 보스니아 전쟁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사라예보 포위전 당시 활동한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Vedran Smailović)의 실제 일화를 다루고 있다.
6.2. 영화
- 세르보크로아트어권 개봉작 중에서는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의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인 〈노 맨스 랜드(Ničija zemlja)〉(2001), 아흐메드 이마모비치 감독의 단편 영화 〈10분 동안에〉(2002), 야스밀라 주바니치 감독의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그르바비차(Grvavica)〉(2005)가 보스니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이 가운데 〈노 맨스 랜드〉는 한국에서도 동시기인 2001년에 개봉했지만 코미디 영화로 잘못 홍보돼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 미미 레더 감독의〈피스메이커〉(1997)에서도 이 전쟁이 비중있게 언급된다.
- 피터 안토니제빅 감독의 <세이비어>(1998) 역시 보스니아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존 무어 감독의 〈에너미 라인스〉(2002)는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격추됐던 미 공군의 스콧 오그래디 대위(Scott O'Grady)의 실화를 다룬 영화이다. 스페이스 포스의 주인공 마크 네어드의 캐릭터도 오그래디를 부분적으로 모델로 하여 보스니아에서 추락해 6일간 벌레를 먹으며 버틴 적이 있다.
- 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1994년에는 멀리 떨어진 르완다에서도 르완다 내전이 벌어졌으며, 이를 이용해서 보스니아 전쟁과 르완다 내전을 다룬 창작물에서는 각각의 사건을 창작물 내에서 따로 언급할 때가 있다. 가령 르완다 내전을 다룬 테리 조지 감독의 〈호텔 르완다〉(2005)에서는 극중에 보스니아에서 학살극이 자행되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이와 비슷하게 보스니아 전쟁을 다룬 〈노 맨스 랜드〉에선 등장인물들이 '르완다에서 무슨 일이 났나봐.'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1994년은 연말에도 피로 범벅이 된 해였는데, 12월 11일날 러시아 공군기가 그로즈니를 공습하며 제1차 체첸 전쟁이 벌어졌고 당시 파푸아뉴기니에서는 부건빌 내전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스니아 전쟁에 비하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 베니시오 델 토로와 팀 로빈스 주연의〈어 퍼펙트 데이(Un día perfecto)〉(2015)는 보스니아 전쟁 종결 직후 보스니아에 파견된 구호 단체가 하루 동안 겪는 해프닝을 다룬 영화이다.
- 〈그르바비차〉의 감독이었던 야스밀라 주바니치의 〈쿠오바디스, 아이다〉(2020)가 2021년 국내에서 개봉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으며 UN 통역관 아이다의 사투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 중 하나로 학살을 주동한 실존인물이자 스릅스카 공화국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라트코 믈라디치도 나온다.
6.3. 게임
보스니아 전쟁 그 자체를 다룬 것보다는, 게임 내 세계관에 이 전쟁을 일부 반영한 것들이 있다. 주로 전쟁 기간 중 및 직후에 출시된 게임들에 그 흔적이 있다.- 한국 게임 강철제국에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모티브인 전 육군 대령 밀로셰비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당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의 단골 총포상 사장인 보리스 영감의 딸을 인질로 잡고 명품 소총을 내놓으라며 인질극을 벌이다 주인공과 겨룬다. 본 게임엔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의 국내외 정세가 이곳저곳에 잔영되어 있다.
-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Nod 형제단이 템플 오브 노드가 있는 사라예보를 성지로 여기고 있으며, 타이베리안 선의 노드 지도자인 안톤 슬라빅의 별명이 "세르비아의 늑대"인 점 등 이 전쟁의 영향을 일부 받은 흔적이 있다.
- 폴란드 11비트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게임 This War of Mine이 이 전쟁을 배경으로 삼은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을 매우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압도적인 게임성으로 유명하다.
- 에이스 컴뱃 어설트 호라이즌 - 과거 회상. 안드레이 마르코프가 나토군의 폭격으로 아내인 크리스타를 잃고 분노하는 장면이다.[스포일러]
7. 여담
스포츠 부분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경기 출전 금지령까지 내려졌던 것. 과거 냉전 시기 동유럽의 스포츠 강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해 국제스포츠대회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 그 존재감이 지워지게 된다. 전쟁의 장기화와 유고 연방의 분리로 국가대표 선수들의 혼란 또한 당연히 발생됐다. 유고 연방 분리로 국가대표 각 선수들은 독립한 자신의 모국으로 국적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구 유고슬라비아 시절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축구, 수구, 테니스 등의 전력이 급감하게 된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유로 1992를 들 수 있다. 당시 UEFA는 유고슬라비아의 유로 대회 출전을 박탈했고, 그 자리를 대신한 덴마크가 유로 1992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아예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 중 모니카 셀레스나 슬로보단 지보이노비치 같은 선수들은 미국 등 국외로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29]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으로 유명한 축구 선수인 에딘 제코 역시 보스니아 전쟁을 눈앞에서 경험하였다. 축구인 바히드 할릴호지치 역시 모스타르에서 피해를 겪은 적이 있다고 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경제도 보스니아 전쟁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사실 (UN 통계 기준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이전인 1990년 기준으로 1,713$였던 보스니아의 1인당 GDP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여파로 독립이 선포된 1992년에는 1,101$로 떨어진 상황이었으나 보스니아 전쟁의 여파로 경제 회복은커녕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겪은 1995년 기준으로는 1인당 GDP가 524$를 기록하기에 이른다. 불행 중 다행히도 전쟁 이후 보스니아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세에 접어들어 전쟁 7년 후인 2002년 전쟁 이전 1인당 GDP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2021년 기준으로도 보스니아의 1인당 GDP는 유럽치고는 낮은 7,143$를 기록해 벨라루스[30],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우크라이나, 몰도바와 함께 유럽 하위권의 후진국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보스니아 전쟁에서 세르비아의 학살적 행동을 비판했으나, 동시에 서구 국가들과 지식인이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방관적인 자세로 언론 매체에서 나오는 내용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비판하며 이를 "비현실적, 시뮬라크르적 전쟁"이라고 비평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미군기지 구석에 박혀있던 79년식 쉐보레 카마로는 덴마크 장교 헬게 마이어에 의해 발안된 민간인 구호품 수송작전에 동원되어 각종 개조를 거친 뒤 추격전을 벌여가며 민간인에게 구호품을 수송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참조
희대의 괴작 게임 홍콩 97에서는 실제 사망한 보스니아 민간인 시체를 그대로 게임오버 장면에 갖다 쓴 걸로 유명하다! 시체가 시체이니 만큼 처음 본 사람들에겐 혐짤 아니면 그 이상일 수 있으니 찾아보려고 한다면 주의하자.
8. 관련 문서
[1] 미국과 유럽 공동체(유럽 연합의 전신)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했고 여기에 대한 대응으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지배하던 세르비아(신유고 연방)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포격을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이 날을 전쟁 발발 시점으로 잡는다.[2] 데이턴 협정 체결일. 사라예보 포위전의 종료를 기준으로 하면 1996년 3월 1일. 1996년 3월 1일은 라도반 카라지치가 스릅스카 공화국의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종적을 감춘 날이기도 하다.[3] 범슬라브주의[4] 세르보크로아트어권에서는 보스니아 무슬림(bosanski Muslimani)을 의미하는 표현으로서 '보슈냐크(Bošnjak: 단수형, Bošnjaci: 복수형)',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민족 전체를 의미하는 표현으로서 '보사나츠(Bosanac: 단수형, Bosanci: 복수형)'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구분하지만, 한국에서는 별도의 구분없이 지명에서 유래한 보스니아인으로 지칭하는 편이다. 보슈냐크인이라는 표현 대신 영어식 표현인 Bosniak에서 유래한 보스니악이라는 표기가 사용되기도 한다.[5] 물론 전후나 전쟁 중 잡힐 경우엔 비참한 최후만이 기다리고 있었다.[6] 보슈냐크계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같이 보스니아의 독립을 이끈 민주행동당 소속이었다. 1992년 보스니아 독립 선언 이후 아브디치는 이제트베고비치와 노선 갈등으로 민주행동당을 탈당하고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와 손잡았다. 보스니아 전쟁 후 아브디치는 크로아티아로 도주하였으며 보스니아에서는 국가반역혐의로 궐석재판에서 이 인물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하였으나 크로아티아-보스니아 간 합의로 판결을 취하하고, 2012년 아브디치를 보스니아 정부에서 특별사면하였다. 이후 2021년 아브디치는 보스니아로 귀국하여 전쟁 당시 자신이 만들었던 서보스니아 자치주의 수도 벨리카클라두샤 시의 시장으로 당선돼 활동하고 있다.[7] 카라지치와 이제트베고비치는 1990년 이전까지는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 둘은 통념과 달리 오히려 많이 친했는데, 반 공산당 투쟁을 같이 이끌었다. 그러나 1990년 동유럽 혁명에 휩쓸리면서 서로 비난의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8] 유고슬라비아 치하에서 무슬림(Muslimani / Муслимани)이라는 용어는 연방 내 슬라브 무슬림 모두를 포괄하는 민족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9] 주로 세르비아와 인접한 부코바르 등 동부 지역과 크닌 등을 비롯한 크로아티아 중부 지역에 세르비아계의 분포 비율이 높았다.[10] 처음에는 SAO 보산스카 크라이나, SAO 헤르체고비나, SAO 로마니아 등 SAO(사라예보 자치주)로 독립했으나 이후 하나로 통합된다.[11]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인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발족은 1992년 4월 29일이었므로 아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SFR Yugo)이었다.[12] 심지어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이전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점령기에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 등 추축국 세력들의 지원 하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국내의 세르비아계들을 학살, 탄압한 이력이 있다. 자세한건 우스타샤, 한트샤르 문서 참조.[13] 1995년 체결된 데이턴 조약의 경우 스릅스카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등 구성국에 사는 사람은 다른 쪽 구성국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이 보스니아 전쟁 시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소수민족만이 계속 거주할 권리를 갖는 상태이다.[14] 보스니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후 분리독립 국민투표를 인정하는 것. 의외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밀로셰비치는 1992년 3월 10일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던 적이 있다. 그래서 밀로셰비치는 카라지치와 믈라디치에 "이 정도만 해라. 우리의 주적은 크로아티아다."라는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15]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주적을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6] UN은 유고슬라비아의 회원국 지위를 말소하고 대신 구 유고에서 독립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를 모두 신생국 자격으로써 UN 회원국으로 받아줬다. UN은 신 유고 연방에 대해서도 신생국 자격으로 UN에 가입할 것을 내걸었고, 이는 신 유고 연방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후계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정통성을 부정당한 신 유고 연방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UN 회원국 지위 박탈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박탈이나 다름없었다. 신 유고 연방은 코소보 전쟁이 끝난 2000년에 신생국 자격으로 UN에 가입했다.[17] 나토의 E-3 조기경보기가 헝가리 영공에서 정찰비행을 실시했으며 헝가리군은 나토의 조기경보기가 공격을 받을 경우 헝가리 공군의 MiG-21로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18] 미 공군의 F-16과 스페인 공군의 F/A-18이 레이저 유도폭탄으로 탄약고를 공습했다.[19] 미군의 F-16C 4대가 스릅스카군의 항공기 6대와 교전하여 4대를 격추하였다.[20] 이 사건은 영화 에너미 라인스의 배경이 된다.[21] 러시아의 이런 비협조적인 태도는 이후로도 계속되어 20년 뒤인 2015년,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자는 UN 안보리 결의안에 대하여 러시아는 유일하게 비토권을 행사한 국가가 되었다#[22] 데이턴 협정으로 전쟁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유야무야 끝나서 그렇지, 사실은 러시아 등 정교회 슬라브 국가들에서 대놓고 지원했다는 얘기도 많다. 당시 세르비아측이 가졌던 압도적인 중화기와 화력은 다른 국가들의 지원 없이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ㅍ일단 러시아측으로부터 "자발적인 전사" 다수가 당시 보스니아 내전에 유입되어 세르비아인을 위해 싸웠다는 것은 세르비아도 인정하고 있다.# 이고르 기르킨도 이때 세르비아에 파견되어 싸웠었다고 한다.[23] 빌 클린턴의 국방장관이었으나 NATO 확장 정책에 반대하여 사퇴하였다. 러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서라면 발칸 반도 분쟁에서 미국이 직접 개입하면 안되었어야 하는 입장이었다.[24] 이곳에서는 이틀에 걸쳐 28구의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현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영상에서 슬피 우는 사람은 알마사 스마일로비치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어머니 셰리파가 세르비아인 이웃 슬로보단카 하일로비치의 집에 들러 같이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세르비아계 병사들에게 이웃과 함께 살해당하는 변을 당했다. 그래서 발굴 팀을 통해 어머니의 시신을 찾게 되어서 이를 보고는 오열하고 있다.[25] 정확히는 Oasis and friends라는 이름으로 조니 뎁과 케이트 모스, 리사 무어리쉬와 함께 참여했으며 노엘이 메인보컬이고 리암이 코러스를 담당했다.[26] 여기에 수록된 Lucky라는 곡은 후에 OK Computer에 수록된다.[27] 다만 배경 등을 고려해보면 보스니아 와 전체적으로 유사한 것 은 기동전사 V 건담 보다 기동전사 건담 SEED 쪽 이 더 유사하다.[스포일러] 여기서 세르게이 일리치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29] 다만,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전적기록이나 대외 관계 등은 대체로 세르비아가 유고슬라비아를 계승했다.[30] 다만 보스니아와 1인당 GDP 차이는 고작 22$에 불과하여 실질적으로는 동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31] 생존자가 레딧에 올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