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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9:18:07

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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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슬로베니아/역사, 크로아티아/역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역사, 세르비아/역사, 코소보, 몬테네그로/역사, 북마케도니아/역사
유고슬라비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주요 사건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티토-스탈린 결렬, 유고슬라비아 전쟁(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외교
소련-유고슬라비아 관계
기타
범슬라브주의, 남슬라브, 슬라브족이여, 세르보크로아트어, 마케도니아어, 슬로베니아어,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
유고슬라비아
Југославија | Jugoslavija
파일:유고슬라비아 위치.svg
1918년 12월 1일 ~ 2006년 6월 5일[1]
<colbgcolor=#de0000><colcolor=#ffffff> 위치 동유럽
수도 베오그라드
언어 세르보크로아트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면적 255,804㎢(1989)
102,350㎢(2003)
인구 2,365만 7,623명(1990)
1,065만 6,929명(2002)
통화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성립 이전 세르비아 왕국 | 몬테네그로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멸망 이후[2] 세르비아 | 몬테네그로 | 슬로베니아 | 북마케도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코소보
1. 개요2. 국체의 변천3. 국가(國歌)4. 구성 집단 사이의 합의와 이질성5. 문제점
5.1. 내부적 요인5.2. 외부적 요인
6. 통합은 가능했는가?
6.1. 가능했다6.2. 불가능했다
7. 유고슬라비아의 유산8. 유고슬라브인9. 유고슬라비아의 스포츠 선수들10. 대유고슬라비아?11. 기타12.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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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명을 번역하면 "슬라브 인의 땅"이라는 뜻이 된다. 한국에서는 보통 줄여서 '유고'라고 불렸다.

1918년부터 2006년[3]까지 남유럽 발칸 반도 서부에 위치했으며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던 국가.[4] 수도는 현재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인해 국가로서의 생명이 끝났다.

2. 국체의 변천

2.1.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세르비아 왕국을 중심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가 모인 연합왕국으로 시작했다. 세르비아의 왕가인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통치했으며, 초창기 국명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었지만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국명을 바꾸었다.

하지만 1941년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단 일주일 만에 멸망했다. 멸망한 왕국은 여러 갈래로 쪼개져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에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 들어섰고 슬로베니아는 세 갈래로 쪼개져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에 편입되었으며 몬테네그로는 이탈리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저항운동을 전개했고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독립한다.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은 영국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꾸렸지만 이미 파르티잔들이 왕정의 무효를 선언하였기에 왕정복고는커녕 귀국조차 할 수 없었다.

2.2.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구 유고 연방)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의 주도로 사회주의 국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재탄생한다. 티토는 밖으로는 냉전 상황에서 실리를 챙기는 실리외교를 펼쳤고 내부적으로는 각 민족들이 화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덕분에 유고슬라비아는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오로지 티토의 능력과 명성만으로 지탱되는 것이었기에 티토가 죽자 유고슬라비아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당마저 무너지자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갈등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올랐다. 1990년 자유 총선에서 공산당은 완패했고 민족주의 정당들이 각 구성국들의 의회를 독차지했으며, 보스니아는 누구도 과반의석을 차지하지 못해서 2년 동안 내각을 구성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세르비아가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한다. 10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은 끝내 유고슬라비아를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전쟁 결과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가 독립했고, 코소보NATO의 개입으로 세르비아군이 물러나고 UN의 관리를 받았다.

2.3.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 연방)→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구성국들이 죄다 탈퇴하자 세르비아는 연방에 잔류한 몬테네그로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구성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이름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참혹한 모습으로 몬테네그로도 독립파인 밀로 주카노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독립의 열기가 고조된다. 그러던 세르비아의 독재자이자 전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2000년에 물러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파도 한 발 물러나 신 유고 연방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바꾸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2006년 몬테네그로가 국민 투표에서 독립을 선택하고 세르비아가 받아들이면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사라지고 유고슬라비아의 역사도 끝난다.

3. 국가(國歌)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국가는 세르비아의 국가인 《정의의 하느님(Боже правде)》, 크로아티아의 국가인 《아름다운 우리 조국(Lijepa naša domovino)》, 슬로베니아의 국가였던 《전진하라, 영광의 깃발을 향해(Naprej, zastava slave)》,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세르비아의 국가인 《정의의 하느님》을 각 4행씩 조합한 것이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구 유고)과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신 유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국가는 《슬라브족이여》였다.

스포츠에서 나라가 분리된 지 얼마 안 되는 경우 개별 국가 대표팀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분리 전 같은 나라였던 나라들이 단일 팀을 구성하기도 하는데[5] 보통 단일 팀 국기나 국가는 임시로 만들어 쓴다.[6] 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단일 팀(대회 도중 분리)은 구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기와 국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4. 구성 집단 사이의 합의와 이질성

먼저 유고슬라비아의 건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 고조되었던 범슬라브주의에 따른 것이며, 훨씬 이질적인 요소가 섞였지만 그럭저럭 다민족 연방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 (예를 들어 인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 비해 분열요소가 딱히 있었던 것도 아니다.[7] 어쨌든 종교만 달랐고, 이들 국가들은 동로마 제국-오스만 제국-합스부르크 제국[8]의 틀 안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고슬라비아가 내부적 다양성이 높았다고 하지만, 유럽만 해도 스페인, 벨기에, 스위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 분열되기 이전의 유고슬라비아 정도의 다양성을 지니면서도 통합을 유지하는 나라들이 분명 적지는 않다.[9] 그리고 해당 예시를 보듯 거의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유고슬라비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다양성을 지닌 채로 국체를 유지하는 중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 주도로 남슬라브계 민족국가가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역시 (지역 의회 결의 등으로) 이에 동의했다. 이 무렵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어렵다. 원래 영국과 프랑스는 '런던 밀약'으로 이탈리아에게 아드리아해 해안 지대를 넘기기로 결의했고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이탈리아는 이 지역을 점령하려 했다. 유고슬라비아 통합안은 이에 대한 카운터로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주장한 결과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의 건국은 강대국들의 이해와 강요에 따른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민족의 '자의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내에서도 세르비아와의 합류를 반대하고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긴 했지만, 1차 대전이 채 마무리되기 전부터 이탈리아가 달마티아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움직임을 보이는 등 상황이 너무도 급박하게 전개됐고 결국 민족과 언어와 문화가 남슬라브계로 좀 더 가까웠던 세르비아 합류 지지로 여론이 크게 기울었다.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권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무너뜨릴 때처럼 민족 구성별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등이 개별적으로 독립해야 했으며, 그랬다면 남동유럽의 현대사는 참혹한 전쟁과 학살의 역사가 아닌 평화로운 역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에서는 어려운 방안이었다. 당시 강대국인 이탈리아에 대항하려면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서 유고슬라비아 민족이 단일국가로 독립하는 제안을 내세워서 협상국의 승인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단지 오스트리아의 영토에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유고슬라비아 침공을 한 역사와 베니토 무솔리니알바니아를 병탄하고 그리스를 침공한 역사를 보면 구 유고 각국의 운명은 뻔했다.[10] 물론 중부유럽의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처럼 슬라브 민족 계열의 나라들이었으면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별개의 국가로 독립한 나라들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이들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유고슬라비아가 없었다면 미리 맺어진 '런던 밀약'에 따라서 이탈리아가 이 땅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의 신봉자였고 비밀 외교를 혐오했다. 런던 밀약이라는 비밀외교에 의해 민족자결주의에 반하는 이탈리아로의 달마티아 할양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5. 문제점

5.1. 내부적 요인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아온 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보슈냐크인이 몰락이 기정사실화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기존부터 세르비아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마케도니아인, 세르비아에 흡수당한 몬테네그로인과 함께 세르비아에 합류하면서 형성되었다.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보슈냐크인 3민족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로부터 자결권을 쟁취하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세르비아가 유고의 리더임을 인정할지언정,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신한 새로운 주인으로 모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성립된 이후 세르비아는 외세에 맞설 줄도 모르는 민족들을 본인들이 계도한다는 식의 선민의식을 드러내며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고 점차 비 세르비아계, 특히 크로아티아인은 이거 남슬라브주의라길래 합류했더니만 그냥 대세르비아주의에 합류한 거 아니냐는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다양한 인구 집단을 통합시키기 위해 종교와 문화를 초월한 남슬라브주의를 도입하고, 여러 차례 행정구역을 조정하는 등 노력을 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스스로 자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민족인 세르비아인은 마찬가지로 독립한 지 얼마 안 되는 다른 민족까지 포괄한 크고 아름다운 연합왕국을 경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뒤따르는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를 수행하기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정치체제가 너무도 불안정하고 미숙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가 성립된 지 10년 정도 지난 1928년에는 대표적인 민족주의 계열 정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당수 스체판 라디치가 백주대낮에 의사당에서 의정활동 중에 다른 의원이 쏜 권총에 피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로 유고 정국은 즉각 대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이를 기점으로 국왕 알렉산다르 1세의회를 해산함으로써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등 시대를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분열된 국론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세르비아계는 물론 비세르비아계 민족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주기 충분했고, 곧 국왕 암살과 왕국 곳곳에서의 사보타주와 소요 사태라는 최악의 형태로 분출되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남슬라브의 해방과 자결을 부르짖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간데 없고 그저 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유고 왕국을 멸망시킨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세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대세르비아주의, 대크로아티아주의 등 유고 내 각 민족의 민족주의를 평등하게 탄압하는 한편, 소련에 굴하지 않고 제3세계로써 서방 국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국가 위상을 드높이고 독자적인 경제노선을 택해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룩하는 방식으로 각 민족 간의 화합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티토의 민족 화합 정책은 티토의 파르티잔으로서의 명성과 성공적인 외교 및 경제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뿐 유고 내 각 민족의 자발적인 의사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11] 티토가 죽은 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대크로아티아주의 등 각 민족의 민족주의와 대세르비아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유고 내 각 민족의 대표자들은 티토와는 달리 각 민족의 민족주의와 타 민족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고, 결국 티토 사후 15년도 못 가 유고는 분열하여 붕괴되어야 했다.

5.2. 외부적 요인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발칸 반도 내 제민족들간에 분쟁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급격한 쇠퇴로 독립이 가시화되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했던 각 민족국가들은 몰락한 지 한참이 지났고, 오스만에서 독립한 각 민족국가는 각 민족의 입장에서의 경계선에 대한 관점이 자기 민족의 최대권역을 염두에 두고 주장했기 때문에 분쟁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현존하는 국가가 아니기에 국경이라는 게 없었고, 각 민족들은 오스만령 아래에서 복잡하게 거주지가 섞이게 되었고, 대부분의 경계 지역에서 각 민족들이 중첩되어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권역배분 문제는 이들 민족간의 심각한 분쟁 사안이 되었다. 이것은 각국이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명분이 민족주의이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승리를 경험하면 눈깜짝할 사이에 열광으로 바뀌기 쉽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면서 부풀어오른 민족감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로 변화된다. 발칸 전쟁에 이르러서는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겠다고 나선 민족들이 아예 오스만 제국과 손잡고 다른 민족을 죽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발칸 반도의 이 통제불능의 상황은 수많은 분쟁과 학살을 발생시켰다. 러시아는 러시아 나름대로 남하를 꾀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이탈리아대로 옛 베네치아 공화국령이던 달마티아 지역과 그리스 반도를 탐냈으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가지고 있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승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는데 이는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는 오스만 제국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영국의 지지 덕분이다.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던 영국은 이탈리아의 체급으로는 러시아를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 지역을 맡길 국가로 오헝 제국을 선택했다. 이에 반발한 이탈리아는 크로아티아, 러시아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를 지원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꼴을 보고 발칸 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 지칭하며, 언제일지는 몰라도 분명 세계대전은 여기서 시작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헝 제국의 새로운 황태자[12]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헝가리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쇠락하는 제국의 국력을 생각했을 때 오헝 제국은 열강들과 대립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과 연고도 없고 통제도 안되는 여러 민족에게 동등한 주권을 주어 제국을 연방국 형태로 재편하고자 했다.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들은 그 제안을 듣자 눈이 띠용~했다. 슬라브인 모두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싶던 러시아는 발칸 국가들이 친오스트리아 성향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고 세르비아는 스테판 두샨 시절의 세르비아 제국 권역을 모두 가지고 싶어했다. 오헝 제국령이던 시절에는 오헝 제국의 압제에 맞서 싸우자는 이야기로 다른 슬라브계 민족을 꼬드길 명분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무장투쟁을 하려고 했었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제국을 연방국 형태로 재편성하려는 구상을 내놓자 발칸 반도 내의 독립 여론은 타격을 입었다.[13] 오헝 제국령 범슬라브계 민족들을 선동해 대세르비아를 이루려고 하던 세르비아 왕국은 발칸 반도 내에서 고립되었고, 과격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프란츠 황태자를 암살하였다.

6. 통합은 가능했는가?

유고 내전의 결과가 워낙에 참혹했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가 통합하지 않고 처음부터 제 갈길을 가야 했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다.

6.1. 가능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유고슬라비아인들의 합의가 성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버리고 유고슬라비아를 승인해 주었다. 그래서 중동전쟁을 부른 아랍 국가들이나, 아프리카의 식민지 출신 국가들이나 베트남과는 이런 측면에서 동일시할 수 없다.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무렵에 이탈리아(미수복 이탈리아) 및 세르비아(대세르비아)의 야망 때문에 각 지역이 충분한 합의를 거치지 못하고 급히 통합되어 세르비아의 독선을 유발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주도 국가의 독선과 같은 경우에는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한 독일 통일사르데냐-피에몬테가 주도한 이탈리아 통일에서도 두드러진 문제이긴 하지만 위의 두 가지 경우에는 유고슬라비아와 같이 끔찍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특히 이탈리아의 통일과 같은 경우에는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강성했던 북부와 달리 남부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의 경우 구성 집단의 동의가 없는, 북부에 의한 남부의 강제 합병으로 인식되어 골치를 썩혔음에도 이탈리아라는 국가는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14] 그렇기에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집단의 이질성이 강하고, 구성 집단의 동의 없이 유고슬라비아가 건국되었다고 보더라도 유고슬라비아의 붕괴가 필연적이었다고 하기에는 하자가 많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당시 발칸 반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남슬라브 통일 운동은 몇몇 현지 지식인들과 지도자들만 주장했고 대다수 일반 민중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민족주의 운동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15] 그렇다고 일반 대중이 민족주의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주장한 지식인이 소수였더라도 결국 동조하고 따라간 대중이 있으니까 민족주의가 힘을 얻은 것이다.

여러모로 따져볼 때 유고슬라비아는 내부의 문제가 많이 있기는 했으나 분열이 필연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고슬라비아 정도의 내부 문제를 가지고도 내전과 학살 같은 폭력 충돌 없이 국가를 유지하는 나라들이 매우 많이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핵심을 이루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는 다른 종교를 가지며 문화 정체성이 구분되는 상당히 이질적인 집단이었으나 같은 언어를 이용하는 등 민족주의적으로도 하나로 뭉칠 여지가 존재했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나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유고슬라비아는 평화로운 통일 민족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얻었으며 오히려 많은 나라없는 민족들에 비하면 강대국들의 승인을 받아서 상당한 규모의 인구와 영토를 가지고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으니 운이 매우 좋고 외부의 대우도 좋게 받은 편이다. 실제로 티토의 지도력과 공산주의를 고려해도, 유고슬라비아는 수십 년 동안 평화롭게 국가 체계를 갖추었으며 동서 냉전 사이에서 단독 노선을 걸으면서 독자성을 유지했고,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주축을 맡을 정도로 외교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유고슬라비아가 냉전 붕괴 후 통합에 실패하고 국가들끼리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여러 개의 소국들로 쪼개진데에는 통일 전 너무나 깊었던 각 공화국 간의 차이로 인한 분리주의, 티토 사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프라뇨 투지만,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밀란 쿠찬, 키로 글리고로프민족주의, 지역주의를 앞세워 정권을 쟁취하려던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 크다. 충분히 대화로 해결하여 통합을 유지할수 있었던 사안들을 극단적인 정책과 전쟁, 분리독립 이탈로 날려버린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유고슬라비아의 비참한 종말은 그 어떤 외부 요인보다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기보다는 사소한 차이를 빌미로 삼아 증오와 폭력을 강화시켜서 극단주의를 추종한 유고슬라비아인들 스스로의 잘못이 가장 크다. 어쩌면 지역감정이 초극대화되어 생긴 비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를 비꼬며 유럽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서 유럽은 모든 게 바뀌었지만, 100년이 지나도 (전쟁의 발단이었던) 보스니아가 세르비아 땅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6.2. 불가능했다

달마티아 지역은 오스만 제국 이전에도 가톨릭 세력, 정교회 세력, 보고밀파 세력 등등 여러 세력에 의해 분열되어서 서로 다른 역사를 지닌 지역이였다. 비록 세르보크로아트어를 구사하는 남슬라브인들이 주류라 통합 가능성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은 언어와 유전적 혈통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한문이 통용되고 인종적으로 유사하다고 중국과 대만이, 심지어 한국과 일본을 외국인이 한나라로 묶어버린다면[16] 그 안에서 벌어질 혼란은 충분히 예상가능할 것이고 발칸반도에서 정확히 그 일이 일어났다. 서로에게 동질감을 못 느낀다면 아무리 유사해도 갈라질 수밖에 없다.

오스만 제국의 피지배국들에 대한 지배는 필연적으로 피지배국 속주 내부에 민족, 종교간 분열을 조장했다. 오스만은 피지배 민족의 종교를 존중했다 하나, 이슬람은 언제나 기독교 등 타 종교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알바니아 지역이 오스만 제국에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아예 민족 전체에다 "너 임마? 개종할래, 죽을래?"라는 식으로 강제 개종을 시켰다고 한다.[17] 또한 개종자와 비개종자의 차별을 극심하게 두는 바람에 독립 이후에도 민족 갈등의 요소가 되었다.

범슬라브주의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이후 의회의 결의를 받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결과 그들과 연관이 있을 수 밖에 없던 지역 유력자들 대부분을 부역자로 몰아 처형하고 수감한 후 이루어졌다. 또 통합된 이후의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이를 더 악화시켰는데 정교회 이외의 교회나 모스크에 불을 지르거나 키릴문자 표기를 강요하여 비세르비아계 민족들이 극렬히 반발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각 민족의 문화나 종교에 관대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연방주의자들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이상적인 유고슬라비아의 건설자로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티토는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하는 데 제민족의 동의를 구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적들을 제거한 뒤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는 철저히 언로를 막은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티토가 구축한 유고슬라비아는 구성국 모두가 자발적으로 합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티토가 독재와 탄압을 통해 달마티아 지역 남슬라브인들의 발언과 활동을 봉쇄하여 이뤄낸 것이다.

이미 많은 식민지를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미국의 독립 이후 연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식민지의 이탈을 우려하고 있던 영미와 달리 뒤늦게 확장을 시도하던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는 상당히 호전적인 팽창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그 영향권이 맞닿는 절묘한 지리적 위치 덕에 신흥 강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발칸반도는 복잡한 국제정세와 민족분쟁이 중첩되어 있었다.

남슬라브인의 독립국가는 300년 전부터 몽상적인 남슬라브 범민족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국가였다. 범민족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은 유고슬라비아 시절의 영광을 잊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티토 같은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존경은 해도 유고슬라비아는 별개로 경계하고 또 미워한다. 유고슬라비아 건국 당시부터 문제였던 민족 간 권력 불균형도 시정되지 못하여,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때에도 군대는 세르비아인으로 채워져 있었으며[18] 다른 민족은 정계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았다.

유고슬라비아의 원형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왕국으로 편성되었지만 이 왕국 역시 각 민족의 온전한 합의보다는 종전협상 당시의 강대국의 합의에 따라 성립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지속적인 민족분쟁이 발생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한 축으로 발칸 전역이 개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번에는 공산주의 국가로 정립되었지만 티토의 독재가 종식되자마자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생했다. 유고는 결국 여러 번 억지로 통일되고 그에 반발한 다른 열강이 후원하는 민족의 반항과 그것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는 지역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유고 왕정은 쿠데타와 암살로 얼룩졌고 공산 유고는 티토의 문화 탄압 및 박해로 얼룩지다 무너졌다. 남슬라브인의 통합국가는 종주국이 손을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여러 번 반복되었으며 각 민족 간의 반감은 강렬했다. 실제로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보스니아-크로아티아에서는 황태자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며 반세르비아 폭동을 일으켰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크로아티아인들이 나치의 지원하에 세르비아인을 학살하는 등 분열은 예정되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가 설립될 수 있었던 건 제1, 2차 세계 대전에서 모두 승전국이 되어 얻은 보상에 지나지 않는다. 세르비아는 그렇게 유고슬라비아가 된 후 타 민족을 차별했고, 그 대가로 국가 분열을 맞았다. 구 유고슬라비아 지지자들은 유고 연방의 분열을 초래한 소수민족을 민족주의, 국가 분열 책동 등으로 비난하지만 그들이 단순히 편협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유고왕국 시절에 세르비아는 남슬라브인의 통합국가를 세웠지만 그 안에서 소수민족을 박해하고 차별하다가 참혹한 내전을 몇 차례나 발발시켰다. 티토의 사망 이전에는 이런 사정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소련과 서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티토를 호의적으로 보아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티토는 폭압적 정치를 통해 억지로 민족화합을 "연출"했을 뿐이지 내부 갈등은 부글부글 끓는 채 은폐되어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재판도 없이 반대파 군인 23,000명을 바로 처형했고, 이후에도 수백 명, 수천 명 단위의 처형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했다. 그저 모두가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유고슬라비아 내 22개의 천주교 교구 주교중 14명을 처형한 것에서 보듯이 티토의 처형 대상은 한계가 없었다. 공포정치의 물밑에서 이러한 폭압에 대한 반발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티토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증명해준다. 유고 전쟁은 티토 사망 이후에 원인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은 티토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고 티토는 이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그저 폭압적으로 자국 언론과 정치인들을 탄압하면서 은폐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티토가 사망하고 유고슬라비아가 민주화되자 유고슬라비아라는 폭압의 제국은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서부 남슬라브인 제민족들은 일제히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계가 주축이 된 범슬라브 통합주의자들은 황급히 국가 해체를 막으려 했지만, 그 수단은 타 민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는 사실상 모든 민족주의 지도자가 인종 청소 범죄에 연루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고를 이끌던 세르비아인 집단의 인종청소 범죄는 가장 심각했다.

이후 국제사회 여론은 유고슬라비아에게 싸늘하게 식었다. 2013년에 유럽연합은 크로아티아를 EU 회원국으로 승인하여 어느 쪽의 의견을 지지하는지 분명히 했고 세르비아에게 후보국 지위는 주었지만 가입조건으로 코소보에 대한 독립인정을 조건으로 걸고 있다. 세르비아는 물론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미 망해버린 나라에 대한 평가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유럽연합 대부분의 국가는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치주로 주장하고 있다. 코소보 내에는 약 12% 가량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있는데 이들은 코소보 정부를 자치주로서만 인정한다. 이들은 자동차 번호판도 세르비아 번호판을 달고 다니는데 코소보가 이들에게 벌금을 먹이겠다고 하자, 세르비아 대통령이 "한번 해 봐라, 지옥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협박하는 등 아직도 끝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다.

서부 발칸반도 지역은 일상적으로 민족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발생하고 있고 언제라도 민족말살을 목표로하는 대규모 학살, 강간 사태가 재발할 수 있는 지역이다. 티토는 독재로 민족 간 화합을 연출했을 뿐, 사회주의 연방 시절에도 민족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고 유고 왕국 시절부터 지속된 세르비아인의 우위와 타 민족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다. 유고 전쟁에서 일어난 박해와 학살에 저항하는 다른 민족에게 유고 체제는 식민 체제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7. 유고슬라비아의 유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고슬라비아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승계국가 자리를 놓고 구 유고 국가 사이에 논쟁도 만만치 않다. 일단 세르비아의 경우,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가 세르비아 땅에 있어서 붕괴 전 유고 연방의 정치적, 외교적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유고 구성국 중 인구도 가장 많은데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성립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수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잡은 나라가 바로 세르비아라면서 유고의 승계국은 세르비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명분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는 유고슬라비아의 유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것은 세르비아라고 봐도 무방하다.[19] 하지만 세르비아는 구 유고 연방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제노사이드 인종학살 등 세르비아가 주도한 전쟁 범죄 과오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구 유고 연방의 정상적인 승계국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UN에서 현대 세르비아 공화국의 전신이 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회원 자격을 계승하지 못하고 2000년에야 신생국과 동일한 자격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도 사실 티토 시절 전반적인 국력 상승과 이에 따른 국격의 상승 때문에 존속 기간에는 통제 가능했던 민심이지만, 사실 체트니크(세르비아 과격민병대)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통적인 정교회 기반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티토가 상징했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적 범유고 민족주의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집권 기간 중에도 내내 티토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상을 크게 경계했고, 세르비아 내에서도 연방 시절 국력 신장의 공은 인정해도 티토 시절을 뿌리 없는 좌파 국제주의자들이 민족 국가를 집어 삼켰던, 러시아 우익이 볼셰비키 소련 정권을 보는 시각으로 부정하는 목소리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승계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유고 연방이 해체된 이후에 세르비아에서도 유고슬라비아가 현실적으로 실패한 국가임을 인정하고 유고 연방의 잔재를 청산하거나 독자적인 자국의 정체성을 갖추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유고 시절의 국적 항공사였던 자트 항공을 에어 세르비아로 바꾸었고, 유고가 들어가 있던 회사 사명이나 자국산 상품들의 명칭도 변경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경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국부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을 명분삼아 유고슬라비아의 승계국가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라며 세르비아의 승계국 주장에 반발하고 있다. 이 밖에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승계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붕괴되어 여러 나라로 갈라진 소련의 경우는 유고슬라비아에 비해 어느 정도 평화적으로 국가들이 분리 독립되었고소련의 승계권을 확실히 이어받은 러시아와 달리[20][21]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가 그나마 좀 더 크고 중추였다지만 연방 구성국들의 비중과 덩치가 비슷비슷한 편이라 확실하게 주도권을 가지는 나라가 없었고 전쟁과 학살 등 폭력적인 과정을 겪으며 해체되었기에 어느 나라가 계승국인지는 논란이 분분하며 구 유고 구성국들의 국력도 미약하여 그리 중요시되지도 않는다.

2004년 슬로베니아, 2013년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했고, 세르비아가 가입을 신청했으며, 그 밖에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의 가입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7월 12일에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코소보는 이탈리아트리에스테에서 열린 제4차 발칸 회의에서 지역 경제 공동체의 창설을 채택하고 교통망을 통합하는 조약에도 서명했다.#

2016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고 연방의 해체가 나라에 해를 끼쳤는가?"라는 질문에 세르비아에서 81%, 보스니아에서 77%, 몬테네그로에서 65%, 마케도니아에서 61%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심지어 유고 연방 해체를 불러온 분리독립의 선봉이었던 슬로베니아에서도 그렇다는 대답이 약간 많았다(45:41). 나라에 유익했다는 대답이 더 많았던 곳은 코소보(75%)와 크로아티아(55%)뿐이었다.#

2019년 11월 14일에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측에 옛 유고연방 승계금 1억 4천850만 달러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8. 유고슬라브인

세르보크로아트어: Jugoslaveni/Југославени

스스로의 민족 정체성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인, 유고슬라브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유고슬라비아를 이루는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거나 무신론자, 통합주의자들이 많았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성립 이후 유고슬라브인을 칭하는 사람의 수는 계속 늘어나 1981년에는 전체 인구의 5.4%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대부분 각 독립 공화국의 국민으로 개별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유고슬라브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주로 미국, 캐나다, 호주 등 해외로 이민간 유고계들이지만 2010년대 초반 기준으로 세르비아에 2만, 그 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등 구유고 국가들에서 수백~수천 명 정도가 본인을 유고슬라브인이라고 칭했다. #

실존인물로는 파블레 왕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 이비차 오심[22], 레파 브레나[23] 등을 들 수 있으며, 가상인물로는 일본 소설 안녕 요정의 등장인물 마야[24]를 들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소련인 정체성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박노자가 있다.

9. 유고슬라비아의 스포츠 선수들

스포츠 팬들, 특히 축구팬들 사이에 만약 티토 사후 구 유고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구성국들이 독립하지 않고 그대로 유고슬라비아로 지속되었더라면,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떡밥이 좀 있다. 팬들이 매우 흥미롭게 상상하는 주제인데, 유고 연방에 속하는 국가들에서 그야말로 1980~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엄청난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었기 때문이다. 선수 목록을 살펴보자면,
라이코 미티치(Рајко Митић) - 세르비아[25][26]
드라간 자이치(Драган Џајић) - 세르비아[27]
사페트 수시치(Safet Sušić) - 보스니아[28]
리스토 비다코비치(Risto Vidaković) - 보스니아
하산 살리하미지치(Hasan Salihamidžić) - 보스니아
다르코 판체프 (Дарко Панчев) - 마케도니아
네나드 마슬로바르(Nenad Maslovar) - 몬테네그로
데얀 사비체비치(Dejan Savićević) - 몬테네그로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Predrag Mijatović) - 몬테네그로
드라간 스토이코비치(Драган Стојковић) - 세르비아
고란 부네브체비치(Горан Буњевчевић) - 세르비아
고란 조로비치(Горан Ђоровић) - 세르비아
슬라비샤 요카노비치(Славиша Јокановић) - 세르비아
시니샤 미하일로비치(Синиша Михајловић) - 세르비아
블라디미르 유고비치(Владимир Југовић) - 세르비아
드라간 판텔리치(Драган Пантелић) - 세르비아[29]
보라 밀루티노비치(Бора Милутиновић) - 세르비아[30]
밀린코 판티치(Милинко Пантић) - 세르비아
사보 밀로셰비치(Саво Милошевић) - 세르비아
즐라트코 자호비치(Zlatko Zahovič) - 슬로베니아
알렌 보크시치(Alen Bokšić) - 크로아티아
다보르 슈케르(Davor Šuker) - 크로아티아
즈보니미르 보반(Zvonimir Boban) - 크로아티아
로베르트 야르니(Robert Jarni) - 크로아티아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Robert Prosinečki) - 크로아티아
이고르 슈티마츠(Igor Štimac) - 크로아티아
드라잔 예르코비치(Dražan Jerković) - 크로아티아

등등…이외에도 많다. 이들이 유고슬라비아라는 한 국가 아래에서 뛸 수 있었다면 적어도 유로컵이나 월드컵 등 주요대회 우승은 한 번 차지할 수 있었겠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다. 실제로 당시 이들이 활약했던 1980년대~1990년대 초반 유고 대표팀 및 유고 청소년 대표팀은 공포의 대명사였다.

이는 1987년 20세 이하 칠레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것으로 증명된다. 보반, 야르니, 프로시네치키, 슈케르, 미야토비치 등이 출전했다. 당시 조별예선에서 칠레, 호주, 토고를 각각 4:2, 4:0, 4:1로 가볍게 제압하고, 8강, 4강에서는 브라질과 동독을 각각 2:1로 무찌르며 결승에 진출, 서독을 승부차기 끝에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31]

그러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1992년 유로컵이나 1994년 월드컵을 비롯해 1990년대의 주요대회에 유고 팀이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차례로 독립하고 결국 나중엔 몬테네그로도 떨어져나가면서 유고 축구 팀은 완벽히 해체되었다. 결정적 계기는 보스니아 내전. 내전이 시작하자마자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의 NATO 가입국들의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신 유고 연방에 대한 경제 재제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신 유고는 UN 회원자격도 박탈되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분은 스포츠 부분이었다.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도 경기 출전 금지령까지 내려졌던 것.

그렇게 벌어진 1992년 유로컵에서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1991년 조별 예선에서 7승1패 승점 14점으로 1위를 차지했으나 이듬해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모든 국제활동이 금지되면서 유로 출전권을 박탈당했다. 당시 같은 조 2위는 6승1무1패 승점 13점[32]이던 덴마크였는데, 대회개막 1주일을 앞두고 잉글랜드와 친선전을 가지려던 덴마크는 갑작스런 통보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여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을 차례로 따돌리고 동화같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나마 1998년 월드컵 때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 유고 연방과 크로아티아가 각각 월드컵에 진출했고, 이 대회에서는 크로아티아가 4강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긴 했다. 하지만 그 크로아티아도 2002년부터는 조별리그에서 1승만 딴 채 16강도 못 가는 안타까운 신세로 전락했다. 2002년 대회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각각 1승 2패, 3패로 16강 진출에 실패, 세르비아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출전한 마지막 월드컵인 2006년 대회에서 3전 전패를 당하면서 일찌감치 짐을 쌌고, 2010년 대회에서는 독일을 이겼지만 호주, 가나에 지면서 조 최하위로 탈락했다. 같은 대회 본선에 오른 슬로베니아 역시 조 3위로 16강 진출에 실패. 2014년 대회에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가 본선에 진출했으나 둘 다 1승 2패 조 3위로 16강 진출 실패.

그리고 2018년,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조별리그 전승으로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해 16강에서 덴마크를, 8강에서 개최국 러시아를, 4강에서 잉글랜드를 모두 연장 혈투 끝에 격파하고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또한, 크로아티아는 그 다음 대회인 2022년에도 8강에서 브라질을 격파하고 4강 진출에 성공함과 동시에, 2대회 연속으로 명실상부한 세계 정상급 실력을 공인받았다.

만약 구 유고 연방이 붕괴되지 않고 이 대회에 출전해서 크로아티아의 멤버 외에 다른 유고 연방 계열 국가의 멤버들이 함께 뛰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2010년대 들어서도 마찬가지라서, 한다노비치,일리치치,오블락의 슬로베니아를 필두로 네마냐 비디치, 수보티치, 이바노비치, 마티치, 알렉산다르 콜라로프 등을 배출한 세르비아나, 스르나, 모드리치, 라키티치, 만주키치를 보유한 크로아티아, 피아니치, 에딘 제코를 보유한 보스니아와 요베티치, 사비치를 보유한 몬테네그로 선수들을 조합해보면 유럽 내 어느 강호팀을 상대로도 꿀리지 않는 막강한 스쿼드를 구축할 수 있다. 또한, 제르단 샤치리 역시 2살 때 부모님을 따라 유고 내전을 피해 스위스로 피난간 걸 생각하면 들어갈 수 있다.물론 2010년 프랑스 대표팀처럼 파벌만들고 싸우다가 망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세계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8골이나 득점한 유일한 나라였다는 나름 자랑할만한 기록(1934년 스코어 8:4)이 있었다.#

일단 현재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전적기록이나 대외 관계 등은 대체로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계승했다.

축구 이외에도 농구나 테니스, 수구[33]같은 다른 스포츠 분야에서도 유고슬라비아는 공포의 실력을 자랑했는데. 만약에 유고 연방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축구말고도 수구나 농구, 테니스 등에서도 좋은 성적을 더욱 거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농구도 유고 연방 분열 당시 시점에서 비미국인 최고의 선수로 여겨지던 블라디 디박(세르비아)와 드라젠 페트로비치(크로아티아)[34], 토니 쿠코치(크로아티아) 등이 함께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농구 은메달을 이끈 핵심 멤버들이었다.

특히 테니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과거 유고슬라비아도 축구 못지 않게 테니스도 강국이었다. 모니카 셀레스나 슬로보단 지보이노비치 등등이 당시 대표적인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들이었는데, 출전 금지령 조치로 이들이 미국 등 국외로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나 아나 이바노비치, 크로아티아의 고란 이바니셰비치같은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들도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아닌 유고 연방 국가 대표로 하계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출전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35]

그리고 현재 각 국의 일원들을 봐도 여전히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카 모드리치 - 크로아티아
이반 라키티치 - 크로아티아
마리오 만주키치 - 크로아티아
마테오 코바치치 - 크로아티아
마르첼로 브로조비치 - 크로아티아
이반 페리시치 - 크로아티아
데얀 로브렌 - 크로아티아
얀 오블락 - 슬로베니아
사미르 한다노비치 - 슬로베니아
케빈 캄플 - 슬로베니아
요십 일리치치 - 슬로베니아
그라니트 자카 - 코소보[A]
제르단 샤치리 - 코소보[A]
스테반 요베티치 - 몬테네그로
스테판 사비치 - 몬테네그로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 - 세르비아
네마냐 마티치 - 세르비아
알렉산다르 콜라로프 - 세르비아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 - 세르비아
두산 타디치 - 세르비아
알렉산다르 미트로비치 - 세르비아
두샨 블라호비치 - 세르비아
에딘 제코 - 보스니아
미랄렘 퍄니치 - 보스니아
그리고 농구도 마찬가지. 미국의 드림팀을 제외하고는 어떤 상대로도 오버롤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라인업이다.
다리오 샤리치 - 크로아티아
보얀 보그다노비치 - 크로아티아
마리오 헤조냐 - 크로아티아
고란 드라기치 - 슬로베니아
루카 돈치치 - 슬로베니아
니콜라 부세비치 - 몬테네그로
니콜라 페코비치 - 몬테네그로
보그단 보그다노비치 - 세르비아
네마냐 비엘리차 - 세르비아
밀로스 테오도시치 - 세르비아
니콜라 요키치 - 세르비아
보반 마랴노비치 - 세르비아
유서프 너키치 - 보스니아
미르자 텔레토비치 - 보스니아

10. 대유고슬라비아?

원래 유고슬라비아는 불가리아알바니아까지 통합 목표로 두고 있었다. 불가리아인도 마케도니아인과 가까운 남슬라브 민족인데다가, 절대 다수는 아니지만 알바니아인들도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꽤 퍼져 살았기 때문이다.[38]

초반 유고슬라비아에서 불가리아는 제외되었으나 냉전 시대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가 모두 공산주의 국가가 되자 발칸 연방의 일환으로 티토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서기장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간에 유고슬라비아에 같은 남슬라브인인 불가리아까지 합치는 대유고연방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허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유고에 붙으려는 디미트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밉보여 소련에 소환된 후 독살이라 의심되는 죽음을 맞이하고 대유고연방 구상은 불발된다. 알바니아도 마찬가지로, 티토가 알바니아를 자국 유고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다분히 보이자 알바니아에서 반발하여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11. 기타

2020년 12월 22일에 질병관리청에서 발표한 보도자료에 추정유입국가로 유고슬라비아가 있었다. 이후에 북마케도니아로 수정되었지만 영어판으로는 유고슬라비아로 남아 있다.# 아마 북마케도니아의 옛 표기명인 "The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를 보고 혼동을 일으킨 듯. 2018년에 외교부 SNS에서 체코체코슬로바키아로 표기한 데 이어 또 이런 일이 발생한 데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12. 매체



[1] 나치 독일 점령기 제외. 다만 망명정부가 존재하긴 했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왕국1929년 10월 3일까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2003년 2월 4일 국명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연합'으로 바꾸니 국체와 별개로 국명만 가지고 따졌을 경우의 존속기간은 1929년 10월 3일 ~ 2003년 2월 4일이다.[2] 코소보가 미승인국이 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3] 실질적으로는 2008년 코소보 독립 시점까지 버티고 있었다.[4]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한 1991년 이후로는 몬테네그로 방면만 붙어 있었다.[5] 반대 사례도 있었는데 독일 통일 두 달 뒤에 열린 세계 여자 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는 구 동독서독 팀이 별도 참가하였다.[6] 대표적으로 UEFA 유로 1992 당시 참가한 독립국가연합.[7] 인도제국은 독립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으며 25년 정도 지나서 동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나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는 전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1970년대 동티모르,서파푸아 병합 후에 현지의 친인도네시아파들을 이용해 반인도네시아파들을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주 저질렀다. 이에 반발한 독립파들이 동티모르에선 국제적 지원 얻고 2002년 독립했다. 서파푸아는 현재도 인도네시아령이다.[8]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9] 영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에서도 이 때문인지 일부 지역에선 분리주의를 통한 분리독립 국가 건설 주장이 나오기도 하나 비교적 미미한 편이다.[10] 베르사유 체제가 확립되는 동안, 협상국은 협상국의 일원이었던 루마니아 왕국과 신생국인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제2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등에 최대한 힘을 실어주며 일명 '소협상국'을 만들었다. 이는 패전하고 영토를 빼앗긴 바이마르 공화국,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 구 동맹국이 필연적으로 보복에 나설 수 있으니 여기에 맞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국력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현실은 다들 아시다시피 죄다 파시즘의 물결에 쓸려나가 버렸다.[11] 이처럼 개인의 명성에 의존하는 체제나 국가는 얼마 가지 못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만 구축할 수 있었던 비스마르크 체제도 그가 물러나고 빌헬름 2세가 등장하면서 무너졌고,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리더십에 의존하던 말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그가 죽은 지 2년도 되지 않아 붕괴되었다.[12] 실제로는 공식 황태자가 아니고 제위 계승자다.[13] 그냥 보면 간판만 바꿔달자는 것 같은 이야기에 발칸 반도의 독립 여론들이 잠시 쑥 들어갔던 이유는 대타협이라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헝가리는 오헝 제국령이지만 별도의 의회와 정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헝가리 정부는 부분적인 징세권, 외교권, 국방권 외에 헝가리 지방의 모든 독자적 권리를 행사했다. 헝가리인은 오헝 제국에서 공식적 차별을 받지 않았으며 헝가리 안에서는 독일계보다도 헝가리인만 될 수 있는 헝가리 정부 관료에 접근하기 쉬워 오히려 유리했다. 이런 모델을 실제로 보았으니 프란츠 황태자의 제안이 매우 큰 신뢰를 얻은 것이다.[14] 물론 남북간 격차에 의한 사회적 문제는 현재진행형이지만 남부를 어느정도 이탈리아 국민국가에 합류시키는 데에 성공한 현대에는 오히려 북부쪽이 독립운동 세가 강하다.[15] 이는 이탈리아 통일에서도 존재한 문제였고, "이제 이탈리아는 만들었다. 다음 차례는 이탈리아인들을 만드는 것이다."라는 어록이 존재할 정도였다.[16] 사실 세르비아어-크로아티아어-보스니아어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아니 사실상 같은 언어의 서로 다른 방언 수준의 차이점밖에 보이지 않는다.[17] 그래서 알바니아는 보스니아와 함께 유럽에서 드문 양대 이슬람 다수 국가가 되었다. 다만 이 둘은 튀르크계 이슬람이었고 공산주의를 겪은 국가들이라 그런지 이슬람 색채는 약한편이며 세속주의 성향도 튀르키예보다도 강하다.[18] 유고군의 크로아티아인 비율은 1981년 기준 22%였으나, 장성급은 14%에 불과했다. 비교하자면 세르비아인은 전체에서 39%였지만 장성급에서는 50%였다. 국가 제2민족인 크로아티아인이 이랬으니 다른 민족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19] 가령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전적기록이나 대외 관계 등은 대체로 세르비아가 유고슬라비아를 계승했다.[20] 애초에 소련은 국가에 러시아가 이루어냈다는 표현이 등장하고, 각 연방공화국의 국가에 러시아 인민과의 관계를 담은 가사가 들어가는 등 명백히 러시아가 주도하는 나라였다.[21] 무엇보다 애초에 소련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탄생한 국가이다.[22] 아버지는 슬로베니아계, 어머니는 폴란드-체코계였고 고향은 사라예보다.[23] 유고슬라비아의 가수였으며 본명은 파흐레타 지보이노비치(Fahreta Živojinović). 보슈냐크인임에도 보스니아 전쟁 시기 스릅스카 공화국 군복 차림의 사진이 찍혀서 매국노, 배신자라고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다만 스릅스카 공화국에 포위된 고향 브르치코에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서 위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4] 아버지는 세르비아계, 어머니는 슬로베니아계다. 물론 세르비아계와 슬로베니아계의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유고슬라브인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작중 내용을 보면 자신을 명확히 유고슬라브인, 즉 통일 국가 유고슬라비아를 기반으로 탄생될 새로운 민족집단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여섯개 문화가 융합된 일곱번째 문화가 탄생하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인물이므로 아주 모범적인 유고슬라브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다만 고향이 사라예보. 전쟁 당시의 사라예보였기에 그로 인하여 굉장히 끔찍하고 슬픈 결말을 맞는다. 동시에 이는 통일된 유고슬라비아라는 꿈이 처참하게 실패하였음을 보여주는 메타포이기도 하다.[25]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창립 멤버이자 첫 번째 주장.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구장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26] 아래 언급된 선수들보다는 훨씬 대선배.[27] 정상급 윙어였지만 변방에서 활약해 저평가 당한다. 아래 언급된 선수들보다는 대선배.[28] 1955년생. 아래 언급된 선수들보다는 대선배.[29] 1951년생. 원조 골 넣는 골키퍼. 통산 A매치 19경기에 출장, 통산 2득점을 기록했다.[30] 1944년생. 선수로써의 커리어는 미미했지만, 은퇴 후 지도자로써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코스타리카,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미국을 16강에 올려놓는 등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수완을 인정받았다.[31] 그러나 이런 추측도 만약의 영역에 불과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가 최강자가 되었을지도 몰랐을 거라고 언급된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의 경우 당장 1983년 해당 대회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는 등, 연령대별 대회는 성인 대회보다도 이변이 자주 나오는 대회이고, 성인 대표팀도 언급된 선수들을 포함해서 선수들 개개인의 이름으로는 유럽 최강의 수준에 가까웠으나 정작 이 선수들이 성인 대회에서 한 팀으로 뭉친 1988 서울 올림픽 축구에서는 메달권에 진입하기는커녕 토너먼트 진출도 하지 못하고 브라질과 심지어 호주에게도 밀리며 조별리그 탈락, 1990년 월드컵에서는 8강에 진출해서 대회 준우승팀인 아르헨티나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끝에 아쉽게 지는 모습을 보이며 선전하긴 했지만 조별리그에서는 대회 우승팀인 서독에게 1:4로 참패 당했다. 후술할 유고슬라비아 대신 덴마크가 유로컵 본선에 진출해서 우승한 사례도 일부 축구팬들과 호사가들이 유고슬라비아가 원래대로 본선에서 경기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과 만약의 영역으로 얘기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정말 유고슬라비아가 나갔다면 덴마크처럼 우승했다고 확신하긴 힘들다.[32] 당시에는 승리시에 2점, 무승부시에는 1점을 주는 제도였다.[33] 특히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발발로 유고 연방이 분열되어가던 와중이던 1991년에 치러진 유럽수영선수권대회에서 11대 10으로 스페인을 이기고 우승하는 기염까지 토했다.[34] 이들은 절친한 친구였으나 연방 분열 과정에서 사이가 나빠져 페트로비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1993년까지 이승에서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다.[35] 그러나 테니스는 축구와 달리 개인 종목이라 유고슬라비아가 아닌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등 연방에서 갈라져나온 국가들도 충분히 최강급이라서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해도 현재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국가대표 선발전 난이도 역시 크게 올랐을 것이다.[A] 스위스 대표팀에서 뛰고 있다.[A] [38] 사실 알바니아는 남슬라브와 거리가 멀다. 인종적 구성이 남슬라브족이 아니라 그리스인에 가깝고 알바니아어 또한 슬라브어파에 속하지 않고 별개인 알바니아어파로 분류된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근접한 국가이니 역사적 교류를 통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던만큼 연방국으로 포함시키려 한 연유가 되었던 듯. 뭉쳐야 산다[39] 정확히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