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Questione meridionale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의 차이에 대해 서술한 문서. 학계 및 현지 정치권에서는 남부문제(Questione meridionale)라고 쓴다. 이탈리아는 서유럽 국가 중에서 지역감정이 가장 심각한 축에 속한다.[1]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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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격차 이전에 로마 제국 이후 현재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이 역사적으로 최근(1861년)에 일어난 일이고 그 이전엔 서로 간의 정치적 동질감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남남이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탈리아 북부나 사르데냐 섬은 이탈리아 남부보다는 스페인이나 남부 프랑스와의 연관이 훨씬 크다(남프랑스-북이탈리아는 언어조차 통역 없이 말이 통하던 수준이었다. 다만 현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표준어가 확산되며 언어적 동질성이 국경 따라 갈라졌다). 사르데냐도 사보이아 공국에게 넘어가기 전까지는 그냥 따로 놀던 왕국이었다가 아라곤 왕국을 거쳐 스페인 제국에 편입되었던 역사가 있다.[2] 대체적으로는 크게 과거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양시칠리아 왕국의 영역이었던 지역을 남이탈리아, 그 이북지역을 북이탈리아로 본다. 단, 사르데냐섬은 양시칠리아 왕국령이 아닌 사르데냐 왕국령이었지만 남이탈리아로 치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의 경우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피사 공화국, 루카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 도시국가 코무네의 역사로 인해 북부 내에서도 지역주의가 심한 편이고 남부의 경우 발전 경로의 차이와 통일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일원으로 흡수에 실패하며 두드러진 면을 보인다.
통일은 이탈리아 반도 북부 피에몬테[3]와 발레다오스타, 사르데냐를 통치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4]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남부 사람들에겐 "하나된 이탈리아"라는 대주제보다는 지배자가 바뀐 것에 불과한 것으로 비춰졌다. 그래서 남부에선 통일 이탈리아 정부에 반항하는 브리간타조 반란군(Brigantaggio)이 발생했고 이탈리아 정부군과 남이탈리아의 게릴라들의 전투는 통일 후에도 몇 년간 이어졌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이후 이탈리아 중남부는 정치적 격동의 연속이었다. 게르만족의 지배와 동로마 제국의 탈환은 오래 가지 못했고 아랍인들의 통치를 겪는다. 하지만 아랍인들을 쫓아내고 최종적으로 눌러앉은 노르만인들은 상공업 경제에 무지하고 시민사회를 싫어했던지라 원래 로마보다도 훨씬 부유한 것으로 유명했던 남부의 그리스계 항구도시들이 폭삭 망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싹수가 있던 신흥 상공업 도시 공화국인 아말피마저 박살나버렸다. 특히 네아폴리스와 타렌툼이 그런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도 베네치아 제노바 등 구석의 북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게 밀려서 오늘날 같은 몰락의 단초가 된다.
하지만 오트빌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기 남부는 일단은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북부와 방향성만 다를 뿐 상당한 번영을 이룩했다. 그런데 남부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꼬이게 된 건 호엔슈타우펜 왕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이탈리아 전역 정복[5]을 막기 위해 교황이 앙주의 샤를을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 봉하면서였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만프레디와 콘라딘을 물리치고 시칠리아 왕국을 확고히 장악한 샤를은 아드리아해 건너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에 불타올라 시칠리아 왕국을 고세율로 착취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시칠리아 주민들은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을 일으켜 샤를을 나폴리로 쫓아내고 아라곤 왕국의 지배하로 들어가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의 아라곤령 트리나크리아 왕국(Regnu di Trinacria)과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앙주 왕조 나폴리 왕국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아라곤 십자군으로 불리는 아라곤 왕국과 앙주-교황간의 전쟁이 이어지면서 나폴리 왕국의 고세율은 계속 이어졌다. 이후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나폴리 왕국까지 접수하며 이 상황이 끝나나 싶더니 그 조카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결혼하며 아라곤이 스페인의 일부가 되고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위는 최종적으로 스페인의 손에 들어가 이탈리아 남부는 스페인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6]
스페인 지배하에서 진보도 있었으나 압스부르고 왕조 스페인의 전쟁 부담을 떠안으며 다시 고세율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게 되고[7] 본토의 배타적 가톨릭 성향의 영향을 받으며 르네상스의 영향도 비껴나가 이탈리아 남부는 점점 척박한 변방지역이 되어갔다. 고세율은 도적 난립을 불러일으키고 치안 악화로 인해 산업발전과 육상 교통 발전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 당국은 세금 인상에 의존하는 등 남부 이탈리아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버렸고 스페인 당국이 복지 사업의 일환으로 나폴리에 추진한 토목 사업들의 영향으로 나폴리 인구집중과 도시 한량 라차로니(Lazzaroni)의 등장이 일어났다.
이후 시칠리아와 나폴리는 스페인의 왕조가 압스부르고 왕조에서 보르본 왕조로 바뀌는 시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에게 넘어갔다가[8] 얼마 안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 펠리페 5세의 아들 카를로스 왕자에게 넘어갔다.
카를로스 왕자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9]으로써 남부 이탈리아를 통치하다가 이복형 페르난도 6세 사망 이후 카를로스 3세로 스페인 왕위에 즉위하며 3남 페르난도[10]에게 나폴리, 시칠리아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탈리아 남부는 최종적으로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방계가 지배하게 되었다.[11]
페르디난도 4세 치하 이탈리아 남부의 정세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을 받아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1799년, 젊은 귀족 지주들로 구성된 나폴리의 공화주의 혁명세력은 프랑스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나폴리 왕국을 무너트리고 파르테노페아 공화국을 설립했었다. 그러나 파르테노아 공화국은 농민들의 가톨릭 반혁명, 반프랑스 운동인 산페디스타(Sanfedista) 운동으로 이는 좌절되었다.
이후 1806년 나폴레옹의 정복으로 인해 반도 남부가 프랑스 제국의 위성국이 되고 양시칠리아 보르보네 왕조는 시칠리아로 도망쳐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나폴리 왕위를 조제프 보나파르트, 이후 조아킴 뮈라에게 수여했다. 조제프 보나파르트 시기 봉건제 철폐와 사적 토지소유권 확립을 기초로 한 토지개혁이 단행되나 농민의 자영농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기득권층의 교회토지, 공유지 경매로 끝나 남부를 괴롭히는 대토지 지주제가 시작되었다.
또한 봉건제 철폐로 근대적 행정을 도입하나 지역유지와 지주 엘리트층 이외의 식자층이 부족해 이 계층에 의존하는 행정군주정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행정제도는 통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시칠리아로 도망친 보르보네 왕조는 영국의 권유하에 팔레르모에 의회를 도입,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시도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시칠리아의 보르보네 왕조가 복권되어 페르디난도 4세는 통합 양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로 즉위, 동군연합 상태가 해소되고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공식적으로 통합되었다.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레옹 전쟁기에 행해진 자유주의 개혁을 철폐하고 전제주의 복권을 추구해 엘리트층의 반감을 사고 특히 팔레르모 의회의 철폐시도는 시칠리아 지주층의 독립운동 참여를 가속화시켰다. 한편 프랑스 혁명이 뿌린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통일운동이 부상하기 시작하고 남부 지주층 중에도 카르보나리 가담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기 부왕 페르디난도 1세를 대신해 섭정 신분으로 시칠리아를 이끌었던 프란체스코 1세는 자유주의 성향을 보이며 팔레르모 의회에 협조적인 성향을 보였던 섭정기와는 달리 즉위 후엔 반동 정치로 일관했다.
페르디난도 2세는 국가주도로 공업성장을 추구하고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관심을 가져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여하는 등 개방적 성향을 보였으나 뒤로 갈수록 점점 반동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친오스트리아적 성향을 보였다.
그 아들 프란체스코 2세 지배기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카밀로 카보우르의 주도의 2차 통일전쟁이 발발해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붉은 셔츠단이 양시칠리아를 침공했다.
이미 의회 문제 등으로 보르보네 왕조와 틀어진 시칠리아 지역을 시작으로 혁명, 통일파 지주들의 지지하에 후진적인 양시칠리아군을 물리치고 남부를 장악해간 붉은 셔츠단은 가리발디의 독자세력화를 두려워한 카보우르의 개입으로 테아노 회담을 통해 남부의 지배권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넘겼다. 프란체스코 2세와 왕비 마리 조피는 가에타 요새에서 최종 항전을 벌이나 패배했고 남부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하면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통일혁명은 남부의 통일운동 지지자 상당수가 지주 엘리트층이었던 등의 이유로 농민들이 원한 토지개혁등의 사회 구조 개혁[12]은 등한시 했으며 가리발디 또한 토지개혁을 외친 농민들을 학살한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13]
이러한 상황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과 피에몬테화(Piemontesizzazione)로 알려진 국민개병제 등의 사르데냐 왕국식 근대 시스템의 이질감 등의 결합해 남부 각지에는 브리간타조 게릴라가 빈발했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이를 진압하는 데에 초기 국력을 허비해야만 했다. 이후 왕국 의회의 남부 의석은 해당지역 지주들이 차지해 대토지 지주제는 공고해졌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근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이었던 통일운동이 부르주아 계층의 혁명에 머물고 민중을 포함시키지 못한 반쪽짜리 혁명이었다고 진단하며 통일운동의 미완성이 이후 이탈리아 혼란상의 원인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정착하며 민중들이 가난해지고 남부 농민들을 국민국가로 자발적으로 끌어들이는데에 실패하며 이후 교육 및 국민개병제 등 근대적 발전 시행을 강압과 강요로 이룰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압과 강요의 전통은 왕국 시기 이탈리아 정치권을 장악해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즘의 토양이 되었다.
실제로 브리간타조 반란은 통일 정부와 남부 민중 양측에게 커다란 트라우마가 되었는데 연방제를 꿈꾸고 반동 세력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남부의 이상주의적 발전을 상상했던 통일 운동가들은 남부의 반란을 신정부 지도자의 입장으로 겪은 뒤 프랑스식 중앙집권 시스템의 강요와 군사적 해결을 통한 강압적 계몽을 선호하게 되었고 야만성, 후진성, 반동성으로 대표되는 남부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편 남부의 농민들은 근대적 신정부를 불신하며 이후 남부 사회의 특징으로 꼽히는 공공성 결여, 연고주의, 가족주의, 마피아와 엮인 치안 불안 등이 뿌리내려 근대 시민사회로의 전환이 삐그덕거렸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 페르디난도 2세 시기에 양시칠리아 왕국이 나폴리를 중심으로 국가 주도로 육성해놓은 남부의 공업 시설들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저관세 조치의 적용으로 경쟁력을 잃어 급속도로 붕괴되었고 이후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내각 이후로 보호무역이 대두되며 대유럽 수출로 먹고살던 남부의 상품작물 자영농이 타격을 입는 등 통일 정부의 정책이 남부에 불리하게 돌아가며 격차가 더더욱 벌어진 면도 존재한다.[14]
이 외에도 통일 자금 확보를 위한 곡물세 등의 고세율 농업세 등 남부에 타격을 준 정책은 더더욱 많아 북부의 남부 착취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1880년대 국제적 농업 위기와 그 이후 이어진 크리스피 정권의 보호무역에 남부 경제가 타격을 입자 1889년부터 시칠리아 각지의 농민, 노동자, 지식인, 장인들은 파시(Fasci)라는 조직을 설립해 지주와 광산 자본가들에게 토지 임대료 정상화, 임금 상승, 공유지 재분배, 지방세 인하 등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했다. 이러한 파시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며 전성기엔 시칠리아 각지에 170여개의 파시 조직이 존재했다. 지주 세력은 로마에 진압을 요청하며 중앙 정치권을 압박했고 크리스피 총리는 시칠리아에 계엄령을 선포, 40,000여명의 병력을 파견해 즉결 처분을 동원한 무자비한 진압을 명령했다. 파시 운동은 1950년대까지 시칠리아 좌익 운동에 영감을 주었으나 한편으론 많은 파시들이 마피아와 협력했다는 의혹 또한 받는다.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협상국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수많은 남부 농민들이 징집되어 전선에 끌려갔다. 하지만 민족 의식이 미약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던 남부 농민들 입장에서는 미회수된 이탈리아 영토 수복 같은 명분은 남 얘기였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이탈리아 왕국군의 부실한 상태가 결합되어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전해 그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토지 분배를 공약했다.
승전 이후 정치 혼란과 전역자의 사회 복귀, 불어난 전시 경제 규모의 재축소가 겹치면서 이탈리아도 혼돈의 전간기를 보내게 되는데 남부를 포함한 각지의 소작농들은 부재지주의 미경작지 점유를 꾀하게 된다. 정부는 전시에 공약한 사항도 있고 혼란속에서 이를 통제할 여력이 없어 토지 점유를 눈감아주었다.
로마 진군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스파치오 비탈레의 실현을 위한 군비 증강으로 해군 요충지 나폴리와 타란토가 발전하게 되며 남북간 도시 발전의 격차가 일시적으로 줄어드는 듯 보였으나 남부의 근본 원인인 사회 구조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남부 문제 역시 잔존하였다.
파시즘 사상 자체는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사회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무솔리니는 집권 후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기존 자유주의, 자본가, 지주 세력과 손을 잡고 파시스트 행동대의 활동을 억압하게 된다.
로마 진군 직전 무솔리니는 남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연설했지만 집권 후엔 전간기의 토지 점유를 무효화시켜 지주 세력을 정권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남부의 행정 조직과 국가 파시스트당 조직에 대지주 귀족들을 대거 기용해 남부를 지배했다. 파시즘 정권은 토지 전투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각지의 미경작지를 몰수, 개간해 원주인 대지주들에게 개간 비용을 전담하는 정책을 폈으나[15] 남부에서는 지주들의 협조가 필요했던 무솔리니에게 저지당해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전통적인 남부 빈민들의 안전판으로 기능하던 미국 이민 길이 대공황 시기 미국 이민법 개정으로 막히는 악재 또한 겹쳤다. 파시즘 정권기엔 독재정권 특유의 껄끄럽고 보기 안좋은 사항을 보도 검열하는 언론 통제 때문에 파시즘기 남부의 참혹한 실상은 은폐되었다.
강력한 독재 권력과 마피아 소탕으로 인해 남부의 치안 문제가 나아진 면도 있었으나 널리 알려진 대로 연합군의 이탈리아 전선에서 마피아들이 연합군에 협조하며 다시 세력을 부활시켜 치안 수준은 도로 떨어졌다.[16]
이러한 영향 때문에 근대에 남부 이탈리아인들의 해외 이민이 매우 활발했다. 미국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라틴 아메리카로도 이주가 활발했는데 북부에서도 상당수가 해외로 이주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따지면 남부에서 떠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1950년 미국의 권유하에 토지개혁을 단행하나 이는 여러 이유로 반쪽짜리 개혁으로 끝나 지주제 해체에는 성공하나 남부 빈곤을 해결하진 못한다. 이후 이촌향도 현상이 지속되며 타지로 이주한 노동자들의 송금을 통해 남부의 극단적 빈곤은 점진적으로 완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남부 인구가 북부 및 미국을 비롯한 타국으로 유출되는 현상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북격차는 여전했었고,[17] 여기에 1980년대를 전후하여 급속한 출산율 저하현상이 겹치며 인구 과소 및 급속한 노령화,[18] 노후화된 산업 구조가 남부의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된다.
공화국 수립 이후 이탈리아 정부는 남부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고 남부를 지원하기 위해 남부 개발 기금(La Cassa per il Mezzogiorno)을 설립해 인프라 설치, 공업 시설 유치 등 수많은 경제 정책을 세웠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한때 이탈리아의 경제성장을 이끈 국영 지주회사인 IRI룰 부실화시켰다는 혹평과 함께 북부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나폴리, 타란토 등에 유치한 중공업 시설이 그나마 성공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 역시도 부대 산업 활성화, 사회간접자본 건설 및 인구 유입과 같은 지역 경제 구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며 사막의 대성당(Cattedrale nel deserto)이라는 멸칭을 얻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지원금은 남부의 후진적인 사회 환경과 기민당의 장기 집권, 왕국 시절부터 이어저 내려온 행정 부패와 비효율, 후견주의 전통, 그리고 마피아 문제 등과 결합하며 중앙정부에서의 기민당 지지를 대가로 남부는 정부 지원금을 받는 식의 지원 예산 운용 행태가 발생하였고 서민 단위에서도 기민당을 지지하는 대가로 당 끄나풀을 통해 관직과 이권 등을 약속받는 후견주의가 팽배하였다.
토지개혁 이후 전통적 지주 기반의 지배 시스템이 붕괴한 자리를 이러한 후견주의가 장악해 기민당 정권의 남부 지배 매커니즘이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중앙 정계에서 기민당의 장기집권 기반이 된 남부의 입김이 강해져 정치적으론 남부가 이탈리아의 주류가 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북부에서는 후진적이고 비효율적인 남부가 이탈리아 정치를 장악해 북부 역시 서유럽에 비해 뒤처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강해진다. 개중에는 북부가 독립을 해야지 고질적인 정치 난맥을 해결하고 남북격차로 초래된 수많은 사회문제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나왔고 이는 베네토 독립운동[19]과 북부동맹 등으로 표출된다.
역으로 현대 남부는 북부 중심 통일에서 차별받은 지역이라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분리독립에 대체적으로 반대하고 지방자치 담론에서도 완전 연방제보단 중앙집권 요소 잔존과 이를 통한 부의 지역단위 재분배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기독교민주당의 후견주의 지배 전략이 한편으론 과거 반쯤 식민지 대우를 받아왔던 남부를 이탈리아 국민 국가를 지지하도록 끌어들인 데에 성공한 것이다.
마니 풀리테 운동 이후 기독교민주당과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기존 정치 구도가 붕괴하며 이탈리아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이를 뒤이은 혼란 하에서 누적된 여러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못했고 부패와 남부문제는 아직도 꾸준히 이탈리아를 괴롭히고 있다.
마니 풀리테와 비슷한 시기 지방자치가 강화되면서 북부와 남부 지방정부의 효율성과 행태 차이가 발견되어 북부의 "남부적인" 정부 성토는 더욱 강해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는 북부동맹이 집권당이 되며 북부 독립에서 완전 연방제로 분리주의 주장을 접고 한 발 물러서는 등 남부 문제는 복잡하게 요동치는 정치 속에서 여러 번 모습을 드러낸다.
3. 경제
출처. 이탈리아의 행정구역별 가처분소득을 살펴보면, 북부는 프랑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평균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남부는 그리스, 포르투갈 등 남유럽의 저소득국들이나[20]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 등 동유럽의 구 공산권 국가들과 비슷하다.
근대 이전부터 북부와 남부는 경제력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 북부는 중세 시절부터 도시 국가 및 제조업과 상업의 발달과 부르주아의 성장, 시민 사회의 형성이라는 서유럽의 전형적인 코스를 밟은 반면에 남부는 오랫동안 농경사회에 정체되어 있었고 봉건적인 체제 아래에 있었다.[21]
북부에는 초기 산업혁명 시대의 동력원인 수자원도 풍부했다. 일단 산업혁명 시기부터 주목받은 수력은 1790년 화력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알프스산맥의 협곡을 이용해서 얻어냈고, 그 수력으로 밀라노 등의 실크 가공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포 강, 테베레 강, 아르노 강 등 북부 지역에 있는 하천들은 농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포 강 지역은 세계적인 쌀 생산 지역이며 그 유역은 유럽 내 생산성이 높은 평야이며, 테베레 강과 아르노 강은 각각 라치오, 토스카나를 부양하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부터 석유가 본격적으로 이용되는 대전까지의 산업화 기간 중 수력이 이전보다도 오히려 중요해지는데, 이는 이탈리아 지역에 석탄이 부족해 산업화에 필요한 동력원 수급을 주로 알프스의 수력발전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통일을 주도한 피에몬테를 비롯한 북부 지역의 경우 초기 산업혁명의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철도 연장률이 남부에 비해 넘사벽이었다. 일단 북부 지역은 서유럽 지역의 철도들과 연계가 되어있다보니 일찍 건설된 측면도 있었다.
또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남부에 비해 시장규모도 컸으며 북부는 풍요로운 서유럽 시장에의 접근성이 높지만, 남부는 주변 경제권 버프도 없다. 중세 초반 아말피 공화국이 지중해 무역에 뛰어들었으나 노르만족의 남부 통일에 제압당한 이후 남부의 상공업은 저해되었고 지중해 교역과 시칠리아 왕국내 상업 이권은 피렌체, 제노바, 베네치아 등 북부 도시국가들에게로 넘어갔다.
다시 통일된 근대에 들어서는 이런저런 제반 환경이 바뀐지 오래라 지중해나 수에즈 운하 접근성보다는 서유럽 접근성이 더 중요해졌다. 한 마디로 모든 산업 발전 조건이 북부에 유리했다.
농업에 있어서도 북부는 습지를 벼 재배에, 건조지대를 옥수수 재배에 활용하면서 외래작물의 상업적 재배와 기업형 농장의 개념이 일찌감치 정착하면서 생산력이 크게 상승하였지만 원래 훨씬 유서깊은 곡창지대였던 캄파냐나 시칠리아를 끼고있던 남부는 빵밀, 포도, 올리브, 토마토 등 전통적인 자급자족용 작물의 장원식 재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통일 이전 북부의 경우 프랑스와 비슷한 소작권 보호 및 소출물 분익 관습(지주 : 소작농 1:1)이 존재했던 반면(Mezzadria)[22], 남부는 봉건제도 해체의 미비로 인해 대토지 부재지주 계급이 존재했고 소작권 보호 없이 소작농들이 마름을 통해 매년 계약해야 하는 유사장원제인 Latifondo 시스템으로 굴러갔다는 농업 문화의 차이도 남북격차를 악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23]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남부와 대토지 부재지주 위주로 돌아가는 북부 일부 지역에 토지개혁을 진행하였지만 행정 비효율과 부패, 지주 계층에 대한 정치적 고려, 분배한 박토지역의 개간 미비 등으로 인하여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남부 농민 상당수가 빈농으로 전락했다.
이후 경제성장과 동시에 남부 빈농들이 대거 북부로 이주해 하부 노동자계층을 형성했고 남부의 인구 유출로 인해 남북격차 문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즉 그나마 인구를 방어한다는 나폴리마저 무너지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북부와 남부의 소득격차가 워낙 심해서 양측의 대립이 상당해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이탈리아 남부의 1인당 GDP는 PPP 기준으로 2만 달러에 불과해 한국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과 흡사한 정도이다.
반면 북부, 특히 롬바르디아 지역은 서유럽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20개 주 중 가장 부유한 롬바르디아와 가장 가난한 시칠리아의 1인당 소득 격차는 2.1대 1이다. 동독을 흡수한 독일보다도 상태가 좋지 않다.[24]
2014 년 기준, 미국의 50개 주 중 1인당 GDP 66,160달러로 가장 부유한 주(알래스카)와, 31,551달러에 불과해 가장 가난한 주(미시시피)의 소득 격차와 비슷한 수준이라고는 하나, 이탈리아는 국가 규모와 주의 수에서 미국보다 많이 작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지역 간 소득 격차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25]
이탈리아의 경제 수준이 한국과 비슷한 이유가 이런 것인데 북부 지방은 독일의 바이에른, 헤센, 라인란트팔츠, 바덴뷔르템베르크, 함부르크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 프랑스와 동급으로 잘 사는 반면 남부 지방은 굉장히 낙후한 경제력으로 악명높아 두 지역이 같은 나라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든다.
다른 국가들의 경우 소득격차가 지역과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보통 대도시, 산업도시 지역이 높고 농어촌 지역이 낮거나, 혹은 자원이 나는 지역이 높은 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탈리아는 도시고 농어촌이고 상관없이 북부 지역이 높고 남부 지역이 낮다.
가령 남부의 대도시 지역인 나폴리나 팔레르모 지방의 지역 총생산은 북부 지방에서 가장 1인당 지역총생산이 낮은 지역인 임페리아(Imperia)나 베르바노쿠시오오솔라(Verbano-Cusio-Ossola)보다도 낮다. 즉 북부이기 때문에 높은 현상이 나오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의 유명 지역들은 2005년 포브스의 조사에서 유럽 연합의 159개 지역 중 빈, 런던 및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 함부르크, 일드프랑스, 바이에른의 뮌헨, 스톡홀름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도시권, 지역들과 함께 가장 부유한 10개 지역 안에 들었다.
2009년의 조사에서도 런던, 브뤼셀, 룩셈부르크, 일드프랑스 등과 함께 30위 안에 들었지만 남부는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그리스의 빈곤한 지역들과 비교당하면서 가장 가난한 10개 지역 안에 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게다가 남부의 실업률은 북부의 7배가 넘어 온갖 범죄와 마피아들이 남부에 창궐하고 있다.
현재 페라리[26], 람보르기니[27], 스메그[28], 스톤 아일랜드[29], 세가프레도[30], 마세라티[31], 구찌[32], 살바토레 페라가모[33], 페레로[34], 피아트[35], 이베코[36], 라바짜[37], 카파[38], 일리[39], 핀칸티에리[40], 베르사체[41], 아르마니[42], 메트로시티[43], 몽클레르[44], 돌체 앤 가바나[45], 피렐리[46], 베레타[47], 디젤[48], 로또[49], 디아도라[50], 드롱기[51], 베네통[52], 펜디[53], 불가리[54]와 같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이탈리아 대기업, 중견기업들은 대부분 본사를 북부 또는 중부에 두고 있다.
남부에 본사가 있는 기업들은 대부분이 영세 기업이거나 경공업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나마 연고지가 이탈리아 북부가 아닌 기업 중에 한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거나 혹은 대한민국에 지점을 낼 정도로 크게 성장한 이탈리아 기업은 디벨라[55], 나뚜찌[56], 데 체코[57] 정도 밖에 없다.[58]
하지만 이들 중 나뚜찌와 데 체코[59]는 중부 지역과 인접한 풀리아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마저도 로마, 밀라노, 피렌체 등에 분산된 북부와 달리 대부분 나폴리나 북부 인접 지역에 몰려 있다.
4. 언어
언어도 다르다.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 등 북부 포 강 유역의 피에몬테어나 롬바르드어는 이탈리아어의 기반이 된 토스카나어보다는 프랑스 남부 오크어와 동일 계통[60]으로 치는 갈로 로망스어로 분류되고 중부의 로마네스크어, 남부의 나폴리어와 시칠리아어의 경우 토스카나어와 같은 계통이나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영향으로 언어에 차이가 보이며 특히 이는 지리적으로 먼 시칠리아어로 갈수록 심하다. 푸니쿨리 푸니쿨라가 남부 방언(나폴리어)로 씌여진 노래인데 가사를 보면 표준 이탈리아어와 많이 다르다.또한 알프스 산악지대의 프랑코프로방스어 사용 지역 발레다오스타나 사실상 오스트리아 문화권에 독일어 사용 지역인 쥐트티롤, 남부의 그리스 계통 그리코어 사용 지역[61]과 카탈루냐어[62], 알바니아어 공동체[63] 등 이탈리아 문화와 동떨어진 소수 언어도 존재한다.[64]
이탈리아인들이 스스로 각 지역을 비하하는 지역차별 용어들이 있다. 영상
이러한 남북문제를 기반으로 한 지역드립도 유서 깊다. 북부 사람들은 남부를 농사말고 하는게 없다며 땅흙놈들(terroni)[65]이라 부르며 경멸하고, 반대로 남부 사람들은 북부놈들은 농사도 못지어서 멀건 옥수수 곤죽[66]만 먹다 펠라그라병 걸린다며 곤죽놈들(polentoni)[67]이란 욕으로 응수한다.
5. 문화
기후 차이 때문에 요리 문화도 꽤나 다르다. 북부는 쌀과 옥수수 농사가 가능해서 리소토와 폴렌타를 주식으로 먹고 파스타도 생파스타 종류가 많으며 파마산 치즈, 버터도 아낌없이 쓴다.[70]반면 남부는 우리가 흔히 '이탈리아 요리'하면 생각하는 건조 파스타와 토마토, 올리브유 위주로 먹는다. 온화한 지중해 해안 지대에 풍부한 신선한 야채와 해산물, 오렌지 레몬등의 시트러스 과일, 버팔로 모짜렐라 치즈등이 곁들여진다. 이러다 보니 이탈리아에서 레시피가 매우 엄격한 요리들은 통일 이후에 레시피가 만들어진 비교적 새로운 요리이다. 통일된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요리이기 때문이다.
6. 사회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의 차이는 경제 격차에 그치지 않는다.유전적으로도 북부인과 남부인의 차이가 상이한 편인데, 북부 지방은 라틴계지만 게르만족, 켈트족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인이나 게르만인 영국인, 구 동독 지역 및 남부 독일인과 평균 신장이 비슷하고 남부 지방은 한국인과 평균 신장이 비슷하거나 작은 편[71]이다. # 또한 북부 지방 출신은 피부가 흰 편이고 남부 지방 출신은 피부가 중동인과 비슷할 정도로 까무잡잡한 편이다.[72]
이는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묘사되었다시피 역사적인 이유가 강하다. 고대 로마 시절부터 중북부의 켈트-이탈리아계(Celto-Italic) 인종과, 남부의 그리스계(Hellenic) 인종 등으로 구분되었고[73], 로마의 동맹시 전쟁으로 이탈리아가 통일되자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남북부가 유전적으로 섞였고, 여기서 중부 이탈리아인이라는 별개의 유전적 클러스터가 생겨났다.[74]
세계 어딜가나 지역별 유전 차이는 나지만 이탈리아는 남북으로 길쭉한 지리적 환경이 사회 문제와 엮여서 더 돋보이는 편이다. 비슷한 곳이 중국, 대만 등 중화권이나 인도인데 전자 중 대만은 북방계 외성인 및 화교 + 객가와 남방계 외성인 및 화교 + 남방계 본성인 + 대만 원주민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국, 인도 역시 북방계와 남방계가 다르다.
그나마 비슷한 곳이 프랑스인데 프랑스 북부 지역은 라틴족 기반에 켈트계 골족과 게르만 프랑크족이 섞여 있고, 프랑스 중부와 남부 지역은 라틴족 비율이 높아지고 반대로 켈트계 골족과 게르만 프랑크족의 비율이 낮아진다.
그런데 프랑스의 소득 격차는 생각보다 낮다. 가장 부유한 일드프랑스와 가장 소득이 낮은 지역 간 격차가 생각보다 적고 프랑스의 지역 간 격차는 타 국가와 같이 도농격차에 더 가깝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된 파리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문화 특성 상 갈등이 이탈리아에 비해 낮다.[75]
이탈리아 통일 이후 브리간타조 반란과 경제 격차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남부 문제가 지식인층 사이에서 이슈화되며 북부인들 사이에서 남부에 관한 편견이 고착화된다. 야만성, 저개발성, 부패, 게으름, 무식 등의 남부 타자화는 오리엔탈리즘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남부를 사실상 내부 식민지로 해석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만 타자화와 동시에 국민국가의 일원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교화 대상으로 바라보는 면 또한 존재했다. 왕국 시기 우생학[76]으로까지 뻗었던 타자화는 2차대전 이후 겉으로는 사그라들지만 완전히 남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현실에 뿌리내려 알게모르게 영향을 끼친다.[77]
여기저기서 갈등과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탈리아 남부 마피아들이 1차적으로 노리는 표적이 바로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층이다. 남부지방이 불안정하다보니 범죄가 많이 발생한다. 그 중 시칠리아는 도망칠 곳조차 없다.[78]
2020년 의원 수 감축 국민투표에서도 남부가 득표율이 높았고, 북부는 10% 이내로 낮았다.
2020년 초, 코로나 19가 이탈리아 북부를 초토화시키면서 바이러스가 상대적으로 덜 퍼진 남부에서는 북부를 바이러스 온상지라며 조롱하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2021년 1월 롬바르디아주 부지사가 지역별 경제 기여도에 따라 코로나19 백신을 배분하자는 발언을 하여, 남부에서 분노만 샀다. #
7. 분리주의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와 같이 옛날에 잘 나가는 공화국이 있었던 도시에는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며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소수 정당이 있다. 이런 점은 이탈리아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치를 인정해준 사르데냐[79]와 베네토, 그리고 쥐트티롤에서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역사 단락에 설명한 이유 때문에 차별받아온 남부보다 통일을 주도했던 북부 쪽에서 분리독립 주장이 거센 점이 특기할 만 하다.이렇듯 "차라리 갈라서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바로 현 집권당인 북부동맹이다. 이들은 '파다니아(Padania)'#[80]란 국명으로 북부의 완전 독립과 연방제를 주장했고, 세금은 많이 내면서 효과는 없는 현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지금은 집권하기 직전에 북부 독립을 포기하고 전형적인 범국민 우익대중주의 정당으로 노선을 변경했지만, 이탈리아의 남북문제가 얼마나 골이 들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이발사의 90%는 이탈리아 남부 지역 출신[81]인지라 남북으로 이탈리아가 쪼개지면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머리도 못 깎는다는 우스개가 있다.
그런데 사실 북부 독립주의자들의 속내는 남부와 북부가 분할되더라도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남부 출신의 인력은 외국인 노동자의 형태로 계속 활용할 수 있으니 상관없다는 것에 가깝다. 즉 EU에 가입된 동유럽 국가 출신 외국인 노동자를 서유럽에서 쓰는 것과 같은 구조로 보면 된다. 오히려 사회보장을 해줄 필요가 없어지니 더 싸게 부려먹을 수 있고, 남부의 사회보장이나 기간시설 정비에 북부의 세금이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북아프리카 출신 밀입국자나 사막화 문제 역시 남부에 떠넘기겠다는 속셈이다.[82]
다만, 그나마 이탈리아는 종교와 문화가 유사하고, 정치가 아무리 막장이라도 난립하지는 않은 것이 천만 다행으로, 종교 문제와, 분리독립을 부추기는 막장 정치인들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독립 분쟁을 벌였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매우 평화로운 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8. 대중매체에서
이탈리아의 이런 배경을 주제로 한 만화가 있는데 바로 건슬링거 걸이다. 실제의 북부 독립운동은 해당 만화처럼 과격하지도 않고, 클로체 사건의 경우 실제 있었던 일이 모티브이긴 하지만 위에 마피아 문서에서 언급한 대로 본래는 마피아가 벌였던 일이다.소피아 로렌 주연 영화 사랑의 변주곡(Yesterday, Today And Tomorrow / Ieri, oggi, domani)이라는 나폴리, 밀라노, 로마를 배경으로 한 3부작 옴니버스 영화에서도 남북 간의 격차가 잘 드러난다. #
영화 웰컴 투 사우스(Welcome to the South, Benvenuti al Sud)에서도 이러한 배경이 잘 드러난다. 주인공이 자식 교육을 위해 밀라노로 전근가기 위해 꼼수를 쓰다가 들켜서 남부 카스텔라바테로 좌천되는데, 처음에는 남부에 대한 온갖 편견에 사로잡혀있던 주인공이 순박한 남부 사람들의 모습에 점차 마음을 열게 된다는 이야기.
카를로 레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프란체스코 로시의 영화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Christ Stopped at Eboli, Cristo si è fermato a Eboli) 또한 남부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남부의 참상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남부를 오리엔탈리즘적으로 타자화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회를 다룬 소프라노스의 에피소드에서 인디언놈들이 침략자로 간주하며 싫어하든 말든 같은 이탈리아 동포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기념일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나폴리 토박이 출신인 푸리오 준타가 "그 제노바(북이탈리아 제1항구도시) 새끼가 뭐가 좋다고 치켜세워줘? 우리는 수백년 전부터 돼지같은 북부놈들한테 착취당하며 살았고 지금도 당하는 중인데 말야"라고 쏘아붙인다. #[83]
방송에서도 북부 이탈리아 사람과 남부 이탈리아 사람간의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데 한국에서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북부 베네토주 베네치아 출신인 알베르토 몬디와 밀라노 출신인 크리스티나 콘팔로니에리는 이탈리아에 대해 꽤 긍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유튜버로 활동했던 이탈리아인이지만 남부 시칠리아 사람인 샌디 라골리아는 이탈리아는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디스한다. #
[1] 벨기에의 경우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어권이 나뉘어서 언어 자체가 다르고 민족도 차이가 있으며 영국 역시 켈트의 잔재가 짙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앵글로색슨의 역사를 가진 잉글랜드와 파벌 등이 갈려 종교, 문화적 동질성이 옅은 편이다. 이탈리아는 외양과 생활수준의 차이를 빼면 종교나 문화적으로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이런 지역갈등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2] 유럽의 나라들은 정도의 차이만 좀 있을 뿐 모두 이와 유사한 현상을 겪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 단일화된 나라를 유지해오며 고도로 관료화된 중앙집권국가가 일찌감치 안정된 형태로 자리잡았었던 한국와 달리 유럽에서 영토가 좀 넓다 싶은 나라들이 지금의 판도로 합쳐진 것은 백년전쟁을 전후하여 국토 대부분을 통합한 프랑스를 제외하면 길어봐야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지방자치와 연방제의 발달, 분리주의, 지역연고제 스포츠(축구 등)의 높은 인기 등을 이로 인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3] 원래는 현재 프랑스의 사부아와 니스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영토였으나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 제2제국에게 할양했다.[4] 1815년 빈 회의로 옛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인 리구리아 지역까지 추가했다.[5]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황제들은 북이탈리아 지배권이 있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랑 남부의 시칠리아 왕위를 확보한 후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하려 시도했다. 교황을 중심으로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로인해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의 대결이 일어난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시도가 콘라딘과 만프레디를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실패한 후 동시에 시작된 대공위시대와 맞물려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화와 분열이 더욱 촉진되었다.[6] 시칠리아 왕위는 아라곤 국왕이 소유하다 통일 스페인 국왕에게 넘어갔고, 나폴리 왕위는 아라곤 트라스타마라 왕조 방계의 지배하로 넘어갔다가 이탈리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 왕국 루이 12세의 손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페르난도 2세의 주도하에 스페인의 영토가 된다는 좀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7] 압스부르고 스페인 제국의 주요 영토 중 밀라노 공국은 지역을 노리는 적들로 주변이 포위되어 있어 수탈하기 껄끄러웠고 아라곤 왕국령 지역은 자치 세력이 강해 스페인 국왕이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었다. 따라서 스페인의 전비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와 카스티야, 나폴리가 주로 부담했다.[8] 정확힌 나폴리와 사르데냐는 오스트리아, 시칠리아는 사보이아 공국에 할양되었으나 사국 동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강권에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맞교환,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모두 확보하였다.[9] 나폴리 국왕으로는 카를로 7세, 시칠리아 국왕으로는 카를루 5세라 불리나 이탈리아에서는 일반적으로 보르보네의 카를로(Carlo di Borbone)라 불린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 외가인 파르네세 가문이 단절되면서 파르마 공국을 물려받아 파르마 공작 카를로 1세로 즉위했기 때문에 나라마다 왕호가 다르기 때문이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얻는 대신 파르마 공국을 카를 6세에게 넘겼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카를로스 왕자의 동복 동생 펠리페 왕자가 통치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파르마 공국은 부르봉파르마 가문이 통치하게 된다.[10] 나폴리 국왕으로는 페르디난도 4세, 시칠리아 국왕으로는 피르디난누 3세.[11] 카를로스 3세가 페르디난도에게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위를 물려주며 나폴리 국사조칙을 반포, 스페인 왕위와 나폴리, 시칠리아 왕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금지했다. 스페인 왕위는 카를로스 3세의 차남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가 물려받았다.[12] 실질적으로 통일 이탈리아를 설계한 카밀로 카보우르는 원래 목적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사보이아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북중부 통일 정권 수립이었던 만큼 남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많이 부족했고 사회 혁명보단 사르데냐-피에몬테의 확장을 통한 현실적인 영토적 통일을 추구하는 중도 보수 성향을 가져 토지 개혁등의 사회구조 개혁에는 미온적이었다. 주세페 마치니나 다니엘레 마닌 같은 사회 개혁을 꿈꾸는 공화파들도 토지 개혁에 비판적이라 프랑스 혁명기와 1848년 혁명기에 민중과의 연대에 실패했다.[13] 붉은셔츠단의 시칠리아 정복 당시 카타니아 인근 브론테 지방에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가리발디의 부관 니노 빅시오의 손에 제압당했다.[14] 보호무역 이후 북부 공업지대는 정책에 힘입어 유럽 유수의 공업지대로 성장한다.[15] 이 정책으로 포에니 전쟁 시절부터 유명했던 로마 인근의 폰티노 습지가 개간되어 라티나 현이 된다.[16] 이 또한 마피아가 파시즘기에도 여전히 활개쳤지만 언론 통제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17] 경제성장기 당시에 남부에서 북부로 유출된 인구가 대략 900만명 정도에 달했다.[18]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문제는 북부도 마찬가지로 겪고 있기는 하나 남부는 안 그래도 젊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게 된 상황에서 고령화를 겪고 있으니 북부보다 훨씬 문제가 심각하다.[19] 베네치아 공화국의 찬란한 역사와 이로 인한 베네토 지역민의 자부심이 베네토 독립운동이 유의미하게 강해지는 데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나 베네토 독립운동 역시 뒤이은 북부동맹처럼 민족 운동보다는 공화국 성립 후 무능한 중앙 정치권 성토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20] 물론 서유럽 기준으로나 소득이 낮다는 것이지 세계적 기준으로는 선진국 하위권이긴 해도 엄연한 선진국들이다.[21] 당장 북부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아웅다웅 했지만 남부는 12세기 시칠리아 왕국 성립 이후 양 시칠리아 왕국이 망할때까지 단일 봉건제 국가를 유지해 왔다. 참로고 옛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가 바로 오늘날 남부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지역들이다.[22] 주로 봉건제가 유명무실화된 근세 이후 북동부 및 중부를 중심으로 이런 관습이 존재했으며 포 강 유역 및 해안가 습지 등의 대토지 위주 지역 또한 일정부분 존재했다.[23] 북부의 경우 중세 이후 서유럽의 발전을 어느정도 따라가며 나폴레옹 전쟁 즈음에 시행된 봉건제 폐지령으로 완전히 근대적 구조가 불평등할지언정 정착했으나 남부 왕국의 경우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개혁 전까지 봉건제가 유지되었고 봉건제 폐지 또한 타협적으로 진행되어 근대적 토지소유의 확립이 토지 분배 없는 공유지 폐지와 느슨하게 관리되던 교회토지의 감소라는 농민들에게 최악인 형태로 진행되며 대토지 지주 위주의 억압적 사회구조가 정착하였다.[24] 사실 독일은 지역 간 편차가 매우 낮은 지역이다. 그래서 종주도시라는 개념이 없고, 프랑크푸르트와 뮌헨 간 장거리 노선 개수, 루프트한자의 허브 기능 등이 비슷한데다 대기업, 중견기업의 본사도 골고루 배분되어 있다. 심지어 동독 지역에도 자이스, DHL, 알리안츠, 지멘스의 제2 본사나 중견 기업들이 있다. 물론 대부분 베를린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은 독일 분단 전에 동독에 본사를 둔 곳들이었다. 그나마 동독 지역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격차는 줄어들고 있다. 그것도 동독 지역이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보다는 상태가 양호하다. 구 서독 지역이 그만큼 더 커버려서 격차가 커진 것이다.[25] 사실 미국의 불평등의 특징이,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격차는 비교적 크나, 가난한 지역과 부유한 지역의 격차는 비교적 적은 것이다. 미국의 3,144개 군 가운데 가장 부유한 곳과 가장 가난한 곳의 차이도 22배에 '불과'하다.[26] 에밀리아로마냐 주 마라넬로[27] 에밀리아로마냐 주 볼로냐[28] 에밀리아로마냐 주 구아스탈라[29] 에밀리아로마냐 주 라바리노[30] 에밀리아로마냐 주 볼로냐[31] 에밀리아로마냐 주 모데나[32] 토스카나 주 피렌체[33] 토스카나 주 피렌체[34] 피에몬테 주 알바[35] 피에몬테 주 토리노[36] 피에몬테 주 토리노[37] 피에몬테 주 토리노[38] 피에몬테 주 토리노[39]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주 트리에스테[40]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주 트리에스테[41]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42]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43]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44]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45]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46]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47] 롬바르디아 주 가르도네 발 트롬피아[48] 베네토 주 브레간체[49] 베네토 주 트레비소[50] 베네토 주 카에라노 디 산 마르코[51] 베네토 주 트레비소[52] 베네토 주 폰자노베네토[53] 라치오 주 로마[54] 라치오 주 로마[55] 풀리아주 루티그리아노[56] 풀리아 주 바리[57] 아브루초 주 파라산마르티노[58] 심지어 아브루초주도 라치오 주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있어서 사실상 중부지방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아 완전 남부 지방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실제로 아브루초주는 다른 남부 지방에 비하면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훨씬 양호하다.[59] 실제로 중부 지역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60] 프랑스도 북부와 남부의 언어가 매우 상이하다. 프랑스의 지방 언어 문제 참고.[61] 고대 그리스계 마그나 그라이키아 식민 도시들의 후손이다.[62] 오랜 아라곤과 스페인 지배의 영향이며 코르시카, 사르데냐에도 카탈루냐어 화자가 존재한다[63]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피난 온 이들의 후손이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가 대표적인 시칠리아의 알바니아계 공동체 출신 인물이다.[64] 다만 토스카나어가 단테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이탈리아 문화권 내 상인과 식자층 사이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어 중앙집권 정권의 오일어 강요로 점철된 프랑스(프랑스의 지방 언어 문제 참고)보다 언어적 통일성이 나은 면도 존재한다.[65] 단수형 terrone(남)/terrona(여)[66] 폴렌타(polenta). 원래 곡물로 만들던 죽의 이름인데 옥수수 도입 이후로는 옥수수죽으로 자리잡았다. 식혀서 반죽처럼 만들어 튀기거나 찌거나 구워먹기도 한다.[67] 단수형 polentone(남)/polentona(여)[68] 물론 자기가 먹을 농사를 못짓는다는 뜻이다. 남부는 전통적인 자가 취식용 작물인 빵밀과 과채를, 북부는 2차 가공용 작물이나 대체작물을 주로 생산하다보니 과거 북부 농민들은 직접 담근 신선한 포도주나 포모도로는 커녕 빵도 못먹고 옥수수 가루로 물죽을 쒀먹었다가 펠라그라병으로 많이 죽었던 것이 사실이다. 요즘이야 종합비타민약이 값싸게 보급되어서 그럴 일은 없다지만 옥수수 가루죽 자체도 워낙 맛이 없기에, 이딴 것도 음식이라고 쳐먹냐는 지역드립의 소재가 되는것. 이탈리아인 자체가 요리부심이 대단하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농업에 유리했던 남부가 집에서 손수 만든 무슨무슨 음식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한 것은 로마 시대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다보니 이렇게 음식가지고 지역드립을 걸기도 하는 것.[69] 경제개발기에 빈곤과 기아에 시달렸고 지금도 이북에 굶는 사람이 많기에 먹는 걸로 사람 꼽주는 걸 금기시하는 한국인이 보기에 이런 남북갈등은 거의 사생결단 수준인데, 기실 사생결단이 맞기도 하다.[70] 북이탈리아 요리는 프랑스 요리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들 지역이 올리브유를 안 쓰는 것은 아니다. 남부에 비해 버터 사용 비율이 높은 것 뿐이다.[71] 특히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남부 도서지방이나 남쪽 끝 칼라브리아 등지의 평균 신장은 일본인과 비슷한 수준이다.[72] 이탈리아계 미국인이긴 하나 아리아나 그란데, 알 파치노나 프랑크 카프리오 판사나 시네마 천국을 제작한 이탈리아인 감독인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외모가 전형적인 남부 이탈리아인의 모습이다. 실제로도 아리아나 그란데, 알 파치노나 프랭크 카프리오의 부모 모두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로 아브루초, 시칠리아, 캄파니아 지역 출신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는 시칠리아 토박이이다. 반대로 흰 피부에 큰 키를 가진 북부 이탈리아인의 모습으로는 밀라노 출신인 크리스티나 콘팔로니에리나 베네치아 근교 출신인 알베르토 몬디, 토스카나 출신인 로베르토 베니니, 움브리아 출신인 모니카 벨루치, 로마 출신인 소피아 로렌이 대표적이다.[73] 북부 이탈리아는 켈트족의 갈리아 문명과 이탈리아인들의 로마-에트루리아 문명으로 시작한 반면, 남부 이탈리아는 그리스계 민족들의 식민도시로부터 시작했다. 서로 같은 조상을 공유하는 켈트-이탈리아족은 금발과 흰 피부의 비율이 높은 반면, 그리스계의 남부는 그렇지 않았다.[74] 철기 시대 및 로마 공화국 시절 중부 이탈리아의 인골은 유전적으로 현대의 북부 이탈리아인에 가장 가깝고, 로마 제국 시절 중부 이탈리아의 인골은 유전적으로 현대의 남부 이탈리아인, 그리스인과 가장 가깝다. 현대의 중부 이탈리아인의 유전자는 북부 이탈리아인과 남부 이탈리아인의 혼합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이다.[75] 대신 파리에 지나치게 집중되다보니 파리와 타 지역 간 격차가 프랑스 내 문제이다.[76] 전술된 유전적 차이를 인종간 우열로 해석했다.[77] 남북간 격차를 인종과 민족 차이 위주로 보려는 관점 상당수가 사실은 이탈리아 내부의 이러한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78] 참고로 한국인들이 자주 겪을 법한 일로 괜히 돈 많아보이는 동양인 관광객한테 소매치기하는 이들은 마피아가 아니라 내놓고 키우는 집시족 꼬맹이나 이런저런 소규모 동네 소매치기 조직들이다. 이들도 윗줄로 올라가면 마피아들하고 상관이 있다.[79] 사르데냐는 카를로 펠리체 국왕의 개혁 이전까지는 같은 사르데냐 왕국에서도 피에몬테, 사부아와 사실상 남남이었다.[80] 포 강의 라틴어 명칭 파두스(Padus)에서 유래한 명칭이다.[81] 이 말의 출처는 제노포보스 가이드 이탈리아편이다.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바가 있으나 현재는 절판되어 구해볼 수 없다.[82] 이런 북부 독립주의에 대하여 움베르토 에코는 '보통 부자들이 가난뱅이를 뜯어먹지, 가난뱅이가 부자를 뜯어먹으면 왜 가난뱅이로 남아있겠냐?'고 비꼰 바 있다.[83] 애초에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의 조상은 북부를 좋아할 리가 없는 남부출신이다. 영어를 주로 쓰는 교포 2~3세부터는 이탈리아계라는 인식도 막연해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