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토 이탈리아어 : Taranto | |||
국가 | 이탈리아 | ||
지역 | 풀리아 | ||
면적 | 249.86km2 | ||
인구 | 185,909명[1] | ||
시장 | 피에로 비테티 |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UTC+2) | ||
1. 개요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풀리아 지방의 항구 도시이며, 타란토 만을 접하고 있다. 이탈리아 반도를 장화 모양으로 생겼다고 했을 때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이 바로 타란토 만이며, 타란토는 만의 맨 위에 위치한다. 십자군 전쟁기에 동 지중해를 누볐던 노르만 인 군웅 보에몽 1세의 영지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에는 타란토 공습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구 18만의 국제항이며, 아직까지도 이탈리아의 주요 해군 기지가 위치할 만큼 천혜의 항구를 자랑한다.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큰 축에 드는 도시이지만 나폴리나 팔레르모에는 많이 밀리며, 아풀리아 지방에서도 바리보다 작다. 2026년 지중해 게임을 개최할 예정이다. 타란토도의 도청 소재지이다.2. 언어별 표기
이탈리아어 | Taranto |
라틴어 | Tarentum |
고대 그리스어 | Τάρᾱς / Tarās |
그리스어 | Τάραντας / Tarantas |
3. 역사
3.1. 그리스 시대 (대 그리스)
도시는 기원전 706년에 스파르타 출신의 도리스계 이주민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초기 이름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중 한명의 이름을 본뜬 타라스 (Taras)였다. 타라스의 건설자들은 '처녀의 자식들'이라는 뜻의, 약간 비하적인 뉘앙스가 담신 파르테니아이(Παρθενίαι)로 불렸는데, 일반적으로 스파르타에서 리쿠르고스 체제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권력 다툼에서 밀린 제1계층들로 여겨진다.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타란토는 본래 왕정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472년, 타란토는 인근의 폴리스인 레기온과 연합하여 내륙의 원주민인 야피기아 인들과 싸웠으나 패하였고 1만여 명의 그리스 인 포로들이 붙잡혀 참수되었다고 한다. 이에 기원전 466년에 2차 원정이 이루어졌으나 저번보다 더 크게 패하였고 너무도 많은 귀족들이 전사하여 민회가 득세,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리하여 도시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문명권인 마그나 그라키아 중에서 맏형 역할을 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보병 전술과 그를 위한 단련을 중시한 본토 스파르타와는 달리, 귀족적인 분위기 아래에 귀족의 부와 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마병 육성을 중시했으며 헬레니즘 시기 여러 그리스 폴리스들이 기용한 경무장 투창 기병대 또는 그 전술을 뜻하는 타란틴 기병대라는 말이 폴리스 타란토에서 유래했다. 원래 타란토 군의 기병대에서 유래했으나 여러 헬레니즘 국가들로 퍼져나가면서 타란토와의 지리적 관련성은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3.1.1. 민주정과 전성기
기원전 432년에 타란토는 기존의 대립 도시이던 투릴과 화해, 공동으로 헤라클레아를 세웠다. 그리고 재빠르게 집어삼킨건 덤. 한편, 그해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타란토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여 모국인 스파르타[2] 편에 서서 아테네 함대의 정박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가 대패하며 추가 기울자 기원전 415년에 스파르타에게 함대를 보내주어 승전국의 반열에 올랐다. 스파르타 패권은 기원전 371년의 레욱트라 전투로 무너졌지만 그에 관계없이 타란토는 번영하였다.타란토의 '페리클레스'로 평가받는 아르키테스의 집권기간 동안 타란토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한 육군과 해군을 소유하였고 지중해 각지의 물산을 그리스 본국과 거래하며 번영하였다.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한 타란토를 경계하기 위해 반도 중부의 에트루리아 인들과 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동맹을 맺을 정도였다. (기원전 367년) 하지만 유능했던 아르키테스가 기원전 347년에 사망한 이후로는 기나긴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3.1.2. 용병에 대한 의존
타란토의 안위를 가장 위협하던 세력은 다름 아닌 북쪽의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막강한 해군이 아닌 육군이 필요했는데, 시민들은 무역에 치중하여 점차 병사 자원이 떨어졌고, 결국 타란토는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끌어들인 용병은 모국인 스파르타였다. 기원전 343년, 타란토는 스파르타에 용병을 제안했고 이듬해에 아르키다무스 3세의 군대가 도착하여 루카니아 인들과 싸웠으나 패하고 국왕 본인마저 전사하였다. (기원전 338년)기원전 333년, 타란토 인들은 아드리아 해 건너편 에피로스의 국왕이던 알렉산드로스 1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삼촌이자 피로스 대왕의 숙부)를 다음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하지만 그의 군대 역시 삼니움 족에게 패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코센차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타란토는 결국 이탈리아 인들과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20년)
기원전 304년, 루카니아 인들은 타란토를 공격하였고 이에 시민들은 바다 건너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국왕인 아가토클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칼라브리아 일대를 석권하였으나 곧 회군하였다. 다음으로 용병이 된 스파르타의 국왕 클레오메네스 (클레오메네스 전쟁의 그 왕은 아니다)는 기원전 303 ~ 302년간 타란토 인들과 함께 싸운 후 회군하였다. 위의 두 원정으로 타란토의 북쪽 국경은 안정된 듯했다.
3.1.3. 로마와의 대립 (피로스 전쟁)
기원전 290년, 로마는 기나긴 전쟁 끝에 삼니움족을 굴복시켰고,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폴리스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레기온, 로크리, 크로토네 등이 로마에 자발적으로 보호를 요청하였고 기원전 282년에는 타란토의 지배 하에 있던 타란토 만의 도시 투릴이 루카니아인의 위협을 덜고자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타란토 만을 가로질러 투릴에 정박하였고, 타란토인들은 마그나 그라키아의 패권을 행사하던 자신들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다. 타란토 함대는 즉각 출동하여 10척 중 4척의 로마 함선을 침몰시켰고 5척을 나포하였다. 이후 타란토 함대는 투릴로 진격하여 로마군과 그에 협조하던 귀족들을 추방하였다. (구 기득권 층의 귀족들은 민주정을 주도하는 민중당에 맞서 친로마적 태도를 보였다.)이후, 로마는 집정관 포스투미우스을 포함한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나 타란토 대표들에게 모욕을 당한 후 돌아왔고, 이에 로마는 타란토에 선전포고 하였다. (기원전 281년) 그러자 타란토는 명성이 자자하던 명장인 에페이로스 국왕 피로스 1세에게 지원을 부탁하였다. 피로스군이 도착하기 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가 이끄는 로마군은 타란토를 함락, 약탈하였고 타란토-삼니움 연합군도 로마군에 패하였다. 이후 타란토는 로마와 휴전 협상을 하였는데, 그 사이에 3천 명의 에페이로스 선발대가 타란토에 입항하였고 이에 로마 군은 후퇴하였는데, 중간에 그리스 전함들의 공격으로 손실을 입었다.
피로스 1세는 타란토 해군이 자신의 코르키라 (코르푸 섬) 정복에 도움을 주었기에 타란토를 돕기로 하였다. 그는 이후 시칠리아, 카르타고까지 정벌하여 마케도니아를 통일할 군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는 당시 마케도니아 왕이던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팔랑크스를,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와 테살리아에서 기회를 노리던 안티고노스 2세에게 해군과 자금을 빌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9천 명의 병력과 5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보낼 것을 약속하였다. 그 병력은 피로스의 원정 기간에 에페이로스를 지킬 것이다. 기원전 280년 봄, 피로스는 2만 명의 팔랑크스 보병대와 3천 기병대, 2천 궁병, 250명의 투석병, 20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하고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다. 피로스 전쟁(BC 280 - 275년)의 시작이었다.
피로스의 상륙 이후 로마군은 8만 병력 중 4만 명을 남하시켰고 피로스의 3만 대군과 타란토에서 서쪽 50여km 떨어진 헤라클레아에서 싸웠다. 비록 피로스는 승리하였지만 4천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어 (로마는 7천 전사) 이전까지 과소평가하던 로마군에게 놀라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피로스는 카푸아와 베네벤툼 등 로마의 동맹시들을 포섭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아풀리아로 돌아왔다. 기원전 279년, 아스쿨룸 전투에서 피로스는 재차 승리하였으나 3500명의 병사를 잃었다. (로마군은 6천 전사) 베테랑 정예병들이 죽는 것을 보고 회의감을 느낀 피로스는 시라쿠사, 아그리겐툼 등 시칠리아의 도시들이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도움을 요청하자 타란토에 수비대를 남기고 시칠리아로 가서 싸웠다. (기원전 278 ~ 276년, 277년의 에릭스 전투)
기원전 276년, 타란토인들은 피로스를 재차 소환하였고 이듬해인 기원전 275년에 베네벤툼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그는 로마군과 같은 피해를 보았고,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사후 켈트족을 격퇴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안티고노스 2세가 원군 파병을 거절하자 피로스는 더이상 전쟁을 치를 수 없다고 판단, 수비대를 남기고 에페이로스로 돌아갔다. 이후 피로스는 아오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격파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기원전 272년, 그는 스파르타에서 쫓겨난 왕 클레오메네스의 복위를 도와 스파르타를 포위하였으나 저항이 심하여 애를 먹었고, 퇴각 중 장남 프톨레마이오스를 잃었다. 상심한 그는 아르고스의 내전에 개입, 시가전을 벌이다가 아르고스인들의 저항이 심해 퇴각하려고 했는데 전령이 삼남 헬레누스에게 명령을 잘못 전해 피로스는 퇴각하고 헬레누스는 진군하면서 부대가 뒤엉키자 혼란속에 헬레누스와 함께 죽었다. 한 마케도니아 병사가 그를 효수하였고 시신은 복위한 안티고노스 2세에 의해 화장되었다. 피로스의 사망 소식에 타란토의 그리스 병사들은 로마에 항복하였다. 도시에 입성한 로마군은 성벽을 허물고 시민 3만 명을 노예로 팔고, 예술품들을 전리품으로 삼아 로마에 가져갔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빛나던 항구 도시의 몰락이었다.
3.2. 로마 시대
타란토 점령 이후 로마는 아피아 가도를 타란토까지 연장시켰지만 로마의 동방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한 것은 유서깊은 그리스 개척지 타란토가 아닌 로마인들이 직접 세운 식민도시인 브린디시였다. 흰 선 (가도)가 움푹 파인 타란토 만과 만나는 곳이 타렌툼, 아드리아 해와 만나는 끝지점이 바로 브린디시. 다만 로마 시대에도 타란토는 좋은 기후로 유명하였고 귀족들이 별장을 두기 즐겨하였다.
2차 포에니 전쟁 시에 칸나이 전투 (기원전 216년)로 전세가 카르타고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로마는 타란토가 한니발에 항복할 것이 두려워졌다. 기원전 212년에는 타란토의 친카르타고 시민들이 붙잡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끔살 (높은 곳에서 바위 위로 떨어뜨렸다...) 당하였고 타란토 주둔군도 증원되었지만, 결국 그해 말에 한니발은 도시에 입성하였다.(1차 타렌툼 공방전) 다만 아크로폴리스 (시타델)의 로마군은 저항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209년, 전세가 로마 측에 유리해지자 카르타고의 동맹군이었던 한 이탈리아 부대가 로마 군에게 항복하였다.(2차 타렌툼 공방전) 로마는 재차 타란토 시민 3만 명을 노예로 팔아버렸고 니케 상을 포함한 귀중품을 가져갔다.
기원전 122년, 로마인들은 타란토 인근에 넵투니아 라는 식민 도시를 만들었는데, 결국 그리스 도시인 타란토의 시가지에 흡수되었다. 동맹시 전쟁 이후인 기원전 89년에 타란토는 시민권이 주어진 무니키피움이 되었다. 기원전 37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만나 2차 삼두정치를 기원전 33년까지 연장한다는 타렌툼 협약을 맺었다. 한편, 청동판에 세겨진 타렌툼의 시 헌장이 1894년에 발굴되었다.[3] 2세기부터 타란토의 인구는 줄기 시작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퇴역 군인들의 은퇴를 장려하여 도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3. 동로마 vs 랑고바르드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에 따라 타렌툼은 서로마 제국에 속하였으나 5세기 초에 서고트 족에게 약탈을 당하였고 오도아케르 왕국을 거쳐 동고트 왕국의 영토가 되어서야 안정을 찾았다. 540년, 고트 전쟁에서 타란토는 동로마 제국에게 수복되었다. 6세기 말부터 이탈리아로 침투한 랑고바르드 족은 7세기 초에 벌써 남부 이탈리아에 도달하였다. 다만 그들은 왕권이 미약하였고 중남부에 세워진 베네벤토 공국은 사실산 독립 왕국이었다. 타란토는 662년에 베네벤토의 랑고바르드 군에게 점령되었다.하지만 이대로 있을 동로마 제국이 아니었다. 아랍 무슬림 세력이 1차 피트나로 분열되어 싸우며 동방이 안정되자 콘스탄스 2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대응하기로 하였다. 660년, 그는 궁정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옮겨 사실상 천도하였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그리말트가 프랑크 왕국의 내전에 개입해 있는 틈을 타서 타란토에 상륙, 도시를 수복하였다. (663년) 동로마 군대는 랑고바르드 군을 격파하고 아풀리아 지방을 회복하였다. (다만 이후에 카푸아와 살레르노에서 패하여 나폴리 일대의 수복은 실패한다. 이후 콘스탄스는 로마를 방문한다. 콘스탄스 2세 참고)
황제가 시라쿠사로 돌아가자 랑고바르드 인들은 재차 남부 이탈리아를 노렸다. 그리말트는 아풀리아 북부를 정복하였고 그의 아들이자 베네벤토 공작인 로무알트 1세는 686년에 기어코 브린디시와 타란토를 함락하였다. 8세기에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사라센 해적들이 타란토를 포함한 남부 이탈리아를 약탈하였다. 이는 11세기 초까지 지속되었고, 9세기에는 점령을 당하기까지 한다.
3.4. 아랍 vs 동로마
롬바르드 세력은 8세기 후반에 프랑크 왕국의 침공을 받아 약화되었고, 9세기 초반부터는 영주들끼리 내전이 벌어졌다. 841년 베네벤토 대공 지카르드가 피살된 뒤 새 대공에 오른 라델치스 1세에 의해 타란토에 억류되었던 지카르드의 동생 지코눌프가 탈출한 뒤 카푸아의 가스탈트(Gastald: 특정 지역에서 민사, 군사 및 사법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관료)를 맡고 있던 란둘프의 도움에 힘입어 살레르노 공국을 수립해 베네벤테 대공 라델치스 1세와 대립했다. 이들은 서로를 꺾기 위해 시칠리아 토후국을 수립한 아랍인들을 용병으로 불러들였고, 아랍인들은 이 때를 틈타 타란토를 자기들의 영역으로 삼은 뒤 주변 지역을 수시로 해적질했다.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는 배네치아 함대 60여 척을 파견하여 해적들을 몰아내게 하였지만 한 번의 승리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이후 40년간 타란토는 사라센 해적의 무역 거점이자 이탈리아 연안의 약탈에 대한 전초 기지가 되었다. 850년, 바리와 타란토에서 출항한 해적 함대는 칼라브리아, 캄파니아 (나폴리) 지방을 유린하여 동로마 제국에게 충격을 주었다. 854년에는 압바스 이븐 파이드가 이끈 해적단이 타란토에서 출항하여 랑고바르드 영주가 지배하던 살레르노를 습격하였다. 871년과 875년에도 동로마령 이탈리아는 공격을 받았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이끌던 바실리오스 1세는 아랍인들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어 제국 서부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880년, 프로코피오스와 레오 아포스티페스가 이끄는 육군, 나사르가 이끄는 해군은 아랍인들로부터 타란토를 되찾았다. 다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타란토인들은 충격을 받았는데, 황제의 명으로 주민 중 비그리스계 (라틴/랑고바르드) 인들이 노예가 되거나 추방되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의 이주민들로 빈자리가 채워진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도시의 충성심과 수비력을 강화한 제국은 타란토를 랑고바르드 테마의 치소로 삼았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882년에 공작이 사라센과 내통하여 도시는 다시 아랍 지배 하에 들어갔다.
다만 몇년 못 가 도시는 동로마 제국에게 회복된 듯하다.[4] 하지만 927년, 슬라브 인으로서 아랍 해적의 우두머리가 된 사비르가 이끄는 사라센 함대는 다시 타란토를 점령하였다. 90년간 벌써 3번째로 아랍인이 도시를 점령한 것이다. 공성전 이후로도 살아남은 시민들은 전부 마그레브의 노예 시장으로 보내졌다. 그러고 40년이 지난 967년, 동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남부 이탈리아에 강력한 해군 기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폐허로 방치되던 타란토에 90년간 벌써 3번째로 동로마 군대가 진주하였고 항구와 시가지가 재건되었다. 하지만 977년에 시칠리아 토후국의 에미르 아불 카심[5]이 이끄는 선단이 도시를 접수하며 타란토는 4번째로 아랍인에게 점령되었다.
카심은 도시를 약탈하였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그리스 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 과정에서 시가지 일부가 전소되었다. 982년 7월, 동로마 측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2세는 친히 남하하여 카푸아 공작 란둘프 4세, 살레르노 공국 전임 대공 판둘프 2세와 함께 사라센 소탕에 나섰다. 크로토네 인근에서 벌어진 스틸로 (콜로나 곶) 전투에서 독일 중기병대는 아랍 보병대를 무너뜨리고 카심을 전사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이에 오히려 분발한 무슬림 군은 매복시켜 놓은 5천의 기병대의 도움으로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며 승리하였다. 란둘프 4세, 판둘프 2세와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등 많은 고관들을 포함한 4천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였다. 황제 본인마저 헤엄쳐 도망갔으며, 동로마 선박에게 구조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멀리 잉글랜드까지 속보로 전해질 만큼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3.5. 노르만족 점령
11세기는 노르만족과 비잔틴 제국이 타란토와 바리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벌였다. 1060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타란토를 정복했지만, 같은 해 10월에 타란토는 다시 비잔틴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3년 뒤인 1063년 노르만 백작 제프리가 타란토에 입성했지만, 비잔틴 제독 미하일 마우리카스가 도착하자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타란토는 결국 노르만족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페트론의 아들들은 1071년에 첫 노르만인 대주교 드로고를 선출하였다. 타란토는 노르만 공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최초의 통치자는 보에몽 1세였다. 타란토 공국은 377년의 역사 동안, 때로는 시칠리아 왕국의 강력하고 사실상 독립적인 봉건 영지로, 때로는 단순한 작위로 존재했다. 종종 왕위 계승자나 여왕의 남편에게 수여되기도 했다. 1465년에 타란토 공국은 나폴리 왕국 에 합병되어 아라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3.6. 나폴리 왕국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의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 한 나폴리 왕국은 타란토를 요새화 하기로 결정하였다. 1495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아라곤군을 패주시켜 아무런 저항 없이 도시에 입성하여 성을 차지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체사레 다라곤나가 약 1년 반 동안 타란토를 포위하여 이번에는 프랑스군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1497년 8월 10일, 페데리코 1세가 나폴리의 왕으로 즉위했으나, 1500년 11월 11일에 스페인과 프랑스가 아라곤 왕가를 희생시키며 맺은 그라나다 조약에 따라 페르디난도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전쟁을 재개하자, 그는 1501년 9월 프랑스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고, 왕국의 책임을 갓 열두 살이던 아들에게 맡겼다. 얼마지나지 않아 타란토는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어린 왕자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항복했지만, 스페인군은 성체화된 성체에 맹세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를 스페인으로 포로로 보내버렸다. 나폴리 왕국이 독립을 잃게 되면서, 타란토도 다른 남이탈리아 도시들과 같은 운명을 맞아 스페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1594년 약 6개월 동안, 오스만 제국군은 아무런 방해 없이 타란토 만의 케라디 제도에 머물렀고, 당시 스페인의 일시적 약세를 틈타 여러 차례 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먼저 격퇴되었고 결국에는 타라 강 인근에서 타란토 시민들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17세기 초, 타란토의 경제 상황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타란토는 더 이상 중요한 군사 기지가 아니었으며, 침체된 어업과 굴·홍합 양식업, 귀족과 성직자의 손아귀에 있었던 농업 활동이 겹쳐 심각한 경제 위기를 불러왔고, 이는 결국 1647년 민중 봉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주동자인 지안도나토 알타무라는 성의 망루에서 교수형에 쳐해졌다. 17세기 후반부터 스페인은 유럽 내 스페인 왕국 영토를 소홀히 하고, 대신 중남미 식민지에서 금과 은을 얻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3.7. 이탈리아 왕국
1861년 타란토가 이탈리아 왕국 에 편입된 후, 카탈도 니티와 니콜라 미뇨냐는 해상과 군사 면에서 타란토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통해 도시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도록 했다. 이 시기 타란토에 해군 기지와 공창이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가 아프리카 에 대한 식민지 탐험을 결정하자 이 도시는 이를 큰 경제적 기회로 여겼다. 특히 1910년 콜레라 전염병으로 인해 홍합과 굴 산업이 위기에 처해 있던 상황에서 더욱 그랬다. 1915년 5월 24일,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했고, 타란토는 군함 수리 및 건조를 위한 무기고와 새로운 프랑코 토시 조선소를 통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전쟁이 끝나자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해졌고, 1920년에는 해군 조선소 폐쇄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시위를 촉발시켰고, 이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격렬한 충돌로 이어졌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즘의 집권으로 병기창과 해군 조선소의 공사가 재개되어 식민지 전쟁에 투입될 함선 의 수리 및 건조가 가능해졌고, 도시는 새로운 도시로 개발되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영국은 이탈리아 해군의 모항인 타란토를 공습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이탈리아 해군은 타란토에서 철수하여 나폴리, 라스페치아, 제노바 항구로 피난을 가야 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몰락과 그에 따른 휴전 협정으로 독일군은 도시를 탈출했고, 연합군은 슬랩스틱 작전을 통해 타란토를 점령했다. 연합군은 수많은 공공건물을 징발하여 군 막사로 개조했다.3.8. 이탈리아 공화국
1946년 6월 2일, 이탈리아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이후 타란토는 지중해의 전략적 위치 덕분에 중요한 산업 및 상업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4. 경제
타란토의 어업은 매우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굴을 캤다. 그러나 타란토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도심 근처에는 제철소,석유화학, 시멘트 및 조선 공장이 들어섰다,5. 교통
여객철도를 운영하는 타란토 역이 있으며, 나폴리, 레조칼라브리아, 바리, 브린디시를 잇는 철도망이 있다. 타란토 역 바로 인근의 항구로 연결되는 화물용 선로도 있다.타란토에는 자체 공항이 있지만, 일반 승객들을 위한 정기 항공편은 운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대한 가까운 항공편을 알아본다면 인근 바리 공항이나 브린디시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바리-타란토 그리고 브린디시-타란토의 거리와 시간 모두 비슷하지만, 가능하다면 바리 공항을 추천한다. 브린디시 공항에서는 브린디시 시내의 기차역까지 버스나 택시로 가야 하는데, 바리 공항은 2013년에 공항철도 역할의 사철(지하철) 노선이 개통된 상태라 바리 시내의 중앙역까지 이동하기 쉽다. 따라서 바리 공항에서 공항철도(지하철) 20분 + 바리 중앙역에서 일반 국철이나 고속철도를 타고 약 1시간 20분이면 타란토 역까지 도착할 수 있다.
6. 관광
- 타란토 대성당(Cattedrale di San Cataldo) : 타란토의 수호성인 카탈도의 이름을 딴 성당으로, 풀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 중 하나이다.
- 국립 고고학 박물관(MARTA, 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Taranto) :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며, 특히 마그나 그라에치아(고대 그리스 식민지 시대) 유물과 금세공품이 유명하다.
- 아라곤 성(Castello Aragonese) : 15세기 아라곤 왕가가 세운 성곽으로, 바다와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다.
- 스윙 브리지(Ponte Girevole) : 타란토의 상징적인 다리로, 선박이 지나갈 때 회전하여 길을 열어주는 독특한 구조이다.
- 포세이돈 신전 (Tempio di Poseidone) : 카스텔로 광장에 위치한 도리스 양식 의 원형 신전 입니다. 마그나 그라이키아 양식 중 가장 오래된 신전이며 , 구시가지에서 방문객에게 개방된 유일한 그리스식 예배 장소이다.
- 페리파토 정원 (Giardini Peripato) : 타란 중심부의 "녹색 허파"로 여겨지는 약 5헥타르 규모의 녹지로 원래는 타란토 귀족 가문이 감귤 농장으로 조성했던 곳으로, 20세기 초 타란토 시의회에 의해 "시립 별장"으로 지정되었다.
7. 자매도시
[1] 2025년 1월 1일 기준.[2] 민주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양 폴리스 간의 관계는 좋았다고.[3] 현재 나폴리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4] 연도 미상[5] 947년에 파티마 왕조는 섬의 반란 진압을 위해 알 하산 이븐 알리 알 칼비를 파견하였는데, 반란 진압 이후 그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칼브 왕조, 948-1053년) 954년에 그가 사망하자 장남인 아흐마드 이븐 알 하산 알 칼비가 이어 받았는데, 그는 969년에 북아프리카 반란 진압을 위해 파티마 조에게 불려갔다. 이후 아흐마드의 해방 노예인 야이스가 통치하다가 970년에 아흐마드의 동생이자 하산의 차남인 아불 카심이 시칠리아의 에미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