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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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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702424> 아테네 스트라테고스
델로스 맹주 · 아테네 제국 초대 지도자
페리클레스
Περικλῆς | Pericles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ericles_Pio-Clementino_Inv269_n2.jpg
[1]
출생 <colbgcolor=#FFF,#000>기원전 495년 (추정)
고대 그리스 콜라르고스 데모스
사망 기원전 42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인 전염병 (아테네 역병)
재위기간
아테네
스트라테고스
기원전 461년 ~ 기원전 429년
아테네 제국
지도자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29년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2.2.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2.3. 아테네의 번영2.4.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페리클레스의 죽음
3. 페리클레스의 추도사4. 대중매체에서5. 기타

[clearfix]

1. 개요

아테네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 페리클레스가 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Collin Macleod, 『Collected Essay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p.149
제국을 참주정으로 장악하고 있고 그러한 제국을 획득한 것이 부정의한 것으로 생각될지라도 결코 아테네의 패권을 놓아서는 안된다.
-페리클레스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63.2)[2]

고대 아테네정치인. 기원전 495년경에 콜라르고스 데모스에서 태어나 429년에 아테네에서 사망하였다. 자칫하면 혼란스러워지기 쉬운 고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탁월한 연설 능력으로 대중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페리클레스가 통치하는 30년 동안에 아테네는 정치, 철학, 예술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그는 기원전 495년에 아테네 북쪽 콜라르고스 데모스에서, 정치가 크산팁포스와 유력한 귀족 집안인 알크마이모이니다이 가문 출신인 아가리스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때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공부에 매진하기를 더 좋아하였다. 그는 귀족 혈통과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당대 저명한 사람들에게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가 정치적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 아테네는 다수의 대중들이 근간을 이루는 민중파와 소수의 귀족들이 근간을 이루는 귀족파가 대립 중이었다.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가 이끄는 민중파는 귀족파가 주를 이루는 강력한 정치 기관인 평의회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킨다. 아테네의 정치적 의사 결정은 이제 대중들을 설득해야하는 민회에서 이루어지도록 바뀐 것이었다. 이 개혁으로 아테네는 민주정의 시대가 열렸다. 민주정으로 바뀐 아테네에서 정치인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정책을 펼치려면 먼저 대중들을 설득해야했다. 귀족파의 수장인 키몬은 부유하고 관대하여서, 아낌없이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어 대중의 신망을 얻었다. 이에 페리클레스는 대중영합정책, 즉 포퓰리즘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통해 일반 대중들의 연대와 협력를 강조했고, 이는 페리클레스가 지닌 탁월한 연설 능력으로 효과가 극대화된다.

페리클레스는 도편 추방을 통해 정적 키몬을 아테네에서 추방시킨다. 도편 추방 제도란, 대중들이 아테네의 미래에 위협이 될 것 같은 인물을 깨진 도자기 파편에 적어서 내고, 여기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을 아테네에서 10년간 추방하는 제도이다. 키몬은 스파르타에서 농노 반란이 발생하자 스파르타를 약화시키기 위해 반란군에게 물적 지원을 했었는데, 이를 민중파에서 키몬이 아테네의 부를 이용해 스파르타인들을 지원하는데 사용했다고 대중들을 설득한 것이다. 정적 키몬이 추방되자 페리클레스는 친대중 정책과 포퓰리즘을 통해 빠르게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민중파의 수장이자 페리클레스의 절친이었던 에피알테스가 살해당하자 페리클레스가 민주정의 수장이 되면서 실질적인 아테네의 지도자가 된다.

2.2.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60년에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다. 스파르타의 동맹국을 아테네가 경제력으로 압박해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이자 스파르타가 전쟁을 선포했다. 페리클레스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스파르타와 싸움을 시도했다. 기원전 454년 그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시키온과 아카르나니아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그는 코린토스 만의 오이니아데아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는 아이기나와 테베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스파르타의 강력한 육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보이오티아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집트 전선에서도 패퇴하자 아테네는 점점 수세에 몰리게된다. 그러던 중,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51년에 추방지에서 복귀한 키몬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파르타와 '30년 휴전 협정'을 맺는다. 전쟁의 실패로 페리클레스의 입지는 축소되었고, 이 이후의 페리클레스의 공격적인 군사 전략은 완전히 소극적 수비 형태로 바뀐다. 스파르타와 휴전 후에 페리클레스는 키몬과 협의를 통해 키몬에게 아테네 군 총사령관 직위를 주어 군사, 외교 분야를 일임하고 자신은 내정을 관리하는 것으로 권력을 나눈다.

2.3. 아테네의 번영

기원전 444년, 과거 정치 체제를 원하는 보수파와, 현재 정치 체제를 유지하려는 민주정파는 극심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보수파의 새로운 지도자인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추진하던 건설 계획에 방만한 예산 운영으로 돈이 낭비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처음에 투퀴디데스는 지지를 얻고자 민회를 선동하려 하였으나, 민주정파의 영수인 페리클레스가 일어나 보수파를 제압하였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에서 자신의 재산으로 소비된 모든 건설 비용을 상환하겠다고 제안하였으며 그 조건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봉헌 비문을 세울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태도는 박수와 함께 환영받았으며, 투퀴디데스는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였다. 기원전 442년, 아테네의 시민들은 투퀴디데스를 10년간 도편 추방하고, 페리클레스는 다시 아테네 정계의 1인자가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안정적으로 동맹국들을 지배하고,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페르시아의 위협을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델로스 동맹이 점차 아테네 제국으로 변질되는 과정은 페리클레스 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페리클레스 이전 시대의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를 우두머리로 하는 느슨한 도시국가 연합체였다. 페리클레스는 일생동안 델로스 동맹을 중앙집권형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들 중 하나가 동맹 금고를 아테네로 가져온 것이다. 일련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아테네의 해군이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이집트 해역에서 패배하면서, 에게 해에 대한 아테네의 해상 패권이 위협받는다. 게다가 밀레투스나 에뤼트라이 같은 여러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전투에서도 패배한 뒤 아테네는 기존의 해군력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당시 델로스 동맹의 공동 금고는 에게 해의 섬인 델로스 섬에 있었다. 이 금고는 아테네의 압도적인 해군력 아래 안전하게 보관되어 왔으나, 여러 차례의 패전 이후 약화된 아테네의 해군력으로 델로스 섬의 동맹 금고를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없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금고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동맹들을 설득했고 기원전 453년에 동맹 금고를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으로 옮긴다. 이는 동맹에서 아테네의 영향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페리클레스는 동맹국들이 지불한 재화를 이용해 아테네의 자체 해군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도시 사업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이러한 착복에도 불구하고 큰 불만을 품지 않았다. 부강한 아테네가 동맹 도시 국가들이 위협을 받으면 대신 지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재자가 나타나거나 폭정이 발생하면 군대를 파견해 위협을 제거하고 시민들에게 민주주의를 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불만이 있어도 내색하기 힘들었다. 아테네는 동맹을 탈퇴하려는 도시 국가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가혹하게 처벌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페리클레스 사후인 기원전 416년에, 멜로스(Melos)가 아테네의 조공 요구를 거부하자 아테네는 멜로스를 침공해 탈퇴를 주장한 정치인을 참살하고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버린다.

기원전 447년경, 아테네의 클레아르코스는 모든 동맹국이 아테네의 은화와 형량 단위를 사용해야 한다는 화폐 칙령을 발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칙령에 따르면 델로스 동맹 소속 국가들은 모두 아테네가 정한 형태의 은화를 사용해야 하며, 동맹국이 은화를 주조함으로써 얻는 수익은 모두 동맹 금고에 납부해야 했다. 페리클레스는 이 칙령을 법제화하였고 동맹국들이 이 칙령을 어기지 못하게끔 엄격하게 관리했다. 조항에는 칙령을 어기는 사람은 사형을 당할 수 있음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 칙령은 그리스의 해상 무역을 더욱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경제 정책이 그리스 전역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페리클레스는 전쟁을 통해서도 아테네의 힘을 강화했다. 기원전 440년, 사모스는 밀레투스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양국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밀레투스 사람들은 아테네로 가서 사모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아테네는 양측이 전쟁을 멈추고 이 문제를 자신들의 중재에 맡기도록 명령하였으나, 사모스 사람들은 거부하였다. 그러자 페리클레스는 양 도시 국가의 평화를 원하나 사모스가 전쟁을 원한다는 이유로 사모스에 군대를 보내는 법령을 통과하였다. 해전에서 페리클레스와 다른 아홉 장군들이 이끄는 아테네의 군대는 사모스 군대를 격파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기원전 438 ~ 436년 사이에 페리클레스는 폰토스의 아테네 함대를 이끌어 이 지역 그리스 도시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페리클레스는 특수한 유형의 식민지인 클레루키아(klēroukhia)를 만들었다. 클레루키아는 아테네 시민들이 아테네 시민권을 유지한 상태로 정복지 혹은 미개척지에 정착하는 형태의 이주 식민지이다. 다른 아테네의 식민지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었고 조공을 바치는 정도로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클레루키아는 정치적, 행정적으로 완전히 아테네에 종속되어 있었다. 대부분 가난한 시민들이 클레루키아로 이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사시에 클레루키아로 이주한 시민들이 부유한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에 현대 역사가들은 아테네 시민이 식민지에 직접 가는게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노예를 식민지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클레루키아는 기원전 300년 경이 되면 사라지지만 약 100년 간 융성하면서 아테네에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 주었다.

2.4.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페리클레스의 죽음

기원전 433년, 아테네는 메가라 법령을 발표한다. 이는 아테네가 막강한 해군력을 이용해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의 해상을 봉쇄하는 법령이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 동맹국들의 경제를 옥죔으로서 스파르타의 동맹 도시 국가들을 아테네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스파르타는 대표단을 보내 메가라 법령을 철회하고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을 즉각 추방할 것을 주장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스파르타의 제안은 분명하게 아테네 시민과 페리클레스의 대립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이 일로 양보를 하면, 스파르타는 분명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해 아테네 시민들로 하여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이해시켰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에 역으로 제안을 했다. 메가라 법령을 철회하는 대신, 스파르타는 자국 영토에서 주기적으로 외국인을 추방하는 관습(크세넬라시아)를 버리고, 자국 동맹 도시의 자치권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테네의 요구는 스파르타에 상주하는 아테네인들이 상권 장악을 통해 스파르타의 이익을 줄이고, 스파르타로부터 자치권을 받은 도시국가들을 해상 봉쇄로 경제 제재를 가해 아테네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이었다. 스파르타는 이를 거부하였으며, 양측 모두 물너나려 하지 않자 전쟁이 발발한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해 모든 시민들을 아테네 성곽 안으로 피신시킨다. 스파르타가 과거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요새 밖을 무차별적으로 유린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터전을 떠나는 데 동의하긴 하였으나 여러 농촌 주민들은 페리클레스의 결정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군대는 아테네의 농장에 방화하고 돌을 뿌리는등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아테네의 농민들은 이 광경을 보고 페리클레스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페리클레스에게 즉각적인 반격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민회가 열리자 페리클레스는 대중들을 설득해 적극적 교전보다 스파르타 군대가 아테네 근방에 남아있는 동안에 아테네 군함 100척이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으로 보내어 약탈하고, 기병대를 배치하여 도성과 가까운 곳에서 약탈당한 농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으로 끝내도록 하였다.

기원전 430년, 스파르타 군대는 두 번째로 아테네 근방을 대규모 약탈하였으나, 페리클레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소극적인 버티기 전략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아테네에 대규모 시민들이 밀집되어 생활하자 전염병이 발생한다. 이 역병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 하지만 이 전염병으로 인해 도시가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어떻게든 대중들을 설득해 혼란을 잠식시키려고 하였으나, 결국엔 정적들에게 기소당해 장군직을 박탈당한다. 1년 후, 그는 민회를 통해 기소당했던 죄를 용서 받고 아테네의 총사령관으로 복귀한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29년 동안에 모든 군사 작전을 총괄하다가 그 해 가을에 역병으로 사망한다. 페리클레스의 두 아들 또한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3. 페리클레스의 추도사

여러분들은 이 나라의 힘을 하루하루 [말이 아닌] 행동으로(ergō) 기리고, 그것을[4]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kai erastas gignomenous autēs). 그리고 이 나라가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이것들을 획득한 사람들은 용감했고, 소임을 알고 있었으며 행동에 있어 수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음을 말입니다. 또 자신들이 뜻한 바가 실패로 돌아가도, 나라가 자신들의 덕을 빼앗아 갔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최선의 헌신[5]을 나라에 바친 것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이었음을.[6]
페리클레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 연설 中 (투퀴디데스 지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43.1, 이정호 번역)[7]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연설이 페리클레스 자신은 물론이고, 당시 아테네 사회에 대한 아테네인 스스로의 자기규정과 현실 인식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분명 아테네야 말로 시민들 각자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자 자산이며 그들이 목숨을 바쳐 헌신해야 할 가장 숭고한 대상임을 일깨워 주려는 데 그 주목적이 있었다. 페리클레스에 의하면 어떤 시민이건 도시국가적 공동생활에 참여함으로써 누리는 선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누릴 수는 없다. 시민생활을 통해 누리는 고귀한 사회적 인간관계를 갖지 못하게 된다면 개인이 속한 가문과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 페리클레스에 의하면 아테네라는 국가는 사회의 어떤 부분, 어떤 집단보다도 상위에 위치하여 이들에게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 플라톤 지음, 이정호 역, 앞의 책, p.164-165.
지금까지 이 연단에 서서 연설한 사람은 대부분 이런 연설로 장례식을 끝맺는 관행을 칭찬했는데, 그들은 전사자들의 장례식 때 이런 연설을 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비로 치러진 이번 장례식에서 여러분도 보았듯, 행동으로 용기를 보여준 사람들에게는 행동으로 명예를 높여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미덕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한 사람이 연설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좌우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믿음을 청중에게 심어주기 어려운 경우에는 균형 감각을 유지하며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중 가운데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전사자의 친구였던 사람들은 연설이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듣고 싶은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테고,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업적에 관해 들으면 샘이 나서, 연사가 과찬을 한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남들에 대한 칭찬은 각자가 자기도 들은 대로 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선까지는 용납되지만, 일단 그 선을 넘어서면 시기와 불신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연설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우리 선조가 인정한 만큼, 나도 당연히 관습에 따라 여러분 각자의 소망과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나는 먼저 우리 선조에 관해 언급하려 합니다. 이런 기회에 그분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분들의 명예를 높여드리는 것이 정당하고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분들이 대대로 이 나라를 차지하고 살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우리가 자유국가를 물려받은 것은 그분들의 용기 덕분입니다. 그분들도 분명 칭찬받을 만하지만 우리 아버지들은 더욱 칭찬받을 만합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노고도 불사하며 자신들이 물려받은 것에 지금 우리가 다스리는 제국 전체를 보탠 다음 지금 세대를 사는 우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여기 모인 나이 지긋한 우리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제국의 힘을 강화하고 모든 면에서 도시를 정비하여 전시에나 평화 시에나 완전히 자족할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주제에 관해서는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재산을 하나씩 늘려준 전공(戰功)들이나, 우리 또는 우리 아버지들이 헬라스인들 또는 비헬라스인들의 침략을 과감히 물리친 전투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먼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정신자세와,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준 정체(政體)와 생활 방식을 언급하고, 그런 다음 전사자들에게 찬사를 바칠까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이런 이야기를 들어두는 것은 시민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청중에게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정체는 이웃나라들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 남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정치라고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그러나 주요 공직 취임에는 개인의 탁월성이 우선시되며, 추첨이 아니라 개인적인 능력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 생활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데 일상생활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 시기하고 감시하기는커녕 이웃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화내거나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는데, 그런 표정은 실제로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요. 사생활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참을성이 많지만, 공무에서는 법을 지킵니다. 그것은 법에 대한 경외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당국자들과 법, 특히 억압받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과, 그것을 어기는 것을 치욕으로 간주하는 불문율에 순순히 복종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 마음을 위해 온갖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사시사철 여러 가지 경연대회와 축제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우리의 가정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날마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근심을 쫓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시가 크다 보니 온 세상에서 온갖 상품이 모여들어, 우리에게는 외국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자국 물건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습니다. …… 말하자면 우리는 고상한 것을 사랑하면서도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으며,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문약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부(富)는 행동을 위한 수단이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가난을 시인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가난을 면하기 위해 실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곳에서 정치가들은 가사(家事)도 돌보고 공적인 업무도 처리하며, 주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정치에 무식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테나이인들만이 특이하게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비정치가가 아니라 무용지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우리만이 정책을 직접 비준하거나 토의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말과 행동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결과를 따져보기도 전에 필요한 행동부터 취하는 것을 최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다른 백성 사이에는 또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험심이 강하면서도 사전에 심사숙고할 능력이 있는 데 반해, 다른 백성은 무지하기에 용감하고, 그들에게 숙고한다는 것은 주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두려운 것과 즐거운 것의 의미를 명확히 알기에 어떤 위험도 피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정신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울, 도서출판 숲, 2011, p.167-171.
간단히 말해 우리 도시 전체가 헬라스의 학교입니다. 그리고 우리 시민 개개인은 인생의 다양한 분야에서 유희하듯 우아하게 자신만의 특질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내 말이 이 자리를 위한 공허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앞서 말한 자질들을 통하여 획득한 이 도시의 힘이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국가 중에 아테아니만이 막상 시험해보면 그 명성을 능가합니다. 아테나이만이 쳐들어오다가 패배한 적군에게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에게 졌다는 원한을 사지 않으며, 속국으로부터 지배할 가치가 없는 자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불만을 사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을 입증해줄 굵직굵직한 증거를 여기저기 남긴 만큼 우리는 지금 사람들에게도 후세 사람들에게도 경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호메로스나, 그 밖에 그 미사여구가 당장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어도 실체적 진실에 의해 허구로 드러나게 될 다른 시인의 찬사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바다와 육지가 우리의 모험정신에 길을 열도록 강요했고, 적들에게 보복하고 친구들을 도와주었음을 입증할 영원한 기념비를 곳곳에 남겼으니 말입니다.
바로 그런 도시를 위해 여기 이분들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간 것이니, 그런 도시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남은 우리도 각자 그런 도시를 위하여 당연히 노고를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우리 도시의 성격에 관해 이처럼 자상하게 말한 까닭은, 이런 투쟁이 우리 같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뜻한다는 점을 밝히고, 여기 이분들에 대한 내 찬사를 증거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입니다. …… 우리 도시를 빛낸 것은 여기 이분들과 이분들 같은 분들의 용기와 무공입니다. 이분들처럼 찬사와 공적이 균형을 이루는 헬라스인들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이 맞이한 것과 같은 최후는 그것이 최초의 발로이든 최종 확인이든 이분들의 인간 적인 가치를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분들 중에는 흠결이 있는 분도 있겠지만,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이분들이 보여준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상쇄하고, 사생활에서 끼친 해악보다 더 많은 선행을 공동체를 위하여 베풀었습니다.
이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모아놓은 재산을 더 오래 즐기고 싶어 겁쟁이가 되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살다 보면 언젠가는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겠지 하는 희망에서 위험 앞에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보다는 적에게 복수하는 일에 더 마음이 끌렸던 이분들은 이것을 모든 모험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겼으며, 다른 것은 포기하고 적을 응징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 그래서 이분들은 사람들의 비난은 피했지만, 위험에 몸으로 맞서다가 잠시 뒤 위기를 맞아 두려움이 아닌 영광의 절정에서 세상을 하직했던 것입니다.
-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앞의 책, p.171-174.
여러분은 이제 마땅히 이분들을 본받아,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 있음을 명심하고, 전쟁의 위험 앞에 너무 망설이지 마십시오. 죽음조차 불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란 더 나아질 가망이 전혀 없는 불운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을 경우 운명이 역전될 수 있고 실패할 경우 가장 잃을 게 많은 사람입니다. 자긍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희망을 품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자신도 모르게 죽는 것보다, 자신의 비겁함으로 말미암아 굴욕을 당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 계신 전사자의 부모들에게도 애도가 아니라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여러분은 파란만장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분들처럼 명예롭게 생을 마감할 수 있고 여러분처럼 명예롭게 이분들을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며, 인생에서 성공과 역경이 균형을 이루었으니 이분들의 삶은 그래도 행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요. 한때 여러분이 자랑스러워하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것을 보게 되면 여러분은 자식들이 생각날 텐데, 사람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빼앗겼을 때가 아니라 친숙해진 것을 잃었을 때 괴로운 법이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아직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이들은 다시 아들들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 그러나 여러분 중에 자식을 낳을 나이가 지난 이들은 행복하게 보낸 인생의 더 많은 부분을 이익이라고 여기시되, 남은 부분은 길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시고 죽은 아들들의 명성을 생각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기 바랍니다. …… 여기 모인 전사자들의 아들과 형제 여러분에 관해 말하자면, 여러분 앞에 힘든 과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누구나 고인은 찬양하게 마련이며, 여러분이 엄청나게 큰 공적을 쌓아도 이분들과 대등하지 않고 조금은 못한 것으로 평가받을 테니 말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누구나 경쟁자들의 시기를 사지만, 죽은 자에게는 누구나 경쟁심이 없어져 따뜻한 경의를 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제 미망인이 된 부인들에게 부덕(婦德)에 관해 한마디 해야 한다면, 짤막한 조언으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타고난 본성에 따라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의 큰 명성이 되겠지만, 여러분의 가장 큰 명성은 칭찬을 받건 비난을 받건 남자들의 입길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관행에 따른 연설에서 해야 할 말을 다 했습니다. 또한 여기 묻힌 분들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우리는 행동으로도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국가가 이분들의 자녀를 어른이 될 때까지 국비로 부양할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이 이런 시련을 겪은 데 대한 보답으로 고인과 그 자녀들에게 국가가 바치는 상(賞)이자 영관(榮冠)입니다. 용기에 가장 큰 상을 주는 도시에는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친척을 위해 충분히 애도했으니 이제는 이곳을 떠나도록 하십시오.
-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앞의 책, 2011, p.174-176.

4. 대중매체에서

4.1. 게임

4.1.1. 문명 시리즈

4.1.2.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

당대 아테네의 전염병 창궐은 고증했지만, 페리클레스의 최후는 본작의 보스 캐릭터인 데이모스에게 참수당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4.1.3. 도미네이션즈

고문관으로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협의회/페리클레스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기타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투구를 쓴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대두를 감추기 위해서라지만,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역사학자는 없고, 대부분 저 투구는 장군이라는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쓴 것이라고 추정.[2] 플라톤 저, 이정호 역, 『메넥세노스』, 서울, 아카넷, 2021, p.126 발췌.[3] 후보로는 장티푸스, 천연두, 페스트(흑사병) 등이 추정되기도 한다.[4] (책 속 주석) 여성 2격 '그것(autēs)'은 나라(polis) 또는 나라의 힘(dynamis)을 가리킨다. 만약 '그것'을 나라의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페리클레스가 국민들에게 패권국가에 대한 애국주의적 충정을 요구하고 있는 측면이 매우 강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양쪽 무엇이건 간에 국가가 그 정치 행위의 대상으로서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 강조되지 않고,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적 정치 이념과 플라톤의 배려주의적 정치 이념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43의 문맥은 전체적으로 이러한 애국주의적 충정에 대한 요구로 채워져 있다.[5] (책 속 주석) 최선의 헌신(kalliston eranon). eranos는 원래 여럿이 함께하는 만찬, 소풍 등을 의미하다 점차 친교 모임의 뜻으로 쓰였으나, 후대에 가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여러 사람들의 호의에 기초한 무상 출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쓰였다. 이 또한 페리클레스적 제국이 요구하는 애국주의적 충정을 담고 있는 문맥이다. Simon Hornblower, 『A Commentary on Thucydides』, vol. I, Clarendon Press, Oxford, 1991. pp.311-312 참고.[6] 천병희 역은 다음과 같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히려 여러분이 날마다 우리 도시의 힘을 실제로 보고 우리 도시를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 도시가 위대해 보이면, 우리 도시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모험심이 강하고,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고, 의무를 다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 사람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이분들은 설령 어떤 계획을 수행하려다가 실패했다 해도 도시가 자신들의 용기를 아쉬워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하고 도시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울, 도서출판 숲, 2011, pp.173-174.)
[7] 연설 전문의 원전 번역으로는 국내에 천병희 교수의 것과 이정호 교수의 것이 있다. 천병희 교수의 번역은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체에 가깝고, 이정호 교수의 번역은 헬라스어 원전의 직역에 가깝다. 이 문서에서 발췌된 번역인 이정호 번역은 플라톤의 《메넥세노스》 정암학당판(이정호 번역) 부록에 실려있다.(대화편 《메넥세노스》의 특성상 페리클레스의 연설과의 비교가 불가피하기에 부록에 번역을 실은 것이다.) 발췌문의 사각 괄호는 번역서의 것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번역자가 덧붙인 보충어를 의미한다.[8]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창궐 이후 여러 기사에서 페리클레스와 당시 아테네인들이 당해서 쓰러져나갔던 아테네 역병을 코로나 19와 함께 재조명하는 내용이 간간히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