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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382년 |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 |
사망 | 기원전 336년 (향년 46세) |
마케도니아 왕국 베르기나 | |
재위기간 | 마케도니아 바실레우스 |
기원전 359년 ~ 기원전 336년 | |
아버지 | 아민타스 3세 |
어머니 | 에우리디케 |
배우자 | 아우다타, 필라, 니케시폴리스, 올림피아스, 필리나, 메다,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 |
자식 | 알렉산드로스 3세 |
신장 | 180cm[1][2] |
왕조 | 아르게아스 왕조 |
베르기나의 고분에서 발굴된 두개골 유골을 토대로 복원한 얼굴.[3] |
필리포스 2세의 상이 새겨진 황금 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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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hilippum quidem Macedonum regem rebus gestis et gloria superatum a filio, facilitate et humanitate video superiorem fuisse. Itaque alter semper magnus, alter saepe turpissimus.
사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는 업적과 명성에 있어 아들에게 앞질러지긴 했지만, 친절과 인간성이라는 면에서는 더 나았었다고 나는 본다. 그러므로 필리포스는 항상 위대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가끔 매우 추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4]
사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는 업적과 명성에 있어 아들에게 앞질러지긴 했지만, 친절과 인간성이라는 면에서는 더 나았었다고 나는 본다. 그러므로 필리포스는 항상 위대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가끔 매우 추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4]
마케도니아 왕국 아르게아스 왕조의 25대 왕.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버지. 젊은 시절 볼모가 되어 테베로 갈 정도로 약소국이었던 마케도니아를 군사 개혁과 정복 전쟁을 통해 급성장시켜, 헬레니즘 제국의 초석을 다진 명군이다.
2. 생애
2.1. 초년기와 집권
기원전 382년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3세와 마케도니아의 오랜 숙적인 린케스티다 왕국의 군주 시라스의 딸 에우리디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으로 알렉산드로스 2세, 페르디카스 3세를 두었고, 여동생으로 에우리노이아를 두었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아민타스 3세는 두번째 아내 기게이아(Gigeia)를 맞이하여 세 아들 아르켈리오스, 아르히데오스, 메넬라오스를 낳았는데, 이들 모두 나중에 필리포스 2세에게 숙청되었다고 한다.에우리디케와 기게이아 중 누가 첫번째 아내였는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다. 마케도니아는 일부다처제 사회였기 때문에, 아민타스 3세가 두번째 결혼을 하기 전에 첫번째 부인과 이혼했거나 사별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두 개의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아민타스가 왕이 되기 전에 기게이아의 아들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에우리디케의 아들들이 기게이아의 아들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에우리디케는 아울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간통했고, 이 사실이 발각될 걸 두려워하여 남편을 살해하려 했다고 한다. 이 음모는 곧 발각되었지만, 아민타스 3세는 자식들을 고려해 그녀를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에 거듭된 침략을 일삼는 일리리아인들을 달래려는 부왕의 뜻에 따라 일리리아에 인질로 보내졌다고 한다. 기원전 370년 아민타스 3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2세는 테살리아의 분쟁에 개입하여 라리사를 장악한 뒤 수비대를 두었다가 테베의 적개심을 사고 말았다. 테베의 펠로피다스 장군이 마케도니아군을 테살리아에서 몰아낸 뒤 마케도니아까지 쳐들어갈 조짐을 보이자, 알렉산드로스 2세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동생 필리포스 2세를 포함한 여러 인질을 테베에 넘겼다.
그는 테베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희대의 명장 에파미논다스 (기원전 418년 ~ 기원전 362년)의 활약상을 지켜봤고, 이로부터 전략 • 전술과 군대 조직 등 많은 것을 숙달했다. 기원전 364년 마케도니아로 돌아왔고, 기원전 360년 형 페르디카스 3세가 일리리아와의 전쟁 도중 전사한 후 조카 아민타스 4세의 섭정을 맡았지만 기원전 359년 왕위를 빼앗았다. 하지만 어린 조카를 죽이지는 않았고, 딸 키나네(Cynane)를 아내로 삼게 했다.
2.2. 군제개혁
마케도니아 왕국은 오래전부터 헤라클레스의 후예로서 고대 그리스의 일원을 자처했지만,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들을 반(半) 야만족으로 여겼으며, 단지 목재와 목초지의 원산지로서만 유용하다고 여겼다. 페르시아 전쟁 때 알렉산드로스 1세가 그리스를 많이 도와줘서 그리스의 친구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고, 페르디카스 2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자를 오가면서 많은 이득을 챙겼으며, 아르켈라오스 1세가 그리스 문화를 대대적으로 후원하여 그리스인들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냉소적인 반응만 보였다.게다가 필리포스 2세가 즉위할 당시의 마케도니아는 지극히 암울했다. 서쪽의 일리리아, 북쪽의 트라키아, 동쪽의 할키디키 반도 도시국가들, 남쪽의 테살리아 및 테베 모두 만만하지 않았으며, 특히 일리리아는 페르디카스 3세를 전사시킨 뒤 마케도니아에 쳐들어와서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필리포스 2세는 일리리아를 포함한 사방의 외세에 수많은 공물을 바치고 서약을 맺음으로써 그들이 만족하고 마케도니아에 더이상 쳐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시간을 번 뒤, 그는 본격적으로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다.
먼저 재위 첫 해에 린케스티다와 엘리미오티스 등 상부 마케도니아 왕국들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빠른 시일에 통합하고, 그들로부터 받아낸 병력으로 일리리아인과의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메꿨다. 뒤이어 역사에 길이남을 군제개혁을 단행한다. 먼저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를 도입했다. 이들은 길이 18피트에 달하는 긴 창, 즉 사리사를 전원 휴대하게 하고, 전열을 보다 빽빽하게 모아놓으며 선두는 창을 앞에 겨누고, 나머지는 공중에 창을 세우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정면에서의 방어력은 기존의 팔랑크스를 압도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기동력과 측면 방어가 취약해지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병의 양과 질을 늘렸다. 왕을 호위하는 헤타이로이 중기병의 숫자를 대폭 늘리고 철저한 훈련을 실시해 전투력을 올리며, 자신을 단순히 호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장의 양익을 압도하고 적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며, 패주하는 적을 쓸어버리는 임무를 맡겼다. 여기에 히파스피스타이(Hypaspistai: 방패를 든 자) 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은으로 도금한 방패, 또는 은빛이 나도록 연마한 철방패를 사용해 은방패 부대로도 불렸다. 이들은 왕의 방패와 무구를 나르고, 왕의 신변을 경호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정규 부대로 편성되었다. 움직임이 둔하여 전투 도중 이변이 발생했을 때 제때에 대응하기 어려운 팔랑크스를 대신하여 탁월한 기동력과 대응력을 발휘했으며, 산악지대나 늪지대 등 기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거침없이 이동하여 임무를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투석병, 투창병, 궁병의 숫자와 질도 강화했으며, 1년에 12번 월급을 주고 일하는 직업 군인 제도를 실시해 농한기 때만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그리스 국가들과는 달리 어느 때나 전쟁을 할 수 있는 상비군을 갖추었고, 엘리트 기병대에 복무하는 자들에게 토지를 아낌없이 나눠줬다. 그리고 지중해 세계 최초로 장비를 국가에서 마련하게 했으며, 전투병이 직접 식량 등의 군장을 메고 이동해 기동성을 늘렸다. 아울러 그리스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공성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육성하게 해, 공성전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2.3. 확장 정책
군제 개혁을 완료한 뒤, 마케도니아는 필리포스 2세의 지도하에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58년, 필리포스 2세는 일리리아의 왕 바르딜리스 1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잃어버렸던 영토를 모두 되찾았다. 그 후 동부 해안 지대로 눈길을 돌려 기원전 356년 암피폴리스, 피드나, 포티데이아를 정복했다. 암피폴리스는 아테네가 세운 식민도시였기에 이 일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였지만, 당시 아테네는 이웃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서 암피폴리스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는 뒤이어 트라키아인을 격파하고 크레니데스를 공략한 뒤, 도시 이름을 필리피로 바꾸었다. 이 도시를 얻으면서, 마케도니아는 이제 팡가이온 산맥의 풍요로운 광산을 이용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광산에서 채굴된 광물 가치가 연간 1,000달란트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이 광산 채굴에서 얻은 소득을 용병을 모집하고, 다른 도시의 정치인들과 사절들에게 선물을 줘서 자기 편으로 끌여들이는 식으로 사용했다.필리포스 2세는 여러 귀족 가문들을 자신에게 묶어두기 위해 가문의 자제들을 궁정에 보내도록 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인질이었지만, 왕의 호의를 받고 고급 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재들로 변화했다. 또한 정복한 그리스 도시들에 수비대를 남겨뒀지만, 각 도시의 정부들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은 정복된 도시 주민들이 품을 불만을 최소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필리포스 2세는 수월하게 해안 지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기원전 355년 ~ 354년, 필리포스 2세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은 에게 해 북부의 마지막 대도시인 메토네를 포위하여 장기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다. 이때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다리를 절뚝이는 등 여러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이후에도 여러 전장에서 군대를 친히 이끌었다. 그러던 중 포키아인들이 델포이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를 점령하고 테살리아를 압박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포키아의 편에 서자, 마케도니아 아르게아스 왕가와 오래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테살리아의 알류아드 가문은 마케도니아에 구원을 요청했다. 필리포스 2세는 즉시 남하했고, 기원전 352년 크로커스 평원 전투에서 포키아 사령관 오노마르코스를 격파했다. 테살리아인들은 포키아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그를 테살리아 동맹의 아르콘(지도자)으로 추대했다.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남하 정책을 경게하여 테르모필레를 봉쇄하자, 그는 트라키아로 돌아가서 오드뤼사이 왕국의 왕 케르소블렙테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트라키아인들을 복속시켰다.
필리포스 2세는 뒤이어 동부의 할키디키 반도로 눈길을 돌렸다. 특히 할키디키 반도 도시국가들 중 가장 강한 올린토스가 주요 목표였다. 그곳에는 그의 이복동생 두 명이 있었고,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기도 했기에 그의 입지에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토로네, 메키베르나, 스테이지라 등 여러 소규모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뜸을 들인 뒤, 기원전 349년 올린토스에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이 거절하자 즉시 포위했고 1년만에 함락시킨 후 도시를 파괴했으며, 두 이복형제를 살해했다. 올린토스 주민들은 전원 노예로 팔려갔다. 아테네는 올린토스를 돕기로 했지만 제 때에 움직이지 못했다. 이어서 기원전 346년, 마케도니아는 포키아를 병합하면서 그리스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결국 아테네는 필로크라테스 평화 협약을 체결하여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종식했다.
기원전 343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샤한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기원전 340년 비잔티움을 포위하던 중 비잔티움에 곡물을 수송하던 아테네 함선들을 포획했다. 이 일로 아테네 민심은 격앙했고, 데모스테네스의 필리포스 탄핵 연설에 따라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초기엔 마케도니아 함대가 아테네 함대의 압박을 받고 흑해로 퇴각해야 했으며, 비잔티움 공방전 역시 실패로 돌아가는 등 필리포스 2세에게 영 좋지 않은 흐름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그는 도나우 강에서 이민족들을 격파해 군심을 다잡은 뒤, 기원전 339년 아테네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그리스 중부로 쳐들어가서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했다.
기원전 338년 8월 초, 아테네, 테베, 그리고 코린토스 등 도시국가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벌였다.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도 참여한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아테네와 테베가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하자,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에 비해 매우 우수한 해군을 갖춘 아테네는 훗날 페르시아 원정 때 많은 도움이 될 거라 보고 아주 온건하게 대우했다. 반면 테베에 수비대를 주둔시켰고, 반(反)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였으며, 독자적으로 외교 및 국방을 수행할 권리도 박탈했다. 기원전 337년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가 속한 코린토스 동맹을 수립하고, 자신이 맹주를 맡았다. 그는 140여 년전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침략으로 여러 도시들이 파괴된 일을 상기시키며, 페르시아 정벌이 완수될 때까지 도시국가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맹세하게 했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는 아민타스, 안드로메네스, 아탈로스, 그리고 파르메니온에게 10,000명의 병력을 맡겨 소아시아로 파견했다. 그들은 초기에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해안 도시 몇개를 공략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로도스의 용병대장 멤논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에게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2.4.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
고대 작가 칼라티스의 《사티로스》에 따르면, 필리포스 2세에게는 7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페라이의 니케시폴리스와의 사이에서 딸 테살리니케를 낳았고, 라리사의 필리나와의 사이에서 아들 필리포스 3세를 낳았으며, 에페이로스의 네오프톨레모스 1세의 딸 올림피아스로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와 딸 클레오파트라를 낳았다. 기원전 356년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났을 때, 필리포스 2세는 포티데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필리포스 2세가 포티데아를 점령한 직후 파르메니온이 일리리아인을 격파하고 경주마가 올림픽에서 우승했으며, 그의 아내가 알렉산드로스를 낳았다는 세 가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승리를 거두고 영토를 넓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러다가 내가 정복할 땅이 남아있지 않겠다."
며 한탄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경쟁심이 강했다. 하지만 필리포스 2세는 오히려 그런 아들을 기특하게 여겼던 듯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10대 소년 알렉산드로스가 다른 장수들은 좀처럼 길들이지 못했던 명마 부케팔로스를 성공적으로 길들이는 모습을 보고 감격하여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내 아들아, 가서 네가 달리기 합당한 왕국을 찾아라. 마케도니아는 네가 달리기에 충분하지 않구나."
또한 카이로네이아 전투 때 알렉산드로스가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자 병사들이 왕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는데, 필리포스 2세는 이를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아들을 나의 장군이라 부르며 총애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의 관계는 기원전 337년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의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를 들이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에우리디케가 올림피아스와 이혼하라고 요구하자, 필리포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림피아스와 이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일로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결혼식 행사에서, 필리포스 2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령관인 아탈로스는 조카 에우리디케의 결혼에 흡족하여 술을 듬뿍 마셔서 취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들께서 왕국의 합법적인 후계자를 내려주길 기도합시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말에 격분해 아탈로스를 향해 술잔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역시 술에 취해 있던 필리포스 2세는 친구를 모욕하는 아들에게 화가 나 검을 빼들고 아들에게 다가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가 일침을 날렸다.
"보라!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가겠다는 자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지도 못하는구나!"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쪽의 에페이로스로 피신한 뒤, 어머니를 그곳에 머물게 한 후 일리리아에 망명했다. 그러다 반년 후 필리포스 2세가 "모든 걸 용서할 테니 귀환하라."고 하자, 어머니와 함께 펠라로 돌아왔다. 아마도 페르시아 원정을 눈앞에 두고 장성한 아들과 더 갈등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간의 갈등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도 필리포스 2세 사후 자신의 아버지는 필리포스 2세가 아니라 제우스라고 하고 다녔다.
2.5. 암살
기원전 336년 10월, 필리포스 2세는 올림피아스의 남동생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와 올림피아스의 딸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마케도니아 왕국의 고대 수도인 베르기나로 갔다. 그는 극장에 들어선 뒤 그리스 외교관들과 잡담을 나눴다. 그런데 7명의 경호원 중 한 사람인 오레스테스의 파우사니아스가 달려들어 갈비뼈를 검으로 찔러버렸다. 필리포스 2세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파우사니아스는 즉시 탈출하여 근처에서 말을 타고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에게 가려 하다가 경호원들의 칼에 찔러 죽었다. 이후 기병대 장교인 헤로메네스와 아르하바에우스 형제가 파우사니아스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져서 두 사람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자신의 스승 플라톤과 함께 서양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자 마케도니아 궁정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우사니아스가 아탈로스와 그의 친구들에게 기분이 상했기 때문에 필리포스 2세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파우사니아스의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단독 범행이라는 그의 주장은 당대부터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가 인용한 클레이타르코스의 주장에 따르면, 파우사니아스는 필리포스 2세를 사랑했지만, 그가 다른 젊은 남자 파우사니아스에게 관심을 돌리자 질투심을 품었다. 그는 젊은 파우사니아스를 조롱하여 전장에서 목숨을 던지게 했고, 젊은 파우사니아스의 친구 아탈로스는 이에 분노하여 공식 만찬에서 오레스테스의 파우사니아스를 취하게 한 뒤 강간했다. 파우사니아스가 필리포스 2세에게 항의했지만, 왕은 아탈로스가 아시아에 나가 있고, 최근에 그의 조카와 결혼도 한 터라 아탈로스를 건드리기보다는 파우사니아스를 경호원으로 승진시키는 것으로 달래려 했다. 이에 파우사니아스는 손상된 명예를 치유할 기회를 주지 않은 왕에게 반감을 품고 암살했다고 한다.
다른 역사가들, 특히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알렉산드로스와 올림피아스가 음모를 주도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유스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올림피아스는 파우사니아스의 참수된 머리에 황금 월계관을 씌우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매년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다수의 현대 학자들 역시 알렉산드로스와 올림피아스가 암살에 깊게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당시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는 필리포스 2세와의 사이에서 딸 에우로파와 아들 카라노스[5]를 낳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가 마케도니아 사람이 아닌 반면에, 그녀가 낳은 아이는 부모 모두 마케도니아인이므로,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날 수 있었다. 더욱이 올림피아스가 강제 이혼당하고 결혼식에서 불미스런 일이 벌어진 후 망명까지 했으니, 비록 일시적으로 화해했다고 해도 이대로 가면 모든 걸 잃어버릴 거라는 불안감을 품었을 것이다. 다만 그와 올림피아스가 필리포스 2세 암살을 진두지휘했음을 입증할 명백한 증거는 없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뒤 군대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후,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난 뒤 조용히 지내고 있었던 사촌 형 아민타스 4세를 처형하고, 결혼식에서 '적법한 후계자' 운운한 아탈로스와 일가족을 처형했다. 어머니 올림피아스도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에게 자살을 강요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했으며, 에우리디케의 자식들에게 손수 독을 먹여 죽였다.
3. 평가
전체적으로 보면 뛰어난 능력을 갖춘 명군이다. 암살만 당하지 않았다면 페르시아 원정을 지휘하게 되는 인물은 어쩌면 알렉산드로스가 아닌 필리포스 2세였을 수도 있었다. 필리포스 2세의 성격은 알렉산드로스에 비해 대체로 현실적이었으므로 인도까지 원정할 정도로 우악스럽게 정복하려 하는 대신 몇 번 본때를 보여준 뒤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을 수도 있다.학자들 가운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필리포스 2세를 더 높게 치는 경우도 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사력은 사실 필리포스 2세가 다 만들어 놓은 것이고 군사적 재능도 딱히 뒤떨어진다고 말하기 어려우며 정치력도 필리포스 2세가 더 뛰어나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정복 전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쌓았고 그 활약이 없었다면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등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필리포스 2세가 기반을 다져 놓았다고는 해도 그것을 유용하게 써먹은 것은 분명 알렉산드로스의 공적이며, 필리포스 2세처럼 적절한 선에서 강화를 맺고 말았다면 헬레니즘 문화가 널리 퍼질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명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오늘날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 양국에서 모두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통일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북마케도니아에서는 마케도니아가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렇다 보니 그리스인들이 필리포스 2세를 그리스의 통일군주로 추앙하는 것에 대해 북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를 침략하여 마케도니아의 식민지로 만든 불구대천의 원수를 존경한다며 비웃기도 한다.
4. 어록
διαίρει καὶ βασίλευε
분열시켜 지배하라.
분열시켜 지배하라.
영어로는 Divide and Rule. 그의 발언 중 가장 유명하며, 필리포스 2세 사후에 옆동네인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라틴어: divide et impera) 유럽사와 정치사의 주요 격언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마케도니아가 위치해 있었던 발칸 반도의 현재 지정학적 상황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5. 대중 매체
상당한 업적에 비해서 대중 매체에서의 취급은 의외로 그다지 좋지 못하다. 일단 대부분 애꾸눈에 전투광과 같은 이미지를 달고 다니며, 여기에 더해서 아내와 아들을 학대하는 등 막장스러운 가장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한미일 합작 애니메이션인《알렉산더 전기》에선 애꾸눈이 된 계기가 실제와는 좀 다르게 그려지는데, 알렉산더가 태어날 당시, 뱀을 숭배하는 사교의 무녀였던 왕비 올림피아스가 출산을 하면서 커다란 뱀과 난교 행위를 벌이는 것을 목격,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가 뱀에게 물리면서 한쪽 눈을 잃게 된다. 이후 장성한 알렉산더가 자신의 친위 세력을 구축해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며 마케도니아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알렉산더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이를 감지한 심복 아탈로스가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를 바치자,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또 다른 아들을 얻게 되고, 이후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더를 추방시키며 클레오파트라를 새 왕비로, 어린 아들을 새 후계자로 공표하려는 자리에서 올림피아스의 사주를 받은 호위병의 칼에 목이 잘려 살해당한다.
- 2004년작 영화《알렉산더》에서는 발 킬머가 연기. 아내인 올림피아스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급기야 새 왕비를 들여[6] 아들도 낳게 되면서 점차 알렉산드로스와 사이가 벌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들의 능력과 열정을 잘 알고 있어 한때 손수 가르침을 주기도 했으나 점차 의심이 많아져서 아들이 왕위를 노린다고 여기게 되었다. 애증이 뒤섞인 부자간의 관계를 잘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7] 알렉산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아버지를 못미더워 하면서도 위대한 능력을 가진 필리포스를 우러러 보고 필리포스 또한 점차 장성해가는 알렉산더를 자신의 어리고 귀여운 아들이라기 보다는 재능있는 경쟁자로 인식하고 질투하면서도 동시에 후계자의 재능을 대견스러워 하고 키워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8] 올림피아스의 사주를 받은 장교에게 암살당하기 직전, 알렉산드로스가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혼자 개선식에 나가지 말 것을 권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홀몸으로 광장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살해당하고 말았다.[9]
- 샨사가 쓴 소설 《알렉산더의 연인》에서는 연약하게 태어난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아내와 아들을 마구 학대하는 등 심히 막장 가장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당시 그리스인들의 성적 취향을 반영한 것인지 여색은 물론 남색을 탐하기도 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10] 작중 묘사에 따르면 아내인 올림피아스는 다른 나라의 공주였으나 필리포스 2세가 침략해오는 바람에 강제로 혼인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어두운 과거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알렉산드로스를 외모나 성품이 너무 여리다는 이유로 매우 괄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아름다운 청년으로 장성하자 성적인 끌림을 느낀 필리포스는[11] 태도를 바꾸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 후로 아버지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틈을 노려서 친구들을 시켜 암살해버리고 왕좌를 찬탈한다. 그러나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좌를 찬탈한 일은 평생의 콤플렉스가 되고 만다.
- 발레리오 마시모 만프레디의 소설 《알렉산드로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학식을 갖춘 문무겸비의 군주이나, 그리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발전한 신흥국 마케도니아의 군주답게 격정적이고 방탕한 마초의 면모도 엿보인다. 술을 퍼마시고 여색을 밝히는 데다 수틀리면 사람이고 물건이고 때려부수며 박살내는 것이 예사라서 알렉산드로스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낼 때 미에자 아카데미의 아름다움을 필리포스가 묘사하자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가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말씀하시니 곰이 시를 읊는 것 같다' 같은 반응을 보일 정도. 다만 아들과의 관계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편인데, 아탈로스의 딸 에우리디케를 후처로 얻으면서 올림피아스와 갈등을 빚고, 아들과도 멀어지지만 기본적으로 알렉산드로스는 물론이고 올림피아스에게도 기본적인 애정은 남아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길러낸 알렉산드로스에게 미래를 맡길 생각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본작에서 필리포스의 죽음은 필리포스가 억지로 빼앗은 그리스 신성회의에 속한 신관들과 그리스-마케도니아 일대의 여러 불만분자들의 합작품으로 암시된다. 다만 이를 파헤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중간에 위협을 느끼고 손을 떼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이를 밝힐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지닌 자는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 뿐인데, 올림피아스는 근본적으로 필리포스를 증오하는 상태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전쟁에 바빴다.
-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 《히스토리에》에선 일단 용맹하고 야심찬 제왕으로 그려내고 있다.[12]
재미있는 것이, 필리포스는 에우메네스와의 첫 만남에서 안티고노스라는 가명을 댄다. 훗날 디아도코이 전쟁 때 에우메네스의 숙적이자 그를 죽이게 되는 장군의 이름이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Monophtalmos : 애꾸눈)인 것을 고려하면 심상찮은 등장장면이다. 심지어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와 필리포스는 같은 해(BC 382)에 태어났다. 팬들은 필리포스가 암살 위협에서 살아남아 도주하고 훗날 안티고노스로 이름을 바꿔 아들과 에우메네스에게 복수를 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이 에우메네스와 처음 만날 당시 안티고노스 행세를 하던 필리포스와 동행하고 있던 것은 메난드로스이다.[13] 실제 역사에서 메난드로스는 안티고노스의 측근이다. 작중 필리포스는 오디세우스 신화에도 등장하는 외눈박이 괴물 퀴클롭스(사이클롭스)에 비유되는데, 주인공 에우메네스가 동경하는 영웅상이 오디세우스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묘한 암시가 될지도.
현재 에페이로스 왕[14]과 필리포스 2세의 딸의 결혼 연회중 극장으로 입장하는 와중에 올림피아스의 암살의뢰를 받은 오레스티스의 파우사니아스가 난입하여 필리포스를 찌른다. 일단 반사적으로 왼팔로 막긴 했으나 팔 밑으로 몸을 관통한 것으로 보인다. 116화에서 죽어가면서 자신을 걱정하는 알렉산드로스를 보며 '어느 종자인지 모를 놈에게 세계를!' 하며 원한 깊은 마음으로 사망하는가 싶었는데...
118화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부활시킨다! 입회인은 안티파트로스. 심정지한지 한 며칠이 걸렸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부활시킨 뒤 성격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암시했다.[15] 이로써 위의 팬들의 추측대로 살아남은 필리포스 2세가 역사상의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로 변화할 가능성이 매우 유력해졌다.[16] 거기에다 120화에서는 제7왕비인 에우리디케가 갓난 쌍둥이 중 자신의 아들을 살리고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데, 이 아들은 역사상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17]
- 《갓 오브 하이스쿨》에서 호세 나타샤 비욜레타 알렉산더로스의 차력으로 나오지만 여기서도 자신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인지도가 밀려 비네임드 차력 취급. 사용자인 호세와 그의 아버지 알렉산드로스[18]는 필리포스 2세의 직계후손이다. 바꿔말하면 둘 다 알렉산더 대왕의 직계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1]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다. 출처[2] 이 유골이 진짜 필리포스 2세의 유골이라고 치면 필리포스 2세의 키는 180cm가 된다.[3] 이 유골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4] 『의무론』 1권 90장에 나오는 평가다.[5] 다른 왕비 소생이라는 설도 있다.[6] 참고로 오해하면 곤란한 것이 마케도니아에는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새 왕비를 들이고 아들을 낳는 것을 막장으로 보면 곤란하다. 실제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도 유일한 왕비는 커녕 일곱 명의 왕비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고, 알렉산드로스에게도 이복형이 있었다. 다만 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알렉산드로스 사후에야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알렉산드로스 4세)와 함께 공동왕(필리포스 3세)으로 즉위했다.그리고 당연히 디아도코이들에게 살해당했다.[7]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실제 역사상의 부자관계는 뒤로 하더라도 관객인 21세기 남자들이 이해할법한 (그 중에서도 재혼이 사회적인 이슈인 미국에서 더더욱), 그들에게 설득력 있는 부자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게 심해지다보니 어떤 평론가는 "알렉산더가 무슨 21세기 대학생이냐?"며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8] They say already, "Philip was a great general, but Alexander is simply great."[9] 게다가 이 장교가 몇년전 축제 중에 만취한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친구들에게 겁탈당한 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10] 몰래 젊은 청년과 성교를 나누기도 하는데 알렉산드로스가 이를 훔쳐 보고는 충격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11]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매력을 미끼로 필리포스에게 이것 저것 요구한 후,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에게 몸을 주었다는 묘사가 존재한다.[12] 다만 키는 좀 작은 편이다.[13] 일단 역사적으로 보면 불가능하다. 필리포스 2세는 오른쪽 눈이 멀었고 안티고노스 1세는 왼쪽 눈이 멀었다. 둘이 동일인물이려면 양 눈이 멀쩡하면서 애꾸눈 행세를 해야 한다는 이해하기 힘든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는 필리포스가 신뢰하는 원로 안티파트로스가 살아 있었으니 필리포스 2세가 살아 있었다면 그냥 안티파트로스에게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즉시 복위될 것이다. 즉 알렉산드로스와 헤파이스티온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처럼 만화상의 창작.[14] 올림피아스의 동생[15] 작중 필리포스 암살이 묘사되기 이전에 ‘마음은 어디에 깃드는가?’ 라는 화두를 던진 것이 이를 위한 복선으로 보인다. 에우메네스는 마음이 뇌에 위치한다고 봤지만 필리포스를 소생시킨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이 심장에 깃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생 이후에도 심장이 생전처럼 움직이고 있으니 마음도 동일할 것이라고 여기고 뇌손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16] 안티고노스 같은 중신이 아직까지도 이 만화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만큼, 필리포스 2세의 변화 형태의 몫으로서 남겨놓았던 것이리라 여겨진다.[17] 이 데메트리오스도 공교롭게도 필리포스 2세가 죽은 해(BC 336)에 태어났다. 실제 역사에서는 물론 에우리디케의 아들은 살아남지 못했지만, 이 아들도 살아남은 것으로 처리된 만큼 안티고노스-데메트리오스의 부자관계를 형성하는 시나리오로 갈 가능성이 크다.[18] 참고로 알렉산드로스의 차력은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