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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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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Greeks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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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2위13위14위15위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 멜리나 메르쿠리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니코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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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위57위58위59위60위
소포클레스 니코스 벨로야니스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니콜라오스 마르지오리스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에피쿠로스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오톤
66위67위68위69위70위
반젤리스 솔론 클레이스테네스 아이스퀼로스 바실리오스 2세
71위72위73위74위75위
콘스탄티누스 1세 이온 드라구미스 코스타스 시미티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테오 앙겔로풀로스 니코스 실루리스 스텔리오스 카잔티디스 차릴로스 플로라키스 에우리피데스
81위82위83위84위85위
카롤로스 코운 유스티니아누스 1세 라키스 라조폴로스 헤로도토스 다나시스 벤고스
86위87위88위89위90위
헬레네 글리카츠아흐와일러 카티나 팍시누 알리키 부지욱라키 마르코스 밤바카리스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91위92위93위94위95위
바실리스 치차니스 피로스 디마스 마노스 로조스 마노리스 글레조스 엘레나 무잘라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필리포스 2세 디미트리스 혼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탈레스 프락시텔레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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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게아스 왕조 샤한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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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왕조 메리하토르 네페르카레 8세 와카레 케티 메리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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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왕조 아메넴헤트 1세 세누스레트 1세 아메넴헤트 2세 세누스레트 2세 세누스레트 3세 아메넴헤트 3세 아메넴헤트 4세 소베크네페루
제13왕조 소베크호테프 1세 손베프 네리카레 세켐카레 아메니 케마우 호테피브레 이푸니 아메넴헤트 6세 세멘카레 네브누니 세헤테피브레 세와지카레 네제미브레 소베크호테프 2세 렌세네브 호르 세켐레쿠타위 카바우 제드케페레우 세브카이 세제파카레 웨가프 켄제르 이미레메샤우 세헤테프카레 인테프 세트 메리브레 소베크호테프 3세 네페르호테프 1세 시하토르 소베크호테프 4세 메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와히브레 이비아우 메르네페르레 아이 이니 1세 상켄레 세와지투 메르세켐레 이네드 세와지카레 호리 소베크호테프 7세 이니 2세 세와헨레 세네브미우 메르케페레 메르카레 세와자레 멘투호테프 세헤켄레 산크프타히
제14왕조 야크빔 세카엔레 야아무 누부세르레 카레흐 아아호테프레 셰시 네헤시 카케레우레 네베파우레 세헤브레 메르제파레 세와지카레 3세 네브제파레 웨벤레 아위브레 2세 헤리브레 네브센레 셰케페렌레 제드케레우레 산키브레 2세 카케무레 네페리브레 카카레 아카레 아나티 제드카레 베브눔 아페피 누야 와자드 셰네흐 셴셰크 카무레 야카레브 야쿠브-하르
제15왕조 샤렉 셈켐 아페라나트 살리티스 사키르-하르 키얀 야나시 아페피 카무디
제16왕조 제후티 소베크호테프 8세 네페르호테프 3세 멘투호테피 네비리라우 1세 네비리라우 2세 세멘레 베비앙크 세켐레 셰드와스트 데두모세 1세 데두모세 2세 몬투엠사프 메란크흐레 멘투호테프 세누스레트 4세 페피 3세
아비도스 왕조 세네브카이 웨프와웨템사프 판트제니 스나아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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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align=center> 아홉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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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의 이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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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의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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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의 기독교인
헥토르
트로이의 왕자
여호수아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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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의 왕
알렉산드로스 3세
헬레니즘 제국의 건국자
다윗
통일 이스라엘의 왕
카롤루스 대제
신성 로마 제국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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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독재관
유다 마카베오
이스라엘 독립군의 지도자
고드프루아 드 부용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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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0101><colcolor=#E0C03D>
마케도니아 아르게아스 왕조 제26대 국왕
알렉산드로스 3세
Αλέξανδρος ο Μέγας|Alexander the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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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기원전 356년 7월 20일 또는 21일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現 그리스 중마케도니아 주 펠라)
사망 기원전 323년 6월 10일 또는 11일 (향년 32세)
헬레니즘 제국 바빌론
(現 이라크 바빌 주 힐라)
재위기간 마케도니아 바실레우스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23년
코린토스 맹주
기원전 336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3년
페르시아 샤한샤
기원전 330년 ~ 기원전 3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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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0101><colcolor=#E0C03D> 존호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Ἀ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부왕 필리포스 2세
모후 올림피아스
칭호 마케도니아 아르게아스 왕조 제26대 바실레우스
제2대 코린토스 맹주
이집트 아르게아스 왕조 초대 파라오
페르시아 아르게아스 왕조 초대 샤한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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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전투 연대기4. 특징
4.1. 군사 능력4.2. 인품4.3. 사생활4.4. 외모 논란
5. 평가6. 대중매체에서7. 어록8. 여담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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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그를 으로 여길 수밖에.
스파르타 사람 다미스(Δάμις), 알렉산드로스가 도시국가들에게 자신을 으로 대하라고 쓴 명령문을 받자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 아르게아스 왕조의 26대 왕이자, 2대 코린토스 동맹 의장이며, 헬레니즘 제국의 건립자.

영어 이름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으로 유명하다. 아랍어권에서는 이를 음역한 페르시아 어형이스칸다르(الإسكندر)라고 부른다.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 중 하나로 손꼽힌다. 후세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알렉산드로스 3세를 자신의 모범으로 삼았을 정도로,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세계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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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투 연대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그리스, 발칸 전역
카이로네이아 전투 하이모스 산 전투 페우체 섬 공방전 펠리움 공방전 테베 공방전
페르시아 제국 정복전
그라니코스 전투 밀레투스 공방전 할리카르나소스 공방전 이소스 전투 티레 공방전
가자 공방전 가우가멜라 전투 욱시이 협곡 전투 페르시아 관문 전투 키로폴리스 공방전
야크사르 전투 소그디안 바위 요새 공방전 코리에네스 바위 요새 공방전
인도 원정
코펜 원정 아오르노스 공방전 히다스페스 전투 상갈라 공방전 말리 원정
}}} ||

4. 특징

4.1. 군사 능력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던 전천후 군사천재로 그 드라마틱한 인생과 뛰어난 용력, 어떤 전투에서도 패배하지 않은 결과로 인해 전쟁의 신이라고 숭배받았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스스로를 인간이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 즉 이라고 믿었으며 전투에서 가장 사망률이 높은 최선두에 서서 눈에 띄는 황금 갑옷을 입고 싸울 정도로 겁이 없고 용맹했다. 2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 어린 아이가 왕이 되었으니 혼란스러울 것이라 판단한 고대 그리스 국가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테베 공방전으로 반란을 진압함은 물론 테베를 아예 멸망시켰다.

5만 명도 안 되는 마케도니아의 군대를 이끌고 동원 가능 병력이 수십만에 이르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 전역을 7년 만에 정복했다. 기록으로 정확하게 전해지는 전투만 40여 번을 벌여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데, 심지어 대부분 원정에 병력적 열세라는 불리한 상황에서 치른 전투들이다.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보급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 알렉산드로스를 결정적으로 차별화하는 부분은, 이 모든 승리를 본인이 선두에 서서 얻었다는 것이다.

전술적 역량도 뛰어났지만 그 전술의 핵심이 본인의 무력을 이용한 선두 공격을 바탕으로 펼쳐졌기에 개인으로서의 전투력도 인류 정점급으로 꼽힌다. 누구나 그가 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반짝이는 황금 갑옷을 입고 최전방 선두에서 싸웠는데, 이것은 당연히 굉장히 위험한 수로 개인의 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왕의 허무한 전사와 부대의 와해로 이어지는 도박이었다.[1][2] 당장 페르시아 측에서 본인들의 왕이 도주할 때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감안하면 이는 명백하다.[3] 흥미롭게도 뛰어난 무력을 지닌 지휘관으로 유명한 항우리처드 1세는 현대 기준으로도 거구[4]들이었고, 이 두 지휘관에겐 당대 왜소한 체격의 병사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근골격계와 긴 리치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 3세는 당대 기준으로도 평범한 체격이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의 무용과 생존은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왕 본인이 선두에 서서 적진의 중심부를 직접 공격한 기행에 가까운 무용을 반복한 것은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고, 특히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던 이소스 전투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열세인 전력 차를 본인을 선봉으로 한 중심부 돌파로 이겼다. 당연히 본인의 무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전사했을 것이고 페르시아 제국 정복이란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운이 따랐을지언정 최전방에서 전투를 수십 번이나 치르면서 죽거나 불구가 되지 않았음은, 아무리 총기 없이 창칼과 활로 싸우는 냉병기의 시대라 해도 실로 경이로운 기록이다.

유튜브에 흔한 대규모 전투 시뮬레이션을 봐도 클로즈업된 시점에선 피아 식별도 힘든 흙먼지 속 아수라장에서 뒤엉킨 병력들과 비 오듯이 날아오는 화살 등으로 정신이 없는데, 현실은 더군다나 1인칭이고 눈에 띄는 갑주를 입은 왕을 향해 공격이 쏟아짐은 당연하다. 이렇게 고도의 집중력과 극한의 체력소모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수십 번이나 꼭짓점에서 끊임없이 적을 베는 동시에 부대를 지휘하며 매번 승리를 이끌었다.[5] 이런 과정에서 멀쩡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온 몸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있었고, 말리 원정에서는 흉갑에 화살을 맞아 죽을 뻔 했다. 그와 함께 장장 10여년이나 종군했던 백전노장들까지도 결국 무수한 심신의 부상에 지쳐 나가 떨어지며 파업까지 감행했지만, 왕 본인은 문자 그대로 세상 끝까지 싸우기를 고집하는 경이로운 정신력을 보였다.

또한 지형이나 병종 등의 상성을 안탄다는 것도 대단한 점이다. 넓은 벌판이나 요새화 된 도시, 밀림이나 초원 등 각기 다른 다양한 환경에서 같은 그리스계 중보병, 경보병과 기병의 혼합군, 전투 코끼리, 유목민 군대까지 다양한 병종을 상대했어도 언제나 변함없이 승리했다. 특히 잔뼈 굵은 휘하 명장들이 모두 스키타이 궁기병의 히트 앤 런과 스웜 점술에 고전하고 있을때, 한번 와서 딱 보자마자 유목민을 상대하는 법은 그들의 병력을 하염없이 쫒아다니는게 아니라 자유롭게 말 달리는 '공간 그 자체를 점유'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박살내버리는 것은 알렉산더가 환경이나 병종 상성에 구애받지 않는 천재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당시 그리스 전역의 인구를 다 합쳐봐야 2~300만조차 넉넉한 추정치인 데 비해,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는 최소한 1천만에서 평균적으로는 2~3천만 그리고 과장되이 바라보는 학자의 경우 무려 8천만까지 추정하는 단일 국가로서 당대 최대의 인구 대국이었다. 그만큼 그리스 국가들과 페르시아 두 세계 간에는 수십배의 국력 차가 존재했으며 이미 그리스가 과거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방어전과 정복전은 난이도가 천지 차이다. 유목민처럼 청소년 이상의 거의 모든 남성이 기병대가 되는 사례를 제외하고, 정주(定住) 문명 간의 싸움에서 알렉산드로스만큼 큰 국력 차를 뒤집고, 그것도 방어전이 아니라 정복전에서 승리한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도 찾기 힘들다.[6]

4.2. 인품

어릴 적의 스승은 레오니다스이며[7] 좀 더 컸을 때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서구 철학사에서 플라톤과 더불어 쌍벽으로 예우받는 위대한 철학자이다. 단, 왕자 신분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온전히 이어받아 학자로 활동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의 정복 전쟁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굉장히 깊은 단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습득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버트런드 러셀은 플루타르코스가 과장했다고 여겼는데, 실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알렉산드로스의 행보 사이에 별 관련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계획도시들을 줄줄이 세우고, 책의 중요성을 강조해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세울 목적으로 20만여 권에 달하는 책을 모으고, 또 자신의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동행시켜 가는 곳곳마다 학문의 융성을 이뤄내는 등 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적다고 할 수 없는 학문 친화적인 행보들을 보였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훗날 뛰어난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에서 줄줄이 쏟아지는 결과를 만들었다. 수학, 과학, 논리학을 포함해 현대 문명의 핵심 근간이 된 서양 문명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상당 부분이 기원했는데, 학문을 사랑했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성향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환경에서 배출된 아르키메데스가 후대의 태산북두 같은 과학자들에게 준 영향력들과 유클리드원론이 현재 문명에까지 끼친 절대적인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학문적인 환경을 당시 세계 곳곳에 조성하거나 전파한 점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일반적인 정복 군주들과는 달리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철학, 과학, 문학 등 다방면의 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책을 사랑하고 연구를 장려하는 정책들을 항상 견지했으며 또한 현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권개념이 부족했던 고대 시대의 인물이었음에도 포로로 잡은 적국 사람들 중 학자, 시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죽이지 않는 등 아량을 보였다.

그리스식 영웅주의에 완전히 빠져 있어서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넣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 《일리아스》를 추천해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렉산드로스가 항상 갖고 다닌 《일리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성해 준 요약 필사본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야망이 매우 커서, 부왕인 필리포스의 승전 소식을 들을 때면 매우 울적해하며 친구들에게
"부친께서 이렇게 나라들을 계속 정복하신다면 나와 너희가 자라서 펼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작은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큰 영광과 명성만을 탐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평생을 가서 알렉산드로스가 왕자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
이라고 말했다.

부케팔로스의 일화에서 보이듯, 배짱이 매우 강했다. 자신감이 늘 넘쳐났고, 죽음에 두려움을 보이는 일 없이 용감하였다. 모든 전투에서 황금 빛 갑옷을 입고 선두에 선 것은 유명하며, 이로 인해 11차례의 크고 작은 부상들을 입었다. 가장 극적인 전투였던 가우가멜라 전투 때에는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기가 찬 파르메니온이 가서 직접 깨우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우리가 이미 이기지 않았소? 도망다니던 다리우스를 쫓아다니느라 우리가 기진맥진하였을 정도니 말이오."
라고 했다. 카파도키아 반도를 넘어가던 중,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얼음장 같은 온도에, 폐렴이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는데, 어의들은 혹 자기에게 책임이 물어질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필리포스라는 한 의사만이 대왕에 대한 애정으로 나서서 그를 간호하고 약을 지어줬는데, 며칠 후 정신이 좀 든 알렉산드로스에게 파르메니온이 쓴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인즉
"그 의사는 사실 다리우스의 사위가 될 욕심으로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전하를 죽이려 하고 있으며, 약을 통해 독살을 하려 한다."
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의사가 약을 들고 천막으로 들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사발을 받고 쭈욱 들이키며 의사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편지를 읽은 의사는 바로 사색이 되어 땅에 엎드렸다. 의사는 자신은 절대 이러한 의도가 없다며 살려달라 외쳤고[8] 알렉산드로스는 남은 약을 들이킨 뒤, 미소를 지으며 의사를 일으켜 세웠다. 군의 2인자인 파르메니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 것이고 이는 들어맞았다.

하지만 부하들의 불평을 흘려듣지 않고 간언을 듣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하나, 이건 인도 원정을 중간에 그만두고 회군한 것처럼 예외의 경우들이다. 파르메니온과 클레이투스와 칼리스테네스가 괜히 죽은 것이 아니다.

이집트에서 신탁을 받은 뒤로는 자신이 신이라 믿기도 하였다. 인도에서 회군하던 때, 화살을 맞은 그가 피를 흘리며
"이것은 신의 피가 아니라, 인간의 피로구나."
라고 슬프게 말하기도 했다.

물욕, 육욕에 대하여 자제를 하려는 모습은 보였다. 이소스 전투 이후,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리우스의 아내 스타테이라 1세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그녀의 미모를 나에게 말하지도, 상기시키지도 말 것이다."
라고 부하들에게 말하기도 했으며,[9]
"페르시아의 여자들은 눈이 아플만큼 아름답다고 하더구나."
라면서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식욕 또한 필요한 만큼만 먹고, 그 이상 낭비는 하지 않았는데,
"저는 레오니다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식사법을 배웠으니 훌륭한 요리사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침을 맛있게 먹으려면 야간 행군을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으려면 아침을 적게 먹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 원정 중반을 넘어가며, 재화가 숙영지에 넘쳐흐르던 때부터는 식사가 사치스러워졌으나,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늘 군인다운 검소한 삶을 이야기했다. 이는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10]

물욕이 없는 만큼, 베푸는 것의 기쁨을 잘 아는 이가 알렉산드로스였는데, 그는 주위의 인물들에게 지나치리만큼 후한 대접을 하여, 친구들이나 동료 장군들의 부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페르시아의 한 고관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왕께서 오시기 전에 페르시아에는 다리우스 왕 하나뿐이었지만, 이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여럿입니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게 어느 정도였나 하면, 장군도 아닌 서기관 에우메네스가 자기 막사에 숨겨놓은 돈이 금과 은을 합쳐 1천 탈렌트 이상이었을 정도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 중 가장 부유했던 아테네의 1년 예산이 400탈렌트 정도였으니 그의 제장들은 모두 재벌급의 부호였다고 볼 수 있다.[11]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겨울 수도인 수사에 있었던 국고에서 5만 탈렌트를, 종교적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국고에서 12만 탈렌트를 전리품으로 얻는 데 성공했는데 이 중 군비를 제외한 상당한 액수를 제장들에게 나눠 주었을 것이다. 일개 병사들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마찬가지여서, 어느날 나귀가 지나치게 무거운 보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을 본 병사가 보물을 나눠 짊어지자, 대왕이 몸소 그 옆으로 다가가
"힘을 내거라. 캠프까지 네가 그 보물을 들고 간다면 그것은 모두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인정도 깊어, 한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거짓되게 진술하고 전역하려 한 것이 걸렸는데, 그 사유가 고향에 두고 온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을 알게 되자, 대왕이 이를 용서하며 그를 전역시켜 준 적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점령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귀족들에게도 융화 정책을 펴서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철학에 감화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집트에 갔을 때, 굳이 파라오 칭호를 받은 것도 그것이 이집트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한 최선의 수였기 때문이다. 사실 페르시아에 쳐들어갔을 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복수하자고 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이끌었다. 문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랑 휴전을 했던 것. 그리스인들이 야만인[12]의 지배를 받는 걸 못마땅해하자 시선을 밖으로 돌린 것이다.[13]

자제력이 꽤 강한 편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충동적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자제력이 강한 모습들도 이러한 충동적 성격 때문에 생겨난 태도가 아닐까 싶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 후회한 것[14],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불을 지르고 후회한 것, 술에 취해 자신의 은인이자 신뢰받던 장군이던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 등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른 수준이었고, 실제로도 그런 업적을 세웠다.[15] 그 예로 연회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위대함을 말하다가 이 업적이 그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고 지적받고[16] 입을 다문 일화가 있다.

4.3. 사생활

아내를 여럿[17][18] 두었다. 첫 번째 왕비는 박트리아 부족장의 딸인 록사나였는데, 록사나와 결혼한 이유는 아마 다리우스 3세의 장녀 스타테이라 2세[19],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막내딸 파리사티스 2세와 결혼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록사나와 관계를 맺어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를 두었으나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원정에 쏟아부었고, 아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요절했으니 함께 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는 적장이었던 로도스의 멤논의 아내였던 바르시네를 후궁으로 삼아 또 다른 아들도 두었는데 이름은 헤라클레스였다.[20] 이들 이전에 캄파스페라는 여인에게 푹 빠졌다고도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이자 최측근이던 헤파이스티온은 흔히 알렉산더의 동성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21]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로선 작은 키에 외모도 평범한 편이었고 오히려 헤파이스티온이 더 키도 크고 잘생겨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박살내고 그의 어머니 시시감비스와 아내 스타테이라 1세가 있는 막사에 들어왔을 때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그외 일가는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인 줄 알고 그 앞에 엎드렸다는 얘기가 있다. 헤파이스티온이 정말로 그의 연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알렉산드로스에게는 그 누구보다 절친한 친우이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할 당시에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슬픔과 좌절감에 사로잡혀서 헤파이스티온의 건강을 돌본 의원을 십자가형을 내려서 죽이기까지 했으며[22], 죽은 헤파이스티온을 기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거대한 기념물들을 건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또다른 동성 연인으로 유력한 인물은 페르시아 출신의 미소년 환관이었던 바고아스였다. 그는 외모가 아름답고 가무에 능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총애를 받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인도를 떠나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한 후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용 경연이 열었는데, 당시에 바고아스가 아름다운 춤을 추어 우승하고 덤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키스를 나누었다고 한다. 바고아스는 관련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심지어 바고아스를 주인공으로 한 《Persian Boy》라는 소설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는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사랑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그의 성 정체성은 양성애자로 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한 작가는 호메로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리아스》를
“모든 군사적 덕성과 지식을 담고 있는 완벽한 보물”
이라며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간직했다고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가 전한다. 전장에 나가면서도 호메로스의 책을 지참했으며 배개 밑에 《일리아스》를 놓고 함께 잤다고 한다. 아시아 원정중에도 《일리아스》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거기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원정과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4.4. 외모 논란

고대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를 꽃미남으로 묘사해 기록해 놓았고, 남아 있는 조각상에서도 일반적으로는 준수한 미청년의 모습을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각가 리시포스가 남긴 흉상의 레플리카가 가장 신뢰할 만한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가장 못생기게 묘사된 작품 기준으로도 터프한 미남이고 평균적으로 굉장한 꽃미남이다.[23] 어쨌든 추남은 아니라는 데에 유의.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20세기에 들면서부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남아 있는 전신상들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자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이에 대해서는 이른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즉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나타났던 어떤 미적인 규칙을 준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고대 역사가 아리아노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한쪽 눈은 검푸르고 다른쪽 눈은 하늘색, 그러니까 오드아이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떤 유전적인 장애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24]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다시피 한 사람이 영국의 역사가 피터 그린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평균적인 마케도니아 남자의 키에도 못 미치고 몸은 뒤틀려 있고, 목소리는 쉿쉿거리는 데다 수염도 성기게 나기 때문에 멋이 안 나서 일부러 면도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25]

다만 혹자들이 제기하곤 하는, 필리포스 왕이 추한 외모 때문에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선택하기를 망설였다는 가설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일단 알렉산드로스의 외모가 당시 기준으로 어떠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을 제외해보자.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지닌 여러 외모상의 문제점, 그러니까 뒤틀어진 골격이나 오드아이, 거친 목소리 등을 부왕 필리포스로부터의 유전, 나아가서는 당시 마케도니아 아르게아스 왕실의 유전적 특성으로 여긴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서출 형제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의 장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추측되는 부분이 있기에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외모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봄이 옳을 듯하다.

어쨌든 알렉산드로스의 외모에 대해서는 꽃미남설이 다수설이다.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부각되었는데, 그의 외모에 대한 논쟁은 그에 대한 논쟁들 중 메이저는 아닐지라도 2천 년은 족히 이어진 장기 떡밥이다.

일단 정설로 취급받는 학설은 추남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역사에 회자될 정도의 추남이었다면 그에 관련된 루머나 역사책이 상당 수 남아 있어야 정상인데, 보통 사람도 아니고 그 당시 세계의 절반을 휩쓸었던 양반인데도 이에 관한 관련 기록이 없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도 소소한 장애는 보유하고 있을 수 있어도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장애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일화 중에 날뛰는 난폭한 말에 올라탔다는 일화, 무용담, 또 왕에게 심각한 신체적 결함이 있을 경우 왕이 되기 힘든 그 당시 사회상, 언제나 전쟁터에 군대와 함께 섰었다는 걸 생각했을 때 장애설은 신빙성이 낮다. 애초부터 신체적 능력이 나약한 사람이 전쟁터에서 선봉에 서고도 항상 이기고 살아 돌아오기를 반복할 가능성은 낮다.

물론 신체 장애가 있음에도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사례도 상당히 있는 편이며, 한 예로 영국의 리처드 3세는 심한 척추측만증으로 별명이 곱추 왕이었지만 전쟁터에서 뛰어난 기사로 이름을 남겼다. 현대에 척추측만증 환자를 섭외하여 진행한 실험에서도 보병 전투 시에는 쉽게 지쳐버리는 문제가 있지만 기마 전투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싸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절름발이였던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는 왕이 되려 하자 불구인 왕이 나라를 몰락시킨다는 신탁이 나왔다. 그러나 리산드로스가 신탁을 두고 부정한 태생인 사람이 왕이 되면 왕국이 절름발이가 된다는 의미라고 주장하여 사생아로 의심을 받던 조카를 제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추남설은 근거 자체가 희박하다. 그의 조각상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Contrapposto, 즉 인물이 한쪽으로 기울고 짝다리를 서는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기원전 5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해 중세 이전 그리고 르네상스 시절에 부활해 널리 쓰인 방식이다. 미켈란젤로다비드상이나 서기 3세기에 만들어진 파르네세 헤라클레스 조각상 역시 저런 식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애초에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이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시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역시 그리스식으로 조각된 전신 조각상들을 보면 한쪽으로 기울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조각상이 기울었으니 본인도 몸이 뒤틀렸다는 논리라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이 신화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했던 헤라클레스의 몸도 뒤틀린 인물로 여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남은 근거는 오드아이뿐인데, 오드아이가 되는 이유는 유전 장애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고, 오드아이이면서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거나 오히려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 경우도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메이저 리그 투수 맥스 슈어저.

애당초 위에 나온 추남설은 대다수가 근대에 와서 제시되기 시작한 의견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는 미녀가 아니었다." 등과 비슷한 맥락으로, 그 당시의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 확실하게 미남인지, 평범한지, 추남인지는 유해를 살펴봐야 하지만, 유해가 있을 곳으로 보이는 지역이 알렉산드리아이고 유력한 곳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궁전 단지인데, 바닷속인 데다가 추정만 할 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5. 평가

알렉산드로스의 행보는 사실 냉철한 현실주의적 행적들이라기보다는, 야망에 불타오르는 영웅서사시에 가까운 느낌을 줄 때가 많다. 그런 모험들로 수많은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세계정복했었다는 게 오히려 그의 탁월능력들을 더욱더 보여주는 격이긴 하지만. 이를 테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된 그의 왕자 시절 모습과, 군주 시절의 원정 준비 작업을 살짝 들여다보자.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어느 중요한 도시를 함락했다거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덜거렸다. "이러다가는 아버지한테 일을 다 뺏겨서, 우리는 크고 빛나는 사업도 못 하고 말겠어."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더욱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받아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τῆς δὲ στρατιᾶς τὸ πλῆθος οἱ μὲν ἐλάχιστον λέγοντες τρισμυρίους πεζοὺς καὶ τετρακισχιλίους ἱππεῖς, οἱ δὲ πλεῖστον πεζοὺς μὲν τετρακισμυρίους καὶ τρισχιλίους, ἱππέας δὲ πεντακισχιλίους ἀναγράφουσιν. ἐφόδιον δὲ τούτοις οὐ πλέον ἑβδομήκοντα ταλάντων ἔχειν αὐτόν Ἀριστόβουλος ἱστορεῖ, Δοῦρις δὲ τριάκοντα μόνον ἡμερῶν διατροφήν, Ὀνησίκριτος δὲ καὶ διακόσια τάλαντα προσοφείλειν.


ἀλλὰ καίπερ ἀπὸ μικρῶν καὶ στενῶν οὕτως ὁρμώμενος, οὐ πρότερον ἐπέβη τῆς νεώς ἢ τὰ τῶν ἑταίρων πράγματα σκεψάμενος ἀπονεῖμαι τῷ μὲν ἀγρόν, τῷ δὲ κώμην, τῷ δὲ συνοικίας πρόσοδον ἢ λιμένος. ἤδη δὲ κατανηλωμένων καὶ διαγεγραμμένων σχεδὸν ἁπάντων τῶν βασιλικῶν.

ὁ Περδίκκας ‘σεαυτῷ δέ,’ εἶπεν, ‘ὦ βασιλεῦ, τί καταλείπεις;’

τοῦ δὲ φήσαντος ὅτι τὰς ἐλπίδας,

‘οὐκοῦν,’ ἔφη, ‘καὶ ἡμεῖς τούτων κοινωνήσομεν οἱ μετὰ σοῦ στρατευόμενοι.’
그의 군대는 보병 30,000명과 기병 4,000명이었다는 설도 있고, 보병 43,000명 그리고 기병 3,000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설에 의하면 그는 70탈렌트 정도의 군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두리스의 설로는 군량미 30일 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오네시크리토스는 당시 알렉산드로스에게 200탈렌트의 빚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쨌든 대규모적인 계획의 준비로서는 변변치 못한 준비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의 일이 염려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어떤 자에게는 많은 토지를 주고, 어떤 자에게는 한 마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구를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신분에 맞도록 각각 재산을 나누어 준 다음에야 군비를 수송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라고 그는 대부분의 왕실 재산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한번은 페르디카스가 그에게 물었다. "전하,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을 남겨 놓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스가 희망을 남겨놓았다고 말하자, 페르디카스는 대답했다. "그럼 전하와 함께 종군하는 저희들도 그 희망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 15. 1~2

또한 그는 전장에서도 자신의 안전을 내팽개치고는, 전투 대형의 맨앞에서 보통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위험을 무릅썼다. 특히 적들은 복장을 통해 알렉산드로스가 국왕임을 알아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유사시 그가 사망하여 발생할 정국의 불안정을 막기 위해 혼인해서 자식을 낳을 때까지 정복을 멈춰달라는 조언들마저도 무시했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일화이기는 하지만 그는 후계자에 대해서
"가장 강한 자!"(κράτιστος)
라는 말만 남기고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당연히 이러한 행동들은 국가를 다스리는 군주들이 함부로 따라해서는 곤란하고, 무모하다. 하지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며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대왕의 인생업적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지라, 사후 많은 군주들과 지도자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대왕병을 앓게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포함해 많은 지도자들의 롤모델이 되었는데, 일례로 로마 제국의 유명한 네임드율리우스 카이사르는 33세라는 젊은 나이[26]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내 나이에 세계정복하고 죽었지만, 나는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개탄했다는 이 일화는 유명하다.[27]

그리스오리엔트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물론 헬레니즘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에다가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합쳐놓은 정도의 판도이기에, 넓기는 하지만 몽골 제국이나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후대의 거대 제국들에 비하면 "의외로 작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대 그리스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유서 깊은 문명 지역이란, 그리스, 이집트, 레반트,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이란 고원, 인도였으며, 이러한 꿀땅들 중 인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했다.

서쪽에서는 신흥 강호 고대 로마이탈리아를 정복해 나가고 있었고, 결코 얕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나, 당대에는 유서 깊은 문명권이라 하기엔 부족했다. 한편, 동쪽 멀리에 전국시대중국이 있었지만, 히말라야에서 천산에 이르는 거대한 장벽을 경계로 동•서방 사이에 아직 존재 파악조차 거의 안 되던 때였다. 게다가 대영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형성된 거대 제국이기에, 개인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비견될 만큼 땅을 팍팍 정복한 군주는 칭기즈 칸 등 정말 몇 안 된다. 칭기즈 칸은 몽골 민족의 특유의 기동성이 있었지만,[28] 이 당시 그리스는 기마 민족처럼 말을 잘 다룰 수 있는 편이 아니었고 훗날,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들이 잘 발달되지 않던 그런 고대에, 단기간에 페르시아라는 큰 제국을 삼켜버렸고 나아가 인도까지 진출했으며, 그의 사후 제국이 분열되었고 이후에 영토가 제대로 확장되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히 정복 군주로서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다.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교통이 잘 발달되지 않은 편이고 다른 나라에 대한 지식은 아예 알려지지 않거나 오히려 전설로 치부하거나 허구로 믿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알렉산드로스가 동방과 모든 세계의 지리를 알았다면 그가 정복하려는 땅이 어디까지였는지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진시황 이후 통일 중화제국들은 당대 서방세계의 패권국이자 패권 세력이던 로마 제국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서로를 모른 것은 아니고 아우구스투스 시절 한나라가 보낸 사절을 통해 약간의 교류는 분명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를 가로막은 파르티아 제국이나 쿠샨 왕조 등의 세력, 무엇보다 둘 사이를 가로막은 너무나 먼 거리와 자연환경으로 인해 두 문명은 상호간의 세력이나 규모, 정확한 정체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현실적으로 알았다고 해도 사막과 산맥을 넘어 정복전쟁을 하는 것은 당시로선 불가능하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가 로마에 대해 인지한 정도는 '진귀한 물건이 많이 있는 신기한 나라' 수준으로 거의 외계행성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런 접점조차 없는, 아우구스투스보다도 훨씬 이전 사람인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전국시대 국가들에 대해 아는 건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알던 세계의 범위 전역에 걸쳐 정복전쟁을 벌이고 승리했다. 그가 알면서도 정벌을 포기한 지역은 병사들이 파업하는 바람에 포기한 인도 정도뿐이다. 사실 이때도 그는 '인도는 작은 지역인데 지금 정벌해야 한다'라며 광활한 마가다 왕국에 대해 완전히 오해했다. 즉 당시 그리스인들과 알렉산드로스 3세는 세계를 거의 정복하고 짜투리 땅만[29] 조금 남은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30]

로마 제국에서도 대왕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그리스가 중심지인 동로마 제국에서도 존경받았다. 아예 당대 그림 중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묘사한 그림들이 다수 보일 정도다.

친구였던 헤파이스티온과의 뜨거운 관계로 다른 방면에서도 상당히 유명하다. 또한 부하 장병들에게 현지 여성과의 결혼을 장려했는데, 이 역시 그리스와 동양을 혈통적으로 결합하여 이상적인 세계 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정된다.[31] 이런 동 • 서 문화 융합 정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해서 반역 음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융합 정책 때문인지 로마 때는 폭군으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지만 소아시아의 왕들 중에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로 부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또한 영웅시되는 일이 더 많았다. 일례로 티무르의 생애를 다룬 열전에서 그 지역의 위대한 왕들의 이름을 얘기할 때 알렉산드로스도 언급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했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한다. 이 알렉산드리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꿈꾼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작들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이 도시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울리도록 조치했고, 그에 따라 당시 서방에서 모을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문헌을 수집 배분하여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생각하면 알 것이다. 당시 그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샅샅이 뒤져서 책이란 책은 전부 다 몇 달이 걸리든 모조리 필사한 다음에 필사본을 소장하고 원본은 돌려줬다고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알렉산드로스 당시에 수십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한 것이었다.

파일:이집트 알렉산더.jpg
2002년 이집트-그리스 우호의 일환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상

세계 방방곡곡에 건설되었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두 폐허가 되어 위치조차 알 수 없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다. 튀르키예의 항구도시인 이스칸데룬(İskenderun) 역시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렛타"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신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멸망한 뒤 같은 위치, 혹은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도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양에서는 동양에 대한 우월감을 상징하는 인물로 쓰이기도 하며 이 인물 때문에 과거의 마케도니아와 관련없는 현재의 북마케도니아[32]그리스와 관계가 복잡해진다. 아이러니한 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지방을 어르느라 동방 여자와 결혼하고 문화를 받아들여서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욕을 단단히 먹었었다. 다만 한가지 짚어야 할 점은, 서양에서 전근대에 '동양'이라는 명칭은 동아시아가 아니라 오리엔트, 즉 중동 ~ 서아시아까지 이르는 지역을 의미하는 명칭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는 역사서들은 옹호와 비판의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옹호 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예찬하는 경향이 지나쳐서 《창천항로》의 조조급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비판 쪽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잔인함과 술주정에 주로 집중하는 편이다.[33]

그 인기 때문인지 이슬람권에서는 침략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거쳐 서아시아 세계에 전파되어 그의 정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을 영웅으로 대접했으며 수많은 전설들이 이슬람권에서 전해져 내려왔다. 자세한 것은 이스칸다르 항목을 보면 된다. 심지어 무슬림으로 와전되는 전설이 있기도 해서 중근세 말레이 술탄들이 스스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신이라고 자칭하기도 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 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플라톤의 비중도 굉장히 큰 편이다. 한편 무슬림이나 크리스천이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을 성전이라 믿는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근거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선 정도는 있지만.

인도파키스탄 쪽에서는 역사적으론 침략자인 만큼 별로 취급이 좋지 않다. 전(前)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에게 대놓고 야만족의 우두머리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용명은 인도에 있었던 군신스칸다에 흡수되어 인도에서 신이 되었고, 이것이 중국 불교로 전해져 위타천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이다텐이 되었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경우, 알렉산드로스 자체가 원래 동북아 문명권에서도 오랫동안 좋아해오던 전형적인 '영웅호걸' 스타일의 인물인데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공격받은 장본인도 아니기에 여러모로 인기가 좋다. 서구권 학자들이 몽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가 오래 살았다면 세계 제국과 과학의 발전이 일찌감치 성공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거꾸로 그가 단명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남아 있던 헬레니즘 문화의 바탕인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인들의 무지에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사실상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제국을 그대로 계승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현실을 볼 때 설득력이 없는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다.[34] 알렉산드로스 개인의 성격이 어쨌든 상관없이 말이다.

앞에서 말한 계획대로 로마로 진공했다고 해도 한니발이나 피로스의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원본은 로마 장군이 연설하면서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우리 로마에 쳐들어왔으면 깨졌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주장은 당대에서부터 제기되었는데,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로마로 왔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당시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국력 차이와 인재풀을 생각하면 설사 원정을 실패해도 한니발과 피로스의 신세가 될 확률은 낮다.[35][36]

다만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당시 로마가 알렉산드로스를 이길 수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국력의 차이도 차이지만 당시 로마의 상황은 전혀 좋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56년에 태어나 기원전 323년에 죽은 사람인데, 그가 죽을 당시 로마는 제2차 삼니움 전쟁 중이었다. 삼니움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던 삼니움과 에트루리아 등의 세력이 로마 공화국과 수십년에 걸쳐 겪은 분쟁으로, 로마 공화국은 이 전쟁의 결과로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후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과 피로스 전쟁을 치르게 되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로마는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된다. 문제는 이 시점이 기원전 200년대 중반이다. 즉 알렉산드로스 생전에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도 아직 확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로마의 군사력은 이미 반도 내 다른 도시국가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이탈리아의 사실상 패권 국가긴 했으며, 당시 지중해에서 손꼽힐 정도로 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직 사방에 적들을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 지휘관 중 한명이 이끌며, 국력도 로마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국가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이진 않다.[37] 이를 감안하면 리비우스의 발언은 자뻑도 아닌 허세나 국뽕에 가깝다. 괜찮다. 로마한테는 '적장이 이겼으나 로마를 인정하고 물러갔다'라는 필살기 역사왜곡이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 <마카베오기> 상권[38]에서는 저자였던 유대인들의 땅을 침략한 인물이다 보니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만 이와 별개로 현대 이스라엘에는 알렉산드로스가 어원인 스칸다르(שערורייה)라는 이름이 존재한다.
키팀 땅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요새들을 점령하고 세상의 임금들을 죽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땅끝까지 진격하여 많은 민족에게서 전리품을 차지하였다. 세상이 그 앞에서 평온해지니 그는 마음이 우쭐하고 오만해졌다. 그가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지방과 민족과 통치자를 굴복시키자, 그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앓아 눕게 되자 죽음이 닥친 것을 알고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 자란 대장군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나라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 그의 장군들은 저마다 자기 영토를 다스렸다. 그들은 그가 죽은 뒤에 모두 왕관을 쓰고, 그들의 자손들도 그 뒤를 이어 오랫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
《구약성경》 <마카베오기> 상권 1장 1~9절

한편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전근대 이란인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사산 왕조 시대 유행하던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관점이며, 둘째는 사산 왕조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등장한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역사에 존재한 그냥 유명한 영웅 중 한 명으로 보는 관점이다.

전자의 견해는 주로 조로아스터교 경전이나 사산 왕조 당대의 기록에 의거한다. 이에 따르면 로마인 알레크산다르는[39][40] 성스러운 경전들을 없애고, 성스러운 불꽃들을 꺼뜨렸으며, 이란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이 악의 화신이란 말이 단순한 비유법이 아니라 악신인 아흐리만, 악룡 아지다하카, 투란[41]의 왕 아프라시압 등과 함께 당당히 실제(?) 악의 화신으로 쓰여져 있다. 이렇게 사악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으로 이란에 혼란과 분열의 시대가 찾아왔으나, 이를 수습하여 이란에 질서와 정의, 종교와 신앙을 되돌려 놓은 것이 바로 아르다시르 1세라는 것이 사산 왕조의 공식 입장이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구체적으로는 10세기 이후 피르다우시의 《샤나메》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저술된 《에스칸다르나메》 등에 등장하는 에스칸다르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에스칸다르가 사실 이란 혈통이라는 주장도 있고,[42] 이란을 정복한 후에도 "특별히 뭘 파괴하거나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패배자인 다라 왕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자기 딸을 에스칸다르에게 결혼시켜 왕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란의 왕이 된 에스칸다르는 세계 각지를 정복하며 위대하고 현명한 왕이 된다. 나중 가서는 정복왕이 아니라 현자, 예언자라고 쓸 지경이다.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은 에스칸다르 전설 자체가 유럽의 알렉산드로스 전설들이 수입/번안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이슬람적/이란적 색채로 변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란이 타국 세력에 정복된 이후이고, 이란의 지배 세력이자 독자 정체성의 근간이던 조로아스터교 세력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외국 침략자에 대한 혐오가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산 왕조 시대에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증오가 상당히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났음은 전술한 대로다.

현대 이란의 일반적인 평가는 '비록 적이었지만 솔직히 대단했다는 건 인정함' 정도이다. 워낙 오래된 일인 데다가,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의 공주인 록사나와 결혼하는 등 동서 화합을 모색했고, 키루스 2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하는 등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현대 이란의 평가는 꽤 좋은 편이다. 때로는 그냥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후에는 신화적인 존재나 위대한 왕으로 묘사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가 지은 《이스칸다르의 서》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매우 긍정적이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었다. 다만, 이 동네도 모든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 (칭기즈 칸과 함께)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한 악마적인 이미지도 물론 있으며[43] 영웅적인 이미지와 양립하는 중이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샤나메》에 등장하는 사악한 마왕 자하크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알렉산드로스 3세로 추정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샤나메》에 묘사된 자하크의 주요 일생이 알렉산드로스 3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둘 다 서쪽에서 페르시아로 쳐들어왔으며, 어머니와 근친상간 관계를 했거나 혹은 그랬다는 의혹이 있으며, 왕위에 오르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거나 그런 혐의를 받았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들의 경전을 불태우고 사제들을 죽였다고 주장하는데, 《샤나메》의 자하크 역시 조로아스터교를 박해했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 3세의 탄생 설화 가운데는 그가 뱀으로 변신한 제우스와 어머니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자하크 역시 매우 용맹스러워서 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뱀을 용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이런 유사성을 감안할 때,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알렉산드로스 3세에 대한 조로아스터교도와 페르시아인의 오랜 증오가 《샤나메》의 마왕 자하크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추정된다.[44]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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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록

희망.[45]
가장 강한 자![46]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겠다.[47]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48]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한 마리 사자의 지휘를 받는 양의 군대가 한 마리 양의 지휘를 받는 사자의 군대보다 두렵다.
내가 파르메니온이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오.[49]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할 수 있는 한, 연기를 계속하리라.[50]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51]
우리의 가장 큰 승리는 패자들과 다르게 처신하는 것임을 그대들은 모르는가![52]
내가 죽거든 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게 하라. 천하를 쥐었던 알렉산드로스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할 뿐.

8. 여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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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존여부를 떠나 기행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2] 다만 창검으로 싸우는 전근대 전투 특성을 감안하면 미친짓까진 아니다. 화살과 냉병기는 갑옷과 방패로 감당할 수 있으며 정예부대를 대동하고 직접 전황을 누린 지휘관은 동서양 역사 통틀어 적지 않다.[3] 본인이 신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서 그는 이것을 도박이라고 인지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당연히 이것은 타고난 담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인류 역사상 본인이 신, 혹은 신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한 군주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런 군주들 중에서 10여년을 살점 튀기는 최전방 꼭지점에서 싸운 사례는 알렉산드로스 이외에 전무하다.[4] 항우의 키는 정확하지 않지만 기록상 8척으로 184cm 정도, 리처드는 유골검사 결과 196cm였다.[5] 최선두에서 죽어가는 병사들도 고생이지만, 후방에서 지휘만 내리는 것도 고된 일이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단숨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그 아우구스투스조차도 부족한 군재는 물론이고 지휘 자체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전투는 아그리파에게 맡겼다.[6] 방어전이라면 몇몇 예시가 있긴 하다. 고구려만 봐도 체급차가 최소 10배는 차이나는 거대국가 수나라-당나라를 상대로 수십만을 궤멸시켜 버리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몇 안되는 엄청나게 극적인 사례이다. (간혹 고구려를 반농반목 국가라 하는 경우가 있는데, 휘하에 거란과 말갈을 쫄따구로 부린 특성 때문에 그쪽과 교류와 접점이 많았을 뿐 엄연히 농본정주문명이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그걸 넘어서 아예 거꾸로 정복을 해버렸으니 후대의 수많은 왕과 장군들이 롤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7] 고대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 1세와는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영웅들을 생생하게 '내면화'했었으므로, 넓은 의미에선 레오니다스 1세 역시 스승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는 교육학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는 내용.[8] 다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좀 다르게 전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시종일관 의사에 대한 신뢰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편지를 본 의사 역시 자신에 대한 모함에 분노하며 신들의 이름에 맹세코, 자신은 결백하다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왕에게 호소하였다고 한다.[9] 그런데 다리우스의 왕비는 1년 후에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와 동침해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사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10] 다만, 원정 후반기부터 심신이 피폐해지며 폭음하는 일이 잦아지기는 하였다. 그리고 인도 원정에서 귀환 후, 기분 전환으로 술 마시기 대회를 열어 그의 부하들 중 대회 우승자를 포함해 42명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11] 물론 에우메네스는 동방 원정의 행정과 보급을 일임받았으므로 군비를 횡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12]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들은 페르시아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 왕국바르바로이(=야만인)라고 여겼다.[13] 다만 이런 융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은 자신들 마케도니아인들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을 야만인으로 멸시했으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에 열린 회의에서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 귀족 여성인 바르시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헤라클레스를 다음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에 "그럼 우리가 정복한 페르시아 야만인들한테 굴복하는 셈이 되니 안 된다."라고 거부되었던 일화에서 드러난다.[14] '공식적으로는' 진범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실상 알렉산드로스가 불태웠다고 광고한 셈이다. 자세한 건 페르세폴리스 문서 참조.[15] 정확하지 않지만 대충 비교하자면 조선이 명나라를 정복했다고 볼 수 있다.[16] 다른 장군들을 치켜세우는 건 아니고,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국가를 정비한 업적이 있으니 자기칭송 좀 자제하라는 뜻이다.[17] 모두 아시아 계통이다.[18] 물론 중동/중앙아시아의 코카소이드 백인이어서 인종적으로 광범위한 차이는 없다.[19] 또다른 이름은 바르시네[20] 헤라클레스 역시 그가 죽은 뒤 등장한 디아도코이 내전 중에 카산드로스에게 독살당한다.[21]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 연애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고대 그리스/동성애 문서 참조.[22] 이 의원이 전차 경주 구경을 아주 좋아해서 병이 든 헤파이스티온을 놓아두고 전차 경주를 보러 갔는데, 그 사이에 헤파이스티온이 포도주닭고기를 마구 마시고 먹어대다가 그만 소화불량에 걸려 죽고 말았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어서 죽였다.[23] 조각들이 생각 외로 굉장히 많다.[24] 오드아이는 각종 미디어에서 매우 흔하게 등장하는 개성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오드아이였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창작물에서 눈 색깔이 다르게 묘사되는 경우가 드물다.[25] 그러나 일단 면도의 경우는 알렉산드로스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 원정대 전체에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전투 중 수염을 붙잡히는 일이 없게끔 일찌감치 밀어버린 것.[26] 다만 33세는 현대에는 젊은 나이지만 고대 로마 기준으론 중년으로 적은 나이라고 보기 어렵다.[27] 물론, 나중에 이 사람이 로마를 뒤집어 황제에 가까운 지위에 올라 후세에 로마를 대표하는 인물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될 정도로 업적을 남겼다.[28] 혹자는 칭기즈칸이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들만 골라서 쉽게 정복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부합되지않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다. 애초에 칭기즈칸이 무너뜨린 상대들은 몽골 초원을 두고 패권을 다투었던 옹 칸의 케레이트, 몽골인보다 훨씬 물자가 풍부하고 병력도 많았던 나이만, 더 나아가서는 당시 북중국을 지배했던 금나라, 중동의 최강국인 호레즘이었다. 그 외에도 서하, 아유브, 맘루크 등 나아가는 지역마다 패권을 잡던 나라 및 왕조들과 싸워서 이긴게 칭기즈칸 통치기의 몽골이었다. 오히려 인구밀도가 낮아 숫자에서 열세였던 쪽은 몽골인들이었다. 알고보면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간의 국력차보다 더 큰 국력차를 극복한 정복 사업이다.[29] 로마조차 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도시국가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물론 로마는 이탈리아의 패권국가이긴 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위협하거나 그가 정복해야 마땅할 강성한 세력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30] 물론 어떻게든 그가 전세계 지리에 대해 알았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진짜 세계를 정복하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이건 기원전 350년 기준으론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히려 10년 좀 넘는 짧은 재위기간 동안 당시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었던 세계 대부분을 지배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대단한 업적이다.[31]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시민들이 "우리 빼고 다 바르바로이(야만인)이고 싹 노예로 부려먹자." 할 때 알렉산드로스는 "걔들도 문명인이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권보다는 어차피 다 자기 부하라서 그럴수도 있지만 그리스 특유의 우리만 문명인이라는 사상과는 거리가 있었다.[32] 다만 아주 관련 없다고 보기는 힘든데, 남슬라브족과 북마케도니아 토착민의 혼혈 결합으로 북마케도니아인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33] 하지만 이것도 옹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전쟁하면서 잔인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한 지방을 통치하기 위하여 본보기로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것은 여느 나라나 왕이든 다 했던 짓이다. 칭기즈 칸서요를 멸망시키고 그 주민들을 학살해 해골 탑을 쌓았다는 일화나 로마 제국정복한 지역에 약탈방화를 저지르는 것은 다반사였다. 거기다 술주정은 어느 독재자이든 보통 사람이든 간에 자기 자화예찬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자제력이 있고 이성적인 사람이 술만 들이키면 태도가 180도 달라지는 사례는 어느 사람이든 다 있다. 다만 술주정이 누구나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렇다 해도 그것을 절제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못 한 것은 비판받을 만하다. 술주정이 괜히 민폐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잔인함의 경우 그가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 후회한 것 등을 볼 때 애초 알렉산드로스의 충동적 성격 탓이 더 크지 당대에 만연했기에 그도 그러했다는 식의 주장은 좀 모순이 있다.[34] 다만 셀레우코스를 비롯한 디아도코이 왕조들은 기존 문명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빠르고 적극적으로 현지인과 융화되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경우 이집트 전통의 근친혼 문화까지 받아들였을 정도인데, 그리스에선 근친혼을 매우 혐오했음을 생각하면 그리스계 신하들의 반발과 극딜을 각오하면서 상당히 파격적으로 이집트화를 추진한 것이다.[35] 인지도가 낮아서 그렇지 디아도코이 1세대 멤버들은 그 피로스랑 견주어도 안 밀린다.[36] 근데 어떻게 보면 로마의 자뻑인 내용으로도 볼 수 있는 게 아무리 로마가 강성한 나라라고 대중들에게 인식되어 있긴 했어도 그 로마조차도 공화정 설립 이후, 켈트인들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다른 나라에서도 약소국 취급받은 데다가 무엇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보도 아니고 만일 그때까지 계속 살아 있었다면 그들의 전략을 꿰뚫고 바로 약점을 찾아 파고들어 승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은 헤타이로이들과 페제타이로이뿐만 아니라 정복하면서 얻은 다양한 나라 사람들의 병사들도 함께 썼기에 기마병에 약한 로마 병사들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벌하면서 얻은 이란 지역의 궁기병과 인도에서 얻은 전투 코끼리까지 동원한다면 제아무리 로마라도 처참하게 패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그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로스가 만든 제국과의 땅크기와 경제적인 면으로 보아도 로마의 열세였다. 실제로 로마는 보병의 비중이이 매우 큰 지라 기병을 쓰는 국가에게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기록도 상당수 존재한다. 훗날, 누미디아와 동맹을 맺어 그들의 기병을 얻기도 했으나 그래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기록을 보면 알렉산드로스가 기병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면 제아무리 로마라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37] 만약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무지성으로 이탈리아의 모든 국가들에 동시에 쳐들어가고, 로마가 (바로 직전까지 싸우던) 주변 국가들을 규합해 이탈리아 동맹을 만들어 대항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저 정도로 돌대가리라면 애초에 저렇게 눈부신 군사적 성과를 이뤄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38] 가톨릭 기준으로는 정경, 개신교 기준으로는 외경이다.[39] 재미있게도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언급한 대부분의 팔라비어 기록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로마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사산 왕조의 주적은 로마 제국이었고 알렉산드로스의 민족이었던 그리스인은 로마인을 이루는 수많은 민족들 중 이탈리아의 라틴인 바로 다음으로 주요 민족이라서 그렇다.[40] 이후 로마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고 일련의 시간이 흘러 그리스인이 주로 사는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영역이 수축하면서 '로마인'이란 단어는 그리스인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동로마의 공용어는 그리스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괜히 비잔티움 역사서 번역에서 로마인을 그리스인으로 번역하는 게 아니다.[41] 전설상 이란과 적대하는 종족/나라로 사산 왕조 시기에는 사산 왕조의 동쪽 변경을 위협하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동일시된다.[42]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 판본에 그런 주장이 있고, 마케도니아 혈통이라고 쓰는 판본도 있다. 그 설에 따르면 에스칸다르는 당대 이란의 왕이던 다라의 이복형이다.[43]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세폴리스를 정말 파괴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말 부수려 했다면 도시를 산산이 박살냈을 텐데, 사료상 기원전 330년에 불을 겪고도 페르세폴리스는 한동안(최소 20년 이상) 페르시아 지방의 주요 도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궁전에서 불이 붙어 전 도시로 퍼져나갔다고 하는데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궁전을 불태운 게 실수로 도시 전체로 퍼진 것 아닌가 하는 설이 유력하다. 이것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군의 총 책임자인 이상 결과적으로 그의 책임이긴 하지만 말이다.[44] 출처:《지도에서 사라진 도시들》/ 도현신 지음 / 서해문집 / 58쪽[45] 페르시아 원정 준비 동안 부하들에게 왕실의 재산을 팍팍 나눠주어 거의 빈털털이가 되었을 때, "대왕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남겨 놓으셨습니까?"라는 페르디카스의 질문에 답하며 한 말.[46] 알렉산드로스의 유언으로, 후계자를 누구로 정할지 신하들이 물어보자 한 대답. 다만, 진실 여부는 불분명하다.[47] 출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가우가멜라 전투 직전에 병력의 열세를 감안해 야간 기습을 하자는 파르메니온 등의 제의를 거절하며. 바로 위의 두 어록들과 더불어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유명한 어록.[48] 알렉산드로스가 왕자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이에 답변한 말. 알렉산드로스의 웅대한 면을 볼 수 있는 일화.[49] 다리우스가 아시아의 절반과, 자신의 딸, 금은보화를 주는 대가로 휴전을 요청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거절하자 파르메니온이 "내가 왕이었다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라고 투덜거렸을 때 알렉산드로스가 한 말.[50]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이 출정한 모든 전쟁에서 늘 선두에 서서 싸우다가 많은 부상을 입고,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기자 측근들이 눈물을 흘리며 "세계의 제왕이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십니까?"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전쟁에서 선두에 서서 싸우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자 이에 답한 말. 알렉산드로스가 역대 전 세계의 정복자들과 가장 다른 면모 중 하나다.[51] 당시 그리스의 유명한 견유학파 철학자인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부하들과 함께 직접 그를 찾아가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디오게네스가 "있소.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라고 말하며 그를 경멸했고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권력에 굴하지 않는 그의 당당한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돌아가는 길에 부하들이 그를 모두 비웃자 여기에 반응한 알렉산드로스의 말. 위의 희망과 더불어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유명한 발언.[52] 페르시아 제국 정복 후 사치와 안락에 빠져가는 부하들을 꾸짖으며. 출처: 《알렉산더》, 프랑수아 슈아르 저, 해냄출판사, p. 329.[53] 쌍각왕이란 호칭의 쌍뿔 → 귀.[54] 문제는 그 셀레우코스를 쫓아냈더니 찾아온 것이 로마 제국이었고 결국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기에 그의 장남 티투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한 번 더 불타게 된다.[55] 색건타의 색(塞)은 변방이란 뜻이 있으므로 중국인 입장에선 '저 먼 땅의 건타'로 받아들인듯.[56]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왕자일 때,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궁정에서 친구로 자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친이 왕족을 치료하는 의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칙적으로야 신하지만, 실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아빠 친구" 정도의 위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