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 8대 파라오 소베크네페루 | 𓇳𓄤𓄤𓄤𓆊𓅆 Sobekneferu | ||
소베크네페루의 흉상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1] 그리스식 이름: Σκεμίοφρις | |
부왕 | 아메넴헤트 3세 | |
선대 | 아메넴헤트 4세 | |
후대 | 소베크호테프 1세 또는 웨가프 | |
묘지 | 북부 마즈구나(Mazghuna) 피라미드[추정] | |
배우자 | 아메넴헤트 4세[추정]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8세기 중반 재위기간 3년 10개월 24일 |
1. 개요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는 이집트 중왕국 12왕조의 제8대 파라오로, 기원전 18세기에 약 4년 정도 군림했다. 최초의 여성 파라오로 확인되는 인물이며,[4] 세베크(소베크)의 이름을 파라오의 칭호에 넣은 최초의 군주이기도 했다.2. 가족
소베크네페루는 파라오 아메넴헤트 3세의 딸로 추정된다. 그녀의 어머니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메넴헤트 3세는 두 명의 아내 아앗(Aat)과 이름 미상의 왕비를 두었으며, 두 사람 모두 다슈르의 피라미드에 매장되었다. 그는 적어도 또 다른 딸 네페루프타(Neferuptah)를 두었으며, 그녀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하와라 피라미드에 묻혔다가 자신의 피라미드로 이장되었다. 네페루프타는 자신의 이름이 카르투슈 안에 들어가는 등 왕위 계승을 염두에 두고 양육된 것으로 보인다. 하토르호테프(Hathorhotep), 누브호테페트(Nubhotepet), 시타토르(Sithathor)라는 세 공주의 매장 흔적도 다슈르에서 발견되었으나, 13왕조 기간 내내 왕실 매장지로 사용된 곳이므로 이들이 아메넴헤트 3세의 딸인지는 불확실하다.아메넴헤트 3세의 후계자인 아메넴헤트 4세는 헤테프티(Hetepti)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그녀는 ‘왕의 아내’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아메넴헤트 4세와 소베크네페루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으며, 고대 역사가 마네토는 그들이 남매였다고 하였고, 가에 캘린더(Gae Callender)는 부부였을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그러나 소베크네페루는 '왕의 아내' 또는 '왕의 자매'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녀의 즉위는 아메넴헤트 4세에게 남성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다만, 제13왕조의 초기 파라오인 소베크호테프 1세와 손베프는 이름에 '아메넴헤트'을 공유하고 있어 아메넴헤트 4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경우 소베크호테프 1세가 소베크네페루를 정통성이 없는 파라오라고 생각하고 왕위를 찬탈했을 수도 있다.
3. 여성의 왕권
소베크네페루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여왕’이 아닌 ‘여성 파라오’로 즉위한 최초의 확정된 사례이며, 여성 중 정식 파라오의 칭호를 사용한 첫 여성이다.[5] 그녀는 출생명과 즉위명 모두에서 악어신 소베크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위기 상황에서 질서 유지를 위해 왕위에 올랐지만, 이 권력은 일시적이였으며, 후계자들에 의해 그녀들의 존재가 삭제되는 경우가 많았다.[6] 이집트 사회는 전반적으로 여성에게 억압적인 구조였다.고대 이집트 역사에는 여타 여성 통치자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1왕조의 메르네이트(Merneith)는 아들의 섭정으로 간주되며, 5왕조의 세티보르(Setibhor)[7]는 그녀의 기념비가 훼손된 방식으로 보아 여성 파라오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6왕조의 니토크리스는 일반적으로 여성 통치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녀에 대한 실질적 증거는 부족하며, 이름 또한 남성 파라오 네이티케르티 시프타의 오역일 수 있다.
4. 통치
소베크네페루의 즉위 시점에는 중왕국이 쇠퇴하고 있었다. 중왕국의 전성기는 세누스레트 3세와 아메넴헤트 3세 재위 기간이었다. 세누스레트 3세는 마네토와 헤로도토스가 언급한 전설적 인물 세소스트리스의 기반이 되었으며, 누비아와 시리아-팔레스타인 원정을 이끌었고, 60m 높이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그는 아비도스에 매장되었고, 재위 기간은 39년이었다. 아메넴헤트 3세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으며, 파이윰 개발, 광산 원정, 다슈르와 하와라의 피라미드 건설 등 업적을 남겼다. 그는 최소 45년 이상 통치했다. 역사학자 니콜라스 그리말(Nicolas Grimal)은 이러한 장기 집권이 12왕조의 종말을 초래했으나, 6왕조처럼 급격한 붕괴는 없었다고 본다.[8]아메넴헤트 4세는 9~10년간 통치했으나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소베크네페루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즉위했다. 그녀는 약 4년간 통치했으나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기록이 적다. 그녀의 죽음은 12왕조의 종말을 의미하며, 이후 200년간의 제2중간기가 시작된다. 이 시기는 파라오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이 시기의 파라오들의 행적은 매우 불분명하다. 그녀의 후계자는 소베크호테프 1세 또는 웨가프로 보이며, 이들이 13왕조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퀴르크(Stephen Quirke)는 권력 있는 가문 출신의 파라오들이 단기간 교체되며 통치했다고 주장하였다. 수도는 계속 잇타위(Itj-tawy)였으며, 파라오의 권력은 행정권에만 영향을 끼칠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제13왕조 후반까지 통일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킴 라이홀트(Kim Ryholt)는 소베크네페루 치세 말에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14왕조가 성립했다고 주장하나, 토마스 슈나이더(Thomas Schneider)는 그 근거가 빈약하다고 반박하였다.
5. 고고학적 증거
5.1. 당시의 증거
5.1.1. 비문과 인장
소베크네페루의 통치를 입증하는 자료는 극히 소수이다. 누비아의 쿰마 요새에는 즉위 3년 차 나일강 범람 수위(1.83m)를 기록한 비문이 있으며, 동부 사막에서 발견된 다른 비문은 ‘출현의 계절[9] 제2월, 즉위 4년’을 언급하였다. 영국 박물관은 그녀의 이름과 왕명을 새긴 원통형 인장(EA16581)을 소장 중이며, 터키석으로 제작되었고 길이 4.42cm, 지름 1.55cm이다. 같은 박물관에는 유약을 입힌 스테아타이트[10]도 보관 중이다.5.1.2. 조각상
소베크네페루의 조각상으로는 머리가 없는 조각상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그중 석영 재질의 석상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혼합한 복장을 하고 있으며, 상반신에는 세누스레트 3세와 유사한 팬던트가 걸려 있다. 텔 엘다바에서 발견된 현무암 재질의 조각상 3점은 각각 좌상 2점, 꿇어 앉은 형태 1점이며, 하나는 ‘아홉개의 활’[11]을 짓밟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녀의 머리가 있는 조각상은 하나 존재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에서 소실되었다. 다만 사진과 석고 모형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며, 보스턴 미술관에 보관된 하반신 상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5.1.3. 건축
그녀는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12]에 구조물을 세웠으며, 하와라의 아메넴헤트 3세 피라미드에도 건축물을 추가했다. 콤 엘-아카리브(Kom el-Akârib)에서는 4개의 화강암 파피리폼[13] 형식의 기둥과 10개의 화강암 대들보가 그녀의 치세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기념비는 아메넴헤트 4세가 아닌 아메넴헤트 3세와 지속적으로 연결되며, 이는 그녀가 아메넴헤트 3세의 친딸이자 아메넴헤트 4세의 이복누이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왕의 딸' 칭호만 채택했다는 점도 이를 지지한다. 하와라 미궁의 석회암 벽돌에는 아메넴헤트 3세를 ‘좋은 신’으로 부르고 소베크네페루를 ‘셰데트[14]의 주인’으로 칭한 비문이 있다. 반면 아메넴헤트 4세의 이름은 하와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5.1.4. 불확실한 증거
이스라엘 게제르(Gezer)에서 발견된 석상 받침대에는 ‘파라오의 딸’로서의 소베크네페루의 이름이 남아 있으며, 즉위 전의 소베크네페루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왕조의 세누스레트 1세의 알려지지 않은 딸일 수도 있다는 반론도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석상(MET 65.59.1)은 그녀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확정되지 않았다. 칸티르(Qantir)에서 발견된 칠흑색 현무암 혹은 화강암으로 된 스핑크스상도 소베크네페루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석상에는 손상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5.2. 후대 기록
투트모세 시기에는 카르나크 파라오 목록에, 람세스 시기에는 사카라 석판과 토리노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아비도스 파라오 목록에서는 빠져 있으며, 이는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가 소베크네페루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는 그녀의 재위 기간을 3년 10개월 24일로 기록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 역사가인 마네토는 그녀를 '스케미오프리스(Σκεμιoφρις)'라 칭했으며, 재위 기간을 4년으로 기록하였다.6. 매장
소베크네페루의 무덤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하라게흐(Harageh)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는 세켐 소베크네페루(Sekhem Sobekneferu)라는 지명이 언급되며, 이는 그녀의 피라미드일 수 있다. 아비도스에서 발견되어 마르세유에 있는 장례 비석에는 소베크네페루의 창고 관리자인 헤비(Heby)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비석은 13왕조 시기의 것으로 그녀에 대한 장례 제사의 후대에도 지속되었음을 입증하였다.북부 마즈구나 피라미드는 그녀의 무덤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으며, 12왕조 이후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북부 마즈구나 피라미드는 기초 구조만 완공된 채 상부 구조와 사원 건설은 시작되지 않았다. 내부는 복잡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재로 된 통로와 두 개의 포트컬리스[15], 그리고 석관이 들어간 거대한 석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벽면은 붉은색으로 칠해졌으며, 검은 선이 그어져 있다. 진흙벽돌로 만든 둑길도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로 매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네페루소베크(Neferusobek)'라고도 한다. '소베크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추정] [추정] [4] 그녀보다 더 이전의 여성 파라오인 니토크리스는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다.[5] 이집트학자 카라 쿠니(Kara Cooney)는 고대 이집트가 여성에게 절대 권력을 허용한 독특한 문명이라고 하였다.[6] 고대 이집트는 당시 흐름에 엇나가는 행동을 하는 파라오에게는 가차없이 기록말살형을 처할 정도로 보수적이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아케나텐이 있다.[7] 제드카레 시기의 왕비였다.[8] 기묘하게도 6왕조도 페피 2세의 엄청난 장기 집권으로 인해 빠른 속도로 쇠퇴하였다. 단 다른 점은 12왕조는 유능한 파라오가 장기집권을 했으나 6왕조는 무능한 파라오가 장기집권을 했다는 것이다.[9] 1월 9일부터 5월 8일까지의 계절.[10]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부드럽고 밀도가 높은 미네랄로 만든 스캐럽(EA66159)[11] 고대 이집트에서 쓰던 개념. 외지인을 아홉개의 활이라고 불렀는데, 의역하자면 오랑캐 정도로 할 수 있다.[12] 상이집트의 20번째 놈(행정구역)인 나'르트 켄테트의 주도 헤넨-네수트의 로마식 이름[13] 파피루스 형태로 만든 건축물[14] 소베크 숭배의 중심지였던 장소이다. 후에는 크로코딜로폴리스로 불렸다.[15] 위아래로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