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중왕국 제11왕조 5대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 | 𓇳𓎟𓊤 Mentuhotep II | ||
멘투호테프 2세의 석상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네브헤페트레(Nebhepetre)[1] | |
부왕 | 인테프 3세 | |
선대 | 인테프 3세 | |
후대 | 멘투호테프 3세 | |
묘지 | 데이르 엘 바하리의 장제전 | |
왕비 | 템(Tem) 네페루 2세(Neferu II) 헨헤네트(Henhenet) 카위트(Kawit) 켐시트(Kemsit) 사데흐(Sadeh) | |
자녀 | 멘투호테프 3세(Mentuhotep III)♂ 마예트(Mayet)♀[추정]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060년 ~ 기원전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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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멘투호테프 2세는 제11왕조의 여섯 번째 파라오이다.2. 가족
멘투호테프 2세는 일반적으로 인테프 3세와 그의 아내 이아(Iah)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이아가 인테프 3세의 자매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인테프 2세와 인테프 3세 모두를 섬긴 관리 헤네누(Henenu)가 남긴 비석[3]을 통해 멘투호테프 2세의 호루스명이 초기에 산크이브타위로 불렸다는 점이 확인되며, 이를 통해 가계 구성이 간접적으로 뒷받침된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샤트 에르-리갈(Shatt er-Rigal)의 부조 역시 그의 혈통을 시사하는 자료로 지목되고 있다.한편, 일부 학자들은 멘투호테프 2세가 누비아 혈통이었거나 최소한 누비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그의 부조나 조각상에서 보이는 상대적으로 짙은 피부색, 누비아적 얼굴 윤곽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더불어 제11왕조 자체가 테베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고, 누비아와 교류하기 용이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기에 이러한 설이 제기된다는 분석도 있다.
멘투호테프 2세는 여러 왕비(또는 후궁)를 두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그의 장제사원인 데이르 엘 바하리 인근에 매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템(Tem)은 ‘국왕의 아내(ḥmt-nswt)‘[4], ‘왕의 사랑받는 아내(ḥmt-nswt mryt.f)’[5], ‘두 주인의 위대한 왕위 계승자(wrt-ḥts-nbwj)’[6] 등으로 불렸다. 멘투호테프 3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며, 사망 후 멘투호테프 3세에 의해 장제사원 내에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그녀를 멘투호테프 2세의 ‘주요 왕비’로 분류하기도 한다. 네페루 2세(Neferu II)는 ‘국왕의 아내(ḥmt-nswt)’, ‘왕의 사랑받는 아내(ḥmt-nswt mryt.f)’, ‘그의 몸에서 태어난 왕의 맏딸(sȝt-nswt-šmswt-nt-ẖt.f)’[7] 등으로 불렸으며, 멘투호테프 2세의 자매이자 아내였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무덤은 데이르 엘-바하리에 위치한다. 카위트(Kawit)는 ‘왕의 사랑받는 아내(ḥmt-nswt mryt.f)’, ‘왕의 장식(ẖkrt-nswt)[8]’로 불렸으며, 하토르를 섬기는 여사제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녀가 누비아 출신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1907년 에두아르 나빌레(E. Naville)가 데이르 엘 바하리 장제사원 테라스 아래에서 관을 발견하였다. 사데(Sadeh), 아샤예트(Ashayet), 헨헤넷(Henhenet), 켐싯(Kemsit)은 ‘왕의 사랑받는 아내(ḥmt-nswt mryt.f)’, ‘왕의 유일한 장식(ẖkrt-nswt-wˁtit)’[9] 등으로 불렸으며, 이들 모두 하토르를 섬기는 여사제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 장제사원 테라스 아래에 독립된 매장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헨헤넷의 경우 인테프 3세의 후궁이었다는 설도 존재하며, 출산 중 사망했을 가능성이 언급된다. 특히 아샤예트와 켐싯의 관 장식·무덤 벽화에서는 검은 피부색으로 묘사된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이들이 누비아와 관련이 깊었을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무이트(Mwyt) 멘투호테프 2세의 후궁들과 함께 매장된 약 5세 전후의 소녀로, 멘투호테프 2세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3. 통치
멘투호테프 2세는 이집트 제1중간기 이후 통일을 이루어 중왕국을 개창한 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는 그가 약 51년간 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통적으로는 인테프 3세의 아들로 보지만, 그 가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나 멘투호테프의 자칭 신의 후손을 표방했던 점으로 인해 여러 설이 존재한다.멘투호테프 2세가 테베를 기반으로 즉위했을 때, 이미 전임자들이 나일강 남쪽 일대[10]를 어느 정도 통합한 상태였다. 재위 초기 약 10여 년 동안은 큰 분쟁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가 즉위 당시 어려서 국가 운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멘투호테프 2세의 즉위 직후 호루스 이름·네브티 이름·황금 호루스 이름 등을 최소 두 번 이상 개칭한 점은, 그의 초기 통치가 정세 변화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재위 14년 무렵, 북부 지역[11]에서 전투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이집트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헤라클레오폴리스 세력이 아비도스[12] 일대를 침범·훼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대응해 멘투호테프 2세는 군대를 파견해 북진을 개시했다. 데이르 엘 바하리 인근에서 발견된 ‘전사들의 집단 무덤’[13]에는 수의에 싸인 60여 구의 군인 유해가 있다. 이들의 관이나 보자기에는 멘투호테프 2세의 카르투슈가 남아 있어, 그들이 멘투호테프 2세의 북부 원정 중 사망한 군사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통일이 완성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재위 39년경 직전에 상·하 이집트를 모두 제압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 뒤에도 이집트 내부 치안이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어서, 무기와 함께 매장된 일반인 무덤이 발견되는 등 불안정한 흔적이 남아 있다. 통일을 완수한 뒤, 멘투호테프 2세는 반신 혹은 신적 존재로 여겨졌다. 약 200년 뒤[14]의 문헌과 유물에서도 멘투호테프 2세를 신격으로 존중하는 사례가 보이며, 세누스레트 3세·아메넴헤트 3세 등 후대 왕들도 그를 기리는 의례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재위 29~31년에 걸쳐, 재상 케티(Khety)의 지휘 아래 남쪽의 누비아로 원정이 이루어졌다. 제1중간기 동안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던 이 지역을 다시 통제하기 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누비아를 가리키는 ‘쿠시(Kush)’라는 명칭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다. 멘투호테프 2세는 엘레판티네 섬에 주둔군을 배치해 남부 전역에 대한 신속 대응 체계를 구축했다. 그가 가나안 지역으로도 군을 보냈거나 최소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학설이 있으나, 구체적 전과는 불분명하다. 또한 현대 리비아·수단·차드 국경이 만나는 가발 엘 우웨이나트(Gabal El Uweinat) 부근에서 멘투호테프2세의 이름이 새겨진 명문이 발견되어, 이 지역과의 교역 혹은 군사적 진출을 시사한다.
멘투호텝 2세는 중앙 관료 체제를 재정비하고, 재상을 비롯한 핵심 요직을 새로 구성했다. 재상으로는 베비(Bebi), 다기(Dagi) 등이 언급되며, 케티(Kheti)는 국고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재무장관 메케트레(Meketre)와 보석·도장 담당 최고관리 메루(Meru)도 당시 기록에 등장한다. 군사적 업무는 장군 인테프(Intef)가 총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1중간기 동안 지방 노마치들이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으나, 멘투호테프 2세는 북부와 남부를 각각 대표하는 ‘상이집트 노마치’, ‘하이집트 노마치’ 두 직책을 신설하여, 모든 노마치들을 중앙의 명령에 복속시키는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왕실 관리들이 지방을 순회·감독해, 왕실에 반기를 들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을 억제하는 동시에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멘투호테프 2세는 다양한 신성 칭호를 내세우며 통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민이나 아문의 머리 장식을 쓴 모습으로 자신을 조각·부조에 표현하고, 하토르를 자신의 수호 여신으로 삼아 ‘하토르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강조하기도 했다.
멘투호텝 2세는 재위 중 최소 두 차례 칭호를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재위 14년 무렵에 칭호를 변경했는데, 헤라클레오폴리스 세력과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호루스 이름 등을 변경했다는 견해가 있다. 재위 39년 무렵에 칭호를 다시 한 번 변경하였는데, 이집트 완전 통일 이후에 옛 전통에 부합하는 5개의 칭호[15]를 복원하였다. 특히 말기에 ‘하토르의 아들’[16]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고왕국 시기 페피 1세의 칭호와 유사하게 태양신 라 대신 하토르의 후손을 표방한 사례로 해석된다. 후대에 만들어진 파라오 목록에서는 멘투호테프 2세의 칭호가 일부 변형되어 기록되기도 한다.
4. 건축 활동
멘투호테프 2세는 즉위 후 상이집트 지방을 중심으로 다수의 사원 건립을 지시했으나, 현재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적은 많지 않다. 이러한 건축 활동은 멘투호테프 2세의 할아버지인 인테프 2세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적 건설 사업을 계승·확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중왕국 전반에 걸쳐 이러한 지방 사원 건축 움직임이 계속되었다고 전해진다.상이집트 지역인 아비도스, 아스완, 토드(Tod), 아르만트(Armant), 게벨레인(Gebelein), 엘카브(Elkab), 카르나크, 덴데라 등지에 멘투호테프 2세가 관여한 건축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이 파괴되거나 훼손된 상태여서, 건축물의 원형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기초 구조나 비석, 부조 등이 발견되어, 중왕국 시기 사원 건축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5.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멘투호테프 2세가 테베 서안의 데이르 엘 바하리에 건립한 대규모 장제사원은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복합체의 전통을 잇는 동시에, 신왕국 시대에 보편화될 신전 양식을 예고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 사원은 약 550년 뒤에 인근에 건설된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의 장제사원 등에 직간접적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멘투호테프 2세의 사원은 단순히 파라오에게 봉헌물을 바치기만 하는 기존 형태에서 벗어나, 왕이 직접 신[* 특히 아문과 라에게 제사를 올리는 장면이 부각된다. 또한 죽은 파라오를 오시리스와 동일시되는 표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후대 파라오들의 장례 조각상과 부조에 오시리스적 요소가 더욱 강조되었다. 사원의 전체 장식은 대체로 테베 출신 장인들이 담당했는데, 커다란 입술·눈, 가느다란 신체 비율 등 지역적 특징이 뚜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왕비들의 예배당 일부 구역은 멤피스 출신 장인들이 작업한 것으로 보이며, 고왕국 시기의 세련된 조각 기법과 전통 양식이 반영되었다. 이는 제1중간기 전후로 이집트가 정치·문화적으로 분열되면서, 지역별 예술 양식도 분화된 결과로 해석된다.
해당 사원은 테베 서쪽 절벽 지대에 자리해 있다. 멘투호테프 2세 이전의 선왕이였던 인테프 2세와 인테프 3세가 인근 ‘사프 무덤(Saff tomb)’에 매장된 점을 고려하면, 이 지역은 제11왕조가 테베를 근거지로 삼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사원 위치가 카르나크와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배치여서, 매년 열리던 ‘계곡의 아름다운 축제’[17] 때 아문의 신상이 이곳까지 순회하는 점도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세기 중반까지도 멘투호테프 2세의 사원은 상당 부분 토사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59년, 로드 더퍼린(Lord Dufferin) 일행이 사원 남서쪽 구역을 발굴하다가 왕비 템(Tem)의 무덤과 석제 제단 등을 찾아내며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898년, 하워드 카터가 전정[18]에 속칭 ‘밥 엘 호산(Bab el-Hosan)’으로 불리는 매장 공간을 발견, 그곳에서 멘투호테프 2세의 흑색 좌상을 발굴했다. 1903~1907년에는 에두아르 나빌레(Édouard Naville)가 이집트 탐사 기금(Egypt Exploration Fund)의 지원으로 사원을 체계적으로 조사했고, 1920~1931년에 허버트 윈록(H. E. Winlock)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후원으로 추가 발굴을 진행했으나, 주로 예비 보고서 형태로만 결과가 공개되었다. 이후 한동안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1967~1971년에 디터 아놀드(Dieter Arnold)가 독일 고고학 연구소(DAI) 명의로 현장 연구를 실시해, 세 권의 보고서를 펴냈다.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에는 나일강과 가까운 ‘계곡 신전(Valley Temple)’과 데이르 엘 바하리 사원을 잇는 약 1.2km 길이의 접근로가 존재했다. 이는 고왕국 시대 피라미드 단지에서도 볼 수 있는 전통 양식이다. 사원 앞 넓은 뜰에는 직사각형 화단이 조성되고, 양버즘나무와 타마리스크 등의 나무를 심었다. 사막 지역에 인공 정원을 유지한 사례로는 드물며, 복잡한 관개 시스템과 정원사들의 지속적 관리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 전면에는 직사각형 기둥을 이중열로 배치한 포르티코[19]가 양옆을 이루며, 중앙부에 마련된 경사로를 통해 상부 테라스로 진입할 수 있었다. 양측에 늘어선 직사형 기둥은 ‘사프 무덤’[20]을 연상시키는 구성으로, 해당 왕조가 테베 지역 전통을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상부 테라스 안쪽에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핵심 건물이 있었다. 초기 발굴자인 나빌레는 이 구조 위에 소형 피라미드가 세워졌다고 추정했으나, 이후 디터 아놀드는 구조적 이유로 피라미드형 옥상이 어려웠을 것이라 주장하며 평평한 옥상형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내부는 회랑 형태로 둘러싸였으며, 중심부는 왕실 의례나 상징물을 보관 및 전시하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원의 뒤쪽 부분은 절벽을 파들어간 형태로, 거대한 열주실[21]과 신성구역이 있다. 이곳은 아문-라에게 봉헌된 구역이자 멘투호테프 2세의 신격화 의식이 거행된 장소로 추정된다. 후원 바닥 중심부에는 아래로 뻗는 긴 통로가 있으며, 약 150m 길이를 따라 지하에 위치한 왕릉으로 이어진다. 무덤 내부는 적색 화강암으로 마감되어 있고, 그 안에 배치되었던 사각형 석고 예배당 및 목제 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1] "라는 방향타를 잡은 자"[추정] [3] 현재 카이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카이로 36346[4] 헴트 네수트[5] 헴트 네수트 메리트 에프[6] 우레트 헤츠 네부위[7] 사트 네수트 셈수트 엔트 크트 에프[8] 헤케레트 네수트[9] 헤케레트 네수트 와아티트[10] 제1급류에서 아비도스 인근까지[11] 하이집트[12] 아비도스는 당시 역대 파라오들의 신성한 묘역으로 취급받았다.[13] MMA 507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14] 제12왕조 후반[15] 호루스명·네브티명·황금 호루스명·프레노멘·노멘[16] 사 하토르(Sa Hathor)[17] 죽은 자를 기리는 축제였다.[18] 건물 앞쪽에 개방된 공간[19] 기둥이 있는 현관[20] 사프는 아랍어로 ‘열’을 뜻하는 용어이며, 넓은 사각형에 가까운 뜰을 앞에 두고 이중 열주와 출입로가 늘어서 있는 구조가 특징이다.[21] 많은 기둥이 늘어서 있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