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스토리의 도시에 대한 내용은 고대도시 아스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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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강 한가운데 엘리판티네 섬의 모벤피크 호텔과 시가지
아스완 시장 (수크)와 필라에 신전 섬 일대 (우) |
1. 개요
아스완 (이집트) | ||
콥트어: Ⲥⲟⲩⲁⲛ (스완)
영어: Aswan
이집트 남부의 지역명이자 동명의 주도. 북위 24도에 위치하며, 전통적으로 이집트 문명의 남쪽 끝이자 이집트와 누비아 (북수단)의 경계였다. 흔히 나일 강 최대의 '아스완 하이 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구는 약 38만명이다.
이집트 남부의 주요 관광 도시 중 하나로, 더 남쪽에 있는 아부심벨로 향하는 관광객들이 주로 경유한다. 인근 하중도들도 필라에 신전이나 엘리판티네 섬의 누비아 마을 등 볼거리가 많다. 그외에 시내의 옛 채석장, 묘지 등이 있다.
2. 지리
나일강과 시가지
알렉산드리아와 하르툼 사이 암초가 유독 많고 나일강의 폭이 급격하게 좁아져 급류가 몰아치는 6개 지역(Catarats of The Nile)[1] 중 첫 번째이자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 때문에 고대 이집트 초기부터 국제무역의 중심도시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아스완을 지나는 나일 강의 폭은 약 650m이다. 아스완 ~ 알렉산드리아간 거리는 약 1200km고, 전통 배로 21일 ~ 28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3. 지명
고대 이집트어로는 스웨넷(Swenett)[2]이라 불렀으며 뜻은 무역, 시장이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시에네 (Συήνη)로, 고전 히브리어로는 세웨네 (סְוֵנֵה)로 불렸다.콥트어로는 스완 (Ⲥⲟⲩⲁⲛ)으로 불리며, 누비아인들은 성채나 궁전이란 뜻인 '디브'라 부른다. 현대 아랍어로는 물론 아스완 (أسوان)이다.
문화적으로는 고대 이집트와 누비아의 경계선에 있으며 아스완 밑으로는 문화적, 혈통상으로 이집트와 누비아의 문화가 시대에 따라 혼재되는 양상을 보인다.
4. 역사
시가지 남부 하트셉수트의 미완성 오벨리스크 (좌)와 쿱베텔 하와 (바람의 돔)의 귀족 무덤군 (우) |
엘리판티네 섬의 이집트 신왕국 시절 사테트 신전
스웨넷은 나일 강의 제1 폭포 북쪽의 첫 도시로써 하류까지 전 구간 항해가 가능했기에 상고대부터 '이집트의 첫 도시'로 여겨졌다. 현지의 화강암 암반은 여러 신전, 석상, 피라미드 등 거대한 구조물의 건설에 필수적이었기에 이집트 고왕국 시절부터 채석장 및 암석을 운반하기 위한 인력이 자주 왕래했다. 당시의 채석 흔적은 지금도 강 양안에 남아있다. 동시에 누비아와의 국경 도시로써 군사적 거점이었기에 모든 시기에 수비대가 배치되었고, 이곳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에 관세를 거두기 위한 세관도 있어 상인들이 경유하는 교역 도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 도시는 시에네로 불렸고, 기원전 240년경 에라토스테네스가 하짓날 시에네의 우물에 햇빛이 직선으로 들어갈 때에 알렉산드리아의 기둥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점을 응용하여 기록상 최초로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기도 했다.
헤로도토스, 스트라본, 프톨레마이오스, 플리니우스, 비트루비우스 등의 역사가 및 지리가들이 언급할 정도로 시에네는 중요한 도시였다. 성경의 에제키엘서, 이사야서에서도 언급되었다. 로마 제국기에도 시에네에는 군단이 주둔했다. 기원전 26년 로마의 예멘 원정이 실패한 틈에 기원전 23년 누비아 여왕 칸다케 아마니레나스가 도시를 공격했으나 이집트 총독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가 지원군과 함께 반격에 나서 누비아 수도 나파타를 함락한 후 양측은 더이상 싸우지 않았다. 3-4세기 들어 일대는 점차 기독교화 되었고, 5세기 무렵 현지 신전들은 모두 성당으로 전환되었다. 콥트 정교회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임명한 주교가 부임한 시에네 주교구는 콤옴보도 관장한다. 640년, 이슬람 정복 당시 총대주교 키로스의 명에 따라 항복하며 시에네를 비롯한 상이집트는 별 전투 없이 이슬람 제국에 복속하였다.
4.1. 중세
이슬람 시기 도시는 콥트어 지명 스완의 아랍어 발음인 아스완으로 불리게 되었다. 642년, 652년 이슬람 군대의 동골라 원정 당시 후방 보급 기지였던 아스완은 이후 바크트 평화 조약의 체결 후 다시 이집트와 수단 간의 교역창이 되어 안정을 누리고 번영했다.4.1.1. 바누 알 칸즈 후국
파티마 시기 묘지
9세기 무렵, 금과 에메랄드 광산의 발견 후 바누 하니파 등 아랍계 부족들이 대거 누비아 지역에 정착했다. 그중에는 855년 아스완에 정착한 메디나 출신의 학자 압둘라 이븐 압둘하미드 알 우마리도 있었다. 그는 점차 무다르 부족의 셰이크가 되었고, 라비아 부족에 의해 아스완에서 축출된 후에는 더욱 남하하여 마쿠리아 (알 마쿠라) 동쪽에 정착했다. 다만 마쿠리아에게 다시 축출된 후 무다르-카이스-라비아 부족들의 연합 부족장이 된 압둘라는 동부 사막에 거대한 금광을 인수하며 툴룬 왕조로부터 자립하였다. 그는 아흐마드 빈 툴룬이 보낸 두 차례의 토벌군을 모두 격퇴하며 사실상 독립을 인정받았고, 라비아 부족의 반란도 진압했으나 결국 무다르 부족원에게 암살되었다. 다만 압둘라의 사후에도 부족들은 계속 자치를 유지했고, 그중 라비아 부족이 제일 강해졌다.
10세기 무렵, 라비아 부족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쟈족린 하다리바 부족과 연대하여 나일강 ~ 홍해 일대를 통치했다. 두 부족은 통혼하며 광산 및 무역을 독점했는데, 본래 베쟈족은 모계 사회였기에 라비아 부족장의 아들과 베쟈족 공주가 결혼하여 탄생한 자녀들은 일대의 모든 권리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943년, 그렇게 태어난 이샤크 빈 비슈르는 외삼촌 압다크와 카우크로부터 권력을 세습하며 두 부족을 통합했다. 이샤크의 암살 후 그를 계승한 사촌 아부 야지드는 아스완을 수도로 삼고 파티마 왕조에 복속하며 카이로의 칼리파를 '아스완의 보호자'로 칭하였다. 10세기 말엽, 아스완은 3개의 마드라사가 세워지는 등 번영했다.
1006년, 아부 야지드의 아들이자 후계자 아불 마카림 히바툴라는 반군 구장 아브 라크와를 사러잡은 공로로 칼리파 알 하킴에게서 칸즈 앗 다울라 (국가의 보물) 칭호를 받았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이 칭호를 세습했고, 라비아-하다리바 부족 연맹체는 바누 알 칸즈 (혹은 바누 칸즈)로 불리게 되었다. 바누 칸즈는 아스완 ~ 아이다브, 이집트 ~ 누비아간 무역로를 장악해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칸즈 앗 다울라들은 비록 서류상 쿠스 총독 하에 있긴 했지만 칼리파로부터 누비아와의 외교, 변경지의 징세, 와디 알라키 광산들과 여행자 및 카라반 (대상 행렬)의 보호를 위임받았다. 한편 국경 너머 누비아 측에도 라비아-하다리바 부족 연맹이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알 하킴은 또한 나일 강의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괴학자 이븐 알하이삼에게 아스완 부근에 댐을 설계하게 했는데, 실현되지는 않았다.
1168년, 살라흐 앗 딘 유수프가 실질적으로 파티마 조를 멸망시키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카이로에서 축출된 누비아 (수단) 부대가 남하해오자 바누 칸즈는 그들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그러던 1171년, 살라딘이 기어코 칼리파를 폐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자 칸즈 앗 다울라는 새 정권에 충성을 서약하여 아스완 총독 자리를 보전받았다. 하지만 1172년, 흑인 부대가 상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켜 아스완을 습격하자 칸즈 앗 다울라는 살라딘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살라딘의 동생 샴스 앗 딘 투란샤를 파견했다. 비록 원군이 당도할 무렵 아스완에 대한 포위는 풀린 상태였자만, 투란 샤는 바누 칸즈와 반군을 상이집트에서 몰아낸 후로도 남하하여 1차 폭포 남쪽의 이브림을 점령했다.
(반란을 지원하던) 마쿠리아 왕의 휴전 요구에도 누비아 전역을 정복하려 했던 투란 샤는 동골라를 다녀온 사절이 그곳이 가난하여 얻을 것도 없다는 보고를 올린 후에야 많은 누비아인 및 기독교도 포로와 함께 철수했다. 한편 아이유브 조는 기존의 아랍 / 흑인 대신 튀르크 / 쿠르드 군대를 주축으로 삼아 우대했고, 상이집트의 부족들은 자신들의 이크타 (영지) 및 특권들을 뺏길까 우려했다. 그러다 살라딘이 바누 칸즈의 이크타를 아이유브 가문 출신 아미르 아불 하이자 앗 사민의 동생에게 줘버리자 분노한 칸즈 앗 다울라 이븐 알 무타와즈는 그와 일행 전부를 죽이고 파티마 왕조 복원을 천명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븐 알 무타와즈는 비슷한 처지인 일대의 부족들 및 흑인 부대를 규합했고, 중부 이집트의 아랍 부족 연맹장 압바스 빈 샤디가 호응하였다.
하지만 양측이 합세하기 전에 급파된 아불 하이자 휘하의 아이유브 군대가 우선 압바스를 격파하고 그를 전사시켰다. 뒤이어 이븐 무타와즈 역시 아스완 근처에서 패배한 후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이후 바누 칸즈는 국경 지대에서 추방되었고, 전통적인 수호자가 사라진 아스완은 광산 수입의 급감 및 교통의 불안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한편 바누 칸즈는 아이유브 조의 원정으로 약해진 누비아의 마리스를 장악해 새 중심지로 삼았고, 점차 누비아 문화와 언어에 동화되었다. 또한 바누 칸즈의 존재는 누비아 지방에서의 아랍어 및 이슬람 보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은 약 한세기 후, 이집트의 정권이 맘루크 왕조로 바뀐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4.1.2. 맘루크-누비아 전쟁
한편 맘루크 조는 1265년부터 마쿠리아와 전쟁을 벌였고, 1272년 마쿠리아 국왕 다비드는 홍해 연안 항구인 아이다브를 공격해 파괴했다. 1275년 그는 아스완을 공격해 파괴했고, 이듬해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가 반격에 나서 동골라를 약탈한 후 마쿠리아를 속국으로 삼았다. 다만 이후 마쿠리아가 독립을 회복하자, 1317년 맘루크 군이 재침하여 무슬림 왕족 사이프 앗 딘 압둘라 바르샨부를 옹립하려 했다. 이에 기존의 기독교도 국왕 카르나바스는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칸즈 앗 다울라를 대신 무슬림 군주로 새워줄 것을 청했으나[3], 후자는 카이로에 당도하자마자 맘루크 당국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바르샨부가 왕이 되어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했으나, 곧 풀려난 칸즈 앗 다울라가 찬탈했다. 그러자 맘루크 조는 두 차례 토벌을 시도했으나[4] 둘다 실패했다.그후 바누 칸즈는 아랍계 바누 이크리마와 함께 누비아와 동부 사막을 지배했다. 1365년 맘루크 군의 동골라 점령 후 그해 12월, 칸즈 앗 다울라는 다른 바누 칸즈 족장들과 함께 맘루크령 쿠스 총독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1366년 바누 칸즈는 아스완을 공격했고, 1370년에 재차 공격하여 도시를 불살랐다. 이에 맘루크 조는 아스완 주군군을 대폭 늘렸고, 1378년 아스완 총독 이븐 하산은 바누 칸즈를 격파했다. 이로써 크게 약화된 바누 칸즈는 14세기 후반, 맘루크 술탄 바르쿠크가 상이집트로 이주시킨 베르베르계 하와라 부족에게 밀려나 일대의 주도권을 잃었다. 현재 카누즈로 불리는 그들의 후예들은 수단 북부에 살고 있다.
4.2. 근현대
아스완 하이댐 건설 현장을 방문한 나세르
1837년 메흐메드 알리는 아스완에 이집트의 첫 군사학교를 세웠다. 19세기 후반, 아스완은 이집트의 수단 정복의 거점으로써 중시되었다. 1899년, 영국 당국은 기존의 1차 폭포에 아스완 댐을 건설하여 1902년에 완공했다. 완공식에는 영국의 아서 왕자 등이 참가했고, 이집트 독립 후인 1960년에는 수력발전소로 개조되었다. 1960 ~ 1970년에는 소련의 자금 지원 하에 가말 압델 나세르의 숙원 사업이던 아스완 하이댐 건설이 이루어져 비로소 이집트는 나일 강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더 하류에 있는 기존의 댐은 아스완 로우댐이라 불리게 되었다.
5. 관광
엘리판티네 섬 등의 누비아 마을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은 아부심벨 대신전[5]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들르고 있다.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이시스의 신전이 있었던 종교적 성지로 유명했던 필라에 섬과 수많은 유명 오벨리스크들과 피라미드 석재가 이곳에서 채석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채석장이 있다. 필라에 섬에 있었던 이시스 신전은 아스완 하이 댐 건설 당시 분할되어 이기르카 섬으로 옮겨졌으며, 채석장 북쪽 구역에는 하트셉수트시기에 만들다가 미완성으로 남겨진 오벨리스크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아스완 시장 풍경. 다채로운 색감의 향신료와 옷감을 판다.
쿱베텔 하와, 즉 바람의 돔. 이곳의 귀족 무덤군 중에는 고대 이집트 제6왕조 시기의 재상 하르쿠프의 무덤이 잘 남아있다. 내부의 벽화까지 볼 수 있다.
이 곳에는 20세기 초반 나일 강 본류에 영국이 지어놓은 '아스완 댐'이 있었다. 이후 1950년대 들어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공화국 대통령이 나일 강 수자원 개발을 위해 이보다 약간 상류에 훨씬 큰 '#아스완 하이 댐' 건설에 착수한다. 즉 아스완 하이 댐의 '하이(high)'는 지명이 아니라 더 높다는 뜻이다. 한국어로 치면 "대 아스완 댐" 정도의 의미. 현재는 아스완 댐이라고 하면 이 하이 댐을 의미하고, 구 댐은 '아스완 로우(low) 댐'이라고 부른다.
구글 어스로 본 아스완 댐. 링크 누르면 바로 나오는 댐과 인공 호수가 아스완 로우 댐이고,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보이는 훨씬 커다랗게 지어진 댐이 아스완 하이 댐이다.
이 댐의 건설로 아부심벨 대신전 등 수많은 유적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유네스코 주도로 세계 각국이 협력하여 이 신전들을 해체 후 고지대로 옮겨 재조립했다. 일부 소규모 신전들은 수몰을 피할 수 없어 미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들의 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개중 제일 유명한 곳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덴두르 신전이다. 이집트 정부 입장에서는 문화재 유적 보존을 도와준 선진국에게 겸사겸사 생색을 낸 셈이 되었는데, 그대로 놔두었다면 예산 부족으로 나일강 아래 수몰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5.1. 엘리판티네 섬
섬 전반 풍경
옛 묘지 일대
무너진 피라미드
옛 성벽
섬에서 바라본 시가지
시가지 바로 옆의 하중도로, 현지인들은 게지레 아스완 (아스완 섬)이라 부른다. 고대 이집트 시기에 코끼리를 뜻하는 제브 혹은 예브라 불렀는데 섬 모양이 코끼리 형상이기 때문이다.고층의 모벤픽 호텔로 시내에서 봐도 두드러지는 남북으로 긴 섬이다.
섬 남부에는 누비아 마을과 아스완 박물관이 있고, 그외에 사테트 신전과 피라미드 등 여러 유적들이 있다. 그럼에도 시가지와 연결된 다리는 없고, 배를 통해 왕래한다. 한편 무너진 상태의 피라미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사진 피라미드일 가능성이 있어 연구 중이라고 한다.
5.2. 필라에 섬
필라에 섬에 있던 필라에 신전은 고대 이집트 신전 중에서 마지막까지 명맥을 유지한 신전이다.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원후 390년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391년 이교 신전 철폐령을 선포한 이후에도 6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때 폐쇄됐다.
6. 교통
트랜스 아프리카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며, 홍해로 가는 도로가 있다. 6천년 역사의 나일강 수상 교통 역시 활발하다.철도는 카이로까지 연결되고 있으며, 아스완 국제공항은 서남쪽의 아스완 하이댐 인근에 위치한다.
7. 기타
이집트 전통 배 펠루카 선 |
작은 배인 펠루카를 이용한 나일 강 유람도 가능하다. 겨울철의 추위를 피하기 위한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이 곳에 수단 영사관이 있기 때문에 와디 할파로 넘어가기 전 수단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여행객들이 주로 들르기도 한다.
시내의 성 미카엘 성당 |
기독교도가 많은 편인 상이집트의 도시답게 인구의 10% 정도는 콥트교도이다. 누비아인들은 중세까지 대부분 기독교도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천문 관측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이 곳 아스완에서는 알렉산드리아와는 달리 정오에 그림자가 사라지고 우물 밑바닥까지 햇빛이 비친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를 응용하여[6] 지구의 둘레를 계산했는데, 당시 계산으로 지구 둘레는 약 39,600km가 나왔다. 실제 지구의 적도 둘레가 약 40,000km이고 자전의 영향으로 지구 적도 부분이 남북에 비해 약간 부풀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오늘날처럼 인공위성의 측정 없이 수학적 계산만으로 대단히 정확한 값을 도출한 것이다.
아스완에서 하지에 태양 그림자가 사라지는 이유는, 실제로 북회귀선 부근에 있는 도시라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남중하기 때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나일강의 죽음을 집필한 Old Cataract Hotel이 있다.
8. 둘러보기
상이집트의 주요 도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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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전상으로는 폭포 (شلال)라고 하지만 나일강에서는 급류지대를 의미한다. 고대 기술로는 이 구역들을 선박편으로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방 무역지대에서 물품을 하역하여 중간교역을 하였다.[2]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지역에 동명의 지역으로 구현되어 있다.[3] 이는 바누 칸즈가 누비아 문화에 친숙해 현지 기독교도들에게 더 관용적일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4] 마지막은 1324년[5] 아스완 다음의 나일강 제2 급류지대가 이 근처에 있었다. 아부심벨 대신전이 원래 위치했던 지대를 비롯한 근처 고대교역 도시들은 아스완 하이 댐의 공사로 인해 수몰.[6] 알렉산드리아에서 정오 시점에 막대기의 그림자 길이와 막대기 길이로 삼각법을 사용하여 공식을 만들고 알렉산드리아-아스완 간 거리를 비례식에 적용하면 지구 전체 크기가 나온다. 구의 반지름은 호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에라토스테네스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