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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Period of Egypt | |||||
제2중간기 이집트의 세력 구도[1] | |||||
기원전 1802 / 1650년 ~ 기원전 1550년 | |||||
위치 | 이집트 | ||||
수도 | 아바리스[2] 테베[3]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제정일치 | ||||
국가 원수 | 파라오 | ||||
주요 파라오 | 살리티스[4] 네비리라우 1세[5] 세케넨레 타오[6] | ||||
언어 | 고대 이집트어 | ||||
종교 | 고대 이집트 종교 | ||||
주요 사건 | 기원전 1802년 이집트 제13왕조 시작 기원전 1725년 이집트 제14왕조 시작 기원전 1650년 힉소스인들의 침략 기원전 1650년 이집트 제15왕조 시작 기원전 1649년 이집트 제16왕조 시작 기원전 1580년 이집트 제17왕조 시작 기원전 1550년 이집트 재통일 | ||||
성립 이전 | 이집트 중왕국 | ||||
종결 이후 | 이집트 신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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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650년부터 기원전 1550년까지 지속된 고대 이집트의 시대 구분. 제13왕조부터 제17왕조까지가 제2중간기에 해당한다.[7]무려 400여 년 동안 번영을 누렸던 이집트 중왕국은 제12왕조 이후 점차 무너져 내렸다. 제13왕조가 새롭게 들어섰으나 국력은 제12왕조 시절과 비할 따위가 아니었고, 기근과 가뭄이 연달아 들면서 나라는 점점 약해졌다. 한편 국가의 방어력이 쇠락해지자 시나이 반도의 셈족들이 쳐들어와 제13왕조를 남쪽으로 쫒아내고 제14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셈족과 이집트 원주민들이 잡다하게 섞인 제14왕조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고, 결국 제14왕조는 건국된 지 75년쯤 되었을 때, 전차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힉소스인들이 침략해 들어오면서 멸망했다. 한편 풍요로운 이집트의 나일 강 삼각주를 정복한 힉소스인들은 그대로 눌러앉아 파라오를 자칭하며 제15왕조를 세웠다. 제15왕조는 여세를 몰아 남쪽에 잔존하고 있었던 제13왕조의 잔재마저 끝장냈다. 그러나 힉소스인들은 본진인 서아시아 지방으로부터 멀리까지 진출할 생각은 없었기에 테베를 포함한 상이집트 일대를 약탈만 하고 다시 돌아갔다.
힉소스인들이 약탈을 마치고 돌아간 이후 테베에서 이집트 토착 원주민들이 세운 제16왕조가 발흥했다. 그러나 제16왕조는 북쪽으로는 힉소스인, 남쪽으로는 누비아의 쿠시 왕국으로부터 끝없는 공격을 받으며 위태위태하다 결국 수도 테베가 힉소스인들의 제15왕조에 의해 함락되어 67년 만에 멸망했다. 제16왕조의 잔해 위에 역시 이집트인들이 세운 정통 왕조인 제17왕조가 세워졌고, 제17왕조는 건국 초기에는 당연히 북쪽의 제15왕조에 비하여 국력이 매우 약소했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힘을 키워나가며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 재위기에는 거의 제15왕조와 맞먹을 정도로 국력이 강해졌다. 결국 힉소스인들의 시비로 인해 남북간의 전쟁이 터졌고,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는 북쪽으로의 수복 전쟁을 벌여 나일 강 삼각주 일대를 되찾으려고 했으나 전쟁 도중 전사했다. 세케넨레 타오 사후 왕위는 카모세를 거쳐 마침내 아흐모세 1세에게 넘어갔다. 아흐모세 1세는 10년 동안 힘을 기른 다음 힉소스인들에게 총공격을 퍼부었고, 결국 기원전 1550년경에 제15왕조를 멸망시키고 다시 이집트를 통일, 신왕국을 세우면서 100년간 지속된 제2중간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2. 역사
2.1. 제13, 14왕조
일반적인 경우, 국력이 이전에 비하여 확연히 줄어든 제13왕조부터를 제2중간기로 치지만, 힉소스인들이 기원전 1650년경에 침략해 들어오기 이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통일 왕국을 유지한 채로 상당한 세력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일부 학자들은 제13왕조와 제14왕조까지 중왕국 시기에 함께 넣기도 한다. 그러나 제13왕조 시대에 재위한 파라오들의 명단이 워낙 뒤죽박죽인지라 제대로 알려진 것도 없고, 혼란 통에 대부분의 관련 유물들이 유실되었기에 보통은 제13왕조도 혼란스러운 시대로 보는 편이다. 제13왕조의 초대 파라오인 소베크호테프 1세 사후 60명에 가까운[8] 수없이 많은 파라오들이 왕좌를 거쳐갔으나 이들 중 제대로 된 유산을 남긴 이 하나 없었으며 재위 기간 역시 대단히 짧았다. 그나마도 제32대 파라오인 메르네페르레 아이[9] 이후부터는 이집트 전역을 통치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0] 호전적인 가나안 일대의 전투 민족들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제13왕조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나일 강 삼각주 일대를 정복했는데, 이 셈족 계통의 민족들은 제14왕조를 세워 남쪽의 제13왕조와 끊임없이 다투었다.메르네페르레 아이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13왕조는 가나안 민족에 의하여 나일 강 상류 일대로 밀려나 수도를 테베로 천도했다. 하지만 남쪽으로 쫒겨간 제13왕조는 그곳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꾸준하게 쇠퇴했다. 기록에 남은 제13왕조 마지막 파라오인 세헤켄레 산크프타히 이후에도 몇몇의 파라오가 추가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제13왕조를 몰아내고 하류 쪽에 세워진 제14왕조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일 강 하류를 정복, 이집트화된 셈족들이 세운 제14왕조였지만 왕실 내부는 대단히 혼란스러웠으며 토착 이집트인들과 침략해 들어온 셈족들과의 조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제14왕조는 7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디짧은 존속 기간 중 무려 70여 명에 달하는[11] 파라오들이 즉위하는 등 파라오들의 평균 재위 기간이 1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엄청난 혼란기를 겪은 왕조였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기원전 1650년에 전차라는 신무기를 가진 힉소스인[12]들이 침략해 제14왕조를 끝장내면서 본격적인 제2중간기가 시작되었다.[13]
2.2. 힉소스 침공(제15, 16왕조)
<힉소스인들의 침략>[14] | 힉소스인을 묘사한 그림 |
2.3. 제17왕조의 중흥
제16왕조의 수도였던 테베는 기원전 1582년경에 힉소스인들의 대공세로 인해 무너져내렸다. 힉소스 군대가 테베의 왕궁과 신전을 약탈하고 떠난 이후, 테베의 유력 귀족 출신인 라호테프를 중심으로 기원전 1580년 새로운 토착 이집트계 왕조가 등장하니 이가 바로 제17왕조였다. 라호테프는 테베를 기반으로 하여 상이집트 일대 수복에 힘을 기울였고, 아비도스나 키프트 지방의 신전들을 복구하는 등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는 등 민심을 다독였다. 라호테프 사후 네브마아트레, 소베켐사프 1세, 소베켐사프 2세, 인테프 5세 등이 연달아 왕위에 올라 상이집트 일대에 자리를 틀고, 북쪽의 힉소스인들이 세운 제15왕조와 끊임없는 대립을 지속했다. 특히 인테프 5세의 경우, 힉소스인들이 파괴한 상이집트의 수많은 신전들을 복원한 것으로 유명하며, 거대한 기념비 건립과 신관들의 지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인테프 5세의 뒤를 이은 인테프 6세, 인테프 7세, 세나크텐레 아모세의 짧은 통치 이후 세케넨레 타오가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했다. 오랜 준비 끝에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한 제17왕조는 세케넨레 타오 시절부터 힉소스인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북벌에 돌입했다.당시 이집트의 판세는 북쪽의 비옥한 나일 강 삼각주를 독차지한 힉소스인들이 세운 제15왕조, 그리고 남쪽의 테베를 수도로 한 이집트 토착 왕조인 제17왕조가 대립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다만 제17왕조의 힘은 아직까지 힉소스인들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제17왕조가 살짝 힉소스인들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같은 판도도 제17왕조의 힘이 차차 강력해지면서 바뀌게 되는데, 제15왕조의 왕 아페피가 테베에 있는 연못에 있는 하마들이 시끄러우니까 죽이라는 이유로 시비를 걸자[17] 발끈한 세케넨레 타오는 힉소스인들을 상대로 하는 통일전쟁을 일으켰다.[18] 그러나 세케넨레 타오는 전쟁 도중 전사했고,[19] 그의 뒤를 이어 카모세가 즉위했다. 카모세는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벌을 재개했다. 카모세는 나일 강을 따라 힉소스인들을 물리쳐나갔으나 원인 불명의 이유로 재위 3년 만에 사망했다. 카모세가 사망하자 동생 아흐모세 1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아흐모세 1세는 10년 동안 힘을 모아 결국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제15왕조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흐모세 1세가 전 이집트를 다시 통합한 것을 기점으로 오랜 세월 지속된 제2중간기가 끝나고 고대 이집트 최고의 전성기라 불리는 신왕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제2중간기는 힉소스인들에게 정복당해 상당히 피폐한 시절을 보냈던 시기이지만 동시에 아시아에서 수레, 청동기[20] 등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온 개방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3. 관련글
[1] 북쪽 나일 강 삼각주 지대의 넓은 노란색 영토는 이집트를 침입한 힉소스인들이 세운 제15왕조. 이집트 원주민들이 세운 나일 강 상류쪽의 제16왕조는 조그만 주황색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제16왕조의 뒤를 잇고 결국 이집트를 재통일하는 제17왕조 역시 초기에 강역의 크기는 비슷했다. 아래쪽에 있는 커다란 갈색 세력은 누비아의 쿠시 왕국. 힉소스인들이 쳐들어온 틈을 타 사사건건 이집트를 약탈했다.[2] 힉소스인들의 왕조인 제15왕조의 수도.[3] 제16왕조와 제17왕조의 수도.[4] 제15왕조의 건국자이자 힉소스인들의 왕. 하이집트 일대 정복 이후 파라오를 자칭했기에 일반적으로 파라오로 분류한다.[5] 제16왕조의 파라오. 제15왕조에 맞서 싸우고 왕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애썼으나 큰 결실을 보지 못한 채로 죽었다.[6] 제17왕조의 파라오. 본격적으로 힘을 길러 제15왕조를 상대로 수복 전쟁을 시작했다.[7] 제13왕조는 중왕국 시대와 제2중간기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다만 제13왕조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통일 이집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일부 학계에서는 제13왕조와 더 나아가 제14왕조까지 중왕국 시대로 분류하기도 한다.[8] 손베프, 네리카레, 세켐카레, 아메니 케마우, 호테피브레, 이푸니, 아메넴헤트 6세, 세멘카레 네브누니, 세헤테피브레, 세와지카레, 네제미브레, 소베크호테프 2세, 렌세네브, 호르, 세켐레쿠타위 카바우, 제드케페레우, 세브카이, 세제파카레, 웨가프, 켄제르, 이미레메샤우, 세헤테프카레 인테프, 세트 메리브레, 소베크호테프 3세, 네페르호테프 1세, 시하토르, 소베크호테프 4세, 메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와히브레 이비아우, 메르네페르레 아이, 이니 1세, 상켄레 세와지투, 메르세켐레 이네드, 세와지카레 호리, 소베크호테프 7세, 이니 2세, 세와헨레 세네브미우, 메르케페레, 메르카레, 세와자레 멘투호테프, 세헤켄레 산크프타히 순이다. 물론 중간에 명단에서 누락된 파라오들도 존재한다.[9] 23년 간 왕좌를 지켰기에, 제13왕조를 통틀어 최장기로 집권한 파라오였다. 그러나 그 역시 쇠퇴의 흐름을 피해가지는 못했고, 그에게 들어오는 공물과 세입은 옛 시절에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다.[10] 메르네페르레 아이 이후부터의 제13왕조의 파라오들의 기록은 오직 남부 상이집트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고, 북부 하이집트에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11] 야크빔 세카엔레, 야아무 누부세르레, 카레흐, 아아호테프레, 셰시, 네헤시, 카케레우레, 네베파우레, 세헤브레, 메르제파레, 세와지카레 3세, 네브제파레, 웨벤레, 네브센레, 셰케페렌레, 제드케레우레, 베브눔, 아페피, 누야, 와자드, 셰네흐, 셴셰크, 카무레, 야카레브, 야쿠브-하르 등의 파라오들이 이름이나마 남아있다.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파라오들도 많다.[12]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터키 등지에 속하는 지역에 살았던 다수의 유목민 집단으로 추정되며, 이집트인들과는 예전부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성경》의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에 근거하여 이들을 유태인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으나, 현대에 히브리인들의 기원은 셈족 민족들로 거의 확정이 났고 이집트에서 탈출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난 상태이기에 증거는 없어서 기각된 학설이다. 참고로 '힉소스'의 어원은 '외국 땅의 왕자(외지인)들'이라는 뜻의 히카우 카슈트(Hikaw khasut)였는데, 이집트 사학자 마네토의 오류로 '양치기(목자, 유목민)의 우두머리'로 오역되면서 유목민으로서의 힉소스 민족이란 개념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니 힉소스 민족이란 곧 셈족이다.[13] 학자들 중에는 이때부터를 제2중간기의 시작이라 보는 견해도 있고, 아니면 아예 중왕국의 전성기가 끝난 제13왕조부터를 제2중간기의 시작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14] 19세기 헤르만 보겔이 그린 상상화.[15] 힉소스인은 파라오를 자칭했다. 그래서 힉소스인들의 왕조도 100여 년 정도 존속한 제15왕조로 인정된다.[16] 참고로 제16왕조의 15명에 달하는 파라오들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힉소스인들의 봉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다른 학자는 독립적인 왕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17] 당연히 아페피는 북쪽 저멀리 아바리스에 있었으니 테베에 있는 하마들의 소리 따위가 들릴 리가 없었다. 제17왕조에 대한 우위를 확인하기 위한 단순한 시비로 보는 것이 맞다.[18] 참고로 위의 내용은 당시의 고대 기록인 《아페피와 세케넨레의 논쟁》을 출처로 한다.[19] 세케넨레 타오는 정말 파라오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학자들은 그의 시체를 부검한 결과 최소한 2~3명의 힉소스인 장정들이 도끼나 칼 등으로 그를 내려쳐 죽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미라는 턱뼈와 이빨이 모조리 부서졌고 두개골에 끔찍한 금이 가있는 등 보기 힘들 정도의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집트 박물관에 보관된 여러 미라들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지 않으며, 때문에 이 미라를 전시할 때 워낙에 악취가 풍겨 관람객들이 차마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세케넨레 타오의 미라는 영화 <미이라 시리즈>에 등장하는 괴물 이모텝의 외형적 모델이기도 하다.[20] 청동기 부분에서 "그럼 청동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집트인들은 무슨 도구를 들고 싸웠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집트의 경우 순동기 사용기간이 상당히 길다. 이집트에서 구리를 가공해 무기나 도구를 만든 흔적은 선왕조시대 유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청동가공법은 몰랐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집트 내에서는 주석이 나질 않기 때문에 전량을 무역에 의존해야 했다. 헌데 힉소스족 침입 이전까지 이집트의 교역범위는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일대 정도로 극히 제한적이었고, 이 지방들도 크게 다르진 않은 상황이라 후대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영국에까지 가서 주석을 가져오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