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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치 | [[이집트| ]][[틀:국기| ]][[틀:국기| ]] 아스완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88 | ||
등재연도 | 1979년 | ||
등재기준 | (ⅰ)[1], (ⅲ)[2], (ⅵ)[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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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갈 때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작은 배에 올라탄 채로 섬을 올려다보면 야자수와 주랑, 탑문이 세워진 섬이 마치 신기루처럼 강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보인다. 양 편에 돌더미들이 쌓였고 멀리서 보랏빛 산이 반짝인다. 배가 섬에 가까워지자 조각된 탑이 하늘을 향해 점점 더 높이 솟구치는 듯하다. 어디에서도 쇠락이나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견고하고 위엄 넘치며 완벽하다. 그 모습을 보며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순간 잊어버리리라. 그 고요한 공기 속 고풍스러운 성가(聖歌)가 울려퍼진다면, 흰 옷을 차려입은 신관들의 행렬이 베일을 드리운 신궤를 등에 진 채로 종려나무와 탑문 사이로 지나간다해도 전혀 놀랍지 않으리라.
A thousand miles up the Nile, 아멜리아 에드워즈.[4]
A thousand miles up the Nile, 아멜리아 에드워즈.[4]
아스완에 소재한 고대 이집트의 신전. 기원후 6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한 최후의 이집트 신전이었다.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 댐을 착공하며 섬 자체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 차원에서 신전을 분해해 통째로 옮겼다.[5] 현재는 아스완의 대표적인 관광지들 중 하나다.
2. 역사
고대 이집트 당시의 복원도. |
필라에 신전이 위치한 섬은 오시리스의 무덤들 중 하나로 알려진 장소다. 세트가 오시리스의 시신들을 여러 토막으로 조각내어 뿌릴 때 그중 한 조각이 필라에 섬에 떨어졌다고 믿었기에 엄청나게 오래 전부터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이미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수많은 순례객들이 이 곳을 참배하려 몰려들었고, 신관을 제외하면 이 곳에 거주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손꼽히는 성지였던 셈이다. 하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자 신관들이 파라오에게 탄원을 넣어 최소한 공직자들만큼은 이 곳에서 숙식하지 말게 명령해달라고 간청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필라에 섬은 단순한 성소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과 누비아인들이 만나서 교역품을 사고파는 무역 중심지들 중 하나였고,[6] 덕분에 필라에 섬은 고대 이집트 시절 참배객들과 장사꾼 등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필라에 섬에 세워진 첫 번째 건물은 이집트 제3중간기인 이집트 제25왕조 파라오인 타하르카가 세웠다. 이후 제26왕조의 프삼티크 3세가 이시스를 섬기는 작은 사원을 세웠고, 이어 아흐모세 2세와 넥타네보 1세 등 수많은 파라오들이 건물들을 증축해나갔다. 다만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들 대부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세워졌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 프톨레마이오스 6세 등이 대규모로 신전군을 확장했고, 현존하는 건물들 중 3분의 2정도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 세워진 것들이다.
파라오의 시대가 끝나고 들어선 로마 제국 시절에도 여전히 필라에 섬은 중요한 성소들 중 하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나 카라칼라 황제 등 로마 황제들도 여전히 신전의 유지 보수에 힘을 썼고 덕분에 필라에 섬은 다른 신전들에 비하면 쇠락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물론 고대 이집트 신앙이 흥성하던 시절에 비하면 순례객들의 수는 확연히 감소했다. 서기 394년에는 히에로글리프로 쓰인 마지막 비석이 필라에 신전에 새겨졌고 서기 452년에는 민중문자로 쓰인 마지막 비석이 세워졌다. 이 당시 이미 이집트 대부분 지역에 그리스 문자와 콥트 문자가 보급되어 히에로글리프, 민중문자는 문자로써 수명이 다해가는 상황이었고, 필라에 신전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문자를 마지막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필라에 신전은 고대 이집트 신전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이집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전이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옛 종교를 모시는 사람들도 줄어갔고, 결정적으로 기독교가 이집트에 전파되며 상황이 급변한다. 우상숭배를 죄악시하던 기독교도들이 필라에 신전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고, 특히 필라에 지방의 초대 주교 마케도니우스는 신전에서 기르던 신성한 매의 목을 꺾어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필라에 신전이 역사가 오래된 신전이었기에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수년간 기독교 교회들과 공존했고, 이집트 신앙의 신자 수가 줄어감에 따라 점진적으로 사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7]
기독교도들은 집요하게 필라에 신전을 박해했고, 결국 필라에 신전은 5세기 이후 고대 이집트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가 중단되며 그 명맥이 끊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에 따라 537년에는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다.[8] 섬에는 고대 신전들을 허물고 대신 교회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신전의 부조와 벽화들을 지우고 교회 건물로 용도변경해서 쓰기도 했다. 다만 6세기 경까지는 '이교도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필라에에서 활보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고대 이집트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기독교는 이슬람교에게 밀려났고, 새롭게 들어온 무슬림들은 필라에 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필라에 신전은 나일 강 한복판에 있던 섬에 위치하여 교통도 불편하고, 범람 때마다 잠기는 필라에 섬에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기독교도들은 기존의 성지였던 필라에 신전을 조직적으로 파괴했으나 이슬람이 전파될 시점에는 이미 필라에 신전의 명맥이 끊긴지 오래였던 이유도 있었다. 필라에 신전은 버려졌고, 나일 강이 범람할 때마다 신전의 상당 부분이 점차 허물어져 갔다. 특히 1800년대에는 범람 정도가 점점 심해져 1년 중 대부분을 물 속에 잠긴 채로 보내기도 했다.
아스완 댐 착공으로 침수되어버린 신전. |
1800년대들어 필라에 섬은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유명한 이집트 관광지들 중 하나가 되었다. 물 속에 잠긴 수중 신전은 이집트에서 흔하지 않았다. 1902년에는 아스완 댐이 완공되면서 범람하는 정도가 강해졌고, 1년 내내 신전 전체의 3분의 1 이상이 물 속에 잠겨있게 되었다. 돌로 지은 석재가 떠내려가는 일은 없었으나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던 벽화와 채색들이 씻겨 내려가는 등 훼손 정도가 매우 심해졌다. 결국 보다못한 유네스코에서 1960년대에 대대적인 보존 프로젝트를 발족했다. 100만 제곱미터 크기의 댐을 건설한 다음 신전 전체를 2~25톤 정도의 석재 4만 개로 나누어 인근 아길키아 섬으로 옮겼다.[9] 이 모든 작업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약 4년동안 이루어졌다.
3. 구조
필라에 신전으로 입도하려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현대 들어 새로 만들어진 신축 부두에 내려 섬으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넥타네보 1세가 세운 작은 사원이 나온다.[10] 제30왕조 시대에 지어졌고, 섬 남서쪽 모퉁이에 세워져 있다. 원래는 14개의 하토르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무너져내려서 6개 밖에 남지 않았다. 기둥들 사이에는 벽이 쳐져 있는데 벽 높이는 대략 6피트, 그리고 그 위에는 우라에우스들이 줄을 지어 조각되었다. 벽면에는 넥타네보 1세가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면을 새겼다.넥타네보 1세가 세운 사원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두 개의 주랑이 나온다. 하나는 동쪽에, 하나는 신전 탑문으로 이어지는 서쪽에 있는데, 서쪽 주랑이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원래는 서쪽 주랑에서 필라에 섬 맞은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뚫려있었으나 신전을 들어옮기는 과정에서 지형이 바뀌며 현재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서쪽 주랑의 길이는 약 100야드, 보존 상태도 좋아서 32개의 기둥들 중 무려 31개가 그대로 남아있다. 기둥 머리는 꽃무늬로 장식했고 대부분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그려놨다. 원래는 주랑에 천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무너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석재를 조사한 결과 별과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랑 뒷벽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벽화가 새겨져 있다.
동쪽 주랑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넥타네보 1세의 사원 바로 곁에는 조그맣게 아르세누피스[11]의 사원이 있다. 여기서부터 동쪽 주랑이 시작된다. 서쪽 주랑은 로마의 황제들이 지었지만 동쪽 주랑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지었다. 그래서 이 주랑에는 신들을 모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새겨져있다. 동쪽 주랑에는 부분적으로 천장과 지붕이 남아있다. 총 17개의 기둥들이 남아있지만 조각이 완벽히 완성된 것은 고작 6개 뿐이다. 동쪽 주랑의 조성이 중단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동쪽 주랑 끝쪽에는 또다른 누비아계 신인 만둘리스의 사원, 그리고 신격화된 임호텝 신전이 붙어있다.
주랑 사이를 쭉 걸어가면 마침내 이시스 신전 본건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시스 신전의 첫 번째 탑문은 높이 60피트, 너비 150피트 정도로, 양쪽에는 깃대를 세울 용도로 깊은 홈이 파여있다. 대략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절에 착공해 프톨레마이오스 3세 시절에 대략적인 윤곽이 잡힌 걸로 추정된다.[12] 탑문의 오른쪽 전면에는 이집트의 대적들의 머리를 잡은 채 곤봉으로 내려칠 준비를 하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모습이 새겨졌다. 그의 왼쪽에는 왕을 바라보는 이시스가 서 있고, 그 옆에 호루스를 상징하는 매가 있다. 이 장면 위에 두 개의 부조가 있다. 하나는 호루스와 네프티스에게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왕관을 선물하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부조, 나머지 하나는 이시스와 어린 호루스에게 향을 바치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부조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탑문 사이에 위치한 '생명의 집'. |
탑문 사이를 통과하면 왼쪽에 바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이 이시스 여신의 신당으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지었다. 탑문 바로 뒤의 앞뜰에 있는 덴데라 신전과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 '생명의 집'이다. 주 목적은 오시리스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였고, 왕의 신성성을 강조해주는 역할도 했다. 내부에는 호루스와 파라오의 신상들이 안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둥주 장식은 하토르 여신의 머리 장식으로 꾸몄고 벽에는 여러 신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는 이시스와, 그녀에게 안겨있는 아기 호루스의 모습이 새겨졌다. 그 외에 여러 방들이 안에 만들어져 있고 제사장의 의복을 보관하거나, 토트 신에게 봉헌된 도서관 등 다양한 용도들로 구분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탑문. |
이시스 여신의 신당을 한번 둘러보고 나면 마침내 두 번째 탑문으로 갈 수 있다. 두 번째 탑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부조가 새겨져 있지만 기독교도들 때문에 크게 훼손된 상태다. 벽에는 당시 필라에 주교 테오도로스의 비문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두 번째 탑문을 통과하면 10개의 기둥들이 떠받치는 다열주로 둘러싸인 작은 정원이 하나 나오는데, 천장이 뚫려있어서 햇빛이 들어온다. 원래 이 곳에도 부조들이 빽빽히 새겨져 있었으나 기독교도들이 다 지워버리고 대신 성경 내용을 새겼다. 서기 500년 경에는 이곳을 교회로 개조하여 십자가를 세우고, 한 번은 성모 마리아에게, 한 번은 성 스테파노에게 봉헌했다.
신전 내부의 모습. 맨 끝에 성소가 보인다. |
정원을 건너 3개의 어두운 방들을 지나면 가장 안쪽에 이시스 여신의 내부 성소가 등장한다. 원래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순금으로 만든 이시스 여신의 신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 성소로 향하는 방에 있는 벽화들을 보면 오시리스를 애도하는 여신들의 모습, 그의 시신 조각들을 찾는 이시스의 모습, 습지 식물들 사이에 안치된 오시리스의 시신, 오시리스와 호루스에게 상하이집트의 왕관을 바치는 네프티스 여신의 모습 등이 있다. 1800년대까지만 해도 이집트 유적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벽화의 채색이 화려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며, 특히 천장이 밤하늘처럼 짙은 푸른색으로 장식되어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13] 그러나 홍수로 인해 침수되면서 색료가 물에 쓸려내려가 현재는 바위 색만 남았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계단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갈 수도 있다. 이 안에도 벽화들이 밀도있게 새겨져 있다.
트라야누스 신전의 모습. |
마지막으로 섬 동쪽에 있는 거대한 건물은 '트라야누스 신전'이라 불리지만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지었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파라오의 침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꽃처럼 깎은 14개의 거대한 기둥들로 이루어졌고 기둥들 사이에는 스크린 벽이 세워졌다. 신전 벽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트라야누스의 신전으로 추정되었다.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만들어져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시스 축제 때 제사를 올리던 장소였다. 필라에 신전에서도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건축물이며 사실상 필라에를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미이라 시리즈에서도 등장했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4] Amelia B. Edwards. 1831~1892. 19세기에 활동한 영국 출신의 소설가. 저널리스트이자 이집트학자이기도 하다. 위의 글은 그녀의 책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당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이 생각했던 이집트에 대한 환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5] 마찬가지로 아부심벨 신전 역시 비슷하게 조각내어 상부 지대로 옮겼다.[6] 필라에 섬은 고대 이집트어로 읽으면 '경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 국경의 남쪽 끝에 위치했다는 의미다.[7] 필라에 지방의 주교들이 테오도시우스 2세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필라에 섬에 교회와 이교도 신전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쓰여있다.[8] 고고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고대 이집트 종교의 종말'로 본다.[9] 그래서 원래 신전이 세워져 있던 필라에 섬은 현재 나일 강 수면 3~5m 밑에 가라앉아 있다.[10] 섬 동쪽 부분에 놓아둔 널찍하게 의자들은 밤에 하는 레이저 쇼 관람용 좌석이다. 이시스가 사라진 오시리스의 시신들을 찾아 헤메다가 필라에 섬까지 오는 과정들을 레이져 쇼로 재현한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11] 누비아에서만 모셔지던 사자 머리의 여신. 이시스와 동격으로 여겨지기도 했다.[12] 공사 완공 이후에도 장식이 끊임없이 새겨졌다.[13] 한 여행가는 여행록에 필라에 신전 내부의 관경이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처음 봤을 때만큼 경탄스러웠다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