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30왕조 제3대 파라오 넥타네보 2세 Nectanebo I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넥타네보 2세(Nectanebo II)[1] | |
출생 | 기원전 380년 | |
사망 | 기원전 340년 이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358년 ~ 기원전 340년 (약 18년) | ||
전임자 | 테오스 | |
후임자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 |
부모 | 아버지 : 차하피무 왕자 | |
무덤 | 불명 |
[clearfix]
1. 개요
고대 이집트 제30왕조의 3대 파라오. 재위기간은 기원전 360년 ~ 기원전 340년이다. 휘의 뜻은 '호루스의 가장 강한 하수인' 이다. 고대 이집트 최후의 이집트 토착민 파라오. 그의 치세 이후 이집트는 현대의 이집트 아랍 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2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거나 외국계 혈통 지배자의 통치를 받게 된다.[2]2. 생애
2.1. 치세 이전 이집트의 상황
기원전 525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 샤한샤가 이집트를 공격해 제26왕조를 무너뜨렸다. 그럼으로써 이집트는 날아오르던 페르시아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페르시아는 사트라프를 설치해 간접 지배의 형식을 취하면서 이집트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고 파라오도 자칭하는 등 이집트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문화적, 역사적 자긍심이 높은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했다. 100여년간의 치열한 저항 끝에, 제26왕조의 왕손 아미르타이오스가 독립을 선포하고 제28왕조를 열었다. 이후 두 번의 쿠데타를 거쳐 넥타네보 1세가 마지막 왕조 제30왕조를 개창했다. 넥타네보 1세는 계승 안정화를 위해 장자 테오스를 공동 통치자로 선포한 후 사망했고, 테오스는 자연스럽게 파라오위를 승계받았다.2.2. 야망 넘치는 왕족 부자
넥타네보 2세는 넥타네보 1세의 손자로, 넥타네보 1세의 왕자 차하피무의 아들이다. 이집트어 이름은 나크트호르헤브 또는 나크트호르헤비트이다.[3] 그의 전임자였던 테오스는 혈족인 차하피무와 나크트호르헤브를 꽤나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테오스는 반란과 내전의 구렁텅이에 빠진 페르시아를 공격해 레반트와 시리아를 점령하여 신왕국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집트가 재독립할때부터 긴밀히 공조하던 그리스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화답하여 아테네에서는 장군 사브리오스[4]가, 스파르타에서는 국왕 아게실라오스 2세[5]가 지원병을 이끌고 이집트에 도착했다. 테오스는 그리스인 육군은 아게실라오스 2세, 이집트인 군대[6]는 조카 나크트호르헤브, 해군은 사브리오스에게 맡기고, 함께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믿었던 혈족들은 왕좌를 향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나크트호르헤브의 아버지이자 파라오의 동생 차하피무는 이집트 국내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테오스의 전쟁 준비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사제부터 평민까지 모든 계층에 세금이 대폭 늘린 것은 물론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던 신전의 재산까지 몰수하는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이집트의 전통적 권력집단인 사제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었다. 민심이 무너진 지금이야말로 아들을 왕위에 앉힐 기회라 판단한 차하피무는 사제들과 귀족들을 선동했으며, 아게실라오스 2세와 테오스를 이간질했고, 나크트호르헤브를 설득했다. 아버지의 설득에 수긍한 나크트호르헤브는 이집트인 군대를 돌려 테오스에게 왕좌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호응해 이집트에서도 거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당황한 테오스는 두 그리스인 장군들에게 진압할 것을 명했으나, 아게실라오스 2세는 자신은 이집트인들을 도우러 왔지 이집트인들과 싸우러 오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해 버렸고 사브리오스 역시 테오스의 명을 묵살했다. 결국 테오스는 슈쉬로 도망쳐 아케메네스 왕조 궁정에 망명했다. 나크트호르헤브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 세벤니토스[7]에 들어가 파라오에 즉위했다. 기원전 360년의 일이었다. 그의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 넥타네보 1세와 좀 달랐으나, 그리스인들이 듣기에는 똑같은 넥타네보스였는지 그리스 역사서에 넥타네보 2세로 기록되었고, 그렇게 현대까지 전해진다.2.3. 고대 이집트 최후의 불꽃
그의 치세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대형 반란이 터지고 만다. 나일 강 삼각주 지역 주요 도시였던 멘데스에서 10만 명 규모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반란 지도자의 이름은 남지 않았으나 역사가들은 제29왕조의 거점이었던 멘데스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 제29왕조의 왕손을 지도자로 추정하고 있다. 넥타네보 2세는 아직 그리스에 남아있던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진압을 부탁했고, 아게실라오스 2세의 스파르타군은 멘데스로 진격해 반란군을 격파했다. 이 보답으로 아게실라오스 2세는 220달란트[8]의 대금을 받고 그리스로 귀환했다.[9]반란을 진압한 후 넥타네보 2세는 내정 전반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가장 실적이 남은 것은 종교 분야이다. 그는 사제 계층이 동원한 반란의 덕을 봤으며, 또한 찬탈의 정당화도 해야 했기 때문에 종교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종교 사업은 고대 이집트에선 단순한 치적사업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의 호응을 쉽게 많이 얻을 수 있는 주요한 내정 분야이기도 했다. 그가 파라오로써 최초로 시행한 공무는 바로 이집트의 유명한 신수, 아피스의 황소의 장례식이었다. 넥타네보 2세는 아피스 신전에 부조를 추가함은 물론 아부의 크눔 신전, 세크탐의 아문 신전 등의 괄목할만한 규모의 신전을 신축했고 수도 세벤니토스 주변에도 많은 사원을 건축했다. 넥타네보 2세가 전국에 신축한 사원만 크고 작은 것을 합쳐서 100여개가 넘으며, 꼭 사원을 짓지 않더라도 사원 수리, 벽화 추가, 비문을 새기는 등에도 열심이라 현재 고대 이집트 시대의 이집트 신화 성지들의 거의 모든 곳에 넥타네보 2세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넥타네보 2세는 외교에도 많은 공을 기울였다. 그는 이전 파라오들의 외교 전략을 이어받아 그리스 국가들과 긴밀히 공조했다. 또한 테오스처럼 아시아 영토에 관심을 보였으나 넥타네보 2세 본인부터가 무리한 아시아 원정의 틈을 노려 왕위를 찬탈한 만큼, 넥타네보 2세는 해외 원정은 나가지 않았다. 대신, 레반트 일대의 도시국가들과 외교적으로 밀통하는 스마트한 방법을 택했다. 이전의 이집트처럼 외세 페르시아에게 눌린 상태였던 시돈, 예루살렘 등의 도시들이 이집트와 내통했다. 이 도시국가들은 당시 그리스, 소아시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이 모두 모이는 교역 중심지였기에 이를 통해 이집트의 무역도 늘었다. 또한 넥타네보 2세는 페르시아가 조만간 재정복을 위한 침공을 벌일 것을 예상하고 군대를 열심히 양성했으며 당대 최강의 무력집단이라 평가받던 그리스 용병들도 많이 받아들였다. 이렇게 독립 후에도 혼란에 빠져있던 이집트는 넥타네보 1세와 넥타네보 2세의 치세를 거쳐 완전히 정상화되었음은 물론, 다시 한 번 지역강국으로 발돋움했다. 만약 페르시아 최후의 부흥기가 오지 않았다면, 이집트는 독립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2.4. 페르시아의 1차 침공 격퇴
하지만 이집트에 커다란 어둠이 드리웠다. 이집트가 평화롭게 클 수 있는 주요한 이유였던 오랜 페르시아의 내전이 끝난 것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샤한샤위에 올라 사트라프 아르타바주스의 반란을 진압하여 페르시아 제국 전역의 통제권을 잡았다. 샤한샤는 칼끝을 이집트로 돌렸다. 기원전 351년, 1차 이집트 전역이 시작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했다. 목표는 고대 이집트 최초의 수도이자 전 이집트 최고의 성지 멤피스였다. 넥타네보 2세는 지금껏 준비해온 모든 수단을 쏟아 부었다. 넥타네보 2세가 외교로 작업을 해놓은 대로 그리스의 테베는 소아시아에 영향력을 투사해 소아시아 일대의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유도해주었다. 또한 미리 고용해둔 아테네 용병 디오판토스와 스파르타 용병 라미오스 역시 계획대로 출격했다. 페르시아군과 이집트군은 나일 강변에서 1년 간의 전쟁을 벌였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전투에서 넥타네보 2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소아시아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결국 철군했다. 이 승리는 이집트인들을 엄청나게 고무시켰고, 넥타네보 2세는 '신성한 매'라는 호칭을 받으며 국민들에게 신적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반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게 이 패배는 엄청난 위협이 되었는데, 권위 실추와 국력 감소로 인해 패배 직후 레반트 일대와 키프로스가 줄줄이 독립을 선언하였기 때문이다.2.5. 최후의 불꽃, 큰 바람에 꺼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와 넥타네보 2세는 불구대천의 숙적이 되었다. 소아시아 반란을 정리한 후, 그는 그의 라이벌을 제압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국력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첫 타겟은 이집트 본국이 아닌 이집트의 속국들이었다. 시돈의 페니키아인들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키프로스인들은 페르시아가 국력을 가다듬는 수년간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의 뒤엔 이집트가 있었다. 기원전 343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카리아 사트라프 이드리오스에게 키프로스 공략을, 시리아 사트라프 벨레시스와 킬리키아 사트라프 마자에오스에게 시돈 공략을 지시했다. 이드리오스는 승리했으나, 벨레시스와 마자에오스는 이집트 원군에게 참패하여 도망쳤다. 이집트 원군을 이끄는 것은 로도스의 멘토르[10] 로, 그리스 용병 4천 명을 이끌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진노해 페르시아의 국력을 총동원했다. 페르시아인 보병 30만 명, 기병 3만명, 삼단노선 300척, 수송선 500척에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병사 1만 명을 추가로 징병하여, 샤한샤는 친정을 시작했다. 2차 이집트 전역의 시작이었다.샤한샤의 군대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이전에 두 사트라프를 격퇴했던 시돈이었다. 시돈의 페니키아 왕 텐네스는 샤한샤가 친정한다는 소식에 겁먹었고, 우선 대항을 시도했다. 로도스의 멘토르가 나아가 분투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혔고, 그는 그를 고평가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게 등용되어 이전에 이끌던 그리스 용병 4천 명을 이끌고 그대로 페르시아군에 합류한다. 이 소식을 들은 텐네스는 항복 사절을 보내 샤한샤에게 자비를 구걸했으나 항복 사절은 학살되었다. 결국 시돈은 함락되었고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텐네스는 처형당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물 흐르듯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유대도 무너뜨렸다.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이란 북부로 끌려갔다. 이렇게 레반트를 정리한 페르시아군은 군을 세 갈래로 나누었다. 그리스인 군대는 로도스의 멘토르가, 페르시아인 군대는 바고아스가 총사령관을 맡았다.
넥타네보 2세는 일전에 페르시아 군을 막아본 경험이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지난 10여 년간 많은 방어 준비를 해두었다. 이집트의 주요한 도시들은 모조리 성벽을 쌓아올렸고, 나일 강변을 따라서도 막대한 수의 군사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나일 강 도하 저지를 위한 해군도 많이 길러두었다. 넥타네보 2세는 페르시아군이 침공하더라도 지난번처럼 대승을 거두거나 못해도 지연전을 통해 페르시아를 지치게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따라서 페르시아군의 진격 소식이 들려오자 넥타네보 2세는 이집트인 6만 명, 리비아인 2만 명[11], 그리스인 2만 명으로 이루어진 그의 군대를 이끌고 나일 강변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넥타네보 2세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페르시아 장군들의 역량과 로도스의 멘토르의 존재감이었다. 페르시아 측의 장군들은 모두 이집트 측 장군들을 압도할 만한 경험과 기량을 갖춘 이들이었으며, 로도스의 멘토르는 이집트군에서 오래 복무한 만큼 이집트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이 남지 않은 대전투에서, 넥타네보 2세는 대패했다. 파라오는 급하게 멤피스로 파천했다. 이제 남은 방안은 지구전 뿐이었다. 하지만 로도스의 멘토르는 샤한샤에게 이집트군의 약점을 진언했다. 그것은 바로 이집트군을 이루는 여러 인종-이집트인, 리비아인, 누비아인, 그리스인 등-이 서로를 불신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불화를 부추기면 자중지란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계책을 따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집트군을 선동했고, 과연 이집트 군대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도시들의 성문을 열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집트 전역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대도시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것을 본 넥타네보 2세는, 결국 이집트 밖으로 탈출해 누비아로 망명한다. 이렇게 넥타네보 2세의 치세는 끝났고,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토착민 왕조는 멸망했다. 넥타네보 2세는 누비아에 머무르면서 이집트 수복을 시도했다. 그는 기원전 338년에 이집트에서 반페르시아 반란을 일으킨 카바쉬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카바쉬가 파라오를 자칭하는 듯한 유물이 나오며, 반란 도중에 소외되었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바쉬는 기원전 335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년 후인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이집트에 들어온다. 넥타네보 2세가 누비아로 망명한지 8년 후의 일이었다. 보통 그 전에 넥타네보 2세는 죽었다고 알려졌으나, 어쩌면 살아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집트 점령까지 보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익히 알려진대로 시와의 아문 신전을 찾아가 이집트 신화 속 아문 신의 아들임음을 확인받고 파라오에 올랐다.
3. 마술왕 넥타네보 전설
'신성한 매' 넥타네보 2세의 패배와 이집트의 재점령은 이집트인들의 가슴에 큰 상처로 남았다. 넥타네보 2세의 망명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장군 페렌다레스를 이집트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원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지역 문화를 존중하는 관용 정책으로 유명하나, 두 번이나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수준의 반란을 일으켰던 이집트에게 페르시아가 보여줄 관용은 없었다. 모든 도시의 성벽이 헐렸고, 신전은 약탈당했으며 이집트 신화 종교는 탄압받았다. 이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에 들어오자, 이집트는 그를 해방자로 맞이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여전히 넥타네보 2세와 이집트인 왕조에 대한 향수가 강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시와의 아문 신전에서 아문 신의 아들임을 인정받은 후, 이집트 전역에서 재미있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넥타네보 2세는 사실 누비아로 망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문에 의하면, 넥타네보 2세는 멤피스가 함락당할 때 포위를 뚫고 북쪽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필리포스 2세에게 이집트 마술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복군주 필리포스 2세가 원정을 나간 사이, 넥타네보는 왕비 올림피아스에게 접근했다. 그는 올림피아스에게 자신에게 아문 신이 신탁을 내려, 자신의 몸을 통해 아문 신이 올림피아스 왕비와 성관계를 갖고 싶어한다고 했다. 이에 올림피아스는 넥타네보와 관계를 가졌고, 그 사이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문 신의 신성과 넥타네보 2세의 권위를 갖춘 이집트인 위인이라는 것이다.사실 넥타네보 2세가 망명할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미 사춘기가 다 된 소년이었기에 말이 맞지 않는 전설이었으나, 이집트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까지도 이집트 전역에서 예술 작품 등으로 재탄생하는 인기 설화가 되었다. 이 설화 속에서 넥타네보 2세는 용과 같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전설은 끊기지 않고 중세 유럽에까지 전해졌다. 현존하는 유일한 15세기 타로 카드 덱인 솔라 부스카 타로에는 이 설화의 등장인물들인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대왕, 넥타네보 2세, 올림피아스, 아문 신까지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1] 고대 이집트식으로는 Νakhthorheb(나크트호르헤브)이고, 고대 그리스식으로는 Νεκτανεβος (넥타네보스)이다.[2]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를 시작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로마 제국, 이슬람 제국, 파티마 왕조,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이집트 왕국까지 그 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세력은 모두 이집트 외부에서 유입되었다. 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제국 초기까지는 고대 이집트 특유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했다.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전통 이집트 신앙은 완전히 금지당했다. 그리고 이집트 왕국은 실질적인 현대 이집트의 전신으로 국가적 정체성이 이어지나, 왕조는 유럽에서 이주한 알바니아계이다.[3] 이름은 호루스의 가장 강한 하수인이라는 뜻이다.[4] 당시 아테네 군의 동량이었던 역전의 용장. 그리스 내에서의 코린트 전쟁과 보이오티아 전쟁 등에 참가했고 페르시아 군과의 전쟁에도 이골이 났다.[5] 신화적 국가에서 2류 국가로 끌어내려진 시대의 스파르타의 왕위에 앉아, 외교술과 무력으로 스파르타의 지위를 지킨 스파르타 역사상 최고의 명군 중 하나.[6] 마키모이라고 특별히 이름붙은 이집트 하층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말한다. 마키모이는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도 이집트 토착민 병력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7] 나일강 변의 도시로, 이전까지 한번도 수도가 된 적이 없었으나 제30왕조가 이곳을 거점으로 일어나서 이집트 제30왕조의 수도가 되었다.[8] 아테네 최전성기의 연수입이 1000탈란트였다. 최전성기 아테네 연수입의 5분의 1을 넘는 금액으로 특히나 가난한 국가였던 스파르타에겐 거금.[9] 군은 귀환했고, 아게실라오스 2세 본인은 귀향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왁스로 방부처리되어 스파르타에 묻혔다.[10] 동생과 함께 아르타바주스의 반란에 고용되었던 그리스인 장군. 반란이 진압되자 동생은 마케도니아로, 자신은 이집트로 망명해서 각각 그곳의 장군이 되었다. 훗날 멘토르가 이집트 정복에서 세운 공으로 사면되어 페르시아로 돌아갔고 동생은 대장군에, 자신은 레반트 사트라프에 임명되었다. 그의 동생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초창기에 페르시아 제국 총사령관을 맡았으며, 청야전술과 외교술, 해군 운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큰 곤경에 빠뜨릴 뻔했던 로도스의 멤논이다. 그의 아내 바르시네는 그가 죽은 후 동생 멤논과 결혼했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궁으로 끌려가 대왕의 아들 헤라클레스를 낳았다.[11] 현재 리비아인의 직계 조상으로, 베르베르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경보병과 경기병 역할을 맡았을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