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제1중간기 제11왕조 3대 파라오 인테프 2세 Intep I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와한크 인테프(Wahankh Intef)[1] | |
부왕 | 멘투호테프 1세 | |
선대 | 인테프 1세 | |
후대 | 인테프 3세 | |
묘지 | 엘-타리프(El-Tarif) | |
왕비 | 네페루카예트(Neferukayet)[추정] | |
자녀 | 인테프 3세(Intef I)♂ 이아(Iah)♀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112~기원전 2063년, 재위기간 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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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테프 2세는 고대 이집트 제1중간기의 제11왕조에서 세 번째로 등극한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 약 기원전 2112년 무렵부터 기원전 2063년 전후까지 테베를 수도로 삼아 반세기 가까이 왕권을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에 이집트는 여러 지방 왕조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인테프 2세는 남부 지역을 통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였다. 한편, 그는 엘타리프(El-Tarif)에 위치한 사프(saff) 형태의 무덤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 무덤 양식은 넓은 뜰 앞에 열주[3]로 된 통로가 배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2. 가족
인테프 2세의 부왕은 멘투호테프 1세, 모후는 네페루 1세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전임자인 인테프 1세는 그의 형제였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사후에는 아들로 추정되는 인테프 3세가 뒤를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3. 통치
노마치 앙크티피가 사망한 이후, 인테프 2세는 제1급류 인근까지 이어지는 남부 놈[4]들을 하나로 묶어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후 헤라클레오폴리스의 군주들과 아비도스의 지배권을 놓고 충돌하였는데, 이 지역이 여러 차례 점령 세력이 바뀐 끝에 결국 북쪽으로 13번째 놈까지 그의 통치권이 미쳤다고 전해진다.전쟁이 끝난 뒤에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나머지 통치 기간은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엘레판티네 섬에 위치한 헤카입[5] 사원에서 세드 축제[6] 예복을 두른 인테프 2세의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재위 30년경 이미 제1급류와 그 주변 누비아 하부 일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게벨레인에서 와와트(누비아)에 이르는 탐험 기록도 그의 치세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사망했을 때, 테베를 중심으로 상이집트 전역에 걸친 안정적인 정부 조직이 남아 있었고, 아시유트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그의 권력이 미쳤다. 한편, 카르나크에서 신 아문을 처음으로 언급한 기록 역시 인테프 2세 재위기에 해당한다고 전해진다. 중왕국 시대에 편찬된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는 약 49년간 재위한 것으로 언급된다.
4. 왕호
인테프 2세는 고왕국 시기부터 쓰인 5가지 정식 왕호[7]를 모두 사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하 이집트의 왕을 의미하는 네수트-비티와 라의 아들이라는 뜻의 사-레 칭호는 사용하였으며, 왕좌에 오르면서 파라오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호루스 이름인 와한크를 추가했다고 한다.5. 신하
인테프 2세 치하에는 몇몇 주요 신하들의 흔적이 전한다. 예컨대 최고 재무관 겸 왕실 시종을 역임한 체티(Tjetjy)는 인테프 2세와 3세를 모두 섬긴 것으로 보이며, 무덤 비문[8]에 따르면 인테프 2세가 상·하 이집트 파라오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남부 중심의 통치권을 확립했던 정황이 드러난다.또 다른 인물인 자리(Djary)는 헤라클레오폴리스 세력과 아비데네(Abydene) 놈을 두고 벌어진 전투에 참여한 군사 지휘관이었고, 엘캅 출신 관리 헤테피(Hetepy)는 세 곳의 남부 놈을 관할하면서 기근 시기에도 파라오에게 충성을 다한 사례가 비문에 언급된다. 이외에도 하(下)누비아 통치를 맡았던 이두주-이케르(Idudju-iker)가 아비도스 점령에 기여하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6. 건축활동 및 무덤
인테프 2세는 장제용 비석에서 자신이 주도한 건축 사업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카르나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왕실 건축물 조각 중 하나가 인테프 2세의 이름이 새겨진 팔각 기둥이며, 엘레판티네 섬에서 사테트(Satet)[9]와 크눔을 위한 신전을 건설한 최초의 파라오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중왕국 시기까지 이어진 상이집트 지방 신전 건축 전통의 선례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한편, 인테프 2세의 무덤은 테베 인근 엘-타리프(El-Tarif)에 위치하며, 이른바 ‘사프(saff)’ 형식[10] 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사당은 뜰의 동쪽 끝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왕국 시기에 보이던 계곡 사원과 유사한 기능을 의도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20왕조 시기 말인 람세스 9세 재위기에, 여러 고왕들의 무덤이 도굴되는 사태가 잇따르자 왕실 조사단이 엘-타리프 일대 분묘들을 확인하던 중 인테프 2세의 피라미드형 무덤도 조사 대상으로 올랐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해당 무덤은 크게 훼손되어 있었음에도 내부가 온전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다만 현재까지도 이 피라미드의 구체적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인테프 2세는 지방 노마치 가문이[11] 원래 사용하던 관습에 따라 자신의 무덤 입구에 생애와 치세를 묘사한 비석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그가 50년간 통치했다는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무덤 전면 혹은 봉헌 공간에 그가 기르던 개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는 전승이 있는데, 실제로 ‘베하(Beha)’라는 이름의 개가 언급된 석비가 봉헌 예배당 인근에서 발견되었다.
[1] 혹은 Inyotef, Antef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Wahankh는 인생이 지속됨을 의미한다.[추정] [3] 줄지어 늘어선 기둥[4] 고대 이집트의 행정구역[5] 페피 2세 시기 활동하던 장군으로, 군사적 용맹함을 인정받아 사후 신격화되었다.[6] 파라오가 즉위하고 30년이 된 해를 기념하는 행사. 그 후부터는 매 3년부터 계속하여 치룬다.[7] 호루스 이름, 네브티 이름, 황금 호루스 이름, 즉위명, 출생명[8] 현 영국박물관 소장[9] 이집트 남부 국경, 범람하는 나일강, 전쟁, 사냥, 다산의 여신[10] 사프는 아랍어로 ‘열’을 뜻하는 용어이며, 넓은 사각형에 가까운 뜰을 앞에 두고 이중 열주와 출입로가 늘어서 있는 구조가 특징이다.[11] 노마치는 원래 임명직이지만, 중간기 시기에는 세습직이 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