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 Thutmose 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투트모세(Thutmose)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493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506년 ~ 기원전 1493년 (약 12년) | ||
전임자 | 아멘호테프 1세 | |
후임자 | 투트모세 2세 | |
부모 | 아버지 : 아멘호테프 1세 어머니 : 센세네브 | |
배우자 | 아흐모세 무트노프렛 | |
자녀 | 투트모세 2세, 하트셉수트 | |
무덤 | 왕가의 계곡 KV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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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제3대 파라오.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친 파라오이자 최초로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였다.
2. 통치
투트모세 1세의 아버지가 정확히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 선대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1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어머니인 센세네브는 왕가의 혈통이 아니었기에 정실 왕비가 아니라 후궁이나 첩실일 가능성이 크다. 투트모세 1세는 아흐모세 1세의 딸이자 아멘호테프 1세의 이복누이였던 아흐모세 왕비와 결혼했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부족한 정통성을 보강하려 시도했다.투트모세 1세가 즉위하자마자 남쪽의 누비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바로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누비아 반란군을 격퇴했고, 심지어 누비아에 있었던 쿠시 왕국의 왕을 죽이면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승리를 이끈 파라오는 배의 고물에 누비아 왕의 잘린 목과 몸을 내걸고 위풍당당하게 테베로 개선했다. 재위 3년차에는 또다시 누비아로 원정을 떠나 나일 강의 제1폭포 즈음에 운하를 파서 더욱 이동이 용이하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서 누비아의 이집트화 속도가 빨라졌다고 전해진다.
투트모세 1세는 단순히 누비아에 군대를 보내는 것 뿐만 아니라 요새를 축조하고 길을 닦아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등 알박기 작업에도 나섰다. 제3폭포 인근 톰보 지방에 요새를 지었으며, 곳곳에 초소와 연락기지를 지으며 누비아에서의 반란 시도 자체를 아예 꺾으려고 했다. 다만 재위 2년차부터는 누비아 뿐만 아니라 시리아 지방에서의 대대적인 군사원정을 계획하여 누비아에만 관심을 쏟을 수가 없었다. 투트모세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나아가 심지어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가는 등 그 이전의 어떠한 파라오들도 도달하지 못한 지역까지 멀리 진출했다.[2] 이 원정을 통해 수많은 시리아계 소국의 왕들이 이집트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했으나, 정작 투트모세 1세가 이집트로 돌아간 이후에는 공물도 보내지 않고, 오히려 훗날의 침략에 대비해 요새를 강화하는 등 이집트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당시 이집트인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 강만 보아왔던지라 반대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을 보고 굉장히 신기해했다.[3]
투트모세 1세는 정복사업 뿐만 아니라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여러 건물들을 남겼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테베의 카르나크 대신전이다. 투트모세 1세 이전까지만 해도 카르나크 신전은 별로 중요한 신전이 아니었다. 그냥 그럭저럭한 종교 중심지들 중 하나로 사원 몇 개가 모여있는 중형 신전에 불과했는데, 투트모세 1세가 탑문과 신전들을 대거 건설하고 신전의 영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면서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신전으로 확 뛰어올랐다. 그는 백향목의 모습을 본뜬 열주들을 세운 홀들을 연이어 설계했고, 주변에는 상•하이집트의 이중관을 쓰고 있는 투트모세 1세 자신의 모습을 새긴 거상들을 배치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개의 오벨리스크들을 카르나크 주변에 설치했는데, 이 중 몇몇 개는 투트모세 3세 시대 이전까지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았다고 한다. 투트모세 1세는 카르나크 신전 외에도 아비도스에 엔네아드들의 석상을 만들거나 멤피스와 에드푸 등에 여러 신전들을 세웠다. 또한 그는 처음으로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 선선대 파라오인 아흐모세 1세까지만 해도 피라미드를 지어 그 안에 묻혔는데, 투트모세 1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피라미드를 버리고, 땅에 석굴을 파 그 안에 묻히는 형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업적들을 남겼던 투트모세 1세는 죽은 후 왕가의 계곡 KV20에 묻혔다. 1844년 즈음에 KV20 무덤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이전까지 이 무덤은 통로와 매장실을 포함해 모든 곳들이 자갈과 모래가 꽉꽉 들어차 있었던 상태였다. 1903년에 2년에 걸친 발굴작업 끝에 겨우 무덤의 자갈과 모래를 모두 치워냈다. 하지만 이미 무덤은 도굴꾼들에게 털린 지 오래라 그 안에서 발견된 보물이라하면 조잡한 화병 2점, 그리고 도자기 조각들 몇 점만이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참고로 이곳에서 하트셉수트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지만 하트셉수트의 미라나 유해는 안치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여왕이 마음을 바꾸어 다른 무덤을 쓰기로 결정하면서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투트모세 1세 본인의 미라는 데이르 엘 바하리에서 아흐모세 1세, 아멘호테프 1세, 투트모세 2세, 투트모세 3세,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 람세스 9세 등의 미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그의 미라는 어떠한 표식도 없어서 처음에는 투트모세 1세의 것인지 몰랐으나, 고고학자들이 투트모세 2세 등 다른 파라오들과 유전자를 조사해본 결과 투트모세 1세의 미라임이 확인되었다.
[1] 훗날 KV38에 재안장되었다.[2] 선대의 아흐모세 1세가 한 번 유프라테스 강까지 가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3] 그래서 투트모세 1세에게 주어진 칭호들 중 하나가 '역류를 건넌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