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고왕국 제6왕조 3대 파라오 페피 1세 Pepi 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페피 메리레(Pepi Meryre)[1] | |
부왕 | 테티 | |
선대 | 우세르카레 | |
후대 | 메렌레 1세 | |
묘지 | 페피 1세의 피라미드 | |
왕비 | 앙케센페피 1세(Ankhesenpepi I) 앙케센페피 2세(Ankhesenpepi II) 누브웨네트(Nubwenet) 이네넥-인티(Inenek-Inti) 메하아(Mehaa) 세브웨테트(Sebwetet) 네제프테트(Nedjeftet)[추정] 베헤누(Behenu)[추정] 웨레트-얌테스(Weret-Yamtes)[4] | |
자녀 | 메렌레 1세(Merenre I)♂ 호르네체르케트(Hornetjerkhet)♂[추정] 테티앙크(Tetiankh)♂[추정] 메리티테스 4세(Meritites IV)♀[추정] 네이스(Neith)♀[추정] 이푸트 2세(Iput II)♀[추정] 페피 2세(Pepi II)♂[추정]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4세기 후반 혹은 기원전 23세기 초, 재위기간 40년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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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피 1세는 이집트 제6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로, 기원전 24~23세기 동안 약 40년 이상 통치했다. 그의 아버지는 테티였으며, 우세르카레의 짧은 재위 이후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이푸트(Iput)로, 제5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우나스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 페피 1세는 최소 6명의 왕비를 두었으며, 그의 아들인 메렌레 1세가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되었고, 메렌레 1세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된 페피 2세 역시 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페피 1세의 통치 중에는 여러 문제가 발생했는데, 아버지 테티의 암살과[11] 우세르카레의 짧은 통치, 그리고 왕비들 내의 음모 등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의 지역 신들에게 헌정된 사원을 새로 건설하고, 자신의 숭배를 위한 성소들을 이집트 전역에 세워 지방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권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위해 귀족이 아닌 지방 관료들을 중용하였다.
페피 1세는 누비아, 시나이 반도, 남부 레반트 등으로 군사 원정을 나섰으며, 비블로스 및 에블라와 무역을 이어갔다. 그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위치하며, 여기에는 그의 여러 왕비들의 피라미드도 함께 존재한다.
2. 가족
페피 1세의 부모는 6왕조의 초대 파라오 테티와 그의 아내 이푸트(Iput)로, 이푸트는 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우나스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 이푸트는 페피 1세의 즉위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페피 1세의 배우자는 앙케센페피 1세(Ankhesenpepi I)와 앙케센페피 2세(Ankhesenpepi II)를 포함하여 총 6명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모두 아비도스의 지방 행정관 쿠이(Khui)와 그의 아내 네베트(Nebet)의 딸이었다. 이 외에도 누브웨네트(Nubwenet), 이네넥-인티(Inenek-Inti), 메하아(Mehaa), 세브웨테트(Sebwetet) 등도 그의 배우자로 알려져 있으며, 네제프테트(Nedjeftet)과 베헤누(Behenu)도 페피 1세의 배우자로 추정되고 있다.페피 1세에게는 최소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앙케센페피 1세가 낳은 메렌레 1세와 앙케센페피 2세의 아들 페피 2세가 주요 후계자였으며, 누가 낳았는지 불명인 테티-앙크(Teti-ankh)와 메하아의 아들 호르네체르케트(Hornetjerkhet)도 그의 자녀로 알려져 있다. 또한, 페피 1세의 딸로는 메리티테스 4세(Meritites IV), 네이스(Neith), 이푸트 2세(Iput II)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페피 2세의 배우자로 추정된다.
3. 역사적 위치
페피 1세의 재위 시기는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잘 확립되어 있으며, 그는 우세르카레를 계승하고 메렌레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준 제6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이다. 이 같은 사실은 사카라 석판과 아비도스 파라오 목록, 토리노 파피루스 등 여러 사료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마네토의 저서 《아이깁티아카》에서는 우세르카레의 계승이 언급되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페피 1세의 계보는 확실하다.페피 1세의 재위 기간은 최소 40년 이상으로, 49년 혹은 50년까지도 추정된다. 사카라 석판과 하트누브(Hatnub)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25차까지 가축 개체 수 조사의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페피 1세의 통치 기간이 49년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네토의 《아이깁티아카》에서는 페피 1세의 재위 기간을 5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피 1세는 30년째 되는 해에 첫 번째 세드 축제를 개최했으며, 이는 이후 그의 통치 말기까지 자주 언급되었다.[12]
4. 정치
페피 1세의 즉위는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그의 부친 테티가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페피 1세는 어린 나이에 바로 즉위하지 못하고, 우세르카레가 그 사이에 왕위에 올랐다. 우세르카레는 섭정일 수도 있었으나, 일부 학자들은 그를 찬탈자로 본다. 페피 1세는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호루스 이름 메리-타위(Mery-tawy)와 즉위명 네페르사호르(Nefersahor)를 사용했다.페피 1세 재위 기간 동안 중앙 정부의 힘이 약화되고 지방 귀족의 힘이 강화되는 경향이 이어졌다. 페피 1세는 이와 같은 지방 분권화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도입했다. 그는 지방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하고, 지방에 왕의 존재감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카 사원을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귀족이 아닌 사람들도 새롭게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또한, 후궁 중 한 명인 웨레트-얌테스(Weret-Yamtes)의 반란이 발생했으며, 페피 1세는 이를 진압하고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아비도스의 총독 쿠이(Khui)와 동맹을 맺고 그의 두 딸과 결혼했다. 이와 같은 결혼은 정치적 중요성을 지녔으며, 쿠이의 아내 네베트(Nebet)는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상이집트의 대재상이 되었다. 페피 1세는 말년에 재상 라웨르(Rawer)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들 메렌레 1세와 공동 통치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대외적으로 페피 1세는 누비아, 시나이 반도, 남부 레반트 등지로 군사 원정을 펼쳤으며, 많은 군사를 소집해 지역 반란을 진압하거나 토지를 정복하려 했다.
5. 경제
페피 1세의 통치는 6왕조의 외교 정책의 전성기에 해당하며, 교역, 채굴 및 군사 원정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레반트 해안가의 도시들과의 교역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주요 무역 상대국은 비블로스였다. 이집트의 고위 관리 이니(Iny)는 페피 1세 시기 여러 차례 비블로스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채굴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시나이 반도의 와디 마가레(Wadi Maghareh)에서 터키석과 구리를 채굴하기 위한 원정이 있었다. 또한, 홍해 남부 지역으로의 원정도 있었으며, 에티오피아의 흑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아울러 아비도스에서 카르가 오아시스를 거쳐 다클라 및 셀리마 오아시스(Selima Oases)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도 활성화되었다.
내정으로는 기존의 왕실 영지를 대신하여 농업 중심의 행정 단위인 'ḥwt'가 도입되었고, 이로 인해 왕실 사절이 접근 가능한 창고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세금 및 노동 징집이 용이해졌다. 또한, 페피 1세는 어머니의 숭배를 위한 사원에 세금 면제를 부여했으며, 스네프루의 피라미드 인근 도시의 주민들에게도 영구적인 세금 면제를 명령했다.
6. 건축 활동
페피 1세는 이집트 전역에 걸쳐 건축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주요 건축물로는 지방 신전을 포함한 왕실 카 신전이 있다.카 신전은 파라오의 카를 위한 제물을 바치기 위한 작은 건축물로, 히에라콘폴리스, 아비도스, 멤피스 등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신전은 해당 지역의 다른 주요 신전 근처에 위치하며, 지방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신전 건설 활동 중 바스테트 여신을 위한 부바스티스 신전,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13] 복원, 아비도스의 켄티-아멘티우(Khenti-Amentiu) 신전 등이 있다. 또한 엘레판티네 섬에 세운 사테트[14] 신전에도 기여한 바 있다.
피라미드는 사카라 남부에 지어졌으며, 페피 1세 자신의 피라미드와 몇 명의 왕비들을 위한 피라미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피라미드의 벽에는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파라오의 부활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6.1. 페피 1세의 피라미드
이름 | 멘 네페르 페피(Men nefer Pepi) |
뜻 | 페피의 화려함은 영원하다 |
높이 | 52.5m[과거] 12m[현재] |
경사 | 53°07'48'' |
7. 유산
페피 1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장례 숭배는 지속되었다. 고왕국 시기 동안 사카라에 있는 그의 장례 단지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그의 숭배가 이루어졌으며, 제사장들이 활동했다. 이러한 숭배 활동은 제1중간기 동안에도 계속되었으나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산발적으로 중단되었다.페피 1세의 숭배는 중왕국 말기까지 이어졌으나 제2중간기 초기에 중단되었다. 신왕국 시기에는 페피 1세의 장례 단지가 사유지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피라미드 내부는 공동묘지로 활용되었다. 람세스 2세 치세 동안 왕자 카엠웨세트(Khaemweset)[17]의 지시로 페피 1세의 피라미드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말기 왕조 시기에 들어서는 피라미드의 석재 채굴이 확대되었고, 이후 맘루크 왕조에 집중적인 석재 채굴로 인해 장례 단지는 전부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