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5왕조 제2대 파라오 셰비쿠 𓆷𓃞𓇿𓂓 | Shebitku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셰비쿠(Shebitku)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705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714년 ~ 기원전 705년 (약 9년) | ||
전임자 | 피이 | |
후임자 | 샤바카 | |
부모 | 아버지 : 피이 | |
배우자 | 아르티 | |
무덤 | 엘-쿠루 18번 피라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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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시 왕국 나파타 시대 4대 왕이자 고대 이집트 제25대 왕조 2대 파라오. 전 파라오 피이가 시작한 이집트 정복을 완수한 인물이다.2. 행적
기원전 3세기 세라피스 제사장이자 <이집트 역사>의 저자 마네토에 따르면, 샤바카[1]가 이집트 정복을 달성하고 끝까지 저항한 바켄레네프를 불태워 죽인 뒤 8년간 집권했으며, 셰비쿠[2]가 뒤를 이어 14년간 통치했다고 한다. 학계는 오랫동한 마네토의 기록에 따라 피이 사후 샤바카-셰비쿠 순으로 집권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2016년과 2017년에 쿠시 왕국의 이집트 지배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 실제로는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아졌다.제라드 브로크먼은 2017년 논문에서 샤바카의 카르나크 신전 비문의 상단 가장자리가 셰비쿠의 비문 왼쪽 가장자리 부근에 조각된 점을 볼 때, 셰비쿠가 먼저 집권하여 비문을 세웠고 샤바카가 뒤이어 집권하여 비문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이집트 학자 클라우스 주르만은 2016~2017년에 셰비쿠와 샤바카가 세운 카르나크 비문들을 재조사한 결과, 셰비쿠의 상형 문자 비문이 샤바카의 비문 이전에 조각된 것이 분명하다며 브로크먼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여기에 프레데릭 파라우도(Frederic Payraudeau)는 아비도스 아문 신전에서 "아문 신의 아내"로서 활동하던 여사제 셰페누페트 1세가 셰비쿠의 통치 기간 동안에 자신의 이름으로 오시리스-헤카제트 예베당의 문벽과 외부에 부조를 새겼고, 그녀와 함께 여사제를 맡았던 아메니르디스 1세는 샤바카의 재위 기간에야 단독 여사제로서 등장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엘 쿠루에 있는 쿠시 왕실 피라미드의 건축적 특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이와 세비쿠의 피라미드에는 코벨 지붕이 세워진 개방형 매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던 반면, 샤바카, 타하르카, 타누타멘의 피라미드와 이후의 모든 왕실 피라미드에서는 완전 터널식 매장실이 설치되었다. 이는 피이와 세비쿠의 시대에 일반적이었던 매장 양식이 샤바카 집권 후 변화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로 볼 때, 셰비쿠가 샤바카보다 먼저 등극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마네토가 서술한 이집트 정복자는 샤바카가 아니라 셰비쿠일 것이다.
셰비쿠는 피이 왕의 정복 전쟁 이후에도 계속 버티던 바켄레네프 등 하이집트 통치자들을 모조리 제압해 이집트 통일을 달성했다. 그는 이집트 문화를 존중했으며 이집트 신들을 받든 신전들에 상당한 재물을 기부했다. 멤피스에서 발견된 기증비는 그가 호루스와 하토르에게 새 항아리 2개를 바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의 뒤에는 파베토스의 호루스 사제이자 나일강 삼각주 동부 지역 통치자인 파트제네프가 서 있다. 셰비쿠는 파라오의 왕관을 착용한데 비해, 파트제네프는 리비아 베르베르 부족의 양식인 수평 깃털을 착용했다.
1999년 이란의 탕이바르 유적지에서 사르곤 2세가 기원전 706년에 건립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르면, 아시도드(Ashdod)의 왕 이마니(Iamani)는 사르곤 2세의 위세를 두려워해 멜루하로 도망한 뒤 그곳에서 "도둑처럼 은밀하게 살다가" 멜루하의 왕 샤파타쿠(Shapataku = 셰비쿠)에게 체포되어 양손을 수갑을 찬 채 사르곤 2세 앞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셰비쿠는 기원전 706년 무렵에도 생존했으며, 아시리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주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후에 샤바카가 뒤를 이었으며 무덤은 쿠시 왕국 본토의 나파타 공동 묘지인 엘 쿠루에 피라미드 형식으로 건립된 것은 분명하다. 셰비쿠의 무덤인 엘-쿠루 18번 피라미드에는 인간의 유골이 남아있는데 셰비쿠 본인의 것으로 추정한다. 209~216번 무덤에는 생전에 그가 길렀던 말들이 집단매장되었다.
그는 피이의 딸이자 자신의 누이인 아르티와 결혼했다. 그녀의 이름은 카르낙의 하르마케트 동상 밑에 언급되었으며, 엘 쿠루-6 묘지에 안장되었다. 둘 사이에 자식을 보지는 못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