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7대 파라오 십타 Siptah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십타(Siptah)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191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197년 ~ 기원전 1191년 (약 6년) | ||
전임자 | 불명(아멘메세스로 추정) | |
후임자 | 투스레트 | |
부모 | 아버지 : 세티 2세 어머니 : 수탈리자 | |
무덤 | 왕가의 계곡 KV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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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9왕조의 제7대 파라오.고대 이집트의 최전성기인 신왕국 제19왕조의 말기를 다스렸던 파라오였다.
2. 통치
아무래도 십타가 워낙에 존재감이 없는 파라오다보니 그의 부모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려진 것이 없다. 가장 유력한 학설은 십타가 바로 전대 파라오인 세티 2세의 아들이라는 설이었다. 그러나 누비아의 신전에서 머리가 고의적으로 훼손된 사람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아기 시절의 십타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파라오 아멘메세스의 아들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현재는 이쪽이 주류다. 특히 후대 파라오인 람세스 3세가 작성한 왕명록에서 십타의 이름이 아멘메세스와 함께 누락되어 십타가 아멘메세스의 친아들일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1] 만일 십타가 세티 2세의 적통이었다면 정통성이 확실하므로 굳이 왕명록에서 누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어머니인 수탈리자는 가나안 출신으로 추정된다.당시 십타가 왕위를 물려받는 데는 쿠시 총독이자 재상이었던 라메세 카멘테루[2]의 역할이 대단히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티 2세 시절 세워진 석비에 새겨진 십타 바로 뒤쪽에 카멘테루의 모습이 거의 십타와 동등한 크기로 새겨져 있고, 고대 이집트 회화에서 지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맞춰 그렸다는 걸 생각해보면 카멘테루가 십타 뒤에서 암약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카멘테루도 오래가진 못했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카멘테루는 십타의 재위 5년 차에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왕가의 계곡에 건설하고 있었던 그의 무덤 공사를 중단하라는 지시가 도편으로 전달되었는데 현대까지 남아있다. 그후에는 세티 2세의 계비이자 십타의 계모였던 투스레트가 단독으로 권력을 쥐게 되었다.
6년 정도 밖에 안되는 십타의 재위기간에 대해선 많은 것이 남아있지 않다. 재위 6년이 되는 해에 호리를 새 재상으로 임명하고 세드 축제를 주관했으나 그 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카멘테루의 처형과 십타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투스레트가 손을 쓰지 않았겠는냐는 시각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저 두 사람이 제거되면 투스레트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십타가 사망한 뒤 이어진 투스레트의 짧은 단독 재위기간에 십타의 무덤에서 십타의 카르투슈가 삭제되고, 세티 2세의 것으로 교체되었다가 세트나크테가 투스레트를 몰아낸 뒤에 다시 원상 복구를 시켰다는 점도 이런 시각을 뒷받침하지만 이 시기의 기록이 적어 진실은 어떤지 알 수 없다.
십타의 미라는 왕가의 계곡 KV47 무덤에 안치되었으나 훗날 도굴꾼들 때문에, 그나마 멀쩡했던 아멘호테프 2세의 KV35 무덤에 재안치되었고, 1898년에 발견되었다. 2021년 4월에 십타의 시신을 다른 신왕국의 파라오들과 함께 카이로 박물관에서 이집트 문명 박물관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