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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6 13:37:34

헤타이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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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mpanion_cavalry.png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도하하는 알렉산드로스와 헤타이로이

1. 개요2. 상세3. 대중 매체에서
3.1. 영화3.2. 소설3.3. 게임

1. 개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친위대 기병.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3세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의 핵심을 담당한 정예 기병이다. 헤타이로이란 원래 고전 그리스어의 친구 혹은 동지라는 뜻이며, 영어로 "Companion cavalry"라고 부르는 것도 그 단어 뜻을 직역한 것이다. 그래서 왕의 동료, '헤타이로스'라는 말은 기병대 뿐만 아니라 왕과 가까운 고위 관료나 측근, 조언자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2. 상세

원래는 과 가까운 마케도니아 귀족들로 이루어진 정예 기병대였으나, 나중에는 그리스 / 마케도니아 출신 자유민들 중에서 최고급 장비와 승마 기술을 갖출 수 있는 자들도 받아들였다. 심지어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후에는 드물지만 아시아 출신자를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 지배층과 페르시아 지배층을 한데 융합시키려는 헬레니즘 동화 정책의 일환이었는데, 다른 동화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 마케도니아 출신 병사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마케도니아를 크게 중흥시킨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웃 그리스의 기병들은 대개 정찰과 척후 임무만을 담당했지만 필리포스 2세의 헤타이로이는 처음부터 페르시아 중기병을 모델로 삼아 강력한 중기병으로 만들어졌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기병 전술을 발달시킨 이웃 테살리아 지방의 기병들로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중기병들이 이나 투창을 이용한 원거리 접전이나 도끼, 짧은 등을 이용한 근접 난전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돌격 전술은 나중에 발달한 반면, 헤타이로이는 처음부터 긴 창을 사용한 돌격에 주안점을 두었다.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휘황찬란한 전공이 그들의 활약상을 대변해 준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경우 헤타이로이 부대가 짜는 쐐기꼴의 진형에서 항상 그 선봉에서 전장을 누볐다. 당시 기병 전술은 중무장한 보병대에 말과 함께 꼬나박아 타격을 입히는 방식이었고, 그 꼭지점 선봉에 위치한 병사는 목숨을 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점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담력을 알 수 있다.[1] 알렉산드로스의 담력은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긴 했으나, 오죽하면 휘하 장군들이 옥체를 보전하라고 종종 말렸을 정도였다.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 최고 지휘관이자 한 나라의 국왕이 이런 자살 행위와도 같은 짓을 태연하게 한 것은 알렉산드로스를 제외하면 서양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 리처드 1세, 동양에서는 항우 등 손에 꼽는다. 국왕이 앞장서서 가장 위험한 자리에 서는 용맹하고도 솔선수범한 모습을 보여주니 마케도니아 군의 사기는 드높았고, 특히 직접 지휘받는 헤타이로이들은 특출난 용맹을 보여주었다.

파일:Persia_Cataphract2.jpg
위 그림이 헤타이로이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페르시아의 중기병이다. 마갑과 팔, 다리 보호대를 착용하여 초창기 헤타이로이보다 중무장했으나, 주무기가 주로 투창이었으므로 헤타이로이처럼 강력한 돌파력을 갖지는 못 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영향을 받아 헤타이로이가 들고 다니는 장창(크시스톤)을 들고 다니게 되어 충격 기병의 성격을 띄게 된다. 위 그림은 존 워리의 책《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에 들어 있는 삽화다.[2][3]

초창기 헤타이로이는 청동 혹은 린넨으로 만든 흉갑을 입고 3~4m에 달하는 긴 창[4], 그리고 칼[5]로 무장했다. 위 그림에 나오듯이 챙 달린 모자처럼 특이하게 생긴 보이오티아 식 투구[6]도 유명하다. 방패는 쓰지 않았으며, 후대에는 페르시아 중기병의 영향을 받아 마갑이나 팔, 다리 보호대가 추가되었다.

당시엔 등자는 커녕 말 안장도 널리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7]에 흔히 떠올리는 충격기병처럼 무게를 실어 창을 찔러넣었다간 그 충격력을 이기지 못하고 되려 기수가 뒤로 붕 날아갈 판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흔히 떠올리는 것 처럼 적에게 문자 그대로 충돌한 것이 아니라, 빠르게 말을 타고 달리며 쉴새없이 창으로 적을 찌르는 방식으로 적 전열을 붕괴시켰다. 이를 위해 창도 가능한 한 가늘고 가볍게 제작되었으며, 쉽게 부러질 수 있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 양쪽 끝에 창날을 달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말이 빠르게 달리는 것만으로 창이 흔들려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창 자루가 가벼웠다고 한다.

돌격을 할 때에는 정확성과 공격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긴 창을 양손으로 잡고 적을 찔렀는데,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고삐도 잡지 않고 양손으로 창을 쥐고 돌격하는 데에는 상당한 수준의 승마 기술[8]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매우 귀중한 인재들이었으며,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헬레니즘 국가끼리의 전쟁이 일상화되면서 헤타이로이들은 더욱 중무장하기 시작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헤타이로이들은 큰 방패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헤타이로이들은 카타프락토이들보다 약간 경무장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긴 창을 들고 돌격하는 기병이라는 점에서 사리소포로이, 론코포로이, 크시스토포로이, 콘토포로이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9]

파일:battle of magnesia.jpg
위 그림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과 싸우고 있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헤타이로이(혹은 아게마 기병)[10]를 그린 그림이다. 상기한 페르시아 기병의 것과 유사한 팔 보호대와 말의 가슴팍을 가리는 마갑 그리고 호플론과 유사한 큰 원형 방패인 아스피스(Aspis)가 그려져 있다.

중장화를 통해 약점을 극복하려는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헬레니즘 왕조들의 군사적 자산은 나날이 고갈되어 갔다. 특히 등자가 없는 상황에서 양손으로 창을 잡고 돌격을 감행할 수 있는 뛰어난 승마술을 갖춘 기병을 양성하기는 점점 힘들어졌다. 그 결과 왕들의 친위대(αγημα)[11]는 왕으로부터 봉토를 하사받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만 군대로 복무하는 보병들로 채워져 갔으며, 헤타이로이는 점차 사라졌다. 강력한 충격 기병의 전통은 동방의 파르티아사산 왕조 그리고 먼 훗날 동로마 제국카타프락토이들이 계승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친위대 중에도 에테리아(ἑταιρεία)라고 불린 부대들이 있었는데, 이는 앞서 설명한 고전 그리스어의 "동료"라는 뜻에서 일맥상통한다.

3. 대중 매체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만큼, 그리스나 알렉산드로스를 다루는 영화나 다큐멘터리, 게임 등 창작물에서도 자주 나온다.

3.1. 영화

3.2. 소설

3.3. 게임


[1]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인 반인반신임을 굳게 믿고, 헤라클레스보다도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것을 간절히 바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일화.[2] 참고로 저 삽화는 크세노폰의《아나바시스》에서 쿠낙사 전투 당시 소(小) 키루스의 기병을 묘사한 장면과 유물들을 바탕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가 깽판치던 시대랑은 다른 시기의 것인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와 맞짱뜨던 시기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기병은 저 상태에서 장창을 들고 있는 형태라 생각하면 되겠다.[3] 흔히 알렉산드로스의 쾌진격에 다리우스 3세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 하고 탈탈 털리기만 해서 페르시아 기병대가 마케도니아 기병대보다 못 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가우가멜라 전투 당시 페르시아 중기병대는 마케도니아 좌익을 충격력을 십분 살려서 거의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고 파르메니온이 지휘하던 좌익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와 테살리아 기병대는 박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만약 다리우스가 전사를 각오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지휘하는 기병 돌격을 버텨냈으면 알렉산드로스는 돌아온 페르시아 기병대와 정면의 페르시아 보병대에게 붙잡히거나 전사했을 가능성이 컸다. 즉, 페르시아의 병사들의 수준은 마케도니아 못잖았으나 최종 통수권자가 전투 지휘에 영 자질이 없었다.[4] 이걸 콘토스(κοντός) 또는 크시스톤(ξυστόν)이라고도 부른다.[5] 그리스 지역의 병사들이 많이 사용했던 코피스(κοπίς)나 크시포스(ξίφος) 같은 검도류.[6] 저 헬멧을 썼던 이유는 다른 투구에 비해 시야범위가 넓기 때문이었다.[7] 이는 헤타이로이가 타고 다녔던 말의 덩치가 생각보다 작기 때문이었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 기병들이 타고 다녔던 말들은 테살리아 품종으로 덩치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8] 등자가 없었을 당시 그리스 / 로마의 기병들은 말의 궁둥짝에 가깝게 앉고, 허벅지로 아랫배를 조이는 방식의 승마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9] 전부 "창잡이"라는 뜻이다.[10] 셀레우코스 왕조는 근위 기병대로서 각각 1,000명 규모의 헤타이로이 및 아게마 기병대를 가지고 있었고 마그네시아 전투 당시에는 각기 좌, 우익에 배치되였다.[11] 현대 그리스군에서도 'αγημα'(현대식 발음은 '아기마')는 고위 근위부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