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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5:02:26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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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안티고노스 왕조 7대 국왕
페르세우스
Περσεύς | Perseus
파일: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jpg
페르세우스
Περσεύς
출생 기원전 212년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사망 기원전 166년 (향년 45~46세)
로마 공화국 알바 푸젠스
재위 기간
마케도니아 왕국
바실레우스
기원전 179년 ~ 기원전 168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안티고노스 왕조 7대이자 마지막 국왕.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단행하여 초반에는 로마군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피드나 전투에서 완패하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2. 생애

기원전 212년경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 펠라에서 필리포스 5세와 아르고스의 폴리크라테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에서 따온 것으로, 페르세우스가 아르고스의 왕이었던 점을 고려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동생으로 데메트리오스가 있었다. 그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로마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귀환한 뒤 마케도니아 궁정 내에서 친 로마 세력을 이끈 데메트리오스에게 왕위가 넘어갈 걸 우려했다.

기원전 180년, 로마 장군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데메트리오스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편지는 페르세우스가 조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페르세우스는 이 편지를 근거로 아버지에게 데메트리오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고, 필리포스는 이에 따라 데메트리오스를 독살했다. 그러나 아들을 처형한 충격과 로마가 이 일을 가지고 어떻게 나올 지 근심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기원전 179년 사망했다. 페르세우스는 왕위에 오른 직후 안티고노스 3세의 아들 안티고노스를 처형해 왕위 경쟁자를 미연에 제거하였다. 그는 즉각 로마에 대표단을 파견해 자신을 인정하고 기원전 196년에 맺었던 조약을 갱신하자고 요청했고, 로마 원로원은 마지못해 승인했다.

필리포스 5세는 과거 북방의 적인 다르다니아인을 견제하기 위해 켈트족게르만족의 혼합 집단인 바스타르네(Bastarnae)족과 동맹을 맺은 바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동맹을 강화하기로 하고 바스타르네 공주와 결혼했다. 이후 바스타르네족이 다르다니아인을 공격하자, 다르다니아인은 원로원에 사절단을 보내 마케도니아가 바스타르네를 부추겨서 자신들을 치게 했다고 주장했다. 페르세우스는 즉시 사절을 보내 바스타르네의 다르다니아 침공은 자신이 조장한 게 아니라고 부인했다. 원로원은 일단 지켜보기로 하면서도 페르세우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트라키아 부족 사페아족이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하여 암피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암피폴리스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으나, 페르세우스의 통치 기간 내내 마케도니아의 골칫거리로 남았다.

페르세우스는 빚을 갚지 못해 각지를 유랑하는 자들과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공표하여 민심을 모으고자 하였고, 델포이 신전에 다수의 대표단을 보냈으며, 아이톨리아 동맹과 화해해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테살리아와 아이톨리아에서 무거운 빚에 시달리는 이들을 부추겨서 친로마적인 과두정에 대항하게 하였다. 테살리아의 각 도시 국가 정부들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에 개입을 요청했지만, 원로원은 관여하지 않았다. 기원전 174년, 그는 돌로프 족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한 뒤 델포이 신전에 들러 신탁을 받았으며, 그리스인들에게 필리포스 5세 때의 갈등을 잊고 새로운 우호관계를 맺자고 요청했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을 제외한 대다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한편 에우메네스 2세가 통치하는 페르가몬 왕국이 갈수록 강력해지자, 그는 기원전 177년 셀레우코스 제국에 접근하여 셀레우코스 4세의 딸 라오디케와 결혼했고, 누이 아파마를 페르가몬 왕국의 경쟁자 비티니아 왕국프루시아스 2세와 결혼시켰다. 여기에 로도스인들에 접근하여 10,000명의 용병을 새로 징집해, 마케도니아군을 강화했다.[1]

원로원은 마케도니아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도스, 그리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친선 및 동맹 관계를 수립하는 걸 우려했다. 이에 따라 사절을 보내 페르세우스에게 다시 경고하려 했지만, 페르세우스가 사절을 만나주지 않아서 실패했다. 기원전 173년 테살리아의 도시 국가 정부들이 다시 한번 페르세우스의 팽창 정책에 우려를 제기하자, 로마는 사절을 파견해 테살리아에서의 빚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이오티아 동맹과 연합을 체결하고 델포이와 델로스에서 동맹 조약을 발표했다. 원로원 내부에서는 반마케도니아파가 궐기해 무력으로 마케도니아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많은 의원들은 마케도니아가 로마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데 굳이 개입할 필요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에 방문하여 페르세우스를 위험 인물로 묘사하며 개입을 촉구하면서, 원로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들은 로마의 친밀한 동맹인 페르가몬 왕국의 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에우메네스가 귀국하던 중 페르세우스가 보낸 암살단의 습격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지자, 원로원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보고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우선 전쟁 준비를 할 시간을 벌기 위해, 기원전 172년 사절단을 페르세우스에게 파견하여 평화를 논의하게 했다. 페르세우스는 협상에 성실히 임했지만, 기원전 171년 초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문을 접수받자 빠르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40,000명의 보병, 4,000명의 기병을 소집한 뒤, 그리스로 건너온 로마 총독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로마군을 공격했다. 기원전 171년 봄, 테살리아의 라리사 인근 칼리니코스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당시 로마군은 6,000명의 병사로 구성된 군단 2개, 보조군 16,000명, 기병 1,700명, 칼키스 보병 4,000명, 기병 1,000명, 에우메네스 2세가 파견한 함선 수 척으로 구성되었다. 페르세우스는 칼리니코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단호히 거부하였고, 페르세우스는 기원전 171년 후반 로마군 숙영지를 포위공격했으나 큰 손실을 입고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팔라나 전투)

기원전 170년, 에페이로스 출신 장병들이 마케도니아에 집결한 뒤 로마군의 보급로를 위협했다. 신임 집정관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에페이로스를 공격해봤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군단병들이 주민들을 약탈하는 걸 보고 규율을 엄히 적용하여 여러 명을 처형해 군기를 다잡았다. 기원전 169년 봄,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가 올림푸스 지역을 통과해 마케도니아에 진입했다. 그러나 보급로가 수시로 끊기는 바람에 식량이 떨어져 버려서 테살리아로 후퇴했다. 이렇듯 전황이 유리해지자, 페르세우스는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에게 자신과 힘을 합쳐 로마를 무찌르자고 제안했지만, 이들은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일리리아 왕 겐티오스는 페르세우스와 연합하여 로마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로마인들은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기원전 168년의 집정관으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버지이며 당대의 뛰어난 장군이었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를 선출했다. 그는 델포이에 상륙한 뒤 남부 마케도니아로 진격하여 피에리아의 디온 근처에 진지를 세웠다. 페르세우스는 이에 맞서 올림푸스 산 인근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고지에 틀어박혀 로마군의 진로를 막았다.

이후 로마 정찰병들이 페레비아를 통과하는 우회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곳은 매우 좁고 험난해서 자칫 적의 급습을 받는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다들 그 길로 가기를 꺼렸는데,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고 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처음으로 분견대를 이끌고 그 길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파울루스의 허가를 받은 그는 파울루스의 아들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8200명의 보병과 120명의 기병을 이끌고 우회로로 향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세우스는 밀로에게 12,000명의 병력을 보내 로마군보다 먼저 길목을 장악하게 했다. 이걸 본 스키피오는 강행 돌파하기로 작정했고, 양군은 산봉우리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러던 중 로마군에 고용된 트라키아 용병대가 적의 대열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자, 밀로의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이후 그의 분견대가 평야로 내려오자,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 평원으로 후퇴했다. 이에 파울루스는 페르세우스를 추격했고, 양군은 피드나 전투에서 격돌했다.

피드나 전투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재앙이었다. 25,000명에 달하는 마케도니아군이 전사했고 10,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페르세우스는 기병대를 가까스로 수습한 뒤 펠라에 도착하여 병사를 모으려 했지만, 마케도니아 도시들이 하나둘씩 로마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는 다시 암피폴리스에 가서 파울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으나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암피폴리스 주민들은 그를 위해 싸우고 싶지 않으니 당장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는 몇몇 추종자들과 500명의 크레타 용병대와 함께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했다. 로마 함대가 곧 이 섬을 봉쇄하자,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168년 7월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항복했다.

그는 파울루스에게 개선식에 자신을 동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렇다면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라는 답변만 받았다. 그는 차마 목숨을 끊지 못했고, 쇠사슬에 묶인 채 개선식에 전시되었다. 이후 알바 푸젠스의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2년 후인 기원전 166년 사망했다. 그렇지만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로마에 적응하여 도자기를 구워 팔다가 라틴어를 배운 뒤 공증인이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로마에 정복되었고 많은 시민이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노예로 팔렸다. 상당수의 국유지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되었고, 나머지는 네 개의 공화국으로 나뉘어 로마의 간접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네 개의 공화국은 마케도니아를 잘 통제하지 못했고, 급기야 안드리스코스라는 인물이 나타나 마케도니아인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로마는 반란을 진압한 뒤 4개의 공화국들을 없애버리고 마케도니아 전체를 속주로 만들고 직접통치하기 시작했다.

페르세우스의 죽음과 안티고노스 왕조의 멸망은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로마의 우위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피아 전투 이후 토착 이집트인들과 파라오들의 내전을 겪게 되었고 셀레우코스 왕조 또한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 국력이 쇠락하여 로마에 저항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덤으로 페르세우스가 치른 피드나 전투는 부왕 필리포스 5세가 지휘했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와 마찬가지로 팔랑크스레기온이 정면 대결한 전투로써, 몇몇 고대사 밀덕들의 좋은 vs놀이 소재로 쓰이고 있다.


[1] 이때 로마측에다가는 북방 트라키아 부족들을 막기 위한거라고 변명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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