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라틴어: Aulus Hostilius Manc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조부)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아버지)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형제)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아들)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0년 |
전임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동기 |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후임 |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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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플레브스 출신으로,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아울루스,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여러 학자들은 기원전 217년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휘하에서 동맹군 기병 분견대를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에 맞서 싸우다 캄파니아 지방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그의 아버지일 거라고 추정한다. 형제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기원전 145년 집정관을 맡았고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의 아버지다.기원전 180년 로마시의 사법 재판을 관장하는 법무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170년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와 함께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당시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그는 제비뽑기 결과 마케도니아 전쟁을 맡게 되었고, 그는 지난해에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와의 전쟁을 치렀으나 칼리니코스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변변치 않은 성과를 거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임페리움을 회수했다.
이후 에페이로스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들어가는 산길로 행군하기로 했다. 이때 마케도니아와 내통하고 있었던 에페이로스 동맹이 페르세우스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들이 안내해줄 테니 만키누스를 기습 공격하라고 조언했다. 페르세우스는 이에 따라 군대를 일으켰지만 행군이 지체되었고, 그 사이에 적의 음모를 눈치챈 만키누스는 보이오티아의 코른트 만 북쪽 해안에 위치한 안티키라로 방향을 돌렸다. 이후 테살리아로 행진한 뒤 마케도니아군과 교전하려고 했는데, 이에 관한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설명이 소실되었고, 다른 역사가들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키누스는 군대를 정비하고, 마케도니아 남서부의 엘리메아를 통과한 뒤 비밀리에 테살리아를 지나가려 했지만, 페르세우스가 사전에 길목을 차단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숙영지로 철수했다. 이후 주민들을 약탈하는 군단병들을 처단하는 등 군기를 다잡는 한편, 사방에 사절을 보내 로마와의 동맹을 계속 유지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상황은 로마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로마군이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고전하는 것을 본 에페이로스 동맹은 대놓고 로마에 반기를 들고 마케도니아 편을 들었으며, 아이톨리아 동맹, 아카이아 동맹 등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겉으로는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병력 및 물자 지원을 차일피일 미뤘다. 또한 많은 그리스인들이 마케도니아군에 가담해 로마에 맞섰다. 여기에 일리리아 왕국의 국왕 겐티오스가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페르세우스 편에 설려는 조짐을 보였다. 페르세우스는 겐티오스를 확실히 끌어들이기 위해 일리리아 북쪽의 다르다니아인들을 공격하여 10,000명을 주살했다.
원로원은 마케도니아의 공세로부터 일리리아를 지키기 위해 2,000명의 군인을 태운 8척의 수송선을 이사 섬으로 보냈고, 만키누스 역시 법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4,000명의 병력을 맡겨서 일리리아로 파견했다. 아피우스는 진군하면서 다양한 국적의 동맹군을 끌어들여 8,000명을 모은 뒤 에페이로스 부족인 다사레티아족의 영토에 있는 리크니도스에 진입했다. 그러던 중 일리리아 부족인 페네스타이인들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우스카나를 넘겨주겠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야밤에 1,000명의 병사에게 숙영지를 지키게 한 뒤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우스카나로 향했지만, 페네스타이인들로부터 인질을 받아내서 그들이 약속을 지키도록 보증하게 하지도 않았고, 정찰병도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행렬은 길고 불규칙하게 늘어졌으며, 어둠 속에서 행진하다보니 낙오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우스카나에 도착했을 때, 수비대가 곧바로 출격해 많은 로마인을 살육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병사들을 수습할 생각도 않고 리크니도스로 도주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를 따라 무사히 숙영지에 도착한 이는 1,000명 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 역시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기원전 169년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에게 임페리움을 넘겨주고 로마로 돌아갔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기원전 151년 조영관, 기원전 149년 비티니아 사절단의 일원을 맡았으며, 또다른 아들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기원전 137년 집정관을 역임했지만 누만티아 전쟁에서 누만티아인에게 항복해 세인의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