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라틴어: Gnaeus Papirius Carbo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12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조부 또는 아버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형제)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카르보(형제)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장남)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차남)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3년 집정관 |
전임 |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
동기 |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 |
후임 |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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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킴브리 전쟁에서 처음으로 킴브리족과 맞붙었다가 참패한 인물이다.2. 생애
평민(플레브스) 씨족인 파피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인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기원전 168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있었다. 가이우스는 기원전 12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마르쿠스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안티오코스 8세가 델로스 섬에 그에게 비문을 헌장했다는 사실이 고고학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그가 기원전 116년 법무관을 역임한 뒤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기원전 113년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은 그는 킴브리족이 이탈리아 국경에 접근해 노리쿰을 침공하자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고개를 장악한 뒤 킴브리족에게 당장 떠나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킴브리 측이 "우리는 정착할 땅을 원할 뿐 로마와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해명하자, 카르보는 정착할 곳을 주겠다고 속여 그들을 노레이아로 유인한 뒤 이들이 쉬고 있을 때 기습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오히려 킴브리족에게 완패했다. 아피아노스는 짙은 안개와 뇌우로 인해 킴브리족이 추격을 중단하지 않았다면 카르보의 군대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거라고 밝혔다. 그 후 킴브리족은 갈리아로 향했고, 로마인들은 숲에 숨었다가 사흘 만에 집결했다.
기원전 112년, 로마에 귀환한 카르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1]의 고발을 받고 재판에 회부된 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막대한 벌금을 내고 추방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리자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편에 서서 기원전 85년과 기원전 84년, 기원전 82년에 집정관을 맡았다. 그러나 술라의 내전에서 패한 뒤 망명했다가 시칠리아에서 폼페이우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차남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기원전 89년에 호민관을 역임했다.
[1] 탁월한 웅변술을 갖췄기에 오라토르(Orator, 연설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며 옥타비아누스의 라이벌이기도 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조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