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라틴어: Gaius Papirius Carbo | |
생몰년도 | 기원전 162년 ~ 기원전 119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조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아버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형제)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카르보(형제)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아르비나(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0년 |
전임 | 루키우스 오피미우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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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플레브스 씨족인 파피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68년 법무관에 선임된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그의 조부 또는 아버지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형제로 기원전 113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별다른 행적인 전해지지 않는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가 있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동년배라고 한다.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그가 기원전 162년경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키케로는 저서 <브루투스, 또는 유명한 웅변가에 관하여>에서 그가 정기적인 훈련을 통해 훌륭한 웅변 능력을 보여줘서 당대 최고의 변호사가 되었으며, 포로 로마노에 군림하기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웅변의 재능만큼 정치에서도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면 위대한 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키케로는 그의 장기로 뛰어난 유쾌함, 재치, 우렁찬 목소리, 유연한 혀, 신랄한 스타일이라고 밝혔다. 또한 매우 열심히 일하고 연습과 토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기원전 133년 농지법 개혁을 주도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지지했으며, 티베리우스가 살해된 직후인 기원전 132년 말 호민관에 선임된 뒤 티베리우스를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를 꾀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누만티아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따져 물었다.
"티베리우스가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스키피오가 답했다.
"그라쿠스가 국가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정당하게 살해되었소."
그 후 카르보가 가이우스 그라쿠스 등의 지원을 받아 호민관의 재선을 허용하는 법안을 제시했을 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를 극력 반대해 막아냈다. 그 후 카르보는 기원전 130년 농지 분배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29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스키피오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로마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스키피오와 갈등을 심하게 벌였던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 그리고 카르보 중 한 명이 스키피오 암살을 사주했을 거라 여겼지만, 공식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고대 기록에서는 이후 9년간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23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어느 시점에서 그라쿠스파에서 원로원 파로 갈아탔다. 프리드리히 뮌처 등 일부 학자들은 그가 카르보가 그라쿠스가 사망한 후에도 카르타고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는 위원회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가이우스 그라쿠스 추종자들과 집정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 사이의 분란이 폭발하여 그라쿠스 추종자들이 몰살당하고 그라쿠스가 자살하기 직전에 정치적 입장을 변경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20년, 그는 카르보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동료 집정관은 가족 관계와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였다. 그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로부터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는 고발을 받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를 법정에서 변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죽게 된 것은 "완전히 합법적이며, 조국의 이익을 위해 행해졌다"고 주장해 관철시켰고, 오피미우스는 그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이 일로 그의 친구 및 정치적 동맹자들의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기원전 119년, 카르보는 21세의 떠오르는 웅변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고발되었다. 고발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이 연설에서 카르보가 호민관의 재선을 합법화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죽음에 연루되었던 전적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카르보를 배신자로 매도하는 등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할 위기에 몰리자, 카르보는 자살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스페인청가뢰가 생성한 칸타리딘(cantharidin)을 다량 복용하여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아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아르비나는 기원전 90년 호민관, 기원전 85년 또는 84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키케로는 이 인물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크라수스를 증오해 평생 동안 최악의 적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원전 술라의 내전 시기인 기원전 82년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시를 받은 로마의 법무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다마시푸스에 의해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