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라틴어: Marcus Baebius Tamphi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퀸투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아버지)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1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
후임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플레브스 집안인 바이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그나이우스, 아버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퀸투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는 기원전 219년 한니발 바르카의 사군툼 공방전에 항의하기 위해 카르타고를 방문하고 나중에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형제로 기원전 182년 집정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가 있었다.기원전 194년 시푼타 시를 새로 건설하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92년 법무관에 선임된 뒤 히스파니아 속주에 부임했지만, 나중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로마간의 전쟁이 임박하자 브루티움으로 옮겨져 2개의 로마 군단과 15,500명의 동맹군을 이끌었다. 이후 타렌툼과 브룬디시움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뒤 에페이로스로 수송하여 아폴로니아에 숙영지를 세웠다. 이듬해 임기를 연장받은 뒤 로마 편에 선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와 함께 테살리아를 침공해 안티오코스 3세를 지원하는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이후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의 지휘를 받으며 헤라클레아 포위전에 참여해 일부 부대를 이끌었다.
기원전 185년 필리포스 5세에 대한 여러 도시 국가들의 불만 사항을 접수하기 위해 그리스로 파견된 3명의 사절단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템피 계곡에서 열린 회의에서 필리포스 5세가 최근 수년간 점령한 모든 도시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이후 필리포스 5세가 점령하고 있던 트라키아의 두 도시인 에노스와 마로네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테살로니카로 향했다. 사절단은 두 도시를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 결정은 필리포스 5세에게 심각한 모욕을 안겼으며, 마케도니아인들이 마음 속에 분노를 품게 만들어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181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동료와 함께 리구리아를 임지로 부여받아 기원전 180년까지 통치를 수행하면서 알프스 부족들을 무력이 아닌 말로 설득해 복종시킨 뒤 삼니움에 재정착시켰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는 군사적 승리 이외의 이유로 개선식이 거행된 최초의 사례였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