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우스 아퀼리우스 라틴어: Manius Aquil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페르가몬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1년 |
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리우스 |
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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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제2차 노예 전쟁을 진압했으나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패배하고 체포된 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 생애
기원전 487년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투스쿠스를 배출한 이래 여러 차례 고위 행정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아퀼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기원전 129년 집정관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는 그의 아버지로 추정된다. 기원전 103년 이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지만, 학자들은 빌리우스 아닐리스 법에 의거해 적어도 기원전 104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원전 103년 말, 킴브리 전쟁을 치르던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가서 집정관에 재선임될 때 당시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였던 그에게 지휘권을 임시로 맡겼다.기원전 101년. 그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마리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5번 연속 집정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료 집정관을 선택할 기회를 가졌다. 이후 마리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함께 킴브리족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시칠리아에서 발발한 제2차 노예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향했다.
17,000명의 로마군을 통솔해 노예 반란군의 중심지인 트리오칼라로 진격하던 그는 이에 맞서 회전을 벌인 아테나온과 일기토를 벌인 끝에 죽이고 적병들을 궤멸시켰다. 이후 반란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응징하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반란군 1,000명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의 경기장에서 야수들과 싸울 기회를 주겠다고 전했다. 이에 노예들은 검으로 서로를 찔러 죽이는 방식으로 집단 자살했다. 기원전 100년 시칠리아를 안정시킨 뒤 로마로 귀환한 그는 개선식을 요구했지만, 원로원은 노예 반란군을 진압한 것을 가지고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은 로마의 위신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 여겨 오라토르(Orator: 공공 경기장에서 군중의 갈채를 받는 것)를 치르는 것으로 대체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90년대에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를 일삼은 혐의로 고발당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수많은 증인이 그의 악행을 거리낌없이 밝혔기에 유죄가 명백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변호를 맡은 인물은 당대 최고의 웅변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였다. 안토니우스는 배심원들이 피고인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그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기법으로 승부했다. 특히 연설 말미에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팔을 붙잡고 튜닉을 찢어서 모든 배심원과 판사가 가슴에 난 흉터를 보게 했다. 그리고는 아퀼리우스가 나라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여러 상처를 입어야 했다며, 운명이 적의 무기로부터 구한 사람을 법정에서 심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배심원과 판사는 그의 이같은 설득에 넘어가 무죄를 선고했다고 한다.
기원전 90년, 폰토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비티니아 왕국을 침략해 니코메데스 4세를 축출하고 니코메데스의 형제인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여기에 카파도키아 왕국도 공격해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폐위시키고 자기 영토로 삼으려 했다. 이에 원로원은 아퀼리우스를 폰토스에 사절로 보내 두 왕을 복위시키라고 요구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처음에 로마의 요청에 복종하고 동맹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병력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나중에 니코메데스 4세에게 보상하라는 아퀼리우스의 요청에 "로마의 요청에 따라 프리기아를 공략했으니, 로마 공화국은 내게 빚을 졌다"라며 거부했다.
폰토스 국왕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고, 이참에 전쟁을 일으켜서 군공을 세우고 싶었던 그는 기원전 89년 니코메데스 4세를 부추겨 폰토스를 침공해 아마스트리스를 약탈하게 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는 펠로피다스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 항의했다. 그는 프리기아와 카파도키아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데 니코메데스 3세가 제멋대로 빼앗았으며, 이제는 니코메데스 4세가 아마스트리스를 침공하여 약탈한 건 명백한 불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로마가 일방적으로 비티니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며,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니코메데스 4세로부터 미트리다테스가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편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로원은 미트리다테스에게 비티비아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요구가 거부당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마침내 로마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기원전 89년, 미트리다테스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아르켈라오스를 대동하여 프리기아로 진격했다. 니코메데스 4세가 이끄는 비티니아군은 이에 맞서 할리스 강의 지류인 암니아스 강변으로 진군하여 폰토스군과 대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는 비록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낫전차를 동원하여 적 보병대를 무차별 살육하자 비티니아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한 덕분에 대승을 거두었다. 니코메데스 4세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아퀼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합세한 뒤, 프로토파키움 요새로 쳐들어온 폰토스군과 재차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 역시 폰토스군의 승리로 끝났고, 비티니아 왕국과 로마 연합군 10,000명이 전사했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어둠을 틈타 로마군 진영을 이탈하여 페르가몬으로 도주한 뒤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합세했지만, 새로 징집한 프리기아인들이 비협조로 나오자 미틸레네로 재차 피신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여세를 몰아 군대를 소아시아 전역으로 파견하여 순식간에 공략했고, 흑해 어귀를 지키고 있던 로마 함대 지휘관들의 항복을 받아낸 덕분에 에게 해의 패권도 확보했다. 기원전 88년 미틸레네에 숨어있던 마니우스를 체포한 미트리다테스는 그를 전쟁의 주범으로 비난하고 당나귀에 묶어서 여러 곳을 돌며 대중 앞에서 미친 척 하라고 강요했다. 이후 금을 녹여서 그의 목구멍에 붓는 방식으로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