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 라틴어: Lucius Gaius Caecilius Metellus Caprar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증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첫째 형)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둘째 형)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셋째 형)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장남)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차남)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삼남)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3년 |
전임 |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
동기 |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후임 |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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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라치오 인근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시를 건설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는 불카누스(Volcanus, 불의 신)의 아들 카이쿨루스의 후예로 전해지는 카이킬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에서 출세가도를 달려 집정관 계급까지 오른 평민 귀족(노빌레스) 집안으로, 증조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251년과 기원전 247년에 집정관을 맡았으며, 파노르무스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조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206년 집정관이었으며, 아버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 기원전 131년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아카이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첫째 형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는 기원전 123년 집정관, 기원전 120년 감찰관을 역임했고, 둘째 형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는 기원전 117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셋째 형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11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름이 카이킬리아인 두 여자형제가 있었는데, 각각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와 결혼했다.
기원전 134 ~ 133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지휘하에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특정 임무에 실패한 메텔루스를 꾸짖으며 "네 어머니가 다섯번째로 출산하면 엉덩이를 낳을 것이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기원전 129년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정적이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사망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쿠스는 아이밀리아누스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하고 그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장례식에 참여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기원전 127년 화폐 주조관을 맡아 데나리온을 주조했다.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17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15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기원전 113년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동료 집정관이 킴브리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마케도니아를 임지로 배정받고 2년간 트라키아인들과 성공적으로 싸웠다. 기원전 111년 로마로 귀환해 그 해 7월 15일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형제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역시 사르데냐 반란을 토벌한 뒤 같은 날에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03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해 동료 감찰관 누미디쿠스는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심각한 정쟁을 벌였다. 이에 기원전 102년 호민관 임기가 만료된 사투르니누스와 그를 옹호하던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원로원에서 축출하려 했지만, 카프라리우스가 반대하자 결국 포기했다. 사투르니누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연합해 기원전 100년 호민관을 맡아 누미디쿠스를 추방했지만 원로원 당선인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살해된 사건에 연루되어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고받은 뒤 반대 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기원전 99년 호민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망명자들을 로마에 복귀시키는 법안을 제시했을 때 다른 귀족들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누미디쿠스의 정적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마리우스에 종속된 호민관 푸블리우스 푸리우스의 반대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세 아들을 낳았다. 장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는 기원전 6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차남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6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삼남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기원전 69년 법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