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라틴어: Lucius Marcius Philipp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36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증조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아버지) 클라우디아(어머니)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1년 |
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
동기 |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후임 |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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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을 격렬하게 반대했다가 동맹시 전쟁을 초래했지만,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에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양자 사이에서 시세의 흐름에 따라 승자의 편에 서서 생존에 성공했다.2. 생애
처음으로 독재관과 감찰관을 역임한 평민 씨족인 마르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코그노멘인 필리푸스를 단 첫번째 인물은 기원전 281년 집정관인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였다. 증조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기원전 186년과 기원전 169년에 집정관을 맡았고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조부와 아버지 모두 이름이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인 것 외엔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어머니 클라우디아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이다. 따라서 그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두 아들이었던 기원전 92년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기원전 79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조카였다.학자들은 기원전 180년에 반포되어 공직에 대한 입후보의 최소 연령 요건을 규정한 <렉스 빌리아 아날리스(Lex Villia Annalis)>에 따라 필리푸스가 기원전 136년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는 대다수 로마 귀족들이 장교에 복무한 것과는 달리 군대 경력이 전무하고, 군입대나 군사행정 근무도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찍부터 법지식이 해박하고, 법률가, 변호사로 유명했다. 특히 사법행정, 일반행정 분야에서는 그 명성과 실력이 탁월해, 이는 그가 명예로운 경력을 쌓는데 지대한 기반이 됐다.
기원전 104년 호민관에 선출된 뒤 농지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귀족들이 반대하자 철회해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기원전 100년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들을 척살하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96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고, 기원전 94년 집정관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필리푸스는 폭넓은 인맥을 갖추었고 훌륭한 웅변가로 명성이 자자했기에 당선 가능성이 높아보였지만, 투표자들은 그 대신 무명이었던 마르쿠스 헤렌니우스를 집정관으로 선택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일이 모두에게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밝혔다. 그 후 여러 재판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승소를 얻어내며, 인망을 쌓은 그는 기원전 92년 10월에 재차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해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그의 삼촌인 점을 활용해 선거 운동을 벌인 결과, 이번에는 파트리키 신분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당선되었다.
그가 집정관으로 선임된 기원전 91년, 당해 호민관에는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당선된 뒤 활동을 시작했다. 드루수스는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여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호민관에 입후보했고, 당선 직후 기사계급의 배심원 장악으로 벌어진 원로원 위신 하락 해결과 기사계급 견제 및 일반서민 구제 법안을 잇따라 발표했다. 여기에는 원로원이 위원회에 속해 주도권을 쥔, 농지법 개혁도 있었다. 당시 프린켑스 세나투스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친형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신참자이나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키케로 등이 그런 드루수스를 후원했다. 따라서 드루수스가 입안한 기사계급 견제 법안 등은 이들의 지지 아래 통과됐다.
이 해, 드루수스는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는 법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필리푸스는 법무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드루수스의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드루수스의 개혁은 지난날 로마를 혼란에 빠뜨렸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것과 유사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원로원 실권자들이 드루수스의 목적을 알고 비호해 이는 큰 논란을 낳았다.
필리푸스는 로마법상 상위법에 벗어나고, 혼란을 야기할 법안을 찾아내 이 부분을 지적했다. 이어 집정관 권한을 행사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드루수스가 가결시킨 법안의 상당 부분을 직권 폐기한다. 이에 드루수스는 물러서지 않고 필리푸스의 조치에 항의했다. 그는 이미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 오랫동안 함께 피를 흘린 사이이며, 이탈리아 통일 이후 오랜 통혼 아래 둘을 나누는 것이 현실상 불가능함을 주지해, 미리 법제화하여 원로원 의원들이 새롭게 로마 시민권을 얻은 이탈리아인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필리푸스는 드루수스에게 인격적 모독이 담긴 발언을 했고, 드루수스는 호민관을 맹목적으로 비난한 집정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필리푸스 측과 드루수스 측에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필리푸스의 코에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드루수스는 필리푸스가 이름난 미식가로 사치스러운 습관 등의 약점을 연관지어, 필리푸스 면전에 대고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뭐, 코피라고? 저건 고기 수프일 뿐일세!"
따라서 격분한, 법무관 카이피오가 호민관 드루수스에게 사과를 요구하면서, 합의없는 법안 통과를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일갈했다. 이에 드루수스는 누이동생의 남편인 카이피오에게 가족이더라도 법무관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이 소동 끝에 드루수스의 법안이 민회에서 통과된다. 그러자, 필리푸스는 원로원에 달려가 폭력으로 통과된 새 법안을 무효화할 것을 재차 요구했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법안과 그 목적이 원로원 중심 공화정 체제 강화임을 내세워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필리푸스는 격분해 이렇게 소리쳤다.
"지금의 원로원으로는 공화국을 다스릴 수 없소! 보다 합리적인 원로원을 찾아야 하오!"
다음날, 드루수스는 자신을 비호해준 원로원 실권자들의 지원 아래 원로원을 소집한다. 그는 필리푸스의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토론에 부쳤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집정관 필리푸스가 원로원의 권위에 도전하고, 공화정 체제에 의문을 표한 것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그의 지지자 중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에 동의하며, "이미 공화국에 많은 해를 끼친 사람이 원로원의 권한을 박탈하려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 말을 들은 필리푸스는 자제력을 잃고, 발언권을 먼저 요청하지 않은 채 크라수스에게 회의에 결석한 원로원 의원이 내곤 했던 보석금을 내라고 위협했다. 이에 크라수스는 "당신이 나를 원로원 의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당신을 왜 집정관으로 대해야 하오?"라고 대꾸한 뒤, 다음과 같이 연설하면서, 필리푸스를 탄핵했다.
"당신은 내 모든 재산의 권리를 담보 재산으로 취하고 로마 시민들 앞에서 그것을 내놓게 해서 나를 놀라게 할 생각이시오? 크라수스를 막고 싶다면 잘라야 할 것은 내 재산이 아니오. 내 혀를 잘라야 할 것이오! 그러나 그것이 잘라지더라도 내 숨결은 내 자유를 찬양하고 당신의 자주색 의복을 반박할 것이오!"
크라수스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원로원은 "로마인은 원로원이 언제나 변함없이 공화국의 안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라는 결의안을 반포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곧 병에 걸렸고 6일만에 사망했다.
이렇듯 필리푸스와 드루수스파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드루수스의 개혁을 지지한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필리푸스 암살 음모가 시작되었다. 드루수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필리푸스에게 암살 위협을 경고했다. 며칠 후, 드루수스는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 그 후 필리푸스는 전국의 이탈리아인들이 시민권을 취득하면 드루수스의 클리엔테스가 되겠으며 드루수스의 정적들을 처단하겠다고 맹세했다고 주장했고, 원로원은 필리푸스 등의 압력에 못이겨 드루수스의 법률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후 필리푸스는 카이피오와 함께 드루수스 암살을 사주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91년 말, 드루수스가 살해당했고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는 법안이 폐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탈리아인들이 각지에서 봉기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필리푸스는 이탈리아인들과 내통하고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루키우스 멤미우스를 고발했다. 기원전 88년 동맹시 전쟁이 종식된 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그는 시세를 살피면서 승자의 편에 섰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마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한 뒤 대숙청을 자행했을 때 무수한 귀족이 로마를 탈출했지만, 그는 도시에 남았다. 기원전 86년 감찰관 선거가 열렸을 때 원로원에 남아있던 전직 집정관은 그를 포함한 단 3명이었고, 그는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 직후 그가 실시한 인구 조사에서 동맹시 전쟁 중에 로마 시민권을 받은 이탈리아인이 처음으로 로마 시민 명단에 포함되었다.
필리푸스는 감찰관으로서 삼촌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원로원에서 추방했다. 그 이유는 국외 망명한 아피우스가 로마로 복귀하라는 통보에 불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오스쿨룸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와 함께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83년 술라가 브룬디시움에 상륙한 후 술라의 내전을 단행하자, 그는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양자간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내전이 불가피해지자 술라 편으로 넘어갔다. 술라는 필리푸스에게 사르데냐를 장악하라고 명령했고, 필리푸스는 기원전 82년 사르데냐로 건너가 그곳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다.
그 후 술라파가 장악한 원로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그는 기원전 78년 술라가 사망하자 고인의 시신을 관례대로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공동묘지에 묻지 말고 화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날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유해가 술라파에 의해 티베르 강에 던져진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술라의 장례식 동안 "당대 최고의 연설가"가 연설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웅변가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를 가리킨다고 추정하지만, 프리드리히 뮌처는 필리푸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기원전 78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정권을 뒤엎기 위해 로마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에트루리아인들과 연합했다. 이에 필리푸스는 당장 토벌군을 보내 레피두스와 에트루리아인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원로원은 레피두스를 당해내지 못할 것을 걱정해 레피두스가 반란을 중단한다면 사면하겠다고 제안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레피두스가 이를 거부하자, 필리푸스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법무관에게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그 후 레피두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토벌되었다.
그 후 필리푸스는 마리우스파 인사이며 히스파니아 총독을 자칭하며 로마 정부를 상대로 반기를 든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파견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한 의원이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을 대신해서 임페리움을 받는 게 정말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필리푸스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니오. 두 집정관을 대신해야 하오."
필리푸스는 이외에도 두 가지 제안을 했다. 그는 술라에게 군자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자치권을 받은 도시들이 로마에 경의를 표해햐 하며, 독재관에게 주어진 돈은 반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키케로는 30년 후에 집필한 저서 <의무에 관하여>에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며 "부끄러운 일"로 간주했다. 또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로마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리면서 자신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맡기겠다고 한 유언장을 남겼던 것을 빌미삼아 이집트를 합병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필리푸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를 낳았다. 이 인물은 기원전 56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미래에 로마 황제가 될 옥타비아누스의 계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