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라틴어: Gaius Vibius Pansa Caetronian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3년 4월 22일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무티나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아버지) 푸피아(아내) |
참전 |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무티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3년 |
전임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
동기 |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
후임 | 옥타비아누스 퀸투스 페디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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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갈리아 전쟁과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활약했다. 기원전 43년 무티나 내전에서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함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맞서다 전사했다2. 생애
비비우스 가문은 이탈리아 남부의 브루티움에 뿌리를 둔 평민 집안으로, 기원전 103년경에 법무관을 배출한 이래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정계에서 활약했다. 그의 아버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는 재무관으로 활동했고, 술라의 내전 시기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편을 들었다가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살생부에 올라 추방되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술라가 사망한 뒤 에트루리아인들과 함께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게 가담했다가 레피두스가 패하자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달아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에게 가담하여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치렀고, 세르토리우스가 암살된 뒤 귀순했을 거라고 추정한다.기원전 59년경, 대 가이우스 스크니보니우스 쿠리오[1]는 정치에 관한 저서에서 자신의 아들 및 '가이우스 비비우스'와 함께 원로원 회의를 주재한 이야기를 밝혔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판사가 이 당시에 이미 원로원 의원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기원전 59년에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없었던 아들 쿠리오까지 거론한 것을 근거로 그저 비유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기원전 53년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 가담했으며, 기원전 51년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카이사르를 위해 활동했다. 특히 그해 9월 29일 여러 동료들과 함께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를 조기에 끝내려는 원로원의 시도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이어가는데 일조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카이사르 편에 섰지만, 구체적인 활약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기원전 47년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와의 전쟁에서 활약했고, 그해 가을에 비티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1년간 활동하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동전을 니케아, 니코메디아, 아파메아에서 주조했다.
기원전 46년 10월 누미디아의 국왕 유바 2세와 동맹을 맺고 카이사르를 적대한 혐의로 고발된 퀸투스 리가리우스의 재판에 검사측 증인으로 출석해 리가리우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능숙한 변호를 하면서 여론은 피고인 쪽으로 쏠렸고, 처음에 리가리우스를 처벌하려 했던 카이사르는 마음을 바꿔 무죄를 선고했다. 이 무렵, 키케로는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그리고 판사의 집에 찾아가서 웅변술을 가르쳤다.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을 자신의 "성인 자녀"라고 일컬었다. 기원전 45년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을 역임했으며, 카이사르로부터 히르티우스와 함께 기원전 43년 집정관으로 예정되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판사는 카이사르에게 "무력으로 권력을 획득했으니 무장을 잘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카이사르가 듣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기원전 44년 초순 또는 중순에 로마로 달려온 뒤 히르티우스와 함께 카이사르파와 암살자간의 화해를 촉구했으며, 그리스에서 유학하다가 자신이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로 달려온 옥타비아누스와 접촉하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권세를 제한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기원전 44년 11월, 안토니우스는 집정관 임기가 끝나가자 로마에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총독 직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브루투스가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신병으로 구성된 2개 군단, 2개의 마케도니아 군단, 퇴역병으로 구성된 군단 1개, 보조군 및 근위병 코호트 부대들로 구성된 원정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브루투스는 이에 맞서 무티나에서 군단과 검투사 징집 부대로 요새화하며 원로원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기로 결의하고 기원전 43년 1월 1일 카이사르가 사전에 정한 대로 집정관에 선임된 히르티우스와 판사에게 각각 2개 군단씩 모집하여 무티나로 진군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행정관을 역임한 적이 없는 옥타비아누스도 군대 지휘권을 받았다. 이는 카이사르의 옛 부하들이 주축이 된 군대를 통솔하려면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의 협력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자고 주장했지만, 원로원엔 여전히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안토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타협하라고 권했지만, 안토니우스가 이를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기원전 43년 1월 7일, 옥타비아누스는 아레티아의 숙영지에 도착하여 병력을 집결시켰고, 뒤이어 히르티우스의 군대와 합세한 뒤 1월 중순에 북쪽으로 이동하여 안토니우스의 군대에 접근했다. 양측은 곧 소규모 접전을 벌였지만, 협상의 여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치했다. 2월에 협상에 실패한 사절들이 로마에 귀환했지만, 안토니우스를 적으로 선언하자는 키케로의 주장은 또다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각각 총독 권한을 부여받게 하자는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제멋대로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를 죽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는 것 역시 받아들여졌다. 원로원은 재차 안토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화해하라고 권고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단호히 뿌리쳤다.
결국 그와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게 확인되자, 집정관 판사가 4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에서 출발했다. 당시엔 여러 속주에서 로마에 돈을 보내려고 서두르지 않았기에 군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원로원은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직접세를 부과하여 군자금을 마련했다. 그해 봄, 히르티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무티나에서 포위된 사람들이 그들의 진영의 불빛을 볼 수 있도록 아주 가까이 접근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그들과 대치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히르티우스-옥타비아누스와 합세하려는 판사를 기습하려 했다. 이리하여 4월 14일 포룸 갈로룸 전투가 벌어졌고, 판사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패퇴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승리를 거두고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히르티우스가 급파한 2개 코호트 부대가 그들을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들판과 습지에 무질서하게 흩어졌고, 어둠이 깔린 덕분에 전멸을 면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진영에 남아서 안토니우스의 다른 부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4월 21일, 원로원 군대는 무티나 근처에 야영 중인 안토니우스의 진영을 공격했다. 무티나 성채에 고립되어 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 역시 몇몇 코호트를 보내 협공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안토니우스는 크게 패해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수습하여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도주했다. 그러나 히르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음날 중상을 입고 숙영지에 있던 판사 역시 사망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군대 전체를 이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실은 옥타비아누스가 히르티우스가 전장에서 죽게 만든 뒤 병석에 누워 있던 판사에게 독을 먹여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현대 역사학계는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대표적인 카이사르파 인사였고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도 원만했던 점 등을 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판사는 기원전 47년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의 딸 푸피아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보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1]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카이사르 휘하에 들어가 아프리카 원정을 떠났다가 전사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