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6-15 20:00:00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
라틴어: Titus Pomponius Atticus
생몰년도 기원전 110년 ~ 기원전 32년 3월 31일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에퀴테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티투스 폼포니우스(아버지)
카이킬리아 메텔라(어머니)
폼포니아(누이)
필라(아내)
아티카(딸)
직업 로마 공화국 사업가, 철학자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사업가, 철학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절친한 친구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에퀴테스 신분으로 로마에서 저명한 사업가였던 티투스 폼포니우스와 카이킬리아 메텔라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결혼한 폼포니아가 있었다. 그의 전기를 집필한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아버지는 일찍 사망했지만 생전에 아들에게 헌신적인 지원을 해줬고, 그는 이 덕분에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매사에 활동적이고 지식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마닐루스 토르콰투스와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서도 키케로와 가장 친했다.

기원전 8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동맹시 전쟁 이후 선거권을 얻은 이탈리아 유권자들이 기존의 35개의 투표 부족들에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해 그들의 투표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들을 8개의 새로운 부족에 배치하려 했던 원로원은 결사 반대했고, 기존의 로마 시민들 역시 정치적 특권을 새로운 시민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에 술피키우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마리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치를 지휘권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하에 받아들였다. 술피키우스는 마리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법안을 통과시킨 뒤,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동방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했다.

놀라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있던 술라는 지휘권이 박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후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를 포함한 정적 12명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누구든지 그들을 죽이거나 자신에게 끌고 올 수 있다고 공표했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도주를 시도했지만 노예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당시 아티쿠스는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아프리카로 망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기원전 86년 술라파와 마리우스파의 내전이 가시화되자, 그는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신변이 위태롭다고 여겼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형제 세르비우스의 아내 안키아가 아티쿠스의 사촌이기도 했고, 자신은 심정적으로 술라를 위시한 옵티마테스를 지지했기에 술라를 적대하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등 마리우스파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전 재산을 가지고 아테네로 피신했다. 당시 아테네는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미트리다테스 6세를 지지했다가 술라에게 파괴당했다. 그는 도시가 재건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했고, 아테네인들은 그런 그에게 "아티카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아티쿠스(Atticus)'라는 별명을 붙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이며 아테네 시민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아티쿠스는 재산을 부동산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를 토대로 대출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이자를 요구하는 다른 고리대금업자들과는 달리 저금리로 돈을 빌려줬으며, 굶주린 사람들에게 곡물을 무상으로 공급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를 칭송했고, 다들 그에게 돈을 빌리고자 애썼다. 이리하여 그는 당대 최고의 대출업자로 손꼽힐 정도로 성공했다. 또한 부트린트에 대규모 토지를 구매한 뒤 말과 양을 대량으로 키워서 이를 통해 상당한 부수입을 얻었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자신의 저서 <Rerum Rustarum libri tres(농업에 관한 3권의 책)>에서 아티쿠스와 교류하면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축산업에 관해 상세하게 서술하기도 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다가 아테네에 들렀을 때 아티쿠스를 만났다. 그는 아티쿠스의 탁월한 그리스어 구사력과 막대한 부, 훌륭한 인품에 반하여 자신과 함께 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아티쿠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당신에게 무기를 겨누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났습니다. 이제 당신을 위해 조국에 무기를 겨눌 수는 없습니다."

술라는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아티쿠스에게 원정을 통해 얻은 전리품 상당수를 선물로 주고 아테네를 떠났다고 한다. 이렇듯 아테네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아티쿠스는 로마에서 아테네로 유학 온 여러 인사들과 교류하는 한편 철학에 깊이 탐구했다. 특히 에피쿠로스 학파에 깊이 빠져서 삶의 방식을 에피쿠로스 학파의 교리에 맞춰 살아갔다고 한다. 그는 에피쿠로스 학파에 관한 저서를 여러 권 집필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고, 플라톤, 데모스테네스, 아이스키네스 등 그리스 정치인 및 학자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 및 정리했다고 하나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그는 파트리키 가문들의 계보를 광범위하게 다뤘으며 그들에 대한 짧은 시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여러 노예를 고용하여 필사자로 훈련시키고 절친한 친구 키케로의 저서들을 필사해 대중에 널리 배포하게 했다. 키케로의 정치론, 철학, 사상 등을 담은 여러 작품이 현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다. 특히 키케로 사후 키케로가 수십년간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정리한 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의 협조를 받아 출간했다. 이 '서신집'은 오늘날 학자들에게 키케로의 생애와 인간성,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세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1차 사료로 간주되고 있다. 다만 그가 키케로에게 보낸 답신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데, 일부 학자들은 혹여 트집을 잡힐 것을 걱정한 아티쿠스가 편지를 파기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원전 65년, 아티쿠스는 아테네를 떠나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여러 친구들로부터 법무관 선거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뿌리치고 가능한 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5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 의해 추방당한 키케로를 위해 25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보내주고 자살을 고려하는 키케로를 설득해 마음을 다잡게 하는 등, 키케로가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할 때마다 지원해주고 몇 가지 조언을 해줬다.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키케로의 정적들과도 교류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고수했다.

기원전 58년 또는 56년에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외손녀인 필라와 결혼해 딸 아티카를 낳았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 중 어느 한 쪽을 택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카이사르파와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들간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도 중립을 고수했다.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1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원했고, 무티나 내전 당시 안토니우스가 갈리아로 도주한 후 재산을 잃고 신변이 위험해진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를 보호하고 상당한 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줬다.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된 뒤 대숙청을 단행할 때 절친한 친구 키케로가 살해당하고 본인의 이름이 숙청 명단에 들어가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푸블리우스 볼룸니우스의 저택에 은거했다. 그러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풀비아의 권고와 아티쿠스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변호에 안토니우스가 숙청 명단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브루투스의 어머니인 세르빌리아를 보호했으며, 옥타비아누스와 좋은 관계를 맺고 옥타비아누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심복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딸 아티카를 아내로 삼게 했다.

그 후 로마에서 여생을 보내던 아티쿠스는 기원전 32년 1월 병에 걸렸다. 처음에는 가벼운 질병이라고 여겼지만, 3월에 접어들 무렵에 질병이 악화되면서 궤양이 온 몸에 퍼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아티쿠스는 고통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열이 심해지자 '고통의 부재'를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교리에 따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을 지속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식사를 중단해버렸고, 결국 3월 31일에 77세의 나이로 아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