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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16 08:44:51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라틴어: Marcus Terentius Varro
파일: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jpg
생몰년도 기원전 116년 ~ 기원전 27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리에테(오늘날 라치오 주 리에티)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에퀴테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펀다니아(아내)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기바(양자)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국 총독
1. 개요2. 생애3. 문학가
3.1. 메니페아의 풍자3.2. 라틴어에 관하여3.3. 철학에 관하여3.4. 인간과 신의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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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문학가, 철학자.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옵티마테스파에 가담했지만 도중에 귀순한 후 철학 탐구와 문학 집필에 전념했다.

2. 생애

로마 인근의 소도시 리에테(오늘날 라치오 주 리에티) 인근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에퀴테스 출신이며 부유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외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로마에서 수사학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스틸로의 가르침을 받았고, 뒤이어 아테네로 유학가서 아미수스의 문법학자 티라니온의 제자로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기원전 76년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할거하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고자 감행한 원정에 부관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전쟁이 아니라 히스파니아 현지의 농업과 축산업에 있었다. 그는 훗날 'De re rustica(농업에 관하여)'에서 히스파니아의 농업과 축산업 관행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했다.

기원전 70년 호민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67년 다시 폼페이우스 휘하에 들어가 시칠리아에서 델로스에 이르는 지역의 치안을 맡아 해적들을 토벌했다. 그 후 폼페이우스의 후광에 힘입어 법무관까지 역임했으며, 기원전 55년 집정관에 선임된 폼페이우스가 임기 종료 후 총독으로서 맡게 될 히스파니아를 3개로 분할하여 부관들에게 각각 맡기기로 했을 때,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그 임무를 맡았다. 아프라니우스는 가까운 히스파니아를 맡았고, 페트레이우스는 루시타니아 속주를 맡았으며, 그는 먼 히스파니아를 맡았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페트레이우스와 아프라니우스는 히스파니아를 침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고, 그는 먼 히스파니아에 남아서 치안을 담당했다. 두 장군이 카이사르에게 무너지자 2개 군단을 소집하여 맞서려 했지만, 그들이 카이사르와 싸울 의지가 없자 결국 항복했다. 이후 카이사르의 사면을 받고 카시눔의 시골 별장으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냈다. 나중에 로마 최초의 공공 도서관 조직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으나, 카이사르 사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를 숙청 명단에 올려놓는 바람에 직위를 빼앗기고 많은 재산을 헌납해야 했다. 그나마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보호해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후 정치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집필활동에 전념했으며, 기원전 27년에 사망했다.

3. 문학가

바로는 생전에 풍자시, 일반 시, 연극에 관하여 150편에 달하는 작품을 집필했으며, <인간과 신의 고대사> 41권, 700명의 유명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에 관한 전기, <로마 민법>, <로마인의 기원>, <로마인의 삶>, <로마 관습>, 그리고 철학적 에세이 등 수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또한 "문법, 논리, 수사학, 기하학, 산수, 천문학, 음학, 의학, 건축"을 자유인이 알아야 할 교양 주제로 선정하고, 각각의 주제를 다룬 책을 집필했다. 이 밖에도 <인간의 문제> 25권, <신의 문제> 16권을 집필했다고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에 대해 "키케로,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의 위대한 3개의 등불"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다수 작품은 실전되거나 부분 손실되었다.

오직 <Rerum Rustarum libri tres(농업에 관한 3권의 책)>만이 완전하게 전해진다. 기원전 37년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아내 펀다니아를 위해 집필했다고 알려진[1] 이 책은 농업, 축산, 사냥감 및 어업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는 더 읽기 쉽게 하기 위해 대화체로 집필했으며, 경험 많은 농부의 경험담과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잘 살려서 체계적인 농업 기술을 설파하고자 했다. 그는 농민을 존경했으며, 시골 생활을 명예롭고 유용하다고 칭송했다. 또한 이 책에서는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미생물에 관한 언급도 있어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공중에 떠서 입과 코를 통해 몸에 들어가 심각한 질병을 일으키는 미세한 생물들이 사육하고 있으니, 늪을 피하라."

3.1. 메니페아의 풍자

메니페아의 풍자(Saturae Menippeae)는 세태를 풍자하는 시 모음집이다. 그는 기원전 3세기의 냉소주의 철학자인 가다라의 메니푸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진지한 견해에 유머러스한 표현을 덧붙인 이 작품은 산문과 시가 혼합된 형태였다. 본래 150편에 달했다고 하나, 현재는 단편만 남아서 600행과 90개의 목록만 전해진다. 남아있는 풍자시로 보건대, 그는 그리스 철학의 많은 부분이 부조리하다고 여겼고, 로마인들이 검소한 삶을 유지했던 옛날과는 달리 사치품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3.2. 라틴어에 관하여

라틴어에 관하여(De lingua Latina)는 25권에 달했다고 하며, 1권은 서론, 2~7권은 어원, 8~13은 굴절, 14~25권은 구문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5~10권이다. 이 저서엔 오래된 라틴 시인들의 인용구가 많이 담겨 있어서 언어학자와 문학 연구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8~10권에서는 변칙의 언어 원리 또는 유추의 언어 원리를 논했는데, 유추에 찬성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언어 철학은 다소 현학적이고 종종 논리가 맞지 않은 부분이 있으나, 로마인이 자기 언어를 진지하게 탐구한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3.3. 철학에 관하여

바로는 철학적 대화 형식의 76편으로 구성된 "Logistorici"를 출간했는데, 현재 전해지는 건 후대 철학자들이 인용한 파편적인 내용 뿐이다. 이에 따르면, 그의 철학은 신화와 역사의 예를 통한 윤리적 추론에 집중되었다. Logistorici는 바로가 만들어낸 신조어로 보이는데, 정확한 의미는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는 단행본 <철학에 관하여(De philosophia)>에서, 철학을 올바른 삶의 방식을 규명하는 교리로 제시했다. 고대 철학 연구가들은 그가 뚜렷한 철학적 관점을 가졌다기 보다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여러 철학적 관념을 절충하여 현실에 적용했다고 본다.

3.4. 인간과 신의 고대사

인간과 신의 고대사(Antiquitates rerum humanarum et divinarum)는 총 41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며, 로마 문화와 역사에 대한 백과사전 형식을 띄었다고 한다. 서론 후에는 사람, 장소, 시간 및 사물에 관한 네 부분이 이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전해지지 않으나, 아우구스티누스 등 그리스도교의 교부나 학자들이 인용한 부분은 전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제", "신성한 장소", "신성한 시간", "의례" 등에 관한 설명을 참고해 자신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1] 바로는 서문에서 "남자가 거품이라면 노인은 더욱 그렇다. 이제 80살이 되었으니, 저세상으로 떠나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