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셜리 잭슨 Shirley Jacks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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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셜리 하디 잭슨 Shirley Hardie Jackson |
출생 | 1916년 12월 14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
사망 | 1965년 8월 8일 (향년 48세) |
미국 버몬트주 노스 베닝턴 | |
직업 | 소설가 |
장르 | 호러, 미스터리, 고딕 |
활동 | 1943년 ~ 1965년 |
모교 | 시라큐스 대학교 |
배우자 | 스탠리 에드거 하이먼 (1940년 결혼) |
자녀 | 4명 |
종교 | 무종교(무신론)[1] |
서명 |
1. 개요
미국의 소설가.현대 고딕 호러의 선구자격 작가로 꼽힌다. 다만 작정하고 호러로 쓴건 힐 하우스의 유령 정도다. 전반적인 작풍은 호러보다는 고딕이나 스릴러에 기울어 있었던 편이며, 힐 하우스의 유령 역시 유령보다는 이상 심리 묘사에 집중되어 있다.
귀신들린 집 장르의 고전이라 불리는 힐 하우스의 유령의 경우 더 헌팅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으며 스티븐 킹이 샤이닝을 쓸 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1948년에 발표한 제비뽑기가 있다. 영문학 교과서 다수에 실린 영미단편 최고급 명작. 다만 발표된 당시에는 충격적인 내용 탓에 혹평한 독자들이 절대 다수라, 잡지사에 항의 전화가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작품의 충격이 진정된 후에야 진가를 인정받은 케이스.
2007년 그의 이름을 따 셜리 잭슨상이 제정되었는데, 편혜영 작가가 2017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다.
2. 생애
외가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유명한 장군인 너새니얼 그린(1742~1786)의 후손으로, 출생이 원하지 않는 임신에 가까웠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불화가 심했다고 한다. 잭슨의 어머니는 잭슨한테 '실패한 피임의 산물'이라는 폭언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고. 잭슨의 어머니는 잭슨이 요조숙녀로 자라길 바랐으나, 잭슨은 그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딸이었기 때문에 모녀 간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잭슨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우울증과 자존감 부족에 시달렸다. 가족과 멀어지기 위해 일부러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진학했고, 재학 시절 유태인 평론가 스탠리 에드거 하이먼(1919~1970)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호기심을 느껴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기 위해 대학교에 찾아왔다는 이유로 그와 사랑에 빠져 이른 결혼을 했으며 하이먼 사이에서 2남 2녀를 낳았다. 하지만 말이 결혼이지 비평가였던 남편의 잦은 외도로 사실상 오픈 릴레이션십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이먼이 이랬던 것도 잭슨처럼 가정적 환경이 큰 원인이었다.
셜리 잭슨은 베닝턴 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베닝턴에 정착했지만 남편은 가정에 불성실했고 베닝턴 토박이었던 이웃들은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사람들이라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시절 이웃들에게 배척당하면서 홀로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을 하며 그녀가 느낀 소외감은 작품 활동의 원천이 되었다.
생전에도 작품의 영화화가 두 번이나 이뤄졌을 정도로 소설가로서 나름 이름을 떨쳤기 때문에 돈은 셜리가 훨씬 잘 벌었지만 재정은 남편인 하이먼이 관리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잭슨은 조현병 환자처럼 성격을 종잡을 수 없었으며, 돈을 마구 쓰고 폭식하는 등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기는 했지만 흥청망청 썼고, 거리에서 쓰러져 누워 자다가 경찰에 신고당하면 하이먼이 연락을 듣고 찾아와 데려가는 일도 있었다.
뚱뚱하고 못 생겼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남편의 외도가 잦았기 때문에 셜리 잭슨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모습에 대해 큰 열등감을 가졌고 그것을 마구 폭식을 하거나 술을 진탕 마셔서 꽐라가 되거나 줄담배를 피는 것으로 풀었다. 덕분에 고도비만이었고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결국 작품 집필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계속해서 술과 코카인에 의지하다가, 한창 활동할 시기인 만 48세에 병으로 요절했다. 시신은 화장되었고, 3년 뒤 미발표된 단편들과 미완성 장편이 남편인 하이먼에 의해 발견되어 출판되었다. 이후 세월이 훨씬 흘러 1996년, 생가의 헛간 지하에 있던 상자에서 미발표되었던 또 다른 단편들이 발견되어 31년 만에 출판되기도 했다. 잭슨이 사망한 후 하이먼은 불륜 관계였던 포비 페팅겔과 재혼했으나, 잭슨이 사망한지 고작 5년 뒤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두 사람의 지인들이 증언하길 잭슨의 남편인 하이먼은 그녀에게 그다지 모범적인 남편이 아니었으나 평소 두 사람은 마치 좋은 친구같은 모습으로 지냈다고 한다. 특히, 남편 하이먼은 아내의 작품 활동에 있어서만큼은 아내를 늘 지지해주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첫만남을 가지게 된 이유도 하이먼이 잭슨의 글솜씨에 흥미를 느껴 수소문해서 그녀를 보러 찾아간 것이었고 대학 시절부터 늘 잭슨의 글을 호평해 왔으며 살아 생전 잭슨의 글이 그저 3류 호러소설 취급당하는 것에 분개하여 평론으로 이를 반박하기도 했다. 비록 건실한 남편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아내의 작품만큼은 생전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아내의 글쓰기를 응원한답시고 술과 코카인을 아내에게 권하고 자신도 똑같이 즐겼다...
상술하던 대로 하이먼이 곧잘 바람을 피운 것 또한 잭슨의 경우처럼 가정적 환경이 원인이었다. 하이먼도 잭슨처럼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골통 유대교 신자인 부모와 종교적 충돌을 빚었는데, 어릴 적 부모에게 굶기거나 다락방에 가둬지는 아동 학대를 당했다. 그 트라우마로 하이먼은 종교 자체를 혐오하게 되어 지독한 무신론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신약성경에서 강조하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다부다처제를 긍정하며 그럴 수 있는 환경만 된다면 수 많은 애인들을 사귀면서 인생을 즐겨라 라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이먼은 심지어 '가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대놓고 씹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종교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고 한다.
하이먼의 무신론은 잭슨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그녀도 종교에 대해 비판하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처럼 어린 시절에 대한 동질감 때문인지 두 사람은 비록 사랑과는 거리가 먼 가정 생활을 살아왔지만, 이혼은 서로 마다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아이들에겐 좋은 부모였다고 한다. 부모들에게 학대받으며 자라온 두 사람이니만큼 적어도 아이들에겐 그런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하이먼도 여러 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약물에 의존하며 살았고 이로 인해 그 역시 잭슨과 사별하고 5년밖에 안 되어 5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종종 페미니즘계에서 여성인 잭슨을 일방적인 피해자로 남성인 하이먼을 인간말종처럼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중해야 될 일이다. 아내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면서 그녀의 작품을 악평하던 평론가들에게 죽어라 반론하던 점, 그리고 두 사람이 같이 술과 담배, 코카인을 즐겼던 걸 보면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맞는 좋은 친구이자 이해자로 지낸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걸 제3자가 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하이먼 역시 가정적으로 불우한 배경을 지닌 채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