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古典主義 / Neoclassicism / Néo-Classicisme
신고전학파와는 무관하다.
1. 미술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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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각 장르에 걸쳐 서구 전체를 풍미한 예술 양식. 고전, 고대(그리스 ∙ 로마)의 부활을 목표로, 고고학적 정확성에 강한 관심을 두고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두었다. 고대적 모티브를 많이 쓰고 냉철한 표현의 완성을 특징으로 한다.
신고전주의라는 용어는 당대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이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19세기 말 푸생의 회화를 설명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이후 이 용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용어에 걸맞은 시대상을 찾으려 시도했고, 1920년대에 미술사학자들과 여타 미술 평론가들이 이 용어를 지금과 같은 용례로 사용하게 되었다. 용어의 기원이 채 100년도 되지 않았기에 이 말은 예술의 각 분야에서 동일한 시기를 지칭하지 않음이 특징적이다. 가령 음악에서는 미술과 달리 이 용어를 19세기~20세기 음악에 적용하기도 한다.
또한 이 양식의 대두는 여타 복고주의 양식의 대두를 불러오는데, 건축양식에선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으로의 복고를 중시한 보자르(제2제정) 양식, 르네상스 시대로의 복고를 중시한 신 르네상스[1]-이탈리아네이트 양식, 중세 복고 양식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예시를 차고 넘치게 보고싶다면, 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50개 주 주의회의 주의회 건물을 검색해보면 된다. 50개 주 대부분의 주지사 혹은 의회 건물은 모두 석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립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자크 루이 다비드, 그리고 그의 제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이탈리아의 안토니아 카노바가 있다.
1.1. 특징
아름다운 그리스여! 이제는 쓸모없게 된 슬픈 유적이여! 쇠락하여 영원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위대하도다!
— 조지 고든 바이런
— 조지 고든 바이런
신고전주의 미술 운동은 18세기, 19세기 미술 운동에 있어서 낭만주의와 함께 유럽 미술의 한 축을 형성했던 주요한 미술 운동이다. 신고전주의가 촉발된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그 계기가 된 원인은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고고학적 발굴 때문이었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의 도시가 발굴되면서 당시의 도시문화나 도시구조, 예술작품 등이 온전하게 드러났는데 오히려 18세기 유럽보다도 더 선진적인 도시구조와 시설, 예술수준(특히 조각품)을 가졌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리스와 그리스의 후신으로 일컬어진 고대 로마에 관심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계몽주의가 활개쳤기 때문에 계몽주의를 숭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교가 없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유럽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들은 그리스도교가 점령하기 이전에 유럽에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학문들을 숭상하며 그것이야말로 이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 화사함만 중시하고 정신적 가치가 없던 로코코 미술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신고전주의는 또한 고고학의 발전으로 시작된 그란 투리스모라는 상류층의 교육·여가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측면이 있다. 18세기 상류층의 자제들은 으레 이탈리아의 고전 문화를 보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는데 이러한 관례 속에서 형성된 여행지, 논의, 각종 문서들을 통칭 그랜드 투어의 경향으로 묶어서 부르고 있다. 그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랜드 투어는 단순히 여행이라는 뜻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통상 당대의 유럽인들은 그랜드 투어를 위해서 평균적으로 1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소모했는데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교적인 모임과 강좌 등이 후일 신고전주의의 미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투어가 가능하게 된 것에는 도로의 발달과 고전고대의 유물들이 발굴된 것이 가장 첫 번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주요한 유적들이 발굴되었는데, 헤르쿨라네움 발굴이나 폼페이 발굴과 같은 것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발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고전, 고대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유적지들이 많이 발굴됨과 동시에 이에 관한 출판물들도 허다하게 나왔다. 요한 빙켈만의 <그리스 예술 모방론>에서부터 그랜드 투어를 위해 작성한 소규모의 유적, 미술관 목록에 이르기까지 책의 종류도 다양했다. 물론 그랜드 투어가 단순히 고전, 고대의 유물들만을 선호했던 것은 아니다. 여행자들은 이러한 유적지들뿐만 아니라 우피치 미술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을 모아 놓은 미술관들을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피렌체와 같은 도시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려야 하는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당시 여행자들이 받아들였던 고전, 고대의 예술, 문화의 성격이 그 이전 시기였던 르네상스인들이 받아들였던 바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신고전주의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18세기 유럽인들이 받아들였던 고전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성격이었느냐는 문제가 연구자들에게 남았다. 현재까지의 일반적인 견해는 당대인들이 받아들인 고전은 르네상스의 고전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때의 고전이라는 것은 르네상스와 17세기 고전주의를 거치면서 변형된 고전에 가깝다.
이를 알 수 있는 예가 신고전주의의 성숙기로 분류되는 19세기 전반의 신고전주의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신고전주의자들은 이전의 고전주의자들과 다르게 터키와 중동,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와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여타 다른 신고전주의자들도 고전, 고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르네상스 당시 가졌던 고전, 고대에 대한 관점에서 몇 가지 의문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후기에 들어서 시작되는 그리스 복고 경향은 앞서 보았던 앵그르의 사례에서 보듯이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과는 다소 동떨어진 세계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점은 기본적으로 계몽주의라는 사조가 피워낸 합리적인 의심의 결과물이었다.
신고전주의의 시기적인 구분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학계에서 널리 통용된다. 하나는 양식적인 경향으로 나누어 초기의 로마 복고 경향과 후기의 그리스 복고 경향으로 설명한다. 이 두 경향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중심으로 크게 갈리는 측면이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두 양식이 함께 공존하다가 그리스 복고 양식이 후반기에 들어서 더 강해졌다고 봄이 적절하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경향일 뿐 그리스 복고가 강했던 시기에도 로마 복고의 경향으로 작품을 제작한 경우는 존재했다. 다른 방법은 전통적인 시기 구분인데 이 역시도 프랑스 혁명을 주요한 전환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양식적 구분과 궤를 같이한다. 흔히 말하는 앙시앵 레짐의 시대였던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형성기로 나누고 그 이후의 시기를 성숙기로 나누는 것이 신고전주의의 시대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있어서 신고전주의는 17세기 프랑스의 미술사조인 고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한 점은 소묘와 터치에 있어서 작가 본인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빛의 표현에 있어서 차가운 조명과도 같은 흰색 계열의 빛을 사용한 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 주제에 있어서도 풍경화가 지양되거나 부수적인 요소로 물러나고 인물화, 건물을 그린 그림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건축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묘사된 인물이나 건물은 많은 경우 영웅의 죽음과 헌신과 같은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주제 일색으로 그려졌으며 신화에 대한 그림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러한 형식 경향에 있어서 예외가 존재하는데 특히 나폴레옹이 실각한 직후 프랑스 미술에서 이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얄궂게도 이러한 이탈 경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화가가 앞에서 이야기한 오퀴스트 앵그르다 그는 비단 이국적인 주제뿐만이 아니라 고전주의 양식이 규범적으로 드러나는 인물화 분야에 있어서도 논란을 많이 일으켰다. 당대에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은 <베르탱 씨의 초상>이 그러한 이탈 경향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인물의 묘사, 특히 기다림을 참지 못해 초조해보이는 표정과 그를 반영하는 듯 손가락이 모두 펴져 발톱처럼 묘사한 부분은 이 그림의 백미이자 당대의 보수적인 예술평론가들이 숱하게 많이 지적했던 부분이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앵그르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다비드가 망명한 이후 등장한 그의 제자들의 작품들도 형식에 있어서는 역사화의 규범에 따르고는 있었지만 세세한 표현에 있어서는 낭만주의의 경향을 수용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이 때문에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비교에 있어서 둘을 대립되는 경향이 아닌, 낭만주의에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신고전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유통된 H.W 젠슨의 <서양미술사>는 신고전주의 개괄에서 이 경향에 대해서 서술하고,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은 최신 판본에서까지 그 서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1.2. 참고자료
신고전주의1.3. 함께 보기
2. 음악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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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낭만주의에 의해 상실된 고전적 형식미를 되찾기 위해 생겨난 음악 사조이다.
후기 낭만주의의 과장된 감정과 편곡, 전통적인 조성의 붕괴 및 인상주의와 현대음악의 난해함에 반대하여 나온 20세기의 음악 경향을 말하며, 피아니스트 부조니,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중후기 음악[2], 힌데미트, 프랑스 6인조의 풀랑 등이 대표적이다. 라벨 또한 신고전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외에 다양한 작곡가들이 직접적으로 신고전주의를 천명하지는 않았지만 고전적 형식미를 재해석한 결과물을 내놓는 등 이 사조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버르토크나 쇼스타코비치 등등...
1920년대~1940년대의 주요 사조로 수명이 상당히 길었으며[3] 클래식의 생존 작곡가들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남아있던 시절[4]의 마지막 사조이기도 하다. 이후 음렬 음악을 필두로 하여 강경한 모더니즘이 대세를 이루면서, 현대음악은 본격적으로 사실상 학계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위의 미술의 신고전주의와 혼동하지 말것. 미술의 신고전주의가 먼저 등장했다.고전 음악과 신고전 미술이 비슷한 시대다.
[1] 서울역 옛 역사가 이 양식으로 지어졌다.[2] 스트라빈스키는 작곡 활동 초반에는 불새, 봄의 제전처럼 파격적인 곡들을 주로 작곡했다.[3] 음렬 음악은 정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류화된지 10년도 못 가 퇴조를 맞았다.[4] 스트라빈스키나 쇼스타코비치는 그 무식한 일반적인 미국인도 한 번쯤 이름을 접해봤을 만큼 상당히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