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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6:14:24

모더니즘/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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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서양 미술사의 시대 ·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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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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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4ECD5><colcolor=#000> 19세기 리얼리즘 (1840~1860) · 인상주의 (1863~1890) · 탈인상주의 (1886~1905) · 나비파 (1888~1900)
러시아 아방가르드 (1890~1930) · 분리파 (1892~1910)
모더니즘 외 사조
아카데믹 미술(아카데미즘) · 라파엘 전파 (1848~1854) · 미술공예운동 (1860~1910) · 상징주의 (1880~1910) · 아르누보 (189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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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1905~1930) · 다리파 (1905~1913) · 청기사파 (1911) · 더 스테일 (1917~1931) · 바우하우스 (1919~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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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떻게 볼 것인가?3. 모더니즘 이전 서양 미술의 역사 : 고대부터 낭만주의까지
3.1. 고대3.2. 중세3.3. 르네상스3.4. 신고전주의3.5. 낭만주의
4. 모더니즘 사조
4.1. 1830-1900
4.1.1. 리얼리즘 1840 ~ 18604.1.2. 인상주의 1863 ~ 18904.1.3. 탈인상주의 1886 ~ 19054.1.4. 모더니즘 이외의 흐름
4.2. 1900-1950
4.2.1. 분리파 1892~19104.2.2. 야수파 1904 ~ 19094.2.3. 입체주의 1907 ~ 19144.2.4. 표현주의 1905 ~ 19304.2.5. 미래주의 1909 ~ 19164.2.6. 다다이즘 1916 ~ 19304.2.7. 더 스테일(신조형주의) 1917 ~ 19314.2.8. 바우하우스 1919 ~ 19334.2.9. 러시아 아방가르드 1890 ~ 1930
4.2.9.1. 구축주의 1920년대4.2.9.2. 절대주의 1913 ~ 19174.2.9.3. 생산주의 1917년 이후
4.2.10. 모더니즘 이외의 흐름
4.3. 1950-1970
5. 관련 항목6. 참고자료

1. 개요

파일:external/www.brainpickings.org/100diagramsthatchangedtheworld16.jpg 초기 모더니즘 미술사조의 흐름[1]

모더니즘(Modernism). Modern은 우리말로 '근대' 또는 '현대'로 번역가능한데, 여기서 말하는 Modern은 대략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후반까지의 100년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근대'를 지칭한다. 미술에서 '현대'는 보통 Modern을 쓰지 않고 'Contemporary'(동시대)를 많이 쓴다.[2]

그 전까지의 고전주의 예술이 그저 자연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재현'적 작업에 불과했다면, 모더니즘은 '미술의 공통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추상'적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것은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기술이 더 이상 사진기술을 따라잡기 힘들기 때문에 미술가들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정당성을 되찾기 위하여, 도대체 미술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더니스트들은 미술 회화의 본질이 평면성에 있다고 보았고 3차원 대상을 2차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색ㆍ질감ㆍ터치ㆍ점ㆍ선ㆍ면 등의 기본 요소로 이루어진 추상작품이야말로 미술의 본질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수록 추상화가 진행됨에 따라 모든 추상작품들은 비슷해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과연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이후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미술 작품의 의의가 '평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2. 어떻게 볼 것인가?

대개 일반인들은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서 어렵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피카소 정도는 알지만, 뒤샹 이후 작가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편.

모더니즘에 대해 알기 위해선 우선 모더니즘 항목에 적혀있는 역사적 배경을 미리 알기를 권장한다. 모더니즘 미술은 18세기 이후 유럽에서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자본화의 사회 변화와 떼어놓고 볼 수 없으며, 반대로 이런 맥락을 알고 보면 나름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행태에 수긍할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계를 둘러싼 세력들을 크게 다음의 4가지로 나눠서 볼 것을 추천한다.

1) 전통적, 보수적 예술
2) 상업화, 자본화된 예술.
3)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예술을 하길 추구했던 예술. 우리가 흔히 아는 모더니즘 예술.
4) 1번의 시대착오성, 2번의 천민자본주의 속성, 3번의 폐쇄성과 기성세력화됨을 비판하는 예술.

1번 예술은 우리가 흔히 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그림, 즉 원근법, 명암, 유화 등 우리가 사실적이라고 느끼도록 현실의 대상을 묘사하는 예술이라 보면 된다.
2번 예술은 일부 건축, 일부 대중음악, 일부 디자인 분야 등을 포함한다. 우리가 흔히 '물건 가격 높게 받으려고 기능은 별다를게 없는데 디자인만 다르게 해서 파는 상품'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이 예술은 1번과 차별화하려고 예술을 이용한다.
3번 예술은 이 글에서 이야기할 모더니즘 예술이다. 오늘날 미술관에 고이 걸려있거나 예술시장에 안착해 있는 주류 예술들이다. 미술관 등지에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채, 1번과 2번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려 한다.
4번 예술은 모더니즘 예술 이후 등장했으며, 그러면서도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예술들이다. 전통예술 종사자, 상업예술 종사자, 모더니즘 예술 종사자, 심지어 일반인에게도 외면 받는 소수파 예술들이다. 그리고 언제든 1번, 2번, 3번 예술로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현재는 1번, 2번, 3번 예술들도 과거에는 4번 예술이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모더니즘 예술은 대개 3번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2번일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1번이 될 수도 있다.(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예술가들에겐 인상주의는 1번 예술이나 다를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4번 예술'만은 다르게 부르려 한다. 즉, 이 글에서는 4번 예술을 되도록이면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을 써서 부르진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4번 예술을 아방가르드 예술, 혹은 안티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3] 여기서 안티모더니즘은 단순히 예술상에서의 모더니즘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상의 모더니즘에 전부 반대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특히 4번 예술에 대해 설명한 단락 마지막 줄 내용, 언제든 1번, 2번, 3번 예술로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현재는 1번, 2번, 3번 예술들도 과거에는 4번 예술이었을지 모른다.는 말에 집중해서 예술의 역사를 보기를 적극 권장하고 추천한다. 이와 관련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흥미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은 즐기는 문화가 다르다고 한다. 상류층은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에 기존 전통과 질서를 옹호해주는 예술(이를테면 클래식 음악이나 르네상스 미술)을 선호하고, 하류층도 기존 사회제도를 뒤엎기 보다는 먹고사는데 바빠 안정을 바라기 때문에 전통 민속문화(외국으로 치면 전통공예나 서커스, 한국으로 치면 민속품이나 탈춤 등)를 즐긴다고 한다. 중산층만이 기득권 세력으로 올라가길 원하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고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가치를 합리화하는데 사용한다고 한다.(예를 들면 사진이나 영화 등) 바꿔 말하면, 기존 상류층 세력이 도태되거나 축출되면, 미래에는 사진, 영화, 나아가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 고급예술이나 순수예술로 취급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실제로 다는 아니지만 이미 일부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은 철학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3. 모더니즘 이전 서양 미술의 역사 : 고대부터 낭만주의까지

모더니즘(modernism)의 어근인 모던(modern)의 어원은 중세에서 유래했다. 그 옛날 고딕 건축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전 예술(로마네스크)에 비해 새롭고 진리에 더 다가갔다고 여겼고[4], 이전 예술을 폄하했다. 이를 신구논쟁이라 한다.

여기에는 조각이 우월하냐 회화가 우월하냐 하는 논쟁도 있었지만 이는 일단 제끼고, 중요한 것은 서양에서는 유독 다른 지역과 달리 '지금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풍토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중세때는 이런 태도가 거의 미미하다시피 했고, 이런 태도가 극성맞게 커진건 근대 이후, 즉 르네상스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부터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유독 서양에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것도 크지만, 역설적이게도 정치적으로 서양에서는 중앙집권이 약했던 탓도 있다.[5] 역으로 중앙집권이 약했던 탓에, 상인 계층이 자기네 마음대로 이익활동을 벌이고 연구활동을 벌인 것이 기술 발전의 촉매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부산물로 그 새로운 상인 계층 앞에서 판촉행사를 하는 장인-예술가들이 등장하기도 했고 말이다.(대표적으로 예를 들자면 네덜란드) 중국이 황제와 환관 중심의 관료제, 유교 이데올로기로 중인들을 단속하고 쇄국정책을 했던 것과 대조적.

모더니즘과 이전 시대를 차별화하는 요소를 한마디 단어로 요약하면 반항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과거의 관습적 예술 표현을 거부했다는 것. 그렇다면 과거에는 관습적으로 어떤 예술을 만들었을까?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상화(idealization)라 할 수 있다. 관습적인 미술은 표현하는 대상의 현실적인 모습 대신,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고자 하였다. 그리스 미술부터 이어진[6] 이상적 표현에 대한 추구는 모더니즘까지 이어져왔고, 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려 했던 움직임이다.

3.1. 고대

파일:external/daljin.com/6000122532_20081111.jpg
미론, <원반 던지는 사람>, 기원전 5세기경

파일:external/www.getty.edu/01520401.jpg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가 그려진 항아리>, 약 기원전 540년경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이나 도자기에 그려진 주제는 대부분 신화 속 이야기였다. 신체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 모습은 어디까지나 이상화된 모습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소위 황금비례라고 불리는 자연적 비례가 아주 중요했고, 예술에선 이를 인체에 적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병적으로 비례에 집착했는데,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현실이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현실의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을 것을 그리는 대신 이데아의 것을 그리고 싶어했기 때문에 인간이 수학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비례에 집착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모더니즘이 시작되기 까지 2천여년 동안 서구세계를 지배했다.

3.2. 중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7px-Duccio_-_Maest%C3%A0_-_Google_Art_Project.jpg
<루첼리 마돈나>, 1285 - 1286

중세시대에 회화는 곧 성화였고, 조각은 곧 성상이었으며, 건축은 곧 성당이었다. 그나마도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질 정도로 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거부감을 가졌다. 이슬람교는 아직도 알라무함마드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거부감을 가진다. 그나마 카톨릭은 그리스 정교회와 달리 대중에게 교육한다는 목적으로 형상화를 정확한 형식 안에서만 허용했는데, 오늘날 보기에 이 형식이란 것이 상당히 조악하다. [7] 인체 비례가 무시되고, 원근감과 양감이 없어 그림이 평면적인 데다가, 중력이 무시되고 있는데, 결국 따지고 보면, 너무나 신성해서 감히 그림 따위로 표현할 수 없다 여겼기에 저렇게 비현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신성한 것들을 함부로 사실적이게 그릴 수 없으니 정해진 형식 내에서만 그림을 그렸는데, 대신 그림 자체의 상징성을 더 중요시했다. 나타내고자 했던 상징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권위, 고귀함 등이 있는데 금박이나 그보다 비싼 울트라마린 물감을 남발한것도 마찬가지로 천상의 고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였다. (이는 불상의 금박과 같다.)

3.3.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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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사실적인' 이미지를 그리는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작되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베네치아 등을 통해 비잔틴과 이슬람에 남아있던 그리스 로마 문화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몇백년동안 그리스 따위 제대로 모르고 살다가 실감나게 잘만든 조각이나 회화 작품을 보니 르네상스 사람들은 뿅가 죽으려 한 것이다. 또 한가지 중세와 르네상스가 다른 점은, 이때부터 예술가들이 장인에 그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실력을 뽐내려 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후원자나 의뢰자의 눈에 들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그러나 역시 이때도 주제는 늘 성경이나 신화 이야기였다. 아니면 후원자를 미화시키고 이상화시킨 그림들이거나. 이는 이후 웅장함과 역동성을 강조하는 바로크나 귀족적이고 장식적인 로코코 때에도 마찬가지였다.[8] 단지 후원자가 성직자냐 왕족이냐 귀족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3.4. 신고전주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97px-Jacques-Louis_David_-_Marat_assassinated_-_Google_Art_Project_2.jpg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이후 프랑스혁명 시기의 신고전주의 회화는 어땠을까? 왕정이 무너졌지만, 여전히 예술은 이상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했다. 심지어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들은 권력 정당화를 위해 예술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크 루이 다비드 같은 화가들은 같은 급진파 자코뱅 당원였던 장 폴 마라의 죽음을 마치 순교자가 성스럽게 죽은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다비드는 이 그림을 사람들에게 공개하고는 선전용으로 써먹었다. 실제로 장 폴 마라가 있었던 욕실에는 각종 지도와 서류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마라는 처참하게 죽은 상황이었다. [9] 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실제 현실과는 다르게 그렸다. 마라를 이상화시킨 것이다.

3.5. 낭만주의

파일:external/accad1db3799f4fc8e53f2995616ad795d08b92809c491902046dc2332939b9f.jpg
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게 아니라 이상화시키기는 이후의 낭만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쓴 동명의 시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바이런이 쓴 시에서는 사르다나팔루스를 군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의연하게 불길로 걸어 들어간 고귀한 희생자로 묘사했는데, 들라크루아는 이를 무시하고 정반대로 폭력마저 쾌락으로 즐기고 마는 잔인한 폭군으로 묘사했다. 낭만주의 사조는 이렇듯 대상의 사실적인 표현보다 화가의 주관적인 표현을 더 중요시하는 사조였다.

4. 모더니즘 사조

이와 같이 겉보기에는 사실적이지만 실상은 이상화되어 있는 예술들이 19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점차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역사, 사회적 배경은 모더니즘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잠시 다시 위에서 설명했던 4가지 미술 분류를 다시 생각해보자.

1) 전통적, 보수적 예술
2) 상업화, 자본화된 예술.
3)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예술을 하길 추구했던 예술. 우리가 흔히 아는 모더니즘 예술.
4) 1번의 시대착오성, 2번의 천민자본주의 속성, 3번의 폐쇄성과 기성세력화됨을 비판하는 예술.

19세기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경제적으로는 산업기술이 발전하면서 2번 경향, 즉 예술적 기교들을 상품판매에 동원하려는 경향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하지만 아직 오늘날의 디자인 산업 정도로 대규모가 되진 않고, 예술이 판화 인쇄물이나 상표 등에만 간간히 사용되던 수준이었다. 이스트만 코닥 정도 되어야 현대적인 의미의 광고가 나오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4px-Brooklyn_Museum_-_Nadar_%C3%89levant_la_Photographie_%C3%A0_la_Hauteur_de_l%27Art_-_Honor%C3%A9_Daumier.jpg
도미에, <사진을 예술로 높인 나다르ㆍNadar Elevating Photography to the Level of Art>, 1862.[10]

그리고 이 시기에 드디어 사진이 발명되었고, 19세기 중엽이 되면 파리 곳곳에 사진관들이 성업하게 된다. 도미에가 그린 삽화를 보면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초기 사진 시기에는 사진 성능이 형편없어 3류 화가들이 일일이 현상액을 붓으로 수정해주고 색을 입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후 사진기술이 발전한 뒤에는 당연히 기존 초상화가들은 밥벌이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앙드레 아돌프-으제느 디스데리(Andre Adolphe-Eugene Disderi)가 특허를 낸 명함판 사진(Carte-de-Vistite)의 예.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등이 일어나 왕족, 귀족 세력이 몰락하였지만, 아직 신진 세력인 부르주아들은 자기 취향 줏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시기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은 1번 예술을 어레인지하는 수준에서 문화 생활을 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 당시 초상사진들을 보면, 자기들이 무슨 귀족이나 그리스 신들인 마냥 코스프레하고 찍은 사진들이 많다.(위의 사진은 약과다) 이외에도 속은 철골 구조면서 겉은 그리스 로마 건축을 흉내낸 대규모 오페라관을 짓거나, 살롱에서 과거 아카데미즘(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회화를 놓고 품평하며 사교모임하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4px-Musei_Wormiani_Historia.jpg
경이로운 방의 한 예. <"Musei Wormiani Historia", the frontispiece from the Museum Wormianum depicting Ole Worm's cabinet of curiosities.>

그 이외에 눈에 띄는 점이라면, 1759년 대영박물관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1793년 프랑스 혁명정부가 루브르궁 대전시장에 국립중앙미술관을 설치하고 대중에게 공개했다는 것 정도. 그 이전까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건 그저 '귀족들의 골동품 창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뿐이다. 경이로운 방(Cabinet of curiosities)이라 불린 이 창고는 귀족들이 진기한 미술품들을 모아놓고 다른 귀족들에게 자랑하는 공간이었을 뿐이었다.[11] 우리가 아는 권위적이고 가까이 하기 힘든 미술관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후 현대미술관은 전시물들을 저렇게 다닥다닥 붙여놓진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루브르 미술관 같은 19세기 이전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미술관은 저런식으로 다닥다닥 디스플레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당연히 당시 이런 곳에 드나든 관객들은 부르주아들이 대부분. 오늘날 서민층에 해당하는 (그리고 오늘날엔 대중문화의 주요 고객들인) 당시 노동자 계층은 정말 심심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유일한 낙은 '빵과 서커스'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니 당연히 미술관 운영이나 소장, 전시하는 작품도 부르주아 취향에 맞춰서 전시 될 뿐이었다. 근데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당시 부르주아들은 자기만의 취향 줏대가 없어, 미술작품도 그냥 이전 귀족들의 취향을 그대로 받아서 흉내내는 정도에 그쳤다. 다시 말해, 이전 관학파(아카데미즘) 예술이 그냥 머물러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

이들 기존 아카데미즘이 자리를 꽉 잡고 있는 상황에서, 신세대 화가들은 정말 그림 기교가 뛰어나지 않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점차 이 당시 신세대들은 자기들이 이전 세대와 다르다는걸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4번 예술을 만들려 시도했다. 그렇게 나온 예술이 아래에서 설명할 리얼리즘이나 인상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예술들은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는 더 이상 4번 위치에 있는 예술이 아니게 되었다. 도리어 3번 예술의 위치에 가있게 되었다.

4.1. 1830-1900

4.1.1. 리얼리즘 1840 ~ 1860

4.1.2. 인상주의 1863 ~ 1890

4.1.3. 탈인상주의 1886 ~ 1905


탈 인상주의의 화가는 5명으로 꼽을수 있다. 먼저 탈인상주의를 만들고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그린 조르주 쇠라, 정물화를 많이 그린 폴 세잔이,고흐의 라이벌 폴고갱,빛의 화가 클로드 모네,그리고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해서 별이 빛나는 밤등을 그린 빈센트 반 고흐가 있다

4.1.4. 모더니즘 이외의 흐름

후대 미술사에서는 인상주의가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긴 했지만, 당연히 이 이외에도 다른 미술사조도 있었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이렇게 '반항적인' 예술 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다른 곳은 어땠을까?

이상하게도 영국 미술계에서는 도리어 이전 시대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일어났다. 역설적이게도 문화사에서는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걸맞지 않게 문화는 이전 과거 시대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종종 보인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그런 시대로, 이 시기 건축을 보면 르네상스나 바로크 건축의 껍데기만 빌려온 느낌을 준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문화는 여전히 새로운 시대에 변화하지 못하고 이전 문화를 답습하는데 그친 것이다.

이미 모더니즘도 한풀 꺾인 요즘의 시각에서는 그게 그거일 수 있지만, 모더니스트들은 이런 모습을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여겼다. 모더니스트들은 시대가 변화한 만큼, 이전 문화의 답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업사회에 종속된 것도 아닌,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더니스트들 입장에서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미술'은 마치 새 술을 새부대에 담지 않는 꼴처럼 보였을 것이다.(마치 오늘날 얼리어답터들이 아직도 스마트폰을 안쓰고 피쳐폰 쓰는 사람들을 희한하게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20세기가 되어서 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 미술계에는 분명 복고적 경향이 있었다.
4.1.4.1. 라파엘 전파 1848 ~ 1854
4.1.4.2. 미술공예운동 1860 ~ 1910
4.1.4.3. 아르누보 1890 ~ 1910
4.1.4.4. 상징주의 1880 ~ 1910

4.2. 1900-1950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로 분류되는 화가들은 이전의 관습화된 화풍을 버리고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는데 집중했다.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가 되자, 이러한 새로움을 시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피카소, 뒤샹 등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서 계속 확대, 발전되었고, 그 결과 유럽 모더니즘 회화의 전성기를 만들게 된다.

1) 전통적, 보수적 예술
2) 상업화, 자본화된 예술.
3)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예술을 하길 추구했던 예술. 우리가 흔히 아는 모더니즘 예술.
4) 1번의 시대착오성, 2번의 천민자본주의 속성, 3번의 폐쇄성과 기성세력화됨을 비판하는 예술.

이를 다시 앞서 설명한 4가지 예술 분류로 놓고 보면,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회화는 이제 4번 예술의 자리에서 3번 예술의 자리로, 나아가 1번 예술의 자리로 지위를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화가들은 3번 에술의 자리에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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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머이브릿지, <말의 동작 촬영>, 1878

이런 상황에서 기술적으로는 영화가 발명되었다. 에드워드 머이브릿지 같은 기술자들이 영화의 시조쯤 되는 연속사진 촬영을 시도했고, 이후 우리가 잘 아는 뤼미에르 형제토마스 에디슨 등이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하면서 영화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영화와 비슷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알다시피 영화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기본 원리는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쏘마트로프(Thaumatrope),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 죠트로프(Zoetrope),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 등 여러가지 기술이 있었으나, 결국 시장에서 살아남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스크린에 투사(projection)하는 방식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넓은 화면을 한번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그만큼 더 많은 대중에게 값싸게 많이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기 영화는 주로 동네 장터나 카페 등에서 상영되었고, 장르는 코미디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이 당시만해도 영화는, 순전히 신기한 눈요기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탄생 초기의 영화는 전용 상영관 없이 장터극장(fête forain)을 떠돌며 상영되었고, 1896년에야 겨우 파리와 리용에 전용 상영관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대도시에서는 영화업자들이 일정 기간을 임대로 상영관을 확보하여 상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1897년 5월 4일의 파리 자선 바자회 화재로 부유층 인사 128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나자 영화는 위험한 오락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본격적인 영화 상영관 건립이 불가능하게 된 적도 있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신기하기 짝이 없던 활동사진이 그 길이가 너무 짧고 천편일률적인 내용 때문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과 대다수 지식인들은 영화를 경멸하는 풍조까지 나타났다.
당시의 장터를 중심으로 한 극장에서는 영화 1편당 한 쇼트로 구성된, 대략 1분 정도의 상영시간을 가진 필름을 10여 편 정도 보여주고 1프랑 내지 50 상팀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상영 중에는 변사의 해설이나 손풍금 따위의 음향효과가 뒤따랐고, 초기의 뤼미에르 식의 기록영화 위주에서 차츰 벗어나 희극적이거나 남녀관계에 관한 내용이 가미되면서 서민들이 즐기는 오락으로 자리 잡게 된다. [12]

그러나 영화를 단순히 킬링타임용 즐길거리에서 예술로 발전시키려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영화를 훌륭한 예술 ~표현 수단으로 보고 굉장히 진지하게 탐구했다. 에이젠슈타인이 완전히 창안한건 아니자만, 그가 발전시킨 몽타주 개념은 훗날 영화가 필름 편집을 통해 탄탄한 스토리 위주의 제작 경향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역사에 남을 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 이외에도 1960년대 이후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예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누벨바그 등도 영화의 수준과 폭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사회적으로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더 심화되면서 이제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 일반인 대중이 등장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 부르주아 문화 중심의 경제 구조를 대중문화 중심의 경제 구조로 변화시켰다. 문화산업의 중심도 미술관이 아니라 영화관이나 라디오 방송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말이다. 물론 대중문화 중심의 문화산업 구조는 기업가이자 자본가이자 언론인이고 정치인인 부르주아 계층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대중에게 (물질적인 것이든 감각적인 것이든) 상품을 팔고 이윤을 챙기려 했다. 따라서, 사실 엄밀히 말하면 대중문화는 '우리의 문화'는 아니다. 오늘날 문화에서 유행이 생기는 것도 결국 그 대중문화가 정말 우리가 원하는 문화는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좋아하는 문화 콘텐츠나 예술이라면 1년이든 10년이든 지나도 질리지 않고 잔잔히 좋은 느낌을 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위 제국주의 국제질서는 이런 부르주아 집단간의 이익 다툼이 국제적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그 결과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이 두 시기를 거치면서 유럽 부르주아가 이룬 찬란한 사회는 퇴색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 유럽 문화를 일명 질서로의 회귀(rappel à l'ordre)라 부르기도 하는데, 전쟁으로 인해 문화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보수화된 시기이다. 2차세계대전과 나치즘은 여기에 또 다시 찬물을 끼얹게 된다. 그 결과 세계 예술의 흐름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는 이전의 인간의 능력과 이성을 예찬하는 분위기가 죽어버리고 회의감과 환멸이 가득한 시기였다. 이 시기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전처럼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는 이렇게 전쟁을 하는가?', '어떻게 해야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나?' 같은 문제들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 아래에서 우리는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예술이 어떻게 3번 예술에서 1번, 2번 예술로 변화하게 되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어떤 '4번 예술'이 있었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4.2.1. 분리파 1892~1910

4.2.2. 야수파 1904 ~ 1909

4.2.3. 입체주의 1907 ~ 1914

4.2.4. 표현주의 1905 ~ 1930

4.2.4.1. 다리파 1905 ~ 1913
4.2.4.2. 청기사파 1911

4.2.5. 미래주의 1909 ~ 1916

4.2.6. 다다이즘 1916 ~ 1930

4.2.6.1. 초현실주의 1920년대

4.2.7. 더 스테일(신조형주의) 1917 ~ 1931

4.2.8. 바우하우스 1919 ~ 1933

4.2.9. 러시아 아방가르드 1890 ~ 1930

4.2.9.1. 구축주의 1920년대
4.2.9.2. 절대주의 1913 ~ 1917
4.2.9.3. 생산주의 1917년 이후

4.2.10. 모더니즘 이외의 흐름

4.2.10.1. 나치 시대의 예술(퇴폐미술) 1933 ~ 1945
4.2.10.2. 사회주의 리얼리즘 1922~1986

4.3. 1950-1970

4.3.1. 추상표현주의 1940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 2차대전 이후 미국
액션 페인팅 (Action painting)
색면 회화 (Color field painting)
서정적 추상 (Lyrical Abstraction)
타시즘 (Tachisme) 1940년대 후반 - 1950년대 중반 프랑스

4.3.2. 미니멀리즘

5. 관련 항목

6. 참고자료

할 포스터, 로잘린드 크라우스, 이브-알랭 부아, 벤자민 H.D.부클로, 데이비드 조슬릿 지음 | 배수희, 신정훈, 오유경 옮김 | 김영나 감수 | 1900년 이후의 미술사 - 모더니즘, 반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 세미콜론 | 2012년 08월 20일 출간[13]


[1] 뉴욕현대미술관 초대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 Jr.)가 '입체주의와 추상예술전'을 볼 관객들을 위해 정리했다.[2] 그 시대 때는 그 미술 사조가 '현대'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 기점으로 '근대'가 되어버려서 그렇다.[3] 이는 '1900년 이후의 미술사' 글쓴이들의 분류에 따른 것이다.[4] 다시 말해 신의 뜻에 더 가깝다는 뜻.[5] 독일이나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조차 지역 귀족들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6] 이러한 이상적 모습을 가장 잘 그렸던 것이 그리스였기 때문에 모더니즘 이전에 서양미술사를 보면 그리스의 그림자가 계속해서 드리워져있다.[7] 가령 아기 예수의 경우 실제 아기처럼 보이지 않고 작은 사람 ~같다.[8] 둘은 거의 같은 시기의 산물이다.[9] 피가 욕조 주변에 가득하고, 시신이 많이 부패된 상황이었다고 한다.[10] 나다르는 자신의 사진관에서 1874년 제 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이미 1858년에 기구ㆍ氣球를 타고 세계 최초로 공중 촬영을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사진술의 발 명으로 인한 화가들의 충격은 매우 커서 "회화는 죽었다!"고 단언할 정도였으나, 추상회화와 같은 신개념의 미술을 산출하는 기폭제 역할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 문인들, 미인들의 기념사진을 찍어 초상사진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정착해 주었다. (Judith Wechsler, Ibid., p. 20, 박홍규, Ibid., pp. 212~217) 원출처[11] 박제, 화석, 민속품, 식물, 동물, 유물, 미술품 등 종류는 다양. 이후 자연사박물관, 박물관, 미술관, 식물원, 동물원 등은 다 이 귀족들의 전시관에서 유래된 것이나 다름없다.[12] 최춘식, 프랑스 영화의 대중성 - 영화 <탕기Tanguy (Etienne Chatiliez : 2001)>를 중심으로, 한국프랑스학논집 제 57 집 (2007) pp. 415~434[13] 이 책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 책의 저자들은 이들이 신진 연구자였던 1960년대 이후부터 활발하게 모더니즘을 비판하던 포스트모던 계열 학자들이다. 이들은 학술지 옥토버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본 항목의 미술사 개괄도 그들의 시각이 상당부분 반영되어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이들의 견해는 이 책이 발간을 전후해서 다소 수정되었고, 이 책에도 그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