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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Baroque | ||
영국 런던[1]에 있는 성공회 런던교구의 주교좌성당 | ||
17세기 ~ 18세기 | ||
지역 |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 | |
언어별 명칭 | ||
프랑스어 | Baroque | |
영어 | Baroque | |
네덜란드어 | Barok | |
이탈리아어 | Barocco | |
스페인어 | Barroco | |
독일어 | Barock | |
에스페란토 | Baro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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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18세기 유럽의 미술, 건축, 음악, 그리고 문학 등을 아우르는 예술 양식이다.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pérola barroca'에서 유래된 단어이며 프랑스의 여행가인 샤를 드 브로스의 편지나 생시몽 공작의 회고록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덩치만 큰 건축 양식이라는 의미로 비하하는 호칭이며, 고딕처럼 멸칭[2]이었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비하하는 뜻이 떨어져 나간 경우이다.바로크 양식 자체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맞선 가톨릭의 자체 정화 운동이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호응으로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전파된 것이었지만 사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이전 시대를 부르기 위해 바로크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이는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개척하며 발전하던 영국이 너무 화려하고 퇴폐적으로 보였던 프랑스의 문화(바로크와 로코코)와 결별하고, 보다 순수해 보였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따르려고 했던 신고전주의를 발생시켰기 때문이었다. 신고전주의의 관점에서 이전 시대의 문화를 공격하느라 사용한 멸칭 중 하나가 바로크였던 것이다. 이후 신고전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 이후의 프랑스에서 절정을 맞게 된다.
바로크 양식은 군주들이 주도적으로 지원한 궁정적인 바로크와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발현한 부르주아적 바로크로 나뉠 수 있다.
궁정적인 바로크의 중심은 17세기 부르봉 왕조 치세하의 프랑스 왕국이었다. 궁정적인 바로크는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을 거치며 각국이 종교에 따라 원수지간이 되면서 일어난 국가간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육성하는 목적의 예술이었고, 따라서 루이 14세 등의 절대왕정 이미지가 매우 강한 예술 사조였다. 전반적으로 크고 화려하면서도, 어둡고 장중한 분위기를 지향했다. 이는 절대왕정의 확립에 따라 예술 역시 특정한 형식이 다른 어떤 형식보다도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흐름하에 나타난 분위기였다.
르네상스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미술 아카데미는 이 무렵에 들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권위를 갖는 기관이 되었고, 국가가 원하는 미술 양식을 확립하고 이를 위한 예술가들을 육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교 국가들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도 바로크 양식의 모스크 건설에 열을 올렸다. 이쪽은 아예 비잔틴 건축을 되살리는 신고전주의 운동도 함께 융합되어 타 유럽 국가들의 바로크 시대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는데, 누루오스마니예 모스크와 돌마바흐체 궁전 등이 대표적이었다. 궁정적인 바로크는 이후 루이 14세의 죽음과 함께 더 섬세하고 복잡한 장식이면서 가볍고 밝은 분위기를 지향하는 로코코 양식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부르주아적인 바로크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곳인 스페인령 네덜란드(플란데런)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나타났다. 이 둘이 함께 묶이긴 하지만 당시 두 지방은 갓 독립을 이룬 네덜란드와, 스페인에 끝내 종속된 플란데런이라는 전혀 다른 정치적 환경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두 지방의 사회, 경제적인 환경은 유사했는데, 두 지방 모두 경제력을 갖춘 시민이나 상공업자 같은 부르주아 계층의 영향력이 당대 유럽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강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절대주의와는 연관이 없는 풍속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등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다른 국가들에 비해 사회의 많은 계층들이 예술 작품을 구매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루벤스와 렘브란트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로, 루벤스는 거대한 공방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문하생들을 거느리고 공장처럼 작품을 생산했다. 렘브란트는 당대의 다른 어떤 예술가들보다도 회화의 개인적인 면모에 집중했고, 그 덕에 불우한 말년을 보냈지만 훗날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2. 음악
바로크 음악 항목 참조.3.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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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는데 그 균형이란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전체적인 균형에 비할 수는 없지만, 매너리즘의 의도적인 부조화나 로코코의 단편성보다는 르네상스의 균형에 가까웠고, 바로크 미술이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인 참여를 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인 참여를 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6세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 완결성에 대하여 양감, 광채, 역동성에 호소하였으며 과격한 운동감과 극적인 효과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과 그 이후의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팔레트에서 그들은 강렬하고 따뜻한 색상을 사용했으며 특히 빨강, 파랑 및 노랑의 기본 색상을 사용하여 종종 세 가지 색상을 모두 가까이 배치했다. 그들은 르네상스 그림의 균일 한 조명을 피하고 그림의 특정 부분에 강한 명암 대비를 사용하여 중앙 행동이나 인물에 주의를 집중 시켰다. 그들의 구성에서 그들은 르네상스 회화의 고요한 장면을 피하고 가장 큰 움직임과 드라마의 순간을 선택했다. 르네상스 회화의 고요한 얼굴과 달리 바로크 회화의 얼굴은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바로크 화가들은 종종 그림의 중심에서 벗어난 비대칭 구도를 사용했고, 수직도 수평도 아닌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축을 만들어 불안정하고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등장인물의 의상을 바람에 날리거나 몸짓에 따라 움직이게 함으로써 이러한 움직임의 인상을 강화했다. 전반적인 인상은 움직임, 감정 및 드라마였다. 바로크 회화의 또 다른 필수 요소는 우화였다. 모든 그림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며, 종종 교육받은 시청자가 알고 읽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징과 우화적인 문자로 암호화되어 있다
회화의 경우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바로크 회화는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에 의해 창안되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스페인과 북유럽에까지 퍼졌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루벤스와 렘브란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18세기 독일 미술사학자인 요한 빙켈만와 같은 고전주의 부활 옹호론자들은 바로크 미술을 르네상스 미술의 쇠퇴이며 이상적인 비례와 균형을 중시한 르네상스 미술과 달리 너무나 과장되며 왜곡되며 가치를 잃은 진주와 같다고 비판하였다. 이 시대의 예술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 근대적인 미술사가 정립되면서 뵐플린 등에 의한 바로크 옹호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4. 건축
바로크 건축은 16세기 후반부 유럽은 역동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대항종교개혁과 가톨릭의 부활, 근대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절대왕정의 등장, 천문학의 발전에 따른 시-공간 개념의 변화, 욕망과 놀이문화의 유행 등이 나타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또한 16세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의 대립 상황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성기 르네상스에서 후기 양식인 과도한 장식이 수반되는 후기 르네상스로 오게 되었고, 이러한 후기 르네상스의 과도한 장식과 매너리즘의 반고전주의를 이어받은 바로크 건축 양식이 등장하였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수세에 몰린 가톨릭교회의 후원 아래 로마에서 시작되었다.4.1.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은 1585년 사코 디 로마 이후 황폐화된 로마의 재건 작업을 통해 출발하였다. 종교 전쟁이 유럽을 휩쓸고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비뇰라, 포르타 등의 건축가들에 의해 로마는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다. 예수회의 본산인 제수 성당을 기점으로 로마의 4대 교황 대성전 중 성 베드로 대성당,[3] 성모 대성전, 그리고 라테라노 대성전까지 이 시절에 재건축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바티칸과 로마의 구시가지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들은 당시까지 유행하던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로마 고전주의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당시 실추되었던 가톨릭의 권위를 되살리고자 극적이고 흥겨운 연출을 위해 화려한 바로크 특유의 양식을 정립하였다.베르니니와 보로미니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전성기에는 이 둘이 라이벌 구도를 이루면서 다양한 건축물을 내놓았다. 성 베드로 광장으로 대표되는 베르니니는 타원, 기둥의 숲, 정통 고전주의의 문법을 구사하였고, 보로미니는 이의 대척점에서 비정형의 다양한 기하학적 도형들의 역동적인 중첩을 통해 고전주의부터, 중세 건축, 매너리즘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법을 활용하였다.
후기에 이르면 바로크 건축의 중심지는 로마에서 사르데냐 왕국[4]의 수도 토리노로 옮겨갔다. 사르데냐 왕국은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 시절부터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특히 프랑스 공주 크리스틴 마리가 어머니였던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시기에 바로크 양식의 구시가지가 들어섰다. 주로 보로미니의 비정형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건축물들이 탄생했으며, 보로미니 이상으로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기하 작도에 기반한 건축을 구사하였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시기에 꽃피운 토리노의 양식들은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이 프랑스, 독일의 바로크 양식으로 넘어가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으며, 역으로 이북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사르데냐 왕국의 궁전으로 쓰였던 스투피니지 사냥 궁전(Palazzina di caccia di Stupinigi), 마다마 궁전(Palazzo Madama) 등이 대표적인 예시.
4.2. 프랑스
프랑스 바로크 건축은 종교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마치고 새로이 출발한 부르봉 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앙리 4세 시절부터 파리 재개발 계획을 실행하면서 건축 붐이 일었고, 이는 루이 14세 때 절정을 이룬 후 로코코로 넘어가게 된다. 프랑스 바로크는 절대왕정의 권위를 치켜세우는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원류인 이탈리아 바로크와 그 목적이 어느 정도 일치하였다.프랑스 바로크 건축은 크게 종교적인 건축물과 비종교 건축물로 나눌 수 있다. 교회 등의 종교 건축물에서는 종교 전쟁을 마치고 다시 가톨릭으로 회귀한 역사를 반영하여 베르니니 식의 정통 고전주의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비종교 건축물은 당시 바로크 건축의 후원자였던 왕실의 덕으로 다양한 궁전부터 호텔, 성채까지의 다양한 세속적인 목적의 건축물들이 세워졌으며, 본격적으로 타국에 영향받지 않는 프랑스 고유의 국가 양식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졌다. 왕실은 아예 왕립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국가 단위로 건축 양식을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나, 이 시대에는 아직 완벽하게 자리잡지 못했으며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리슐리외, 마자랭, 콜베르 등의 재상들의 건축 취향도 반영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고전주의와 중세부터 이어지는 프랑스 고유의 전통이 결합된 프랑스 특유의 바로크 양식이 완성되었다. 뤽상부르 궁전, 루브르 궁, 베르사유 궁전, 콩드 호텔 등의 프랑스의 수많은 랜드마크들이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4.3. 영국
영국은 지리상의 이유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도입이 지지부진했다. 대신 이 시기에는 튜더 양식이라 불리는 영국 특유의 건축 양식이 들어섰다가 청교도 혁명으로 혼란스럽던 정치 상황 때문에 찰스 2세의 왕정복고기에 들어서야 바로크 양식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1666년의 런던 대화재로 도시의 태반이 소실되면서 이를 복구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였다. 영국에서의 바로크 양식은 프랑스와 비슷하게 국가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당시 첨단을 달리던 건축 양식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영국이 본격적으로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영국 고유의 양식을 요구하여 이 둘 사이의 절충을 통해 영국 바로크 양식이 탄생한다.런던 대화재의 복구를 지휘한 크리스토퍼 렌이 영국 바로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학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의 시대상에서 성장한 크리스토퍼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엠마누엘 칼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 그리니치 왕립해군병원, 세인트 폴 대성당 등의 작품을 남겼다. 크리스토퍼에 의해 탄생한 영국 바로크의 가장 큰 특징은 '과학적'이라는 것으로 과거의 건축가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문법들을 담습하지 않고 과학적인 사고에 기반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도입하였다. 이후 영국 바로크는 크리스토퍼 렌의 제자들에 의해 이어진다.
4.4. 독일
독일의 바로크 양식은 사실상 로코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덕에 휴기에 이르면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을 수준의 장식성을 보여주었다. 영국과 비슷한 시기인 17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영방국가들에도 바로크 양식이 도입되었으며, 이 무렵이면 반쯤은 독립국가 수준이었던 제국 내 여러 국가들의 다양한 지역적 전통에 맞춰 교회와 궁전을 중심으로 다양한 건축물들이 탄생하였다.제국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는 궁전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영향을 받아 수평적인 확장이 두드러졌다.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건축은 제국의 다른 지역보다 웅장한 편이었다. 가톨릭의 부흥이 이루어졌던 바이에른 선제후국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바로크 건축이 발전했는데, 프랑스 로코코의 영향과 공예가 출신이던 주요 건축가들의 성향으로 인하여 특유의 장식적 경향과 독일 교회 특유의 엄숙주의와 신비주의를 내세운 경향의 두 갈래의 양식이 나타났다.
동남부 작센 선제후국에서는 고전적인 오더 양식이 거의 의미를 잃고 장식이 부각되는 형태의 건축이 나타났다.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이 대표적으로, 이러한 경향은 상수시 궁전 등의 북독일 지역의 로코코 양식으로 이어진다.
5. 네오 바로크
바로크 양식은 루이 14세가 사망한 1700년대 이후 쇠퇴하였다. 19세기 중반 무렵에는 바로크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네오 바로크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기도 한다. 네오 바로크 양식을 이끌었던 주역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과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이었다. 이에 따라 제2제정식이라고도 불리운다. 네오바로크 양식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행하다 아르누보양식에 자리를 넘겨주었다.[1] 시티오브런던의 러드게이트 힐에 있다.[2] 고트(goth)의 양식(ic). 한국어로 치면 '오랑캐 양식'정도 된다.[3]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성당은 건축 시작에서 완성까지 150년(...)이 걸린 지라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다양한 건축 양식들의 집합소가 되었다.[4] 1861년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