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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돔에서 내려다본 성 베드로 광장. |
1. 개요
성 베드로 광장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자리한 넓은 광장이다. 이탈리아 바로크의 거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1656~1667년에 걸쳐 설계해 완공했으며, 최대 30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광장의 평면은 열쇠 구멍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베드로의 지물이 천국의 열쇠이기 때문이다.2. 역사
2.1. 광장이 만들어지기 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비비아노 코다치, 1630년경, 캔버스에 유채, 168 x 22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1] |
광장이 들어서기 전의 성당 앞은 수많은 집과 복잡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힌 무질서한 공간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교황 율리오 2세가 1506년 4월 18일에 초석을 놓은 이래 교황 우르바노 8세가 1626년 11월 18일에 축성식을 거행할 때까지 120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광장을 만들려는 논의는 나오지 않았다. 광장을 조성하려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축성식이 끝나고 20년 가까이 지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치세 때였다. 건축가 카를로 라이날디(Carlo Rainaldi, 1611~1691)는 교황의 요청을 받아 각각 육각형, 사각형, 원형, 타원형으로 된 광장 설계안 4가지를 제출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계획에 속도가 붙은 것은 인노첸시오 10세가 사망한 뒤 즉위한 교황 알렉산데르 7세 때로, 알렉산데르 7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곧바로 건축위원회에 광장 조성에 대한 논의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광장 공사를 담당할 건축가로는 알렉산데르 7세가 파비오 키지 추기경이었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수석 책임자였던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선정되었다.
알렉산데르 7세는 성 베드로 광장을 통해 대성당과 교황청, 나아가 가톨릭과 교황권의 위세를 떨치고자 했다. 광장 공사에 필요한 예산이 100만 스쿠디가 넘을 것으로 추산되자, 이처럼 천문학적인 비용은 그렇잖아도 전임 교황들의 헤픈 씀씀이 때문에 적자에 시달리던 교황청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공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교황은 "광장 공사가 로마 빈민과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 로마 시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이므로,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 하고 주장하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2.2. 광장의 형태
알렉산데르 7세가 베르니니에게 주문한 광장의 용도는, 교황이 사도 궁전에서 광장에 모인 인파에게 강복할 때, 인파가 교황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베르니니가 처음 설계한 광장의 형태는 사다리꼴 모양이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설계해 르네상스 양식을 극대화한 것으로 찬사를 받은 캄피돌리오 광장이 바로 사다리꼴 형태였기 때문에 대선배의 업적을 참고한 것이다. 그러나 목재 구조물을 만들어 광장 예정지에 세워본 결과 광장을 둘러쌀 회랑이 사도 궁전에서 교황이 등장하는 창문을 가리는 것으로 드러나자 사다리꼴 설계는 철회되었다.광장 예정지에 있던 건물들을 철거하는 작업이 1656년 9월 29일에 시작되는 동안에도 형태와 규모가 확정되지 않은 가운데, 1657년 3월 베르니니는 사각형 양쪽에 반원 하나씩을 붙인 타원형 모양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걸 본 건축위원회 사람들의 반응이 미덥지 못하자 베르니니는 원 2개를 포갠 타원형 모양, 다시 말해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광장을 다시 제안하면서 건축위원회와 교황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베르니니는 1656~1667년에 걸쳐 광장을 설계했는데 설계 완성했는데, 광장에 운집한 보다 많은 군중들이 대성당 정면에 있는 강복의 발코니와 사도 궁전에서 거행되는 교황의 강복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원 2개를 겹친 타원형으로 평면을 만들었다. 광장의 북서쪽에는 1981년 5월 1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저격당한 위치가 붉은색 반암으로 표시되어 있다. 로마 시내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다가 광활한 광장이 갑자기 시야에 펼쳐지게 해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베르니니의 의도였으나, 1929년 2월 11일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으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가 화해한 것을 기념해 베니토 무솔리니가 산탄젤로 성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이어진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이라는 대로를 개통하면서 그 길목에 있던 궁전과 성당 및 여러 고택들을 모두 철거해 베르니니의 의도가 빛을 바랬다. 관련 영상
3. 주요 건축
3.1. 오벨리스크
광장 중앙에 있는 높이 25.5m(기단부까지 합친 높이는 41m), 무게 320t에 달하는 이 오벨리스크는 그냥 장식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성 베드로 성당 자리의 근처에 있었던 네로 경기장(Circus of Nero)에서 성 베드로가 처형당했다고 전하기 때문에, 그 네로 경기장에 세워져 있던 오벨리스크를 순교의 '증인'으로서 성 베드로 광장의 한복판으로 가져온 것이다. 어찌 보면 오벨리스크 자체가 성유물인 셈.
이 오벨리스크에는 더 깊은 역사가 있다. 원래 기원전 20~기원전 19세기 이집트 제12왕조의 어느 파라오가 헬리오폴리스에 세운 것이다. 서기 1세기에 활동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인 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가 저술한 백과사전 《(Naturalis Historia)》 제36권 제14~15장에 따르면(라틴어 원문)(영어 번역문), 이 오벨리스크는 '세소시디스(Sesosidis)의 아들 넨코레우스(Nencoreus)'가 '태양신에게 바쳐진 도시'에 세운 것이다. '태양신에게 바쳐진 도시'가 '헬리오폴리스'를 의미함이야 쉽게 알 수 있지만 건립자인 '넨코레우스'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후보로는 세누스레트(Senusret) 1세의 아들 아메넴헤트(Amenemhat) 1세와, 세누스레트 3세의 아들 아메넴헤트 3세가 있다.
최초 건립자와 경위를 알 수 없는 이유는 이 오벨리스크에 히에로글리프(고대 이집트 신성문자) 명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지운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히에로글리프가 없었고, 명문을 새기지 않은 이유 또한 불명이다.
위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따르면 이 오벨리스크가 로마로 건너온 것은 예수와 거의 동시대인 기원전 1세기 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의 이집트 문화유산 약탈과는 무관하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받은 이집트 총독 코르넬리우스 갈루스(Cornelius Gallus)가 이 오벨리스크를 알렉산드리아의 포룸 율리움(Forum Julium)으로 옮겼으며, 그 후 서기 37년 칼리굴라 황제가 로마市의 테베레강 서안에 마련한 개인용 전차 경기장에다가 이를 재차 옮겨 세웠다. 이때 오벨리스크를 자르지 않고 통째로 운반하기 위해 길이 105m, 너비 20m짜리 대형선을 건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주변이 황폐화되면서 오벨리스크는 옛 대성당 옆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오벨리스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 것은 1500년 뒤 교황 식스토 5세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이 대형 오벨리스크를 이동하여 세움은 당시로선 대단한 난공사여서 공사를 총 지휘한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가 1586년 4월 30일부터 9월 10일까지 인부 900여 명과 말 140여 필 등을 동원해 진행하였다. 이 시기는 아직 대성당의 돔도 완성되지 않았고, 옛 대성당의 정면이 남아 있으며, 성 베드로 광장을 어떻게 설계할지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던 때이다. 지금의 광장이 있기도 전에 오벨리스크는 이미 성당의 앞으로 옮겨진 것. 이 즈음을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사도 궁전에 있다.
이 공사를 두고 전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공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단계인 오벨리스크를 수직으로 세우는 작업을 할 때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모든 인부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 마찰로 인해 밧줄이 끊어지려 하자 한 인부가 용기를 내서 "당장 밧줄에 물을 부어요!"라고 소리쳤고, 그대로 한 덕에 공사를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이 인부는 처벌을 감수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오벨리스크를 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았고, 상으로 식스토 5세를 알현할 기회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전례 때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사용하는 종려나무 잎을 공급할 권한을 받았다.
한편 이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 광장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있는 쇠공 안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골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카이사르의 유골은 당시 로마인들의 풍습대로 화장된 후 비에 씻겨 내려갔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오벨리스크를 이전 공사를 할 때 도메니코 폰타나가 조사해보니 쇠공 안에는 먼지만 있었다고 한다. 이 쇠공은 로마 미술관에서 보관 중이다.
오벨리스크 위에 올려진 청동제 십자가 내부에는 예수가 못 박힌 그 십자가라고 전하는 성십자가의 일부가 안치되었다. 1817년 이 오벨리스크의 길쭉한 그림자를 이용해 태양이 황도에 들어감을 표시하고자 주변에 둥근 돌들을 설치하였기에 초대형 해시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벨리스크 기단부 4면과 상단부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은 아래와 같다. 간혹 반가톨릭 진영에서 이집트 태양신앙의 상징을 성 베드로 광장 한가운데에 두었다고 가톨릭 교회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명문을 보면 건립의도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오벨리스크를 바티칸 광장 가운데에 세우고 위에 예수가 못 박혔던 성십자가의 조각을 봉안한 것은 '이교 신앙에 맞서 그리스도교가 승리했음'을 상징한다.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 | |
방위 | 명문 |
동쪽 면 (화해의 길 쪽) | ECCE CRVX DOMINI· FVGITE PARTES ADVERSAE· VICIT LEO DE TRIBV IVDA· (Ecce crux Domini. Fugite partes adversae. Vicit leo de tribu Iuda.) 보라, 주님의 십자가로다. 반역의 무리들은 물러들 가라. 유다 지파의 사자가 승리하셨도다.[2] |
남쪽 면 (자니콜로 언덕 쪽) | SIXTVS·V·PONT·MAX OBELISCVM VATICANVM DIS GENTIVM IMPIO CVLTV DICATVM AD APOSTOLORVM LIMINA OPEROSO LABORE TRANSTVLIT ANNO M·D·LXXXVI PONT·II· (Sixtus Quintus Pontifex Maximus obeliscum Vaticanum dis gentium impio cultu dicatum ad apostolorum limina operoso labore transtulit. Anno millesimo quingentesimo octogesimo sexto, Pontificatus secundo.) 불경한 숭배로 말미암아 민족들의 신들에게 봉헌된 바티칸의 오벨리스크를 식스토 5세 최고사제장이 허다한 수고 끝에 사도들(베드로와 바오로)의 묘소들로[3] 이전하였다. 1586년, 교황 재위 제2년. |
서쪽 면 (대성당 정면 쪽) | CHRISTVS VINCIT·CHRISTVS REGNAT·CHRISTVS IMPERAT· CHRISTVS AB OMNI MALO PLEBEM SVAM DEFENDAT· (Christus vinci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 Christus ab omni malo plebem suam defendat.) 그리스도 승리하시고, 그리스도 군림하시며, 그리스도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악으로부터 당신 백성을 지켜주소서. |
서쪽 면 최상부 (대성당 정면 쪽) | SANCTISSIMAE CRVCI SYXTVS·V·PONT·MAX· CONSECRAVIT· E PRIORE SEDE AVVMLSVM ET CAESS· AVG· AC TIB· I· L· ABLATVM M·D·LXXXVI· (Sanctissimae Cruci Syxtus Quintus Pontifex Maximus sacravit e priore sede avulsum et Caesaribus Augusto ac Tiberio iure licito ablatum millesimo quingentesimo octogesimo sexto.) 예전 자리에서 분리되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으로 정당하게 운반된 (이 오벨리스크를) 식스토 5세 최고사제장이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에 봉헌하였다. 1586년.[4] |
북쪽 면 (사도 궁전 쪽) | SIXTVS·V·PONT·MAX CRVCI INVICTAE OBELISCVM VATICANVM AB IMPVRA SVPERSTITIONE EXPIATVM IVSTIVS, ET FELICIVS CONSECRAVIT ANNO M.D.LXXXVI PONT·II· (Sixtus Quintus Pontifex Maximus cruci invictae obeliscum Vaticanum ab impura superstitione expiatum iustius et felicius consecravit. Anno millesimo quingentesimo octogesimo sexto, Pontificatus secundo.) 식스토 5세 최고사제장은 더러운 미신으로부터 정화된 바티칸의 오벨리스크를 더욱 정의롭고 복되도록 불패의 십자가에 봉헌하였다. 1586년, 교황 재위 제2년. |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고 주목받지도 않지만, 기독교 공인 이전인 로마 제국 시대에 이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서 옮겨왔을 무렵 새긴 다른 라틴어 명문도 이 오벨리스크 하단에 여전히 남아 있다.
DIVO CAESARI DIVI F AVGVSTO TI CAESARI DIVI AVGVSTI F AVGVSTO SACRVM (Divo Caesari divi filio Augusto, Tiberio Caesari divi Augusti filio Augusto sacrum) 신의 아들이요 거룩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거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친) 성물 |
3.2. 열주랑(대회랑)
베르니니는 광장의 형태를 결정한 후 둘레를 에워쌀 회랑을 설계했다. 처음에는 아케이드로 만들려고 했지만 나중에 열주랑으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베르니니는 성당을 머리로, 열주랑을 팔로 비유해 두 팔을 편 교회의 어머니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광장에 들어온 신자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여기에 더해 대성당 바로 앞에 있는 사다리꼴 모양의 작은 광장과 열주랑이 둘러싼 타원형 광장이 합쳐지면서 광장의 전체적인 평면을 열쇠 구멍으로 구성해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지물인 열쇠를 상징하는 효과까지 더했다.
한편 전임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수석 책임자인 카를로 마데르노가 설계한 대성당의 화려한 정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열주는 기둥 양식 중 가장 단순한 도리아식, 그 가운데서도 토스카나식을 사용했다. 16m 높이의 토스카나식 대리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가 4개의 열을 이루며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열주랑 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와 더불어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제작한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3.24m 높이 조각상 140개가 늘어서 있다. 또한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문장도 열주랑 위를 장식했다.
성 베드로 광장 바닥에는 '회랑의 중심(Centro del Colonnato)'라고 새겨진 원판이 깔려 있는데 이곳에 서면 4개씩 늘어선 대회랑의 기둥들이 겹쳐져 하나로 보인다.
ALEXAN·VII·P·M(교황 알렉산데르 7세) | 하늘에서 본 광장의 모양 |
1657년 8월 28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와 베르니니가 참석한 가운데 광장의 착공식이 거행되었다. 교황의 적극적인 의지 덕분에 신속하게 진행된 공사는 1662년 열주랑 북쪽 면이 완성된 것에 이어 공사 10년 만인 1667년 완공되었다.
베르니니의 열주랑이 건설되기 전까지, 마데르노가 만든 대성당의 정면은 돔을 시야에서 가리고 건물의 폭이 넓어보이게 해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균형과 비례를 깨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베르니니의 열주랑은 대성당의 정면보다 낮으면서도 안쪽으로 끌어당기도록 되어 있어 정면부가 더 높아보이도록 해 불균형적인 상태를 상당 부분 해결하는데 성공했다.
3.3. 분수대
원래 대회랑이 건설되기 전에는 오벨리스크 오른쪽에 마데르노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화강암 분수대 하나만 있었지만, 좌우대칭의 균형미와 조화를 살리기 위해 카를로 폰타나가[5] 오벨리스크 왼쪽에 마데르노의 분수대와 똑같은 디자인으로 설계해 완성했다. 대성당 앞에 설치한 분수는 성전에 들어가기 전 흐르는 물로 신체를 정화한다는 의미를 상징화한 것이었다. 뒷날 베르니니가 설계한 대회랑이 들어서면서 마데르노와 폰타나의 분수대는 오벨리스크와 함께 광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4. 사건 사고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의 북서쪽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터키 출신의 알리 아으자(Ali Ağca)에게 저격당하는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미수 사건 참고. 광장의 북서쪽에는 저격당한 위치에 요한 바오로 2세의 문장과 함께 저격 일자가 로마 숫자 XIII V MCMLXXXI로 새겨진 블록이 깔려 있다.1982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대림 시기-성탄 시기를 맞이해 광장 가운데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고 있다. 폴란드 출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 시작한 전통으로, 각국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할 나무를 교황청에 기증하는 것을 영예로 여긴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관련 문서
5. 관련 문서
[1] 마데르노의 설계대로 성당의 종탑들이 완성되었을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종탑들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2] 이 구절은 13세기 초,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만든 기도문을 살짝 바꾼 것이다. 성 안토니오의 원문에서는 Ecce crucem Domini(주님의 십자가를 보라)였지만 여기서는 Ecce crux Domini라고 했다. ecce(보라)라는 말 뒤에 오는 명사는 주격(crux)일 수도 있고 대격(crucem)일 수도 있기 때문에 뜻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성십자가 보목이 있기 때문에 성 안토니오의 기도문을 인용함은 매우 적절하기도 하다. 성 안토니오가 만든 기도문은 가톨릭 엑소시즘에서도 십자가를 내보이며 읊는 구절로도 사용한다.[3] 사도들의 묘소들로(ad apostolorum limina)라는 구절에서 limina는 limen의 복수형이다. limen은 1차적으로는 문지방이라는 뜻이지만 묘소라는 뜻도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로마의 바티칸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성 바오로 대성당에 성 바오로의 무덤이 있으므로, 중세부터 로마시 순례를 '사도들의 묘소들로'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바티칸에 간다는 뜻으로 약간 의미가 축소되었다.[4] 이 명문은 오벨리스크의 꼭대기, 청동 십자가 바로 아래에 있다. 비바람을 많이 맞아서인지 명문이 꽤 마멸되어 사진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다.[5] 도메니코 폰타나와는 다른 인물. 도메니코 폰타나는 마데르노의 분수가 완성된 1613년에는 이미 고인이 된 상태였다(160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