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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령 Stati della Chiesa | |
국기 | |
지도 | |
1870년~1929년 | |
위치 | 바티칸 |
수도 | 바티칸 |
정치체제 | 비주권군주제 선거군주제 신권정치 |
지도자 | 교황 |
언어 | 라틴어 이탈리아어 |
이전 국가 | 교황령 |
이후 국가 | 바티칸 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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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 교황령이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당한 1870년부터 교황과 베니토 무솔리니 간에 맺어진 라테라노 조약으로 교황령(바티칸 시국)이 부활하는 1929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바티칸 포로(라틴어: Captivus Vaticani)'라는 표현은 교황령이 이탈리아로 합병되는 과정을 지켜본 교황 비오 9세의 발언을 통해 정착되었다.2. 역사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는 이탈리아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자 빈 체제가 설립되었고 이탈리아반도 북부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제외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1] 당시 여러 국가들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반도에서는 이런 합스부르크 체제에 대항하여 민족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통일전쟁의 결과 이탈리아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주도로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이탈리아 왕국에 있어 교황령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합병해야 할 세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교황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파병을 요청하여 이탈리아 왕국군과 로마의 통일세력으로부터 로마를 지키게 하였다. 파국을 피한 교황은 이탈리아 민족운동을 억압하는 한편, 교황령의 행정과 경제 개혁을 추구하여 세속권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 제국군이 철수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민중의 지지 아래 1870년 9월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령을 합병하였다. 이로써 교황령의 군주인 교황은 바티칸 지역을 제외한 모든 세속 영토와 권력, 그에 따르던 세금 수입을 상실하였으며, 국제법상 외교 주체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이탈리아 왕국 내부에서 제한적인 자치권만을 가진 비주권군주로 전락하게 되었다.
교황령 병합 직후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보장법(Legge delle guarentigie)을 통과시켜 영토를 제외한 이전 교황의 권리를 대부분 보장할 것을 약속했지만 교황 비오 9세는 자신을 '바티칸의 포로'라고 선언하고 바티칸에서 나오지 않았다. 또한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사보이아 왕가 전체를 파문[2] 하고 이탈리아 왕국과의 모든 대화를 거부했다. 또한 교황령의 귀족들에게 이탈리아 왕국에 협력하지 말 것을 부탁했는데 교황의 명령을 따른 이 귀족들을 검은 귀족(aristocrazìa nera)이라 부르며, 수 십년 동안 로마 문제(questione romana)로 남아 남부 문제와 함께 이탈리아 통합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바티칸의 대(對) 이탈리아 정책은 비오 11세가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였을 때에서야 비로소 수정되었다. 교황 비오 11세가 베니토 무솔리니와 체결한 이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이 성립되었으며 이로써 59년 동안 지속된 바티칸 포로 시기도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3. 관련 문서
[1]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이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는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은 본가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모데나 공국의 프란체스코 4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극한의 반동주의 정책을 실시했다.[2] 그래도 비오 9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죽기 직전 파문을 해제하여 병자성사를 받고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