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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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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후안 카를로스 1세 미겔 데 세르반테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아돌포 수아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펠리페 6세 파블로 피카소 예수의 테레사 펠리페 곤살레스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이사벨 1세 세베로 오초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호세 사파테로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16위17위18위19위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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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위22위23위24위2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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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위27위28위29위30위
로라 플로레스 펠리페 2세 카를로스 1세 로시오 주라도 그레고리오 마라뇬
31위32위33위34위35위
디에고 벨라스케스 이사벨 판토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미겔 데 우나무노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비센테 페레르 카밀로 호세 셀라 페드로 두케 다니 페드로사 파우 가솔
41위42위43위44위45위
다비드 비스발 라파엘 나달 카마롱 데 라 이슬라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46위47위48위49위50위
산티아고 카리요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페드로 알모도바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51위52위53위54위55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미겔 에르난데스 후안 마누엘 세라 로페 데 베가 엘 그레코
56위57위58위59위60위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호아킨 사비나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앙헬 니에토 마누엘 아사냐
61위62위63위64위65위
조르디 푸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알레한드로 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르난 코르테스
66위67위68위69위70위
카를로스 사인츠 파퀴리 텔모 사라 몽세라 카바예 마누엘 데 파야
71위72위73위74위75위
이삭 페랄 플라시도 도밍고 미겔 길라 루이스 부뉴엘 엘 코르도베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프란시스코 피사로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라울 곤살레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81위82위83위84위85위
아만시오 오르테가 마놀레테 에두아르도 칠리다 페란 아드리아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86위87위88위89위90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호아킨 로드리고 에밀리오 보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프란시스코 헨토
91위92위93위94위95위
세바 바예스테레스 이삭 알베니스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카르멘 아마야
96위97위98위99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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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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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파일:e4e446244351b3167e1c944b099685a5.jpg
본명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시프리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y Picasso
출생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왕국 안달루시아 말라가
사망 1973년 4월 8일 (향년 91세)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무쟁
직업 미술가, 작가
분야 회화, 그림, 조각, 판화, 도예
서명 파일:Picasso_Signatur-DuMont_1977.svg.pn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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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
신체 163cm, AB형
정당

종교 무종교(무신론)
배우자 올가 코클로바(1918년 – 1955년, 사별)
자크린 로크(1961년 결혼)
파트너 마리 테레즈 월터(1927년 – 1935년)
도라 마르(1935년 – 1943년)
프랑수아즈 질로(1943년 – 1953년)
자녀 장남 파울로 피카소(1927년생)[1]
장녀 마야 피카소(1937년생)[2]
차남 클로드 피카소(1947년생)[A]
차녀 팔로마 피카소(1949년생)[A][5]
}}}}}}}}} ||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유년기3.2. 청년기3.3. 입체파3.4. 성공 이후3.5. 마티스와의 라이벌 관계3.6. 정치적 성향3.7. 이성 관계3.8. 나르시시스트3.9. 타 분야 활동
4. 주요 작품5. 어록6. 여담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스페인화가, 작가, 예술가, 조각가 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예술가이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가 중 하나로 꼽히며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조각, 도자기,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며,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게르니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림 속에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현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의 무궁무진한 예술적 창조와 혁신적인 스타일은 현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이름

풀네임이 특히 길다.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시프리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y Picasso)

이베리아 반도 문화의 특징으로 결혼시 자식은 양 부모의 성을 합치게 되는데, 조상들의 성을 다 붙이고 정리를 하지 않다보니 이름이 길어지게 되었다. 이 긴 이름을 부모만의 성으로 짧게 줄이면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가 되며, Ruiz가 본래의 성씨이다. 피카소는 그의 어머니의 성씨였다. 본래 '파블로 루이스'로 불리는 것이 맞으나 그가 19살 때 피카소를 선택하면서 파블로 피카소로 알려졌다.

3. 생애

3.1. 유년기

피카소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 호세는 식당 장식을 하는 화가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말도 배우기 전부터 그림을 배우게 되는데, 그 천재적인 소질로 아버지를 항상 놀라게 했다.

천재란 단어가 그를 위한 것이란 이야기가 딱일 정도로 그림에 있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말을 배우기 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먼저라고 하며, 처음 입 밖으로 내뱉은 단어가 연필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화가 지망생이었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호세 루이스 이 블라스코, 1838~1913)의 조수 노릇을 했는데, 호세는 피카소가 자신이 시킨 것(새 다리 그려넣기)을 해온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내 꿈을 이루어 다오."라고 말했다.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도 했다. 이미 20세가 되기 전에 그의 회화 실력은 고전주의를 마스터한 수준이었다. 바르셀로나 예술학교 시절에 남들이 1개월 정도 준비하는 과제를 단 며칠[6] 만에 완성하고 1등을 차지했다. 입학 시험을 봤을 때도 남들이 1주일 걸리는 과제를 몇 시간 만에 완수했고, 이걸 본 교사가 큰 충격을 받아 바로 입학 후 월반시켰다는 일화도 있다.[7] 아래 그림을 보듯이 15살쯤에 이미 대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파일:picasso-1892.jpg 파일:external/www.pablo-ruiz-picasso.net/9.jpg
11세 피카소토르소 소묘[8] 15세 피카소의 유화

피카소의 그림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그가 10살 즈음에 그렸던 소묘다. 오늘날의 초등학생 나이에 명암 표현이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하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사칙연산을 배울 요즘 초등학생 즈음 나이에 이미 입시미술을 마스터한 신동이었다. 본인 스스로 "12살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가 평생 부러워했던 것이 그 또래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했던 화풍이었다. 그는 타고난 재능이 지나친 나머지 미술적인 감성면에서는 붓을 잡자마자 유아기도 사춘기도 없이 곧바로 성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일부러 서툴게 그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훗날 그려진 입체파 그림들에 대해서 대중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의 현대미술에 비하면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은 상당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현대미술의 괴리를 경험하고 난 사람들은 그제서야 피카소의 천재적인 재능을 다시 돌아본다는 말까지 할 정도이다. 게다가 위에 나오듯이 이미 입체파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피카소의 실력 자체는 정점에 이른 수준이었다. 그래서 피카소의 이 실력은 입체파 그림을 비롯한 현대미술을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자들을 비판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 현대미술 문서에 나오듯이 '현대미술을 하는 자들은 실력도 없으면서 입 잘 터는 것으로 미술을 한다'라고 오해하거나, 반대로 실제 실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피카소와 같은 현대미술을 한다고 하며 들먹이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대했던 그의 아버지는 평생동안 그의 화풍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와 반목하다가 1913년에 작고했다고 한다. 아버지 호세의 입장에서는 고생고생해서 명문사립학교인 바르셀로나 예술학교와 마드리드 예술학교에 보내서 미술을 배우게 했건만, 피카소는 그냥 돌아다니면서 그림 연습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 열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때문에 피카소는 집을 나오고 말았다.

3.2. 청년기

초창기에는 친구이자 시인인 막스 자콥(Max Jacob, 1876~1944)과 함께 지내면서 힘든 시절을 보냈다. 후술하겠지만 친구 카사헤마스가 죽기도 하고 돈이 없어 가난하게 살아야 했는데, 이때 그림들이 전부 우울한[9] 푸른빛 톤에 우중충함, 슬픔, 고난 등의 주제를 다루었기에 이 시기를 청색 시대(Blue Period, 1901~1904)라고 부른다. 작품 목록 이 중 1901년작인 "카사헤마스의 죽음"은 역시 청년시절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지만 실연 때문에 자살하여 20세로 요절한 카를로스 카사헤마스(Carlos Casagemas)를 추모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그 와중에도 파리의 발전상을 고향 스페인에 알리는 등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예술가들의 후원가로 널리 알려진 레오 스타인(Leo Stein, 1872~1947)과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 남매의 후원을 받았다.[10] 이들 남매가 그림을 잇달아 사준 덕분에[11] 피카소는 살림이 좀 나아졌고, 그보다 살짝 이전에는 첫 번째 연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도 만났다. 또한 스타인 남매의 소개로 앙리 마티스(야수파의 창시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거트루드 스타인의 아파트 27 rue de Fleurus에서 모임을 가지며 가까워졌다. 정신적 여유가 생긴 피카소는 따사한 붉은빛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 때를 장밋빛 시대(rose Period, 1904~1906)라고 한다.

3.3. 입체파

피카소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다녔고, 어느 전시회에서 아프리카 토속 조각상을 보자 인상적인 생동감과 표현력을 느끼고 이를 자신의 그림에 담아내려고 했다. 이 때 나온 게 바로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년작)이다.

왜 갑자기 힘든 길을 가나 궁금한 사람도 있을텐데, 폴 세잔 이후 나온 미술이라는 것은 더 이상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미술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지 않았다. 사람 비슷한 게 나오다가 별안간 도형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나오고, 그러다 괴상망측한 게 나온다.[12] 피카소의 그림들 또한 "어떻게 하면 평면에서 입체의 여러 면(특성)을 한 번에 나타낼 것인가"라는 개념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명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피카소의 입체파(큐비즘) 그림은 아름다워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과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며, 또한 구성의 미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론이고 동료와 친구들조차 피카소의 새로운 도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티스는 물론 절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조차[13] '이해할 수 없다, 다시 거지가 되고 싶으냐'고 반문했다. 다행히 빌헬름 우데(Wilhelm Uhde, 1874~1947)나 다니엘-앙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 1884~1979) 같은 독일계 화상들이 장식과 기교가 없는 대신 호소력이 짙다면서 호평한 덕분에 완전히 묻히지는 않았다. 칸바일러는 이 그림을 계기로 피카소의 친구가 되었고, 훗날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의 쌍두마차가 되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를 소개하기도 했다.[14]

파일:external/www.knowledgeoverflow.com/disturning-photo1.jpg

피카소의 그림을 현실로 보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자세히 보면 옆얼굴이라 코가 절반만 나왔지만, 코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 것을 볼 수 있다. 즉 코의 특징을 전부 담아낸 셈. 어떻게 보면 앞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피카소의 큐비즘 그림들을 보면 눈의 모양이 짝짝이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측면의 눈과 정면의 눈을 동시에 그려서 그런 것이다. 피카소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당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당시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환경 변화와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인 사관 등에 영향을 받았던 유럽은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를 추구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과거로 회귀하는 신고전주의와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낭만주의가 등장한 것과 비슷하다. 피카소 당시에는 모더니즘이라는 이름하에 건축,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모더니즘 미술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미술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피카소는 과거의 영광을 잘 재현하는 유물이 되느냐, 아니면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서 미술계의 혁명가가 되느냐는 길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3.4. 성공 이후

생전부터 그림이 잘 팔렸던 화가로도 유명한데, 피카소 본인도 자신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자기가 받을 돈의 액수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린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pablopicasso.org/guernica3.jpg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공군의 콘도르 군단은 마을에 주둔한 공화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교량을 파괴하기 위해 폭격을 실시했다. 이후 일어난 먼지구름 탓에 정확한 목표 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차별 2차 폭격을 시행했던 것. 민간인 1,500~1,6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본 작품은 이후 황폐화된 게르니카의 참극을 듣고 그린 <게르니카>이다. 이 그림은 349×775c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붓이 아니라 롤러로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그 후 이런 식의 행보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을 갔고, 이후 전쟁이 끝나자 남유럽으로 돌아왔다가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이 민주화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걸 수 없다."
고 주장했다. 그래서 <게르니카>는 한동안 미국의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소장했다. 참고로 피카소가 92세까지 살았지만, 하필이면 프랑코도 천수를 누리는 바람에 스페인이 민주화되는 것을 못보고 세상을 떠났으며, 피카소 탄생 100주년이 된 1981년이 되어서야 이 걸작은 조국인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반환 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소장했다가, 1992년부터 마드리드의 소피아 여왕 박물관(Museo Reina Sofia)에서 소장 중이다.

속설에 의하면,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게르니카>를 보고 피카소에게 "당신 작품인가?"라고 묻자, 피카소는 "아니, 당신들(의 작품)이다."이라며 촌철살인격인 답변을 날렸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ericyu.ca/Guernica_Blog_Madrid-2.jpg

그림이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소피아 여왕 박물관에 아예 <게르니카> 전시를 위한 방이 따로 있을 정도다.

파일:한국에서의 학살.png

또한 1951년 6.25 전쟁을 모티브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도 그렸다. 흔히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혹은 신천 양민 학살을 주제로 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하여간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게르니카>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반전 작품 중 하나로, 당시 '미군을 학살자로 묘사했다'는 주장도 생기는 바람에 한국에선 1980년대까지 금지 예술품이기도 했다.[15] 물론 누가 누구에게 했든 학살은 학살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 표지에 이 그림을 쓰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의 구도를 참고해서 그렸다고. 이걸 가지고 조선일보는 해당 그림이 6.25 전쟁의 허위 선전물이라고 주장했다.

3.5. 마티스와의 라이벌 관계

미술사의 비화로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가 라이벌 관계였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3px-Gertrude_Stein_by_Alvin_Langdon_Coburn.jpg
1913년쯤에 찍은 거트루드 스타인 사진
피카소와 마티스는 상술한 미국의 문인이자 예술 수집가 겸 후원가인 거트루드 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스타인을 놓고 서로 사랑 싸움을 한 건 아니고,[16] 스타인이 미국의 잘 사는 집 딸이라 잘 보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거트루드 스타인은 작가 및 시인 활동을 했으며 파리로 유학와 화실을 열고,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렸는데, 돈이 많아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후하게 사주거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머무를 집도 무척 싸게 빌려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0px-GertrudeStein.jpg
파블로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6년
이것이 피카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다. 피카소는 스타인의 집 벽난로 위에 마티스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해서 마티스의 그림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 스타인에게 바쳤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위의 그림은 그런 작품들 중 하나. 단순히 재미거리로 들어도 될 이야기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예술가들이 어떻게 생존했는지가 드러난다.

그 밖에도 두 천재의 일화는 꽤 많이 있는데 라이벌인 것 치고 서로 간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서로를 고양시키는 라이벌 관계였던 모양이다. 피카소가 12살 더 많은 마티스의 화실에 종종 놀러올 정도였다. 마티스는 미술에서 색을 해방시키고 피카소는 형태를 해방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서로의 스타일이 극명하게 다르기도 했고 서로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보고 있었다는 듯하다. 실제로 피카소는 마티스의 작풍 일부를 차용해서 쓰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피카소가 화실에 놀러왔다 가면 마티스는 "저 인간 또 아이디어 훔치러 왔다."면서 투덜거리고는 했다는 일화가 있다.

3.6. 정치적 성향

공산주의자였다.[17]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정치활동이 자신의 예술의 세계관적인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1937년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프랑코의 꿈과 거짓"이라는 산문시와 삽화를 만들기도 했다.

다만 스탈린을 무척이나 혐오했다고 알려졌다. 당시 공산당은 세계적인 화가의 입당을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 지면의 절반을 들여 선전했지만 곧 피카소와 갈등을 빚게 된다. 불화의 이유는 공산당에서 선전을 위한 그림을 요구했지만 당 간부들이 피카소의 예술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게다가 피카소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싫어해서 다른 공산당원들과도 상당한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18] 결국 피카소가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려주긴 했는데 전혀 닮지 않아서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 사실 그럴만한게 피카소가 스탈린 초상화라고 그린 게 이것이었다. 지금 와서 유명한 피카소의 그림들과 비교해본다면 현실적인 편이지만, 공산당원들 입장에서는 초상화를 그려준다더니 웬 어린애 낙서를 가져온 것이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죽을 때까지 공산당 당적을 유지했다.

파블로 피카소는 반군국주의 성향을 강하게 가진 예술가였고, 그렇기에 국가와 이념을 넘어 전쟁 자체를 혐오했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게르니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그린 <시체 구덩이>, 6.25 전쟁에 관한 <한국에서의 학살>이 그의 대표적인 반전 회화이다. 이중 <한국에서의 학살>은 신천 양민 학살을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피카소가 1950년 말에 그림을 그릴 동안 해당 사건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근거가 희박하다. 작품 군인들도 소속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다. 이 작품은 공산당에서 모호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고, 미국에서도 분노를 사 한동안 그는 미국 예술계에서 냉대를 받았다.[20]

3.7. 이성 관계

피카소의 엄청난 여성 편력은 대중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나이 60, 70세가 넘어서도 스물 살 갓 넘은 손녀뻘인 여자들과 살림을 차려 자식을 낳기도 했다.[21] 여자를 꼬실 때 "당신을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사랑한다."라는 작업 멘트를 했다고 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연인 및 배우자들 목록을 보자면...이상 7명. 이 7명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7회에서 우정아 교수가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1#2

위에 언급된 7명의 여인 말고도 피카소는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그리고 그 모든 여인들을 다 찼다.[24] 올가 코클로바 역시 남편이 마리 테레즈 월터와 바람을 피운 것을 친구로부터 알자마자 아들 파울로와 함께 집을 나가서 이혼 소송을 했다. 그런데 피카소가 재산 분할을 하기 싫어서[25] 이혼을 안 해준 덕에 올가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상태였고, 죽을 때까지 따로 살았다고 한다.

질로는 피카소와 이별한 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이라는 책을 발표해 피카소와 함께 한 10년간의 생활을 솔직히 고백했다. 심지어 피카소의 마초적인 성격과 여성 편력까지도(...). 하지만 그런 질로조차도 피카소에게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는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애정 관계는 아니지만 '포니테일 소녀' 실베트 데이빗[26]을 모델로 수십 점의 <실베트 연작>을 만들고 격려와 금전적 지원(자기 그림)으로 예술가의 꿈을 키워준 이야기가 아동도서로 출간되어 잘 알려져 있다. 훗날 Lydia Corbett은 영국에서의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참고로 1953년 당시 피카소는 72세였고, 실베트는 19세였다.

이러한 피카소의 여성편력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1974년 8월 17일자 조선일보 연재만화 야로씨에서는 주인공이 피카소의 여자관계가 부럽다고 개드립을 치는 에피소드가 실리기도 했다.

3.8. 나르시시스트

천재 화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에겐 충격적일 수 있는 사실이지만,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강하게 추정된다고 한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자기에 대한 거창한 생각으로 머리를 채워줬고, 일방적이고 짧은 관계를 계속 맺었다.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우월하고 소중한 사람이며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보다 못났다고 믿고, 그러므로 이용하고 상처주고 착취하고 학대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는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겐 최악의 인간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에게 "넌 무능한 인간이야. 평생 그럴 거야."라는 말을 내뱉었으며,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손주들에게 '망디앙(거지)'이라고 이름붙인 디저트를 주었으며, 연인이자 자신의 아이까지 낳은 프랑수아즈의 30세 생일"어린 여자는 누구든 너보다 예뻐."라는 말을 내뱉는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자존감, 자부심, 삶의 의지, 인간이 가진 위엄을 모두 꺾어놓고 오직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무력함만을 안겨주었다. 그것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 자기 피를 물려받은 자식, 손주들에게. 결국 가족들이 우울증,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심지어 자살하는 결과를 부르게 된다.

상술한 그의 여인들이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7명 중 2명은 자살, 2명은 정신이상, 1명은 요절) 데도 그의 탓이 크다. 피카소는 평소 "여자는 두 부류- 여신과 현관 발매트(goddesses and doormats)로 나뉜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그를 먼저 차버린 여인 프랑수아즈가 떠나려고 할 때 "나 같은 남자를 떠날 수 있는 여자는 없어. 사람들이 네가 관심이라도 있을 것 같아? 세상은 너란 존재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너를 좋아하는 것 같겠지만, 그건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일종의 호기심일 뿐이야.", "너는 내 작업실의 먼지만큼 하찮은 존재"라는 말로 가스라이팅을 시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질로는 '나는 결코 쓸려가지 않고 내가 원할 때 스스로 떠날 먼지'라고 맞받아치며 넘어가지 않았다. 피카소는 달래고, 윽박지르고, 심지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복수하기 위해 질로가 낳은 자기 자식들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물론 질로는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나로 살기 위해 누구의 허락도 필요없다"며 그를 떠났고, 법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아이들의 권리를 되찾아주었다. 피카소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질로의 결단에 피카소는 몹시 당황했고 질로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회고록을 출판하는 걸 막는 데 실패했을 때는, 자기는 다른 사람들한테 무수한 상처를 줘놓고 자기가 고작 고만큼 당하는 건 못 참겠었는지 모욕감과 패배감을 호소하며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첫째 부인인 올가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차갑게 대했다. 자식들에 대한 관심은 커녕 경제적인 지원도 전혀 없어 손자손녀들은 할아버지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고, 결국 올가 소생의 아들 파울로가 낳은 손자 파블리토 피카소는 피카소가 이미 죽은 후에도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락스를 마시고 자살했다. 그리고 이에 충격을 받은 파울로 또한 술에 의존하다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했다. 파블리토의 친동생인 또 다른 손녀 마리나 피카소도 장장 14년 동안이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라는 책을 출간해 자신의 가족의 민낯을 고발했다.
나의 가족은 저 천재가 쳐놓은 덫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해나가는 데 타인의 피를 필요로 했다. 나의 아버지, 오빠, 어머니, 할머니의 피와 나의 피, 그리고 한 인간을 사랑한다고 여기며 피카소를 사랑한 모든 이들의 피를. 나의 아버지는 그의 폭정의 굴레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그에게 속고 실망하고 비천해지고 망가진 채 그로 인해 죽었다. 냉혹하게도. 그의 가학 취미와 무심함의 노리개가 되었던 오빠 파블리토는 스물넷의 나이에 락스를 마시고 자살했다. 식도와 후두가 타버리고, 위가 파괴되고,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모습으로 피범벅 속에 누운 오빠를 발견한 건 나였다. (중략) 락스를 마심으로써 오빠는 고통을 끝장내고, 자신을 기다리는 암초들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 암초들은 나 또한 노리고 있었다. 피카소 이름을 가진 우리는 우롱당하는 희망의 소용돌이라는 덫에 걸린 사산아들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 p.13
마술처럼 종이 강아지가, 종이꽃이, 종이 암탉이 탄생한다.
"마음에 드느냐?"
특유의 쉰 목소리로 그가 묻는다.
파블리토는 말이 없고, 나는 더듬거리며 말한다.
"네... 예뻐요."
우리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피카소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종이나 마분지, 또는 성냥을 잘라 만든 그 형상들이, 그가 마술사처럼 만들어내던 그 모든 눈속임들이 오늘날 내가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그의 야심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은 모든 걸 할 수 있으며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걸 무의식중에 인지시키려는 야심 말이다.
-p. 18
"주인님께서 방해받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우리는 머리를 떨구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것이었다. 우리를 위한 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찬미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문전에서 거절하는 사람을 어떻게 찬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다고들 말했다. 그들은 그가 친구들을 라 캘리포니아의 대문까지 배웅하는 것을 보았고, 친구들을 위해 정원의 레몬을 따는 것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미용사 외젠 아리아스에게 크로키 몇 장을, 니스의 재봉사 미셀 사폰에게는 데생 몇 점을 주었다. 하물며 자신의 개[27]한테도 접시 하나를 헌정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가 피카소였다.
-p. 85

그렇기에 마리나는 피카소 사후 3200억원 가치에 이르는 할아버지의 작품들과 저택을 자신이 갖고 있고자 하는 의사가 없었고, '과거를 그만 떠나보내겠다'며 모조리 팔아버렸다.# 위 인용문을 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3.9. 타 분야 활동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시를 쓰는 재능도 상당하여 시집도 냈다. 또한 <꼬리 잡힌 욕망>이라는 희곡을 쓰기도 했는데, 저항적인 내용이라 몰래 상연되었다. 여기에 출연한 사람들은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는 30여 개 정도라고 한다.

패션 감각도 특이해서 흰 바탕에 파란색 가로 줄무늬가 있는 상의를 즐겨 입었다. 맨 위의 사진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이 사람의 절친 중 한 명이 바로 찰리 채플린이었다.

4. 주요 작품

5. 어록

한때 회화는 발전적인 단계를 거쳐 완성에 다가갔었다. 매일 새로운 것이 생겼다. 회화는 추가의 결합이다. (그러나) 나에게 회화는 파괴의 결합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봤을 때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곳에서 빼낸 빨간색이 다른 곳에서 나타날 뿐이다.
Formerly pictures used to move towards completion in progressive stages. Each day would bring something new. A picture was a sum of additions. With me, picture is a sum of destructions. I do a picture, then I destroy it. But in the long run nothing is lost; the red that I took away from one place turns up somewhere else.
-1934년 겨울, 리처드 프리덴탈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편지들 - 블레이크에서 폴록까지》중에서
예술은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적들을 막아내는 공격적인 무기입니다.
Art is not made to decorate rooms. It is an offensive weapon in the defense against the enemy.
-1943년 3월 24일, Les lettres françaises
회화는 미학적인 작업이 아니다. 이 이상하며 적대적인 세계와 우리를 중재하도록 설계된 마법의 형태이다.
Painting isn't an aesthetic operation; it's a form of magic designed as mediator between this strange hostile world and us.
-2002년 출간된 마리오 리비오의 《황금률》(The Golden Ratio)에서
입체파는 기존의 미술과 다르지 않다. 기존의 미술과 같은 원칙과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입체파는 이해되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이를 볼 수 없었고, 없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나는 영어를 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어 책은 내게는 백지와 같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내가 모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탓할 수 있겠는가?
Cubism is no different from any other school of painting. The same principles and the same elements are common to all. The fact that for a long time cubism has not been understood and that even today there are people who cannot see anything in it, means nothing. I do not read English, and an English book is a blank to me. This does not mean that the English language does not exist, and why should I blame anyone but myself if I cannot understand what I know nothing about?
-1923년 출간된 마리우스 데 자야스의 《피카소 어록》(Picasso Speaks)에서.
나를 위해 축배를, 내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드시오. 나는 이제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소.
Drink to me, drink to my health. You know I can't drink anymore.
피카소의 유언.[28]

6. 여담

7. 대중매체에서

낮은 대중성과 일반인 기준에서 괴랄해 보이는 그림체 때문에 라이트 코미디물에서는 능욕을 받는 경우가 많다. 딱 봐도 '피카소 스타일'이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유딩/초딩들의 낙서와 비교당하는 건 거의 클리셰 수준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그림을 평생 동경한 본인으로서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드디어 이루어냈다는 생각에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1] 올가 코클로바 소생.[2] 마리 테레즈 월터 소생.[A] 프랑수아즈 질로 소생.[A] [5] 현재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Tiffany & Co.와 협업하여 팔로마 피카소 컬랙션을 선보이기도 했다.[6] 하루 만에 완성했다는 야사도 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7] 14살에 입학하자마자 바르셀로나 예술학교 상급반에 등록했다. 원래는 나이가 너무 어려 시험 자격도 안됐지만 피카소의 아버지가 설득한 끝에 본 입학 시험을 허가받았다.[8] 프랑스의 판화가 샤를 바르그가 그의 저서 '드로잉 코스'에 남긴 벨베데레의 토로소 드로잉의 모사작인데 11살에 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화의 본질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9] blue에는 '푸른'이라는 뜻과 '우울한'이라는 뜻이 존재한다.[10] 이때 특유의 화풍으로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이게 어딜 봐서 스타인의 초상화냐는 말에 "언젠가 이 얼굴과 닮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11] 참고로 피카소의 그림을 가장 먼저 사준 화상(畵商)은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6~1939)이다.[12] 이에 관해서는 사진의 발명이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에 대해서는 문서 참고.[13] 그래도 아폴리네르는 나중에 입체파가 하나의 화풍으로 인정받자 시인의 필력을 활용해서 입체파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나중에 안타깝게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머리에 유산탄을 맞은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14] 피카소의 예술 생활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동료로, 나중에 '우리들은 산에서 밧줄로 몸을 묶고 의지하는 관계'하고 표현했다. 물론 브라크도 피카소가 또 소재 뺏으러 온다며 마티스처럼 질색하기도 했다(…).[15] 사실 한국전쟁 중에는 국군과 미군은 물론이고 인민군과 중공군, 심지어는 정치깡패인 서북청년단에 의해 벌어진 학살사건도 부지기수였다. 사실 이 작품이 금지작품이 된건 단순히 미군을 학살자로 묘사해서가 아니라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에서 좌파정부를 지지했던 것도 한 몫했다.[16] 스타인은 레즈비언이었다. 유럽에 온 것도 일종의 도피성이었다고 한다.[17] 당시에 아방가르드 예술과 같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던 예술가들은 급진적인 사상에 많이들 꽂혔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시작부터가 당시 과거의 예술을 부수던 미래주의가 사상적인 바탕이었고,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표주자였던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같은 사람들도 미래주의와 입체주의 등에 입각한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 다른 점이라면 파시즘에 갔던 미래주의자들은 '과거의 파괴'에 더 초점을 맞췄고, 사회주의에 갔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새로운 예술성(흔히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실험주의, 프롤레트쿨트 같은 것)에 더 초점을 맞췄다. 피카소같은 이들이 공산주의자인게 이상한 건 아닌 셈이다.[18] 사실 공산주의를 동경하던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스탈린이 독재행각을 벌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어서 공산주의는 동경해도 스탈린과 소련은 싫어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비슷한 이유에서 나중에 등장하는 마오쩌둥 같은 경우도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미치광이 독재자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19] 이는 스탈린에 비해 호쾌하고 유머감각이 넘치던 흐루쇼프도 마찬가지로 이런 추상예술을 낙서같다고 느껴서 추상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서 "당나귀가 제 꼬리로 그렸어도 이보다는 낫겠다!"라고 일갈한 에피소드가 있다.[20] 참고로 이 시기 미국은 사회 전반에 걸쳐 공산주의자를 소련 스파이로 몰아 색출해내던 시기였다. 당장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매장당했던 것도, 찰리 채플린이 좌파분자 소리를 들어먹으며 미국을 떠났던 것도 이 시기이다.[21] 다만 자녀는 의외로 3명의 여성에게서 단출하게 4명을 두었다. 2남 2녀로 차례대로 파울로(장남), 마야(장녀), 클로드(차남), 팔로마(차녀). 이 중 클로드와 팔로마는 아버지처럼 예술계에 종사하고 있다.[22] 다만 공식적으로는 계속 결혼 상태였다. 하술된 내용을 참고할 것.[23] 화가 경력도 성공했던 편이나 피카소의 이름이 계속 따라붙었고, 이별 직후엔 피카소가 방해 공작을 펼쳐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24] 하지만 딱 한 번, 프랑수아즈 질로에게만 먼저 이별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대다수의 여자들에게 늘 숭배를 받으며 먼저 찼으면 찼지 차인 적이 없는 피카소는 질로의 이별 통보에 큰 충격을 먹고, 질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달래기도 하고, 애원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했지만 질로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질로가 유일하게 피카소를 찼다는 이야기가 유난히 한국에 많은데 출처가 불분명하다.[25] 스페인은 엄격한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고, 설령 이혼을 하더라도 피카소는 재산의 반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26] Lydia Sylvette David, 결혼 후 Lydia Corbett. 1934년생[27] 이름은 럼프(Lump)로, 종은 닥스훈트.[28] 비틀즈폴 매카트니가 이를 소재로 노래를 만든 적이 있다. Band on the Run 항목 참고[29] 피카소의 그림 실력은 이미 10대 중반 즈음부터 정점을 찍고도 차고 넘칠 수준이었다.[30] 그런데 정작 사회주의자였고 피카소처럼 공산당에 가입도 했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 진영으로 참전했던 조지 오웰은 반공 지식인이라며 띄워주었다. 그의 대표작인 동물농장이 공산권과 북쪽을 비판하는 반공만화로 널리 쓰였기 때문이다.[31] 타이타닉이 침몰한 해인 1912년 당시 피카소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신예 화가 정도의 위치였다.[32] 관련 대화: 로즈 "칼과 나 사이 취향 차이가 있다면 (칼과 달리) 난 취향이란게 있다는 거야" 트루디(로즈의 하녀) "화가 이름이 뭐였나요?" 로즈 "무슨 피카소였나?" 칼 "(피식 웃으며) 무슨 피카소라니...그 친구는 성공 못해.(He won't amount to a thing). 내 말 믿으라고. 최소한 작품 값은 쌌으니 망정이지."[33] <아비뇽의 처녀들 연작>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