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 |
본명 | 앙리 에밀브누아 마티스 Henri Émile-Benoit Matisse |
출생 | 1869년 12월 31일 |
프랑스 르샤토캄프레시스 | |
사망 | 1954년 11월 3일 (향년 84세) |
프랑스 니스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화가 |
학력 | 아카데미 쥘리앙 파리 보자르 |
스승 |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 귀스타브 모로 |
배우자 | 아멜리에 노 엘리 파 레이어 (1898년 ~ 1939년, 사별) |
자녀 | 3명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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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요 작품 | |
이카루스 | 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 |
프랑스의 화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활동한 중요 예술가 중 한명이며, 20세기를 주름잡은 야수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색채와 형태의 조합을 통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포스트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운동을 거쳐 초대현실주의를 이끈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2. 생애
1869년 12월 31일 프랑스 북부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출생하였다.22세 때 파리로 가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병에 걸려 요양을 하는 동안 어머니가 사주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진로를 바꾼다. 그의 아버지는 생계가 불확실한 화가가 되는 것에 반대했지만, 끝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을 배웠다.
1892년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미술학교 수험준비를 하면서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으나 그 아카데미의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사(模寫) 등을 하는 사이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어 1893년 파리 보자르의 그가 가르치는 교실로 입학하였다.
1897년 아멜리에 노 엘리 파 레이어와 만난 뒤 이듬해인 1898년에 부부가 되었다. 결혼 당시 마티스에게는 이미 4살 딸이 있었다.
그 후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風)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 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즘)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 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1908년경에는 강한 색채 효과를 억제하는 한편, 새로이 전개된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주의(큐비즘)의 방향으로 눈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의 뮌헨 ‘근동미술전’의 인상, 1911~1913년 2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으로 왕년의 포브 시대와 다른 장식적인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이나 순수색의 병치(竝置)로 독특한 작풍을 창조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가 있다. 티치아노처럼 그도 나이가 들면서 더 왕성한 활동을 했다. 더 붓을 들 수 없어지자 색종이를 오려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48년 병색이 짙은 나이에 샤펠 로자이르 드 뱅스 예배당 벽화 및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스스로 맡게 되었다.[1] 간병원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들었고 병색이 있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음에도 마티스는 이게 내 최후 작품이라고 힘을 다했다. 그리고 1952년 드디어 이 작업을 끝내고 쓰러졌다. 작업을 모두 다하고 "내 마지막 작품이 이로서 끝났다...."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3. 주요 작품
모자를 쓴 여인 La femme au chapeau | |
제작 | 1905년 |
종류 | 인물화 |
기법 | 캔버스에 유채 |
크기 | 80.65 cm × 59.69 cm |
소장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
이 작품은 절제된 붓질을 보여주던 초기 작업과는 달리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한 마티스의 변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부자연스러운 색상과 거친 붓질, 마치 완성 단계가 아닌 것 같은 이 작품은 당시 예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작품의 모델은 마티스의 아내다. 참고로 마티스의 아내는 이 작품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는데 한껏 꾸민 화사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푸른색 계열로 거칠게 그려졌으니 많이 속상하셨을 듯.
당시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던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형제 기업인 스타인 가족이 이 작품을 구입해 캘리포니아로 가져왔다. 이 스타인 가족은 마티스의 작품을 엄청 사랑하는 애호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마티스의 작품을 수집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들이 경마로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마티스의 작품들을 리바이스 청바지 사장인 월터 하스에게 넘겼다. 그리고 1990년대 월터 하스의 아내 앨리스 하스가 37점의 회화와 조각, 판화를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현재 모자를 쓴 여인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소유가 되었다.
삶의 기쁨 Le bonheur de vivre | |
제작 | 1906년 |
종류 | 풍경화 |
기법 | 캔버스에 유채 |
크기 | 176.5 cm × 240.7 cm |
소장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앙리 마티스가 이 작품을 그릴 때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정신 노동자들이 아무런 걱정, 근심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폭발적인 색채를 거침없이 휘둘러 마치 포악함 짐승같다는 의미로 '야수파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지만 그의 야수파적 흥분은 오래 가지 못했고 마티스의 붓이 한결 부드러워졌을 때 '삶의 기쁨'이라는 이 작품이 나왔다. 폭발적인 색채를 지나 평온하고 안락한 분위기의 이 그림을 마티스 본인은 '정신을 위한 안락한 의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1920년경 미국인 컬렉터 앨버트 반즈가 구입한 이래 반즈 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반즈 재단의 소장품 공개 방침은 대단히 엄격해서, 작품의 상설 전시는 물론 컬러 인쇄마저 오랫동안 금지되어 있었다. '삶의 기쁨' 역시 1993년에야 처음으로 컬러로 된 책에 등장했다. 생전의 마티스도 반즈의 방침을 지지했다고 하니 평생 못 볼 수도 있던 것이다.
춤 Dance | |
제작 | 1910년 |
종류 | 유화 |
기법 | 캔버스에 유채 |
크기 | 260 cm × 391 cm |
소장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뉴욕시 MoMA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이 작품은 러시아 상인이자 귀족으로 남작이었던 세르게이 슈츄킨[2]의 주문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슈츄킨은 본인의 저택에 장식할 그림으로 마티스에게 의뢰했다. 슈츄킨은 마티스가 파격적인 색채와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프랑스에서 유명해지기 전까지 열렬히 후원해주던 사람이었고 그가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해 프랑스에서 살때도 친하게 지내며 그에게 그림을 그려줬다.
이 작품을 그리면서 마티스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라고 말했다.
캔버스에 그려진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는 둥근 모양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형성된다. 한편, 쫙 뻗은 두 사람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지점에는 마티스가 불어넣은 역동적인 긴장감이 감돈다. 선, 색채, 형태의 혁명적 적용을 달성한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씨앗을 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 La Blouse Roumaine | |
제작 | 1940년 |
종류 | 초상화, 유화 |
기법 | 캔버스에 유채 |
크기 | 92 cm × 73 cm |
소장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마티스는 여인의 초상화를 여러점 남겼는데 이 그림처럼 인물을 그릴 때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색채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그림에서도 머리 모양과 이목구비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입체감은 사라지고 평면적인 느낌이 강한 것이 특징. 또한 화려한 색채 표현도 두드러져 보인다.
특히 여인의 흰색 블라우스 위에 그려진 무늬는 아라베스크 문양을 연상시키는데, 아라베스크 문양은 덩굴 식물의 부드러운 곡선과 기하학적 무늬가 조화를 이룬 패턴을 말한다. 이 문양은 주로 이슬람 사원의 벽면이나 공예품에서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마티스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라베스크 문양의 옷감과 카펫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여인이 입고 있는 블라우스에 새겨진 무늬도 이러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식물 모티프와 기하학적 문양이 어우러진 옷의 무늬는 밝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이카루스 Icare | |
제작 | 1946년 |
종류 | 콜라주 |
기법 | 과슈를 칠한 색종이 콜라주 |
크기 | 43.4 cm × 34.1 cm |
비고 | 아트북 『재즈 Jazz』 제8번 수록 |
소장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마티스는 말년에 색종이를 이용해 형태를 단순화한 작품을 여러점 남겼는데 이카루스도 그 작품 중 하나다.
말년에 마티스는 지독한 관절염으로 고생했다. 손에 붓을 쥐기조차 힘들어지자 그는 손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는 이것도 쉽지 않자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서 붙이는 콜라주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색종이 작업을 하면서 “가위는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런 색종이 콜라주 작품을 하나의 '조각'같다고 느낀 듯하다. 조각가가 나무나 돌을 다듬고 깎듯, 종이에 과슈를 바르고 색종이를 잘라 붙이는 행위가 마치 조각의 과정과 흡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카루스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미로에 갇힌 이카루스는 동굴을 빠져나와 깃털로 만들어진 날개를 밀랍으로 고정하여 탈출한다. 그러나 비행의 즐거움으로 과욕을 부렸고 높이 날아 태양 가까이에 간 이카루스는 결국 밀랍이 녹아 추락한다. 마티스는 이 추락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의 파란색 배경은 하늘을, 사람의 형태를 한 검은색은 이카루스를, 가슴의 빨간 점은 동경심을 가진 인간의 심장을 표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노란색 별 무늬는 날개의 깃털로 보인다.
한편, 이카루스로 보이는 추락하는 검은 사람은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공군 비행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왕의 슬픔 La Tristesse du roi | |
제작 | 1952년 |
종류 | 콜라주 |
기법 | 과슈를 칠한 색종이 콜라주 |
크기 | 292 cm × 386 cm |
소장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이 작품은 마티스가 죽기 2년 전에 제작된 작품이다. 색종이 그림의 기념비적인 대작으로 마티스의 자유분방함 색채 감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원색의 화려함과 경쾌한 단순성으로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이 작품 안에 표현된 인물은 렘브란트가 그린 '사울 앞에서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의 수금을 켜는 다윗 왕이고 바로 마티스 자신이기도 하다. 6개의 꽃이 피어있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다윗왕은 실제로도 수금 연주가 뛰어나 사울 왕의 광기마저 다스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웅크린 모습은 건강 악화로 휠체어의 도움을 받는 자신의 마지막 자화상이었던 것.
4. 기타
-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에 노 엘리 파 레이어는 1899년 모자 가게를 열어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마티스가 아멜리에 이전에 만난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마르그리트를 뒷바라지했다. 다만 남편 마티스는 가정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부부간의 갈등은 커져갔고[3], 결국 마티스가 리디아 델레츠토르스카야(Lydia Delectors-kaya, 1910~1998)라는 러시아 출신 여성을 비서로 채용해 공동 작업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1939년 마티스와 결별하였다.
- 한편 1935년부터 마티스의 비서가 된 리디아는 마티스의 비서 겸 그림 모델이 되어 주었고, 1939년 아멜리에가 떠난 후에는 마티스의 가정 살림을 도맡고 간병인 역할을 해주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마티스가 죽기 직전에 그린 마지막 그림은 리디아의 얼굴 드로잉이었다고 한다.
록펠러 가의 후원으로 프랑스에 마티스 박물관이 지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축소 모형을 방안에 두고 완공을 기다렸지만 끝내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54년 심장마비로 84세로 눈을 감았다. 마티스 박물관은 이후 1956년에 개장했다.
- 후배인 파블로 피카소하고는 라이벌 관계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했다. 후원자의 환심을 사려고 서로 경쟁을 벌었다는 일화도 있지만 의외로 사이는 양호했던 모양. 피카소가 마티스 화실에 놀러오기도 했다고 한다.
- 그의 손자 폴 마티스(Paul Matisse, 1933~ )는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거주하는 예술가 겸 발명가이며, 증손녀 소피 마티스(Sophie Matisse, 1965~ )도 예술가이다.
- 이상할 정도로 일본에서는 인기가 없는 화가다. 그래서 소수의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거래될 뿐 투자가치가 적어 경매장에서도 잘 안 보인다. 버블 경제 당시 투기 목적으로 마티스의 그림을 구매한 일본인들은 시간이 흘러도 가격 변화가 없자 대부분 외국으로 다시 팔아 치워서 일본에 남아 있는 그림이 적은 이유도 있다. 물론 일본에서나 이렇지, 해외 경매로 가자면 수십 억에서 수백 억 경매가 이뤄진다.
- 최근 들어 유난히 그의 작품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대세를 이루는 현대 인테리어 속에서 강렬한 색채와 안락한 분위기의 마티스의 그림의 매칭이 좋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 당신은 골프왕에서 마티스 밸리 코스의 모티브로 따왔다.
[1] 마티스가 암에 걸렸을 당시 그를 정성스레 간호해 주었던 간호사가 1명 있었는데 이후 수녀가 되어 돌아와 헨리에게 교회 설계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2] 1854~1936.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Щукин/ 러시아 귀족이자 미술 수집가인 형 표트르(1853~1912)나 아우인 드미트리(1858~?)나 이반(1869~1908)도 엄청난 미술 수집가로 유명하다. 아버지 이반 바실리예비치 슈킨(1818~1890)은 섬유산업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어 500만 루블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재 값어치로 10조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이반도 러시아 유명화가들 그림을 수집하는데 정성을 기울여서인지 아들들도 똑같이 배워 그림 수집에 열을 올렸다.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세르게이는 모네, 마네, 고갱, 앙리 루소, 르누아르, 드가, 피카소의 그림 등등 수백여 점 진품을 소장했을 정도로 알아주던 미술 수집가이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와중에 싸그리 몰수당했다. 그래도, 재산을 챙겨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아갔는데 경제적으로 풍족할 만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생동안 모은 그림들을 강제 몰수 당한 것을 두고두고 한을 품고 1936년 1월에 81세로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2008년에 슈츄킨 집안 후손들은 이 그림들에 대한 보상을 러시아 정부에게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하고 만다.[3] 1911년작 '예술가의 가족'과 1913년작 '대화'의 그림을 보면 마티스와 가족들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