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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
프랑스 제4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Quatrième République | ||
국기 | 국장 | |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애 | ||
상징 | ||
국가 | 라 마르세예즈 | |
지도 | ||
1946년 10월 27일 ~ 1958년 10월 4일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프랑스 임시정부 | 프랑스 제5공화국 | |
역사 | ||
1946년 성립 1958년 해체 | ||
지리 | ||
위치 | 오늘날의 프랑스와 알제리 및 전세계 일부 식민지 | |
수도 | 파리 | |
인문환경 | ||
인구 | 41,800,000명(1950년) | |
언어 | 프랑스어 | |
정치 | ||
정치체제 | 의원내각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
대통령 | 뱅상 오리올, 르네 코티 | |
정부수반 | 총리 | |
주요 수상 | 폴 라마디에 로베르 쉬망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 |
경제 | ||
통화 | 프랑 |
[clearfix]
1. 개요
1946년 10월에 국민투표로 성립된 정부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1958년 10월까지 존속했다. 1958년 10월 국민투표로 프랑스 제5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해체된다.2. 정치
프랑스 제4공화국은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정치적 기반으로 건설됐다. 명목상으로 국가 원수는 여전히 대통령이 수행하였지만 의회에서 선출되는 상징적인 존재로, 실권은 프랑스 총리에게 주어졌다. 실질적 국가원수였던 총리에게는 내각 임명권과 신임안 제청권이 주어졌으며, 제3공화국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상[1]에 대한 반성으로 내각 구성원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대폭 강화됐다. 대통령제와 달리 내각제에서는 내각 구성원들이 의회에 종속된 관계이므로 아무래도 의회가 마음을 먹고 꼬장을 부리면 운신에 제한이 크게 걸릴 수 밖에 없기 때문.다만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에도, 초대 총리였던 폴 라마디에가 의회에게 단순히 총리 선출권 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조각한 내각에 대한 동의안까지도 제출하는 선례를 만들면서, 이후 총리들은 내각을 구성할 때마다 의회에 또다시 동의를 구해야 했고, 군소정당이 난립했던 프랑스 제4공화국에서 이는 필연적으로 내각의 힘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2] 거기에 지나치게 잦은 불신임을 막기 위해 18개월 안에 불신임이 1회 이상 일어나면 대통령이 합법적으로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조항(헌법 제49조, 51조)도 있었으나, 이 역시 의회가 고의로 불신임 찬성률은 통과선인 과반에 가깝게 올려놓고(45%, 49% 등등) 뒤로는 내각에게 엄청난 압박을 주어서 자진 하야시키게 만드는 방법으로 무력화되었다. 어쨌거나 "스스로" 내려온 것이고, 불신임안도 공식적으로는 과반을 못 넘어 폐기된 것이기 때문에 위에 조항에는 위배되지 않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샤를 드골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제4공화국을 반대하며 내각을 흔들었다. 드골은 열렬한 대통령제 옹호자였고, 그런 그에게 의원내각제, 거기에 내각에 대한 보호마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제4공화국은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그래서 드골은 제4공화국 제헌의회와 자주 싸웠으며, 제4공화국의 헌법에 대해 "프랑스인의 1/3은 체념해 버리고, 1/3은 거부하고, 나머지 1/3은 아예 무시해 버렸다."라고 빈정거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거기에 SFIO, 공산당, 급진당, 대중공화운동, 소상공인과 농민의 국민중심 사이에서도 내각 구성 등으로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래도 정부 자체는 온건 세력들의 연정을 통해서[3] 어찌저찌 굴러가긴 했지만[4] 내각은 여기도 13년 동안 23번 바뀌는 등 뒤숭숭한 와중에 정권 붕괴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바로 프랑스 제국의 종말을 알린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이었다.
3. 제국의 붕괴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와중에도 자신들의 식민지들을 독립시켜줄 의향이 별로 없었다. 물론 프랑스 내에서도 이미 저물어가는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을 깨달은 반식민주의자들이 늘어나는 형국이었지만 여전히 식민주의자들 또한 강성한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래서 2차 대전 종전 이후 식민지에서 거세진 독립 열기를 무력으로 찍어누르려 했다.하지만 세계 대전으로 이미 피폐해진 프랑스는 이 식민지들을 유지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오히려 무리를 하면서까지 군대를 투입했다가 성과는 하나도 내지 못하며 피는 피를 부르는 악순환을 불렀고, 국내 여론은 식민주의와 반식민주의가 양분된 가운데 베트남과 알제리에선 프랑스군이 독립군에게 참패하고 막대한 피와 돈만 날린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이 올라가며 당위성까지도 잃어버리자 결국은 식민지들을 독립시키게 된다.
3.1. 인도차이나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끔찍한 패배를 경험했고, 국내외에서 종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드높았다.[5] 이미 십년 가까운 전쟁 기간 동안 9만명의 사망자, 11만명의 부상자, 3만명의 포로를 배출한 와중에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정권을 잡았고, 망데스 정권은 195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베트남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한다.3.2. 알제리 전쟁, 제4공화국의 붕괴
뒤이어 벌어진 알제리 전쟁 역시 거센 반발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엔 공산주의 세력 확대 방지를 명분으로 프랑스군에게 군사 지원을 해주었던 미국조차도 알제리에선 프랑스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베트남에선 캄보디아, 라오스 등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일부 동남아 주변국들이 프랑스를 편들기라도 했었지만[6] 알제리는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튀니지와 모로코 같은 알제리 주변국들조차 프랑스 편을 들지 않고 쓸데없는 짓 중단하고 알제리를 독립시키라고 비난할 정도였다.허나 이렇게 국제 여론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우익 계열은 알제리의 독립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고, '피에 누아르'라는 명칭의 프랑스에서 이민해 온 알제리 거주 백인들도 아무래도 불안하니 알제리 독립을 결사반대했다. 여기서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군부. 1958년 5월 군부 세력은 알제리 평화협상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공수부대가 코르시카 섬을 점령했으며, 알제리 내에서는 외인부대가 봉기에 호응했다.
이들은 프랑스령 알제리 수호와 드골 장군 복귀를 외치며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파리까지 진격하겠다고 대놓고 협박을 가한다. 이에 내분으로 인한 피를 보기 싫었던 르네 코티 대통령은 그들의 요구를 전격 수용해 드골을 총리로 추대하며 6개월간 전권을 위임해 헌법을 작성하도록 했다. 사실상 알제리 독립운동에 유화적이던 좌파 정부에 불만을 품던 당시 군부가 내전 위협으로 드골을 옹립한 꼴.[7]
그렇게 프랑스 총리에 취임한 드골은 기세를 타 강화된 행정부의 권한 및 이원집정부제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도입하여 프랑스 대통령에 선출된다. 그리고 그렇게 제5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제4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4. 성과
끝이 훈훈하게 마무리되진 못했던 제4공화국이었지만, 그래도 프랑스가 더 선진적인 사회로 발전해 나가는데 기여한 바도 적잖게 있었다.- 여성에게 투표권 허용.
정확히는 1944년 임시정부 시절 제4공화국의 제헌의회를 선출할 때 처음 허용됐다. - 사회보장제도 창설.
오늘날 복지국가 프랑스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 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를 창설해 유럽 통합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
- 알자스-로렌에 대한 강제동화 정책 철폐.
- 서독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보여주면서 유럽 내 평화를 확보.
전신 제3공화국이 베르사유 조약과 같이 가혹한 조건을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강요하다 나치 독일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불러일으킨 것을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외교적 성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독일을 가만 내버려둔 것은 아닌데, 당시 아데나워 독일 총리가 추진한 독일 재무장은 끝까지 태클을 걸었으며, 심지어 아데나워가 처음 총리 자격으로 프랑스를 방문할 때도 정부 요인 중 어느 누구도 마중 나가지 않으며(...) 개무시를 했다. ECSC의 창설도 독일의 석탄 및 철강 사용처와 양을 파악해 재무장을 막겠다는 생각이 일부 개입되어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자르 보호령을 놓고 프랑스가 서독에게 보여준 태도는 프랑스 내에서도 '우리는 베르사유 체제의 재현이라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1] 제3공화국은 70년 동안 내각이 104번 바뀌었다. 평균적으로 8개월에 한 번꼴로 내각이 엎어진 셈. 오죽하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드골한테 '프랑스는 수상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할 정도. 물론 그래도 70년 가까이 굴러간 걸 보면 혼란스러웠다는 것도 좀 주관적이긴 하다. 실제 제3공화국 시절은 벨 에포크라 불리는 번영기였으며, 프랑스 공화정 역사상 최초의 안정적 집권기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4공화국도 제3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가 채택된 것. 다만 최후가 나치한테 털리는 것으로 끝나다 보니 일각의 부정적 인식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2]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진행 상황이 제3공화국 초기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제3공화국 초기에도 제3대 대통령 쥘 그레비가 의회를 해산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선례"를 만들어버리면서 이후 의회가 사실상 무적의 존재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내각과 대통령의 힘은 엄청나게 약화되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전술한 70년 동안 내각 104번 교체.[3] 보통은 사회당(당시에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과 급진사회당, 대중공화운동(이후 민주중도로 개편되어 사라졌다)의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었다. 이를 Troisième Force, 한국어로 '제3세력'이라고 했다. 극 초반기에는 드골파와 공산당도 정권에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전자는 드골이 은퇴하면서, 후자는 연립정권에서 탈퇴하면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4] 대내적으론 전후 복구기였고, 대외적으론 친서방 반공정책을 펼쳤다. 물론 여기서 반공은 사회민주주의 말고 소련식 공산주의.[5] 1954년의 여론조사에서 베트남전쟁의 지속을 요구한 프랑스인은 불과 10%도 안될 지경이었다.[6] 사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몹시 좋지 않다. 그야말로 앙숙관계인데, 자세한건 베트남-캄보디아 관계 문서 참고.[7] 하지만 웃긴 건 정작 드골 역시 결과적으론 알제리 독립운동에 유화적인 포지션을 취했고, 이에 군부 강성파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했고 여차저차해서 1962년 알제리도 독립한다.